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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대학생 시절] 본문
"어? 너 여기 합격했냐?"
신입생 환영회를 굳이 자기가 가야겠냐고 강변했지만, 그예 나와달라는 과대의 간곡한 요청에 못이겨 나온 자리였다. 가만히 술이나 마시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여자 선후배들이 '오빠, 우리 술게임 해요!'라고 들러붙는 통에 귀찮은 기색을 대놓고 내비치던 성윤의 시선을 단 번에 사로잡는 얼굴이 있었다. 고등학교 후배이자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의 씨름 선수 생활을 응원했던 유영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든 채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큰 키의 그가 성큼성큼 유영에게 다가가자 일순간 여학우들의 시선이 유영 쪽으로 집중되었고, 대체 둘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 하는 눈 먼 귀가 그들을 향했다.
"어쩌다보니......합격을 여기만 해서요." 유영이 꾸밈없는 말투로 투덜거리자 성윤이 익숙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씨구, 그러냐. 술은 많이 마셨고?"
"의외로 센 것 같은데. 지금 저 소주 한 병은 마셨어요."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서 쉬어라?"
"그러는 선배야말로, 운동 하시는 분이 그렇게 주는대로 다 받아 마셔도 돼요?"
"나? 그런 적 없는데." 성윤이 너스레를 떨며 받아쳤다. "이거 물이야, 임마."
"아."
"곧 시합인데 그렇게 파렴치한 짓은 안 해. 취했으면 집에 가라, 후배님아."
"아, 쫌!" 여전히 자신의 머리 위에 툭, 하고 올려진 성윤의 손을 유영이 살짝 쳐 냈다. "사람들 앞에서 이러면 오해 산다구요. 안그래도 지금 시선이 어마무시한데."
유영은 자신에게 쏠려 있는 여자애들의 시선이 익숙했지만(주된 원인은 성윤 때문이었다) 왠지 오늘 일로 제대로 학기 시작하기도 전에 낙인이 찍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렴 어떠냐, 나는 이게 익숙한걸." 그런 후배의 마음은 생각도 않고, 성윤이 씩 웃으며 자기가 들고 있던 잔을 유영의 잔과 부딪힌 다음 말을 이었다. "수업 듣다가 모르는거 있으면 씨름팀으로 찾아 오너라, 가련한 후배여."
"아, 진짜로!" 유영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걸 보며 껄껄 웃은 성윤이 자리를 비웠고, 곧이어 여자 선배들이 유영에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술집을 나갔다. 뭘 물어보려고 할지는 몹시 뻔한 일이었다.
예상은 확신이 되어, 신입생 환영회 후 유영의 카톡에 불난 듯 문자가 마구 오기 시작했다. 답을 다 일일이 해 주기도 애매한지라 읽지 않고 지워버렸는데, 결국 과방에 잠시 들렀다가 여선배 하나에게 붙들렸다.
"너, 신입생 맞지? 성윤 오빠랑 친해 보이던데, 둘이 무슨 사이야?" 퍽이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선배 혜인이 유영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선 채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예 무시하고 갈 수도 없었기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초중고 선배입니다만."
"같은 학교 출신이야? 그런 것 치곤 너무 친하던데. 너도 씨름선수 출신?"
"안 그래 보이지 않아요? 안했어요, 씨름."
"그럼 뭐야? 거의 여친처럼 대하던데."
"여친처럼 대하면 머리만 쓰다듬고 가지 않아요. 같이 나갔겠지. 묻고싶은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추궁당하는 기분이라 살짝 기분이 나빠진 유영이 반문했다.
"그럼 성윤 오빠 여자친구 없는게 맞는거지? 내가 대시해도 되겠네?"
"개인 의사에 달린 문제인 것 같은데요, 그거. 저한테 물으셔도."
"그럼 됐어." 상큼하게 말을 끊은 혜인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미인이긴 했다. "내가 성윤 오빠 꼬셔야지. 너, 그 오빠한테 꼬리치면 가만 안둘거야."
'퍽이나.' 유영은 자신감 넘치는 혜인을 두고 과방을 나섰다.
"야, 잠깐만." 말이 끝난게 아닌 모양인지, 유영의 발이 붙들렸다. "너, 선배님들이 카톡 하는데 다 씹었다며? 적당히 해라? 성윤 선배가 아무리 잘났어도 너까지 잘난체 하는건 아니지 않니?"
"제가요? 전혀요."
'하고싶은대로 하셔.'
유영은 속으로 하고싶은 말을 삼키며 대답한 뒤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대학 생활이 이래저래 피곤해질 것 같았다.
그나마 대학시절 다행인 점은, 성윤과 친한 같은 과 남자 선배들이 유영을 대신 챙겨주었다는 것이었다. 유영이 여학우회와 이상하게 척을 진 구도를 보고 안타까워 하면서, 그 상황에 일조했으면서도 도움은 거의 주지 않는 성윤을 뒷담 까는 모임이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그래서 외롭지는 않았다. 씨름 구경도 자주 갔고, 덕분에 씨름부 코치 겸 체육교육과 교수와도 친해져 일을 돕고 일당을 받는 일도 있었다. 씨름 구경을 자주 가다 보니 이미 대학부 씨름팀에 있는 선수들과도 친해졌고, 모임에 끼는 일도 잦아져서 거의 씨름팀 명예 매니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을 때, 성윤이 시합 도중 두 번째로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다. 재활을 위해 운동을 잠시 쉬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성윤은 학과 수업에서 착실하게 성적을 내고 있던 유영이 자주 나타나는 도서관에 아예 지박령처럼 자리를 잡았다.
"뭐하냐?" 서가에서 책을 찾던 유영에게 이 말이 들리면 유영의 정수리에 성윤이 제 턱을 올려놓은 뒤였다.
"왜요, 또. 뭐 찾으려고."
누가 보면 꼭 오해하기 좋은 자세인데도 그걸 당하는 유영이나, 하는 성윤이나 별 생각 없는 태도였다.
"저기 위에 있는 책, 꺼내려고 하는 것 같아서. 꺼내주리?"
"지금 키 작다고 놀리는거죠?"
"아니. 딱 보니까 귀여워서, 좀 더 구경하려다가 온건데."
"놀리는거 맞잖아요!"
"쉿, 여기 도서관이야. 조용히 해야지."
"아오." 유영이 발 뒷꿈치로 성윤의 발등을 살짝 짓밟았다. 성윤이 '윽,'소리를 내며 유영의 어깨를 뒤에서 살짝 끌어 안았다. 그의 온기가 등 뒤로 온전히 전해졌다.
"여동생이 있다면 딱 너 정도 키면 좋겠다. 매일 끌어안아주게."
"그거 지금 후배한테 할 소리예요? 떨어져요!"
"싫은데."
"그렇게 하고 싶으면 고백하고 사귀던가."
"그럴까?"
"심장떨리니까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요. 아무튼 진짜 오해 사니까 떨어져요, 저 위에 책은 좀 꺼내주고."
"거봐, 결국 이럴거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런 만담이 대학생활을 하는 내내 수 차례 반복되었다. 주변 사람들도 슬슬 익숙해질 무렵, 성윤은 대학을 졸업했고 모두의 기대대로 실업팀에 입단하여 첫 해에 장사가 되며 연이어 좋은 성적을 냈다. 유영도 졸업반이라 나름대로 바빴지만 메이저 씨름대회는 전부 참관하면서, 그가 트로피를 받고 꽃가마를 타는 순간들을 지켜보았다.
"유영아, 이리 와서 사진 같이 찍자."
"네? 제가요?"
성윤이, 사람들 뒤에 멀찍이 선-꽃다발을 든 유영을 보고 손짓하자 주변 인파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향하는 길을 내 주었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사진작가가 재차 권유하는 바람에 그렇게 같이 사진을 찍었다. 대회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면 그녀에게 액자에 표구된 사진이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액자를 성윤이 고른 모양인지, 늘 모양이 달랐고 오른쪽 한 켠에 성윤의 사인이 커다랗게 되어 있었다. 배려심 넘치고, 짖궂은 그만의 선물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이어져 오던 둘 사이의 전통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액자들이 유영의 방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성윤은 언제부터인가 당연히 자신이 있는 경기장엔 유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큰 대회 중 하나였던, 선수생활 두번째의 설날 씨름대회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적잖이 걱정을 품었다. 그리고 전해주어야 할 것도 있었기에, 직후 유영에게 연락을 했다. 걱정과는 달리 순순히 유영이 나타났다.
"나, 올 봄에 결혼한다."
"......"
청첩장을 받아 들 때 까지는 자신감 있게 표정을 생글생글, 밝게 유지할 수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고 이 사람 앞에서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상대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하고 나서-겨우 구겨지려던 표정을 애써 펴 가며 말했다.
"언제부터 사귄거예요? 감쪽같다, 정말."
"두 해쯤 되어가네. 슬슬 결혼, 해야할 것 같아서. 너, 그런데 지난 대회 때는 왜 안왔어?"
"집안일이......좀 있었어요."
이렇게 되었구나. 이 사람은 인생 최고의 순간을 자랑하고 싶어 나를 불렀구나.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엊그제 부모님한테 왜 사촌오빠를 고소했냐며 손찌검까지 당했는데.
"졸업식 때 무슨 꽃 받고 싶어?"
머릿속이 꽃밭인 듯한 성윤이, 곧 있을 유영의 졸업식을 떠올리며 물었다. 유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백목련 꽃다발이요."
*백목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오, 그거 들고 있으면 화사하겠다." 곧장 스마트폰으로 백목련 사진을 검색해 본 성윤이 들뜬 두 눈을 반짝였다. 그와는 반대로 유영의 기분은 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즐거운 체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워, 그 날은 결국 유영이 먼저 바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업 준비려니, 해서 성윤도 그녀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어째서인지 여선배 중 하나인 혜영이 결혼식장까지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보러 다닌다는 해괴한 소문이 동기들 사이에서 돌았다. 처음엔 여학생들 사이에서, 나중엔 남학생들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졌다. 정작 예비신랑인 성윤에게는 누구도 총대를 매고 싶지 않아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전달되지 않았다. 다들 소문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유영 역시 소문이겠거니, 했기에 자기가 앉아있던 카페에 혜인이 있다는 것에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테이블에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분위기가 하수상하게 돌아가자 잠시간 그 대화를 들었다. 자신의 착각으로 멀쩡한 두 사람 사이를 파탄나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처음 뵙겠습니다. 소개받은 한수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머니께서 꼭 만나보라고 성화셔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하하.'
'아직 졸업한지도 얼마 안 됐는데, 자꾸 결혼하라고 하시네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유영은 주소와 영상을 보내기 직전까지도 고민했다. 자기가 과연 이런 짓을 하는게 맞는건지. 결혼을 앞두고 희희낙락 뇌내 꽃밭일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망쳐도 되는걸지.
하지만 영상을 전달받은 성윤은 발송 후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카페에 나타났다. 상대 남자는 제정신이 박혀있던 모양인지 당황하면서도 정중히 사과를 했고, 유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카페 한 켠에서- 성윤이 혜인의 면전에서 청첩장을 찢어버린 뒤 바깥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릎을 꿇고 약혼자에게 빌던 혜인은 그가 나가자 주변에 있는 손님들에게 다 들릴만큼 욕을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 끄트머리에, 유영이 눈에 들어 온 모양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유영을 급습하는 혜인의 속도가 더 빨랐다.
"너야? 니가 오빠한테 일러바쳤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소문은 돌고 있었어." 유영은 이미 그를 반쯤 놔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혜인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추궁하는 와중에도 이상하리만치 태도가 평온했다.
"당신 약혼자 귀에 들어가는 것도 금방이었겠지."
"니가 뭔데 일러바치냐고!"
"지금 저 사람한테 무슨 짓 한건지는 알고 있어?"
"너 때문이야! 우리 결혼하는데 불만있어? 그걸 왜 오빠한테 알리는데!"
"얼씨구." 적반하장의 태도에 유영이 기가막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식장 잡아놓고 선 보러 다니는 자기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방금 니 입으로 그랬잖아. 어머니가 선 보러 다니라고 시켰다며."
"저 오빠가 언제 운동선수로 수명 끝날지도 모르는데, 나도 보험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너 그 머리로 대학은 어떻게 갔고 저 양반은 어떻게 꼬셨냐? 아니, 저 양반 수준도 알만하네." 유영은 스스로,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을 저 양반으로 칭하는 자신이 서글펐다. "중혼이라도 하려고? 아니면, 혼인신고는 안하고 두집살림 해보려고?"
"입 닥쳐! 니가 뭘 알아!"
"적어도 니가 식 잡아놓고 딴 남자랑 선 보는 미친 여자라는 건 알겠다. 그리고 남의 업장에서 다른 손님 멱살 잡을 기세로 소리 지르는 여자라는 것도." 타이밍이 됐다고 여긴 듯한-유영이 단골로 다니는 카페라 이야기도 꽤 자주 나눈-사장이 나타나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 와중에 소리를 질렀는데도 분이 안풀렸는지 혜인이 손찌검을 시도했으나, 유영이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너네 둘 다 수준 끝내주게 잘 파악했습니다. 선배고 뭐고 그냥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여전히 씩씩대는 혜인에게, 사장이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거고, 손해배상 청구도 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녀가 씩씩거리며 가방을 휙 낚아채 바깥으로 나갔다. 유영에게 찬 물을 가져다 준 사장이 걱정을 건넸고, 유영은 괜찮다는 듯 크게 미소지어 보였다. 어쩐지 뭔가가 마음 속에서 끝장난 기분이 들었다.
'Writings > Di 245(BE, A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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