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칠 년 전의 이야기] 본문

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 [칠 년 전의 이야기]

alicekim245 2020. 3. 24. 13:50

Music with, Gethsemane, 마이클 리 버전


"실례합니다."
긴 말은 나오지 않았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 성윤이 상대 남자에게 청첩장을 건넸다. 거기 선명히 찍혀 있는 여성의 이름을 확인한 남자는 낯빛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성윤에게 정중히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결혼하실 분인 줄은 전혀 몰랐네요. 두 분 원만히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반면 의자에 앉아 있던 혜인은 사색이 된 채, 남자가 빠르게 카페를 나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일어나려고 했다. 성윤이 그런 그녀의-자기 정혼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나랑, 할 이야기가 있을텐데."
"여긴...어떻게 알고 왔어?"
"화려한 꽃은 보는 눈이 많은 법이지." 유영이 보내 준 영상과, 주소. 근처만 아니었다면 유영이 궂은 장난을 쳤을거라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눈 앞에서 본 것은 현실이었다.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선을 보고 있는 광경이.
성윤은 망설임 없이 혜인의 면전에서 청첩장을 찢어버렸다.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혜인이 그의 앞에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의 일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유영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가 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왔어...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아, 그랬구나. 장모 되실 분이 그러셨다고. 애초에 사위 삼을 생각도 없으셨구나."
상견례 당시, 면전에서 실업팀 소속인 자신에게 '운동은 취미로만 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했을 때 엎었어야 했는데. 성윤이 뒤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무릎을 꿇은 혜인을 내려다 보았다. 사귄 기간이 꽤 길었고, 으레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결정하고, 청첩장까지 돌렸다. 왜 그 여자애냐고 친구들이 물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우리, 결혼 없던 걸로 하자. 나는 너 같은 애랑 같이 살 자신이 없다. 날 사위로 볼 생각도 안하시는 분을 장모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고."
"오빠,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혜인이 눈물을 보이며 애원했으나 이미 그녀에 대한 마음을 단숨에 정리한 성윤은 붙잡는 그녀를 두고 카페를 벗어났다. 무척이나 담담한 기분이었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서 터져버리면 오히려 차분하다더니 지금 자신이 그 상황인가 싶어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 나한테 알려줬어?"
"차라리 모르고 싶었어?"
다음 날, 카페로 호출 당한 유영은 성윤이 의외로 멀끔해서 조금 놀랐다. 주변에 이미 결혼 파토냈다는 이야기를 했다는건 들었지만 자기는 일부러 따로 불러내 말하려는건가 싶었다.
"일부러 혜인이한테 사람 붙인거냐."
하지만 성윤이 그렇게 말하자 유영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너에게 '그깟' 협잡질을 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구나, 확신이 들었다. 청첩장을 받았을 때 부터 이미 몇 번이나 든 이상한 기분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고작 일개 팬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모래판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한 알의 모래같은 존재라는 것. 아무리 연심을 품게 되었어도, 그걸 혼자 끙끙대며 가지고 있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유영이 일부러 그의 면전에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직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럴 요량이라면, 웃어보일 수라도 있어야 했다.
"내가 그 여자한테 사람 붙여서 얻는 이득이 있어? 우연히, 라고 말해도 안 믿을 얼굴을 하고 와선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싶은거야?"
"됐다, 그만하자."
"그만 할 거면, 나는 왜 불렀어? 네 탓이라고 말하려고?"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사람은 기가막힌 일을 겪으면 변해."
"본인이 계속 나한테 반말하는 건 알고 있어?"
유영이 계속해서 쏘아붙이자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던 성윤이 반박했다. 오히려 그 반박도 기가 막히다는 듯 유영이 코웃음을 쳤다.
"응. 이제 안 볼 생각으로 나왔으니까 그동안 안했던 말 다 쏟아내고 가려고."
"뭐...?"
"이렇게 말해 볼까. 나 말고 다른 여잘 택하고도 행복할 줄 알았어?"
"너, 그게 지금, 어제 파혼한 사람한테 할 말이야?"
"가정 파탄날거 구해줬더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뭐하러 그 여자한테 사람 붙여서, 뒷조사를 하겠어? 뭐가 아쉬워서. 근데 지금, 내가 꼭 그럴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서 말했잖아. 내가 바보였지. 그냥 보통의 팬이었으면 되는데. 적당히 관심 가지다가, 다른 취미도 파 보고, 그렇게 편하게 살았으면 됐는데. 하필 좋아했던 스포츠가 씨름이었던 것도, 하필 좋아했던 선수가 당신이었다는 것 전부 후회돼. 같은 학교, 같은 과 진학해서 선후배, 동문인 것도 역겨워. 아니, 당신을 알고 지낸 내 인생의 절반이란 시간이 너무 끔찍해."
"유영아. 그만-!"
"나 혼자 좋아하게 된 것 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돌려받기를 바라면서 팬질 시작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는 고작 이 따위 일만 벌어지는걸까."
유영이 들고 있던 흰색 머그잔을 소리없이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어제의 일로 머리가 이미 복잡한 성윤이었으나, 지금 그녀를 보내주면 안될 것 같다는 직감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유영이 차갑게 그 손을 쳐냈다. 예전엔 순순히 잡혀주던 그녀가 그러자, 성윤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나한테 첫 번째로 청첩장을 줬다고 했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당신을 쫓아다녔고, 그 결과 여러 번에 걸쳐 참 잘 받았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우리. 선배로도, 선수로도 응원하는거 그만 둘테니까."
"이렇게 끝내겠다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성윤의 말에 유영이 면전에서 하르르 웃었다.
"네, 이렇게 끝내려고 오늘 나왔어요."

"야, 이 미친놈아. 너 괜찮냐?"
그날 저녁, 성윤을 위로해 준답시고 씨름부 동기들이 자리를 마련했다. 술을 진탕 퍼마시고 어제와 오늘의 일을 잊고싶던 성윤이 깡소주를 들이키기 시작하자 인호가 병을 탁 하고 잡으며 가로막았다.
"군자의 도리에 자작은 없다. 미쳤다고 우리 앞에서 자작질이냐. 혜인이 걔는 아주, 진짜."
"니들 왜 나한테는 말 안해줬냐. 소문 돌고 있었다며."
"누가 너한테 말해준 줄 알았고, 니가 현장 잡으려고 때를 기다리는 줄 알았지."
"야, 근데 왜 유영이 없냐? 안불렀어?" 도원이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인호가 고개를 저었다. 씨름부 활동할 때 자연스럽게 끼어 있던 그녀였기에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안 오겠단다. 그래서 네 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너, 유영이한테 뭔 짓 했냐? 불러서 혼냈어?"
인호는 이미 성윤이 어떻게 파혼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면전에서 청첩장을 찢은 그 사건은 이미 둘 중 하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화제였다.
"부르긴 했는데......"
"불러다가, 혜인이가 몰래 선 보고 있는거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했냐? 임마, 그거 그 전부터 소문 다 돌고 있었어! 니가 언제쯤 엎을까 다들 기대하면서 보고 있던 것 같은데?"
"니들 다 미친 것 같아......" 성윤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 소문이 있으면 당연히 자신에게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니었던가. 새삼 인생 잘못 살았다 싶은 좌절이 스며들었다. 게다가 왁자지껄한 술집 분위기와 자신의 심정이 너무나도 맞지 않아 괴로웠다.
"왜 나한테 말해줬냐고 물어보기만 했다고......"
"얼씨구. 걔를 불러내서 왜 알려줬냐고 탓했단 말이구먼. 너도 참 대단하다. 인생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던걸 구해준 애를 불러다가 선물은 못해줄 망정 그딴 소릴 했어?" 인호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십 년 넘게 네 팬으로 주변에서 알아주던 애한테 대단하다, 너도. 씨름 협회장님도 유영이 알고 있을걸, 너 우승할 때마다 가족도 아닌데 같이 사진 찍는 걸 몇 년이나 했으니까. 그런데 너, 유영이가 너 좋아하는거 알았냐, 몰랐냐?"
"걔가 왜 날 좋아해?" 성윤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워낙 어릴 때 부터 봐 와서, 그 익숙함에 가리워진 탓인지 유영이 '나 말고 다른 여잘 택하고 행복할 줄 알았냐'고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그였다.
"와......둔탱이 새끼가 여기 있었네." 성윤의 말에 일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이 싸한 눈으로 성윤을 쳐다보았다. "진짜 몰랐어?"
"......"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한테 청첩장 줬을 때 기분을 네가 어떻게 알겠냐. 평생 그 잘난 얼굴 덕분에 고백만 받아본 네 놈이. 너한테 청첩장 받은 날 혼자 술 퍼마시고 응급실 실려 갔다온 것도 당연히 모를테고. 너는 진짜, 나쁜 놈이야."
"몰랐어. 정말 몰랐다고. 자기가 말을 안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임마. 그럼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겠냐? 우리가 관심법이라도 단체로 익혔을 것 같냐?"
"......"
"둘이 그렇게 유별스러울 정도로 친하게 지내길래 우린 너희 둘이 당연히 어느 시점부터 사귀고 있는 줄 알았고, 청첩장 줬을 때 둘이 결혼하는 줄 알았지. 근데 왠걸? 청첩장에 찍힌 이름이 다른 여자애네? 우리 충격도 컸다만. 아무튼 유영이 지금 단단히 화 났으니까 무릎 꿇고 면전에서 빌어서라도 사과해라. 니가 잘못한거야. 걔가 아무리 널 좋아하는걸 숨겼더라도 너는 그러면 안됐어, 이 자식아."
"전화......차단했던데."
"그러냐." 인호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성윤의 빈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주었다. "멍청아.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하지 마라."
"이미 후회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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