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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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그 날 저녁]

alicekim245 2020. 3. 31. 10:31

"퇴근 시켜놓고 앞에서 기다리는건 좀 덜 낭만적이지 않아요?"
"같이 저녁 먹자."
"그 멘트도."
"누가 보면 백 퍼센트 오해할 말이긴 하지. 오해를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고."
"와아."
"너, 진짜, 예전처럼 좀 대해주면 안되냐?"
"제가요? 저는 원래 이랬는데요. 설마 팬질하던 그 때로 돌아가라는 염치없는 말은 안하실거잖아요?"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아무래도 평생 빌어야겠네, 그 부분은."
"그러다 나한테 또 청첩장 주려고?"
"안줘! 내가 만약에 장가를 다시 간다고 해도 너한테 첫번째로 안준다! 됐냐!"
"그래주면 고맙겠네요. 저녁 뭐 드실래요?"
"파스타."
"왜...왜 바로 나오는거야, 메뉴."
"너 데려갈려고 예약 해놨거든, 식당."
"내가 먼저 도주했으면 어떡하려고 했어요?"
"그럴 일 없게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와...다음엔 몰래 튀어야겠다."
"그게 지금 상관 앞에서 할 소리냐, 그게. 나는 솔직히, 네가 '안가요!'라고 말할거라 생각했어."
"다음엔 참고할게요. 그런데 저녁 해결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월급은 충분히 주고 있는 걸로 아는데."
"뭐,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이야기를 더 들어줄까, 그런 변덕이예요."
"그것 참 고맙네. 아까 낮에 밭다리는 뭐야? 대체."
"씨름 관람으로 쌓은 짬 어디 안간다는 증명?"
"야."
"미웠거든요. 나도, 선배도."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유영이 푸념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그렇게 말하고 도망갔어야 했을까, 나를 원망하는 날도 있었고. 어째서 일이 그 지경까지 가도록 선배는 나를 한 번도 봐 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술 퍼마시고 잠든 날도 있었고. 다 지나간 이야기예요.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따라왔어요."
"그 말은, 나한테 마음이 아예 없는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
"선배 하기에 달렸죠. 이래뵈도 깊은 원한은 기억에 오래 남는 편이라."
"어이구."
"인사이동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더라구요."
"꼭 마지막에 초를 친다, 초를."
"그런데 선배님, 유부남 아니었어요? 지금 나랑 이렇게 둘이 식사해도 되는건가......?"
"그렇게 생각까지 해 놓고 따라온건 뭐냐....."
"나야 뭐, 내 행실에 대해 왈가왈부할 가족도 친척도 이제 없으니까."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성윤은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따로 알아보자 싶어 일부러 말을 아꼈다.
"비서실장이 유부남이란 이야길 내가 들었는데......"
"그건 어디의 비서실장이냐. 나 싱글인데. 돌싱도 아니고. 혼인관계증명서라도 떼어서 보여줄까?"
"나중에 폐하한테 직접 여쭤볼까나."
"너, 폐하랑 얼마나 친한거야?"
"가끔 불려가서 차 마시는 정도? 규장각에서 일하는 동안 책 찾으러 자주 오셨거든요. 왠지 일부러 들르신 것 같지만. 그 전엔...아, 이 이야긴 안할래요. 아무튼. 진짜 솔로라고? 왜 주변 사람들이 선배님을 가만히 뒀어요? 장가 얼른 가라고 성화였을텐데."
"평가가 후하네? 고마워라."
"그런 의미로 말한거 아니거든요."
"칠 년 전에 그 일 이후로 혼삿말이 아예 안 오간 건 아니지만, 내가 거절했거든. 나, 너 그렇게 보내고 나서 경기 나갔다가 세 번째로 인대 파열당한건 알고 있어? 무릎 재활하기도, 공부하기도 벅찬 시기이기도 했고. 황궁 들어오고 나서는 일에 치여서. 황제 폐하가 얼마나 바쁘신지는 너도 잘 알거 아니야."
"잘 알죠, 몹시도. 너무나." 유영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성윤은 그녀가 죽은 황후와의 기억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후가 비명횡사한 이후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떄는 이미 늦어 있었다.
"오늘 저녁 고맙습니다. 다음엔 제가 살게요. 이렇게 좋은 식당까지는 힘들겠지만."
"데려다 줄게."
"아."
"술 마셨잖아. 너만."
"그러고보니......왜 안마셨어요?"
"나 차 끌고 왔거든? 내가 술 마시면 저 차는 누가 운전하냐."
"현대 문명에는 대리기사라는 좋은 직업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죽거리는 말투가 예전의 그녀와 똑같아서, 성윤의 입꼬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옅게 웃음을 머금었다. 대학생일 때는 소주 두 병도 너끈히 마시던 그녀가 와인 두 잔에 헤롱거리는 것이 낯설기도 했다. 성윤이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동안, 유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오른쪽 창 너머로 비치는 밤 공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할 일이 많았는데, 하고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유영아."
"네?"
"도착했어. 너희 집이야......는 너 왜 나랑 같은 아파트 사냐?"
"예?"
"취했어?"
"엉뚱한 소리 들을 만큼 취한 건 아닌데."
"아니, 진짜로......여기 나도 살아."
"......젠장."
"너, 그게 지금 집까지 데려다 준 사람한테 할 말이냐. 몇 층이야?"
"알아서 들어갈......"
유영이 조수석 문을 열려고 하자, 성윤이 다급하게 유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안전벨트도 안 풀고 어딜 가려고. 데려다 준다고 할 때 그냥 얌전히 에스코트 받아라, 이 둔한 후배 녀석아."
그녀는 결국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성윤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약간 휘청거리며 유영이 차에서 내리더니, 한 소리 했다.
"차에서 뭔가 다른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에 성윤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취한게 분명해 보이는 애한테 얘기해서 다음날 '기억 안나요! 으아아악!' 이런 말 듣기는 싫거든. 맨정신에 듣게 할 거야."
유영의 팔을 살짝 붙잡아 휘청거리지 않도록 도와준 뒤, 성윤은 손가락을 튕기더니 그녀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도 듣고싶어?"
"......"
성윤이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말에, 유영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 모습에, 그가 낮은 소리로 낄낄거리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유영이 카드키를 열고 집에 잘 들어가는 것까지 살펴본 이후, 계단을 통해 바로 위층 자기 집으로 돌아온 성윤은 코트를 스타일러에 걸어놓은 뒤 소파에 털썩,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거실 장식장에 여전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황소 트로피 네 개와 그 때 찍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대회만을 제외하고, 모든 사진에 유영이 그의 옆에서 꽃다발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다시 네가 내게 반하게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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