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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연몽, 단문들 본문

Writings/Di 245(BE, AE)

광연몽, 단문들

alicekim245 2020. 4. 6. 11:01

1. 엘리자베타는 태어날 때부터 울지 않은 기이한 아이였다. 여동생이 물끄러미 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루트비히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자신을 죽일 것임을 알아차렸다. 막강한 신력을 지닌 딸을 낳느라 지친 모후는 신생아가 제 오라비에게 신력을 빼앗겨 머리칼이 검은색으로, 루비같은 붉은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바뀐 것을 알지 못하고 며칠 뒤 피칠갑 된 병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2. 황후의 용모가 황녀를 닮은 것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오갔다. 눈 색깔이 자색이 아닌 푸른 사파이어 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누구나 감쪽같이 바꿔치기 할 수 있을거란 확신이 귀족들 사이에서 떠다녔다. 저 용모 때문에, 내로라 하는 공작가가 아닌 하찮은 남작 가문의 영애가 황후로 선택되었다는 말도.
3. 에드워드가 복잡한 표정으로, 관 속에 누운 여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사한 사람의 표정이 아닌 그저 잠시 잠든 얼굴을 한 여동생의 관 앞에 상복이 아닌 붉은 망토와 은색 견장을 단 크림색 제복을 입은 황태자가 내려놓은 것은 천 송이의 붉은 장미였다. 귀족들이 황태자의 무례에 대해 수군거렸다.
4. 대공의 결혼식이 끝날 무렵 대성전이 폭파당하면서, 천만 다행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으나 윈스턴 대공의 신부 아리엘 테이트와, 에드워드 황태자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아리엘의 경우 얼굴에 보라색 반점이 퍼져 있어 식전 독에 당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나, 에드워드는 얼굴이 짓뭉개져 입고있는 옷으로 식별 후 사망 선고가 떨어졌다. 루트비히 황제가 쓰러졌고, 제위가 그 여동생 엘리자베타에게 급하게 넘겨졌으며, 여제의 안위를 걱정한 황제가 방금 전 신부를 잃은 제 친우이자 사망한 아들의 대부를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그 혼란의 와중 에드워드 황태자가 살아남아 남방 대공령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여제는 폐허가 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강행했다.
5. 여제가 펜리르 백작과 환담을 나누는 것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대공이 바깥으로 나갔다. 그 뒤를 순진한 어린 귀족 아가씨가 따라 나갔고, 여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 뒤를 쫓았다. 귀족들은 아가씨의 안위를 걱정하며 시선을 서로 다른데 두었다. 회장에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서글프게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6. 태어나자마자 어미로부터 떨어진 아이가 기엾게도 품에서 울부짖었지만, 제 쌍둥이 형에게 아들을 건네 준 남자의 얼굴은 한없이 굳어 있었다. 대성전을 폭파하고 사내와 사통하여 아이까지 낳은 성녀 요한나의 처형에 입회한 윈스턴 대공이 그 답지 않게 재차 물었으나, 앤드류는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을 눈에 담고는 그가 그러했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교황청 앞 동상에 교황의 머리가 잘린 채 뒹굴고 있는 것을 새벽기도를 위해 광장을 가로지르던 추기경이 발견했다.
7. 교황의 잘린 머리가 발견된 날, 여제는 자신의 처지를 예견하듯 신부의 흰 베일을 쓴 채 제국회의에 등장했다. 벌어질 일들을 모른 대신들은 그것이 교황의 서거를 애도하는 표상인 줄로만 알았을 터였다. 대공 대신 펜리르 백작이 여제의 외로운 곁을 지키고 서 있었고, 회의가 시작되고 삼십분 뒤 대공이 검은 상복을 입고 문을 열었다. 지각을 질책하려는 여제의 눈 앞에, 그리고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 대공의 등 뒤에 화려한 황제의 붉은 예복을 차려입은 에드워드가 피 한 방을 묻지 않은 칼을 들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흰 장갑을 낀 손을 펼친 에드워드의 손끝이, 여제의 베일 위를 아슬아슬하게 짓누른 보라색 왕관을 향하고 있었다.
8. 꼭대기에 도착하기 직전, 지상으로 추락하는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순간 창 밖으로 스치는 자색 눈동자를 본 것도 같았다. 대공은 순간 그녀가 낳은 제 아이와 함께 자진했을까 염려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살펴본 폐위된 여제의 시신은, 탑 꼭대기에서 추락한 사람같지 않게 온전했다. 저 멀리서 황명을 전달하는 전령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의 품에는 폐위된 엘리자베타의 죄를 면하고,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 뒤 황성 리프레 바깥으로 추방한다는 교서가 들어 있었다. 차갑게 식은 부인의 몸을 끌어안은 대공이 소리없이 목놓아 울었다.
9. 미하일 윈스턴 대공의 아들이 사교계에 이른 나이에 데뷔한다는 소식에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스콜라를 수석으로 단기 졸업한 그의 행보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그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 회장에 나서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나지막이 탄성을 내질렀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경국지색이었을, 연보라색 다이아몬드 같은 눈이 긴 속쌍꺼풀 아래에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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