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고백, 그리고 다음 날 본문

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 고백, 그리고 다음 날

alicekim245 2020. 4. 13. 14:29

"유영아."
"네."
"어째 나 부를 때 선배님, 원장님 이라고만 하고. 나는 왜 오빠라고 안불러줘? 현성이한텐 잘만 하던데."
유영이 다가와 성윤의 이마에 차가운 손을 살짝 짚으며 말했다.
"어디서 반주 한 잔 하고 오셨어요?"
"그 와중에 손은 여전히 차네."

"기록관님, 아까 올린 보존 서류 말인데-"
메신저로 해도 될 일이었지만 텍스트를 보내고 나서도 십 분째 읽질 않아서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간 것이었다. 유영이 짙은 남색 앞치마를 한 채 연구실 한 구석에서 두루마리를 액체에 담그고 있는 것을 본 성윤이 남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흠칫했다.
"어...작업중이었어?"
"보다시피."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유영이 잠시 작업을 멈추고, 장갑을 낀 채 성윤을 맞이했다. "방금 전 보존처리 끝났어요. 요즘은 시대가 참 좋아졌죠, 액체에 담그면 잉크의 흔적을 찾아내서 복원이 된다는게."
기계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 유영은 옆에 두었던 서류에 시선을 흘끗 던지며 말을 이었다.
"메신저 알람은 들었는데 저거 도중에 그만 둘 수가 없어서. 무슨 일이세요?"
"보존 서류 올린거, 처리 코드가 틀린 것 같아서 확인 요청하려고 했지. 앞치마는 따로 산거야? 근사한데."
"지급품이 있긴 한데 길이라던가 이것저것 불편해서. 따로 샀어요. 지급품에...무슨...용 같은게 수놓아져 있는데 그런 고급진걸 작업할 때 쓸 수가 없잖아요."
"그나저나 처음 봤어, 너 앞치마 한 거."
"새삼스러워요?"
"응."
"코드 잘못 올린건 다시 수정해서 결재 올릴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이 찾아 오실 일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래. 오늘은 집에 놀러가도 돼?"
"그게 지금 회사 부하한테, 연구실 들이닥쳐서 할 소리예요?"
"왜. 나 지난번에 말했잖아. 너 꼬시려고 기제원으로 온거라고."
"스케일이 너무 커서 문제란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세상 어떤 사람이, '다른 여자를 택하고 행복할 줄 알았냐?'며 도망간 대학 후배를 꼬시겠다고 석박사를 2년 만에 마친 것도 모자라 빡세기로 소문난 황제 비서실장을 거쳐 황궁 기관장까지 올라오겠는가. 유영은 새삼 자기가 몹시 이상한 사람을 선망하고 짝사랑했던게 아닌가 뒤늦은-약간의 후회감에 젖었다.
"아니면 같이 마트 쇼핑이나 갈까?"
"오."
"예나 지금이나 마트 가는건 좋아하는구만."
"너무 잘 기억하시는거 아닙니까!"
"씨름팀 냉장고 채울 때 우리랑 같이 가고 그랬잖아. 그래서 기억하고 있지."
"언제적 이야기를 지금. 아무튼 냉장고 채울 때 되어서 때마침 에코백 들고 나왔으니까, 같이 가요."
"사야하는거 많아?"
"많으면 배달 시켰겠죠? 그냥, 소소하게 가서 고르고 싶은 날이 있어요."
"그래. 이따 퇴근시간에 봐. 작업 마무리 잘 하고, 아까 올린 서류 코드 수정해 주고."
"네에, 네에."

"진짜 소소하다. 위스키에, 토닉워터."
"술은 배달 안되잖아요......"
"그러냐. 그 날 와인 두 잔 먹고 취한 애가 왠 위스키야?"
"맥주 대신에 가끔 즐기고 있어요, 하이볼로."
"집에서 만들어줄까?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잖아."
"그렇게 은근슬쩍 들어오려구요?"
"응."
"와, 못 본 사이에 뻔뻔함까지 배워오셨어요......아니, 예전부터 그랬나."
"그랬나? 기억 안 나."
"자기 불리한 것만 기억 안나는 병은 없다구 그랬어요."
"그렇지만 니가 우리 집에 순순히 올 것 같지는 않아서."
"가도 돼요?"
"어? 응."
"그럼 갈래."
"청개구리세요?"
"솔직히 여자 집에 남자 들이는게 쉽겠어요, 아니면 남자 집에 여자가 쳐들어가는게 빠르겠어요? 후자겠지. 아, 그리고!"
"어?"
"나도 선배님 앞치마 입은거 보고 싶어져서요."
"다시 반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거예요? 저녁 뭐 해줄까요?"
"오, 남자 집에서 요리까지 해 주게?"
"그렇게 얘기하면 안 갈래요."
"농담이야, 농담. 가서 맛있는거 해 줄게. 내 집에 오는데 음식 대접은 내가 해야지."

"와, 황소 트로피 다 보관하고 있네요?"
"당연하지. 내 인생의 절반이나 다름없는데. 거기 너 사진 있다? 나 재료 손질할 동안 보고 있어."
"겍."
"그러고보니 내가 보내줬던 액자들 무사하냐?"
"집에 잘 있답니다."
"의외네. 그 때 인호가 치워버렸다느니,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처음엔 다 태워 버릴까 하다가,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냅뒀어요. 집에서 나올 때 박스 가득 챙겨서 나왔고."
"그러고보니 본가 어른들은 잘 계셔?"
"아. 그 이야기 안했구나. 저 부모님이랑 의절했어요. 명절 때도 그래서 혼자 지내고, 가끔 할머니 납골당에만 가요."
"왜 그런지 물어봐도 돼?"
"사촌 오빠랑 송사가 있었거든요.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고, 그 인간은 인생 끝장났지만. 더 듣고싶어요?"
"아니. 힘들었겠구나. 더 물으면 그게 멍청이지, 달리 멍청이가 누가 있겠냐."
"여튼 그래서 명절은 진짜로 쉬는 날."
"다음 구정에는 우리집 올래?"
"다 잘 계셔요?"
"그럼. 아들 장가 못보냈다고 이제 포기하셨지만 말이지."
"내가 가면 안 좋아 하실 것 같은데."
"그 잘난 아들이 삼십 중반인데 너 결혼할거라고 데려가면 아마 버선발로 맞으실거야."
"결혼까지 생각했어요?"
"응."
"와아."
"그건 나중에 더 얘기 할테니까, 나 좀 도와줄래? 계란 두 개 깨서 저어줘."
"우리, 어제도 만난 사람 처럼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네요."

"입 찢어진다."
저녁식사를 다 하고도 어째서인지 술과 안주를 내 온 성윤 덕에 거실 소파에 앉아 예능 방송을 함께 보며 낄낄대느라 어느새 시계가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피곤이 가중된 탓인지 유영이 대놓고 하품하는 것을 보고 성윤이 말했다.
"슬슬 잘 시간이잖아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잘 마셨고."
"그러냐. 자고 갈래?"
제 집으로 가기 위해 현관으로 향하는 유영에게 성윤이 툭, 하고 던지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거 너무 진도 빠르지 않아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이웃사촌인데."
"틀려?"
"사귀자고 말 한 적 없잖아요."
"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유영의 대사는, 성윤이 갑자기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는 바람에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진지하니까 잘 들어."
"뭐예요? 갑자기."
눈을 마주보는 상황이 오자 유영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하려 했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은 그가 억지로,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일부러 그러는거야?"
"아뇨, 갑자기 붙잡으면 누구든 당황하잖아요. 뭐 말 할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야-이,"
"지난번에 사과한건 받아줄게요. 그럼, 나한테 할 말이라는게 뭘까?"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해도 돼요? 남자가 좋아하는 이성에게 고백하는 클리셰는 이제 뻔하잖아."
유영의 손이 성윤의 살짝 풀린 셔츠 카라를 향했다. 옷깃을 휙 끌어당긴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본 그녀는 속으로 킥킥 웃고는, 성윤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결혼한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정 그렇게 나한테 오고 싶다면 받아줄게요."
"자고 갈래?"
"아뇨! 베개 바뀌면 못 자는 타입이라서!" 성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걸 잽싸게 피하고, 다시 신발을 고쳐 신는 유영이 손사래를 치며 하르르 웃었다.
못내 아쉬운 눈으로 보던 성윤은 중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고 가라는 말에는 농담, 그리고 진심도 약간 섞여있었지만-섣불리 다가가서 또 도망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인생 처음으로 먼저 고백해 보려고 했더니."
"어, 맞네! 선배님은 항상 고백만 받아봤잖아요! 괜히 했어! 사십 다 되어 가는 아저씨가 고백 한 번 안해보고!"
"분위기 다 잡아놓은거 니가 가로챘잖아, 짜샤. 그리고 아직 삼십대거든!"
"그건 그거구요. 칠 년 전에 내가 얼마나 후회를 많이 했는지는 모를걸요? 먼저 해 보고 싶었어요. 아, 후련하다. 그럼, 잘 자요."
"너같으면 잠이 오겠냐? 칠 년이나 기다려서 겨우 사귀기 시작했는데."
"음......저는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냐. 하기사, 너 피곤하면 티가 나더라. 하품 하면서...는 베개 가린다는거 순 뻥 아니냐?"
"엇, 들켰-! 주무세요!"
"야!"

"아침부터......?"
고백을 한 다음 날, 유영은 자기 집 초인종 소리에 잠을 깼다. 비몽사몽 간에 확인한 시계는 오전 아홉 시였고, 현관문 앞에서 푸른색 셔츠를 입은 채 싱글벙글,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어제부터 막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성윤이었다.
"응."
"그렇게 강아지 같은 눈으로 보지 마요...나보다 20cm는 더 큰 사람이......나 아직 잠 덜 깼는데. 차림새도 잠옷이고.....일단 들어올래요?"
"응!"
얘의 잠버릇이 이랬던가? 성윤은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유영을 따라 거실로 향했다. 자신의 말마따나 잠이 덜 깬 유영이 앞에서 살짝 휘청거렸다. 막 일어난 탓인지, 기분도 왠지 저기압인 것 처럼 보였다. 거실에 놓인 가구는 소파와, 텔레비전, 그리고 거실장이 전부인-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구성이었다.
"집이.....뭐랄까, 되게 심플하네. 나랑 평수는 같지 않아?"
"아마 그럴걸요? 그래도 기본적인 가재도구는 다 있어요, 이래뵈도."
자신의 집 구조와 똑같은 덕분에, 성윤은 익숙하게 부엌으로 향해 들고 온 종이봉투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걸 보던 유영이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아직 잠이 덜 깬게 확실했다. 자기가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어제 막 고백한 애인을 맞이했는지 알면 놀랄텐데.
"파니니 금방 데워줄게."
"아침에 대체 어디까지 다녀온거예요."
"그냥 근처 카페. 잠이 일찍 깨는 바람에."
"어제 술은 나만 마신게 아니었는데?"
"그런 날이 있어. 그럼, 부엌 잠깐 빌린다?"
"네에-."
성윤을 부엌에 두고 거실로 돌아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의 유영은 멍하니 티비 리모콘으로 손을 뻗었지만, 성윤이 파니니를 오븐에 넣어 따뜻하게 데우고 커피까지 내린 뒤 거실로 다시 나갔을 때소파에 웅크리고 잠 든 상태였다. 새근새근 내뱉는 숨소리가 귀여워, 성윤은 잠시동안 근처에 의자를 두고 앉아 그녀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소파 한 켠에 놓여 있던 담요를 펼쳐서 유영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웅크리고 잠든 걸 구경하는데 인기척이 신경쓰였는지 유영이 살짝 눈을 떴다.
"더 잘래? 여전히 어깨 덮어주면 잠드는건 똑같네."
"우웅......졸려."
"아침밥 먹어야지? 유영아."
이름을 불러주자 유영이 배시시 웃었다. 지난 인연 속에서 별로 본 적이 없는, 그래서 더 눈에 띄는 미소였다.
"더 자면 안돼?"
"응. 안돼."
"더 잘래......"
유영이 그렇게 말하더니 긴 팔을 뻗어 성윤의 목을 휘감았다. 가까이 끌어당겨진 성윤은 잠꼬대를 하는 그녀를 보며 잠시 어울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대학까지 같이 졸업하는 동안, 이렇게 정면에서 가까이 끌어당겨진 적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널찍한 소파는 두 명이 눕기에 약간 좁았지만, 성윤은 유영을 품에 안은 채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카페에서 사 온 파니니는 다시 데우면 될 일이었다.

분명 뭐라고 중얼거리고 다시 잠든 것 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막상 더워서 깨어나 보니 눈 앞에 커다란 상체가 있는 바람에 유영은 순간 까무러치게 놀라려다 그가 성윤이라는 걸 알아채고 안심했다. 잠깐 눈 붙인다고 누운 것이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이는데 허리 위에 올라간 성윤의 팔이 의외로 무거워서 치워지질 않았다.
"자요? 일어나야지."
팔을 살짝 잡고 흔들었지만 성윤은 생각보다 깊게 잠든 듯 웅얼거리기만 할 뿐 움직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그의 품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 치고는 이마 알고 지낸 세월이 길어 이런 스킨십도 자연스럽다는게 새삼스러웠다. 그러다 성윤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잘생겼다...'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성윤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잘생겼지?"
"자는 척 한거예요?"
"방금 전에 깼는데. 니가 나 계속 보고 있길래."
"잘생기긴 했네요."
"너한테 그런 이야기 들으니까 약간 부끄러운데. 지금 몇 시야?"
"팔 풀어주면 말해줄게요. 이렇게 누워서는 시계 안 보여."
"싫은데......"
성윤이 품에서 버둥이는 유영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칠 년 만인데."
"학교 다닐 때 뒤에선 자주 끌어 안았잖아요."
"누워서 이런 적은 없어."
"그래도......"
"샌드위치 다 식었겠다."
"데우면 되죠. 커피는요?"
"지금 내리면 돼."
"이제 놔 줄 생각이 들었어요?"
"안 놔줄건데."
"선배니임-."
"너 현성이한텐 오빠라고 잘만 불렀으면서."
"그건 언제 들었어요...?"
"다들 퇴근 시키고 둘이 마지막으로 나갈 때 우연히 들었지. 어찌나 질투가 나던지."
"사석에서나 그렇게 부르죠."
"나는?"
"아직 어색해."
"어색해? 그런데 어쩌지. 나는 오늘 너한테 오빠라고 불릴 때까지 여기서 안 놔줄건데."
"아침 먹어야죠. 안 배고파요?"
"지금 이게 더 중요해."
"흐으으...부끄러운데, 역시."
"해 줘. 안 그러면 이제 뽀뽀 엄청 할 거야."
"으으......"
속으로 갈등하던 유영이 결국 눈을 꼭 감고, 성윤의 셔츠 소매를 꽉 잡은 채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십여년 동안 줄곧 '선배님'이라고 불러왔던 것도 있고, 그렇게 칠 년 전에는 염원했고 또 그 동안 가끔 꿈에도 보일 정도로 실은 '짝사랑'했던 성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오빠."
"아이, 귀여워라. 너 알고 지낸게 거의 이십년인데 처음 듣는다."
"삼십대는 전혀 귀엽지 않아요......"
"넌 언제나 귀여웠어. 이렇게 귀여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시켜볼걸! 아니, 진작에 내 옆에 붙들어 놨어야 했는데."
"이제 놔 줘요. 아침 먹을거야!"
"더 안고있으면 안돼?"
"안됩니다. 배고파요."
하는 수 없이 유영을 놔 준 성윤은 그녀가 샌드위치를 데우러 가는 걸 졸졸 쫓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골든 리트리버가 헤헤 웃으며 뒤를 쫓아오는 듯한 기분에, 유영은 오븐에 샌드위치를 데우는 동안 저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유영아."
"네?"
"근데 너, 지금 되게 야한 차림인거 알아?" 부엌에 서 있는 그녀를 식탁 의자에 앉아 한쪽 팔을 괸 채 바라보고 있던 성윤이 툭 하고 한 마디 던졌다.
그의 말에 자신이 왠지 가벼운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든 유영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보라색 슬립 위에 검은색 비단 가운. 슬립에는 검은색 레이스가 달려 있어서 여성성을 끌어올려 주었지만 가끔 기분전환을 위해 입은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성윤이 말하기 전까지는 미처 신경쓰지 않았었다.
"아. 어제 이거 입고 잤구나."
"뭐야, 그 무덤덤한 반응은......남자친구 앞에서 그런 거 입고."
"그런 거라뇨, 얼마나 가볍고 편한 차림인데요. 저 가슴도 없어서 그냥 나무토막에 입혀놓은 것 같지 않아요?"
"대체 자기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없는거냐......"
자리에서 일어난 성윤이 성큼성큼 걸어와 유영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얇은 비단 감촉 너머로 그녀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어제 씻고나서 머스크를 뿌렸는지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그 향도 났다. 목을 살짝 깨물고 싶어 지는 기분이 들던 찰나, 유영이 그를 살짝 밀며 말했다.
"오븐장갑 쓸 거니까 잠깐 떨어져요."
"내가 꺼낼게. 뜨거운건 조심해야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유영을 놓아주고 오븐 장갑을 뺏어 든 성윤이 다시 데운 샌드위치를 적당한 접시 위에 올렸다.
"오늘은 뭐 해?"
"딱히 일정은 없었는데. 커피 마실래요?"
"응. 원래 쉬는 날엔 뭐 해?"
"기제원 오기 전에는 토요일에도 가끔 규장각 근무 나갔죠. 폐하가 오실 때도 있고, 주말에도 행사 하거나 그러면."
"그랬나......하기사, 나는 밤낮없이 그 분 옆에 붙어 있었으니까."
"비서실장의 일이 대단하다는건 들어서 알고있었어요."
"그럼 요즘은?"
"뒹굴뒹굴. 집 안에서 티비 보거나...책 아니면 미술관 가기도 하고. 그냥 내키는대로 다녀요. 집에 있기도 하고. 선배님, 아니 오빠는요?"
"오, 듣기 좋다. 오빠란 말."
"으."
"뭐야? 그 반응은. 이래뵈도 데이트 신청하러 온 남자친구한테."
"그러고보니 셔츠 멋있네요."
"셔츠만?"
"오빠도. 아, 이거 호칭이 익숙하질 않아......"
"부르다 보면 익숙해 질거야. 애인님. 근데 그거 입은거 계속 보고싶긴 하다."
"그 얼굴로 변태같은 소리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옷 입고 나와. 드라이브 가자."
"네에."
커피를 두고 유영이 안방으로 향하자 성윤이 홀린듯 그녀를 따라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옷 갈아입고 나갈테니까 거실에 있어요."
"구경하면 안돼?"
"구겅은 무슨! 나가요!"
"싫은데......"
"이런 캐릭터인줄 몰랐어......진짜 안나가요?"
"응!"
"야, 이......그럼, 얌전히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뺨에 뽀뽀 한 번 해줄게요. 딜?"
"그게 다야?"
"네."
"쳇. 한 번은 부족한데. 뭐, 내가 더 많이 할거니까."
"캐릭터 낯설어......."
"그래? 난 계속 이러고 싶었는데. 기회가 손에 들어왔으니 놓치지 말아야지."
유영은 성윤을 내쫓고는, 드레스룸에 들어가 한참동안 입을 옷을 고민했다. 그래도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편하게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고 나갈 순 없을 것 같아-그녀가 고른 것은 푸른 빛이 감도는, 무릎 길이의 쉬폰 원피스였다. 화장대 앞에서-여전히 서투른 손으로 화장을 하고 머리까지 손질한 뒤 거실로 나가자, 티비를 틀어놓고 있던 성윤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째서인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신경쓰는거야? 예쁜데. 이뻐." 성윤이 소파에서 일어나 유영의 손을 살짝 붙잡아 품으로 끌어 당기고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우, 진짜. 너 왜 이렇게 귀엽니. 내가 왜 널 몰라봤을까. 이렇게 곱고, 순진하고, 예쁘고, 귀여운데."
"나 옷 입는 사이에 반주 했어요? 삼십대가 뭐가 귀여워."
"내 눈에만 귀여우면 됩니다, 여친님. 가자! 너랑 같이 가고싶은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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