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마지막 인사는 못했지만..."
드물게도 그가 황궁 직원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사랑하던 부인의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제 막 태어난 쌍둥이 아들들에 대한 기쁨보다 더 컸던 탓이었다. 유영은, 차마 그를 원망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 황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황후는 쌍둥이 아들들이 세상을 향한 첫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 자기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챘고 남편은 어디있느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유영이 급하게 무전을 쳤지만, 황제가 수술실에 도착하기 직전 그녀가 허망하게 숨을 거두면서 무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유영의 손을 꼭 잡은 은하가 울었다. 내가 죽으면 이 아이들은, 저 아이의 아빠는 어떻게 하냐고.
'무서워...나,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손 쓸 틈도 없이 죽은 황후의 사인은 양수색전증이었다. 허망하게 부인을 잃은 황제가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그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희고 커다란 상여를 앞세우며, 엄숙한 분위기 아래 황후의 장례가 치러졌다. 먼저 부인을 떠나 보낸 남편은 모든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도 허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장례 직후 은하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유영에게 맡겨졌다. 궁인들의 도움으로 유품 정리를 마쳤음을 황제에게 보고하러 간 자리에서, 그가 사람을 전부 물리치고 그녀에게 작은 벨벳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럴 일이 있을 건 아마 몰랐던 것 같지만...출산하러 병원 가기 전에, 네게 주려고 샀던 것 같아. 주인 될 사람에게 가는 것이 맞겠다 싶어서."
"하지만......소중한 분이 남기신 것을 제가 어떻게, 감히."
"네게 주려고 사 둔 것이니, 뜻을 마땅히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남은 지아비의 도리일테니까."
상자 안에는, 황후가 임신 중 기분전환을 위해 쇼핑을 나갔을 때 유영과 함께 예쁘다며 감탄했던 진주 귀고리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제 월급으론 그냥 구경만 하려구요,'라고 했던 걸 언제 기억했는지 한참 전에 미리 사 두고, '내 아이들도 잘 부탁해! 이따가 봐:)'라고 황후 특유의 귀여운 글씨체로 적힌 카드도 동봉된 상태였다. 카드의 짧은 메시지를 읽은 유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뭐라고. 그저 두 해 정도 곁을 지켰을 뿐인데.
"네가 잘 간직해 주면 좋겠어. 정신과 상담은 잘 받고 있어?"
"아......"
눈 앞에서 친구나 다름 없던 상사를 잃은, 피까지 뒤집어 쓴 유영에게 따로 정신과 의사까지 붙여준 그였다.
"내 앞에서 울지 마. 나도 울고싶으니까."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챘다면......."
"네 잘못이 아니야. 황후가 그렇게 된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상담 잘 받고, 좀 쉬다가 복귀해. 전에 하고 싶다던 석사 과정 밟게 절차도 마무리 해놨어."
"제가 무얼 했다고, 제게 이렇게."
"바쁜 남편을 대신해 황후의 곁을 지켜준 것에 대한 감사와 성의의 표시이기도 해. 네게 수국 꽃다발을 받은 날, 나한테 저녁에 쫓아와서 얼마나 자랑을 했던지.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살아있을 때 매일 꽃을 선물해 줄 걸 그랬어." 황제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유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황궁으로 돌아와서도 잘 부탁해, 이유영 궁무관."
하여, 유영은 황실 소유 교육재단의 후원으로 기록관리학 석사를 1년만에 졸업하고 황궁으로 돌아와, 규장각(도서관)에서 2년 근무한 뒤 황제의 재가를 거쳐 원래 선망하던 기관인 기제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칠 년 전, 청첩장 사건을 계기로 인연을 완전히 끊었던 그 권성윤이 비서실장 직무를 마치고 기제원장으로 부임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비서실장의 업무가 워낙 복잡다단하여, 유영이 근무 중이던 규장각에는 한 번도 들르지 않았기 때문에-그냥 다 잊어버렸나보다,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그녀의 뒤통수를 강렬하게 때리는 인사발령 소식이었다. 같은 황궁에서 근무하는, 급이 다른 직원이라는 사실은 비서실장 인선이 워낙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저절로 알게 되었으나, 기제원 기록관과 기제원장으로 과거의 악연이 다시 마주친다는 점은 역시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피제는 역사 속에나 있는 제도였나요? 하필이면! 당장 승정원이나 규장각으로 이동 시켜주세요! 아악, 이거 놔!"
승정원이나 규장각으로 돌려보내 달라며 부원장이자 여태껏 원장 대행을 해 온 현성의 연구실에 들어와 강짜를 부리던 때에, 성윤이 바람같이 나타나 유영을 거의 반 강제로 끌고 나간 직후였다. 그의 복부에 가볍게 주먹을 날린 유영이 소리쳤다.
"너, 그렇게 없어지고 나서 내가 마음이 편할거라고 생각했어?"
"칠 년 동안이나 아무 연락도 없고 만날 일도 없었으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면요?"
"내 번호 차단 박은게 누군데. 나, 번호 안바꿨거든?"
"어? 저야말로 선배님 번호 차단한 적 없는데요."
"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전화 걸었을 때-."
"설마 칠 년 전에, 그 카페에서 나 뛰쳐나가고 직후를 말하는거예요?"
"어."
"핸드폰 들고 뛰다가 떨궈서 작살났는데. 나 핸드폰 자주 떨어뜨렸잖아요, 잊어버리셨겠지만! 오후에 바로 수리했고. 차단 한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아......?" 순간 기제원장의 얼굴에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유영이 평소에도 핸드폰을 자주 떨어트려서 바꾸는 일도 잦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사과할 기회를 준 건 내 쪽인데?"
"무슨 말같잖은 소릴-!"
"나한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그 칠 년 동안 전화나 문자 한 통이라도 했겠죠. 근데, 이거 봐요. 우리 칠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났어요. 그 때 내가 좀 다른 방식을 택했다면 나한테 여자애 하날 감시했냐 그런 소린 안했겠지만. 어차피 이미 옛날의 팬과 선수, 선배와 후배의 관계는 끝장났잖아요? 공평하게 다른 직원처럼 대하시죠, 기제원장님. 왜 이렇게 끌고 나와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었으면 부원장 앞에서 널 끌고 나오지도 않았어."
"나한테 하고싶은 말이 남아 있었어요? 할거면 지금 말해요. 이제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직원과 원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까."
"그것 참 고마운 일이네."
"비아냥거리는 솜씨는 그 사이 다행스럽게도 일품이 되셨네요." 유영의 말에 성윤의 웃는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그녀가(그의 분노 게이지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기제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어디 가려고? 아직 내 말 안끝났어."
"적어도 저는 드릴 말씀 없습니다만."
"아니, 들으라고. 들어달라고, 제발."
"그 날 제가 그만둔다고 말한 이후로 저란 존재를 인생에서 깔끔하게 지우신 줄 알았더니."
"너, 지금 본인 이야길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네, 제 이야기예요. 선배님을 인생에서 깔끔하게 지운 채로 살아가는 중이었거든요!"
"내가 그 때......너한테 잘못했다고, 그 이야길 하려고 하는거야!"
"와......" 성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유영이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양 팔을 뻗어 성윤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이제와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네, 용서해 드릴게요.'라고 순순히 말할 줄 알았어? 그 때도 말했지, 오랫동안 곁에 있던 대가를 몇 번이나 처절하게 아주 잘! 받았다고! 좋아했던 사람이 갑자기 불러내서 '나, 곧 결혼한다'고 첫 번째로 청첩장 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내가 몇 번이나 사과해도 충분하지 않다는 거 알아. 아는데, 내가 어리석어서 그러지 못했어. 나한테 네가 어떤 존재였는지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 년 만에 석박사 따신 분이 자신은 똑똑하지 않았다고 자조라도 하려는거예요?"
"사람이 겨우 마음 잡고 말하는데 끝까지 들어......그래, 내가 멍청해서, 네가 나한테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는게 늦었어. 네가 내 인생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이후에야 깨달았다고. 그래서 지금 말하려는거야. 네가 다시 내 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유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알아챈 성윤이 팔을 뻗어 그 손목을 한 손에 포개어 잡았다. 유영의 귀 끝이 새빨갛게 변하고 있는 것이 오랫동안 쌓인 분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신임 원장이 기록관의 멱살을 잡아 끌고 나간 것을 느긋한 포즈로 관전한 현성은, 한시간쯤 뒤 그 둘 중 하나-그러니까, 옷에 모래가 잔뜩 묻은 성윤이 투덜거리면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깥에서도 들릴 만큼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본 성윤이 대놓고 면전에서 미간을 좁히며 투덜거렸다.
"소독약 줄까? 형, 진짜 꼴이 가관이다. 둘이 밖에서 치고 박고 싸우기라도 한거야?"
"애가.....변했어...... 가까이 오길래 껴안아주려나 싶었는데 그대로 밭다리......"
"지금 전직 장사님이 기제원 기록관한테 씨름 기술로 테이크다운 당했다고 자백한거야?"
"너같으면 보통 사람이 장사 출신한테 밭다리 걸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냐?"
"난 또, 뺨이라도 때렸을 거라 상상했는데. 역시 폐하가 점찍어 둔 사람 답네."
현성은 웃음을 쉬이 그치지 않으면서도 구급함을 열어 성윤의 손등에 까진 상처를 정성껏 소독해 주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다 했어? 이거 뭐, 거의 두들겨 맞은거나 마찬가진데."
"하려던 말은 얼추 한 것 같은데, 대답을 못들었어. 젠장."
"오, 의외다. 나한테 와서 당장 승정원으로 발령 내달라고 하던 애가 그걸 얌전히 들어줬어?"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냐. 걔가 자기 이야길 순순히 털어놓을 애가 아닌데."
"술 내기 져서 취한 상태로 술술 털어놓은걸 기억하고 있는 것 뿐이야."
"그러냐......" 황제를 제외하면 성윤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현성이 제일 가는 말술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갔다. "그래서, 확실히 사귀는 사람이나 선 보러 다닌 적도 없는게 맞는거지?"
"형도 진짜 대단하다. 자기 짝사랑 하는 줄도 모르고 처음 청첩장 줘서 상처 주고 성격까지 바꿔버린 여자애 앞에 칠 년 만에 무려 상사로 나타나서 자기 할 소리 다 했네."
"시끄러워. 그거 바로잡으려고 여기까지 온거라고."
"그 이전에 내가 유영이를 알 기회가 있었다면 둘이 그렇게 단 둘이 이야기 하도록 두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성격도, 꽤 흥미롭긴 하지만."
"그러냐. 근데 내가 여기 온 이상은 눈독 들이지 마라."
"이기적인 남자로다." 현성이 대놓고 혀를 차면서 말을 이었다. "걔한테 두 번이나 같은 일로 상처 주면 나도 가만 안 있을거야. 형이 칠 년 만에 겨우 근처에 붙잡아 둔 사람이기 이전에, 우리 기제원의 소중한 기록관이기도 해. 더불어, 폐하가 아끼시는 황궁 직원이자 돌아간 황후 폐하의 친구이기도 해. 형이 전에 한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그냥 곁에서 지켜보기만 한거라고.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