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본문

Reviews/헌내기 사서의 독서기록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alicekim245 2016. 11. 10. 20:33

예전에도 한 번 읽은 바 있지만, 왠지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 도서관에서 순서를 기다려 대출했다. 어제 받아서 오늘 오후쯤에 다 읽었으니 속독을 하면서 놓친 부분도 많을 것만 같지만, 과거와는 다르게(왠지 내용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아서) 신선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과, 펭귄클래식 서적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민음사 쪽도 추천을 받았지만 오래 전 페이퍼컷을 당한 원한(?)이 있어서 손에 대지도 않았다. 실은, 질 좋은 종이로 만든 책을 그닥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이야, 킨들로 전자책 빌려서 원문 읽으면 되니까 별로 상관 없기도 하고(참고로 필자의 킨들은 아마존 페이퍼화이트. 2세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멀쩡히 잘 써먹고 있다).

내가 아는 한으로 두 가지 에디션이 있는데(특별판 빼고), 소프트 커버-사진이 들어간 양장과 그렇지 않은 것 두 가지다. 후자의 경우에도 그 특별한 사진이 안에 삽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들고 바깥에 돌아다니면 왠지 소아성애자로 낙인 찍힐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위험한 사진이다. 험버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이라 할 수도 있으려나?

사실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질 않아서 비교는 조금 어렵지만, 그간 비문학 위주로 독서 생활을 힘겹게나마 영위해 온 나에게 『롤리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동감을 보여주었다(솔직히 색채는 잘 모르겠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필체 덕분에 험버트의 시선과 돌로레스, 아니 롤리타의 모습을 눈 앞에 그릴 듯이 선명하게 볼 수가 있었다. 내게 아직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로! 지금은 책이 도서관에 반납되었기 때문에 나의 상상을 자극한 그의 묘사를 적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어떤 방면으로 보아도 험버트의 행위와 생각은 정당화 되어서는 안되지만, 이 사람이 너무 필사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려 들기에 책을 읽는 동안은 그대로 이끌리고 말았다. 그의 모든 묘사 중에서 돌로레스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과 행위에 타당함을 주장하고 있는데도...정점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치밀하며, 예술적인 행위이며, 종내에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 모든 독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험버트라는 사내가 한 여자아이를 송두리째 부수어 놓았다는 점이다.

도중에 전개가 너무 빨라서 흐름을 놓친 부분이 있어 나중에 따로 확인해 보강한 부분이 있고, 또 '안되는데' 싶으면서도 딱 한 부분에서 나도 무너지고 만 적이 있다. 모든 사건이 결말을 향해 달려갈 때, 그가 돌로레스에게 다시 '아빠'인 채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던 장면. 그가 사랑이었다며 울부짖었던 그 순간 돌로레스가 보인 태도와 표정을. 행위와 그 의도에 인륜이란 존재하지 않거늘, 어째서 그 부분에서 멈추어 몇 번이고 같은 문단을 읽어내려 갔던 것인지. 너무나도 강렬했다. 인과가 순간 드러나고 부서지는 과정이 그렇게 극적일 수가 있는 걸까 싶었다. 물론, 돌로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험버트는 자신의 유년과 청소년기를 파괴한 범죄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런 사람이, 한때는 아버지였고, 어린 날 동경했던 사내가 '사랑했다, 사랑한다,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했으니 그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 덩어리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런 의미에서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만난 마지막 파트에서의 대단한 묘사는 이 책에서의 절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소년과 장년의 사랑이 장려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미 그런 시기가 지났고, 2차원 세계의 청소년도 인격(?)을 보호받고 있는 시대인데다, 나 역시 소아성애자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 책을 마냥 곱게만 읽기는 어려웠다. 작가도 아마 그런걸 의도했을까? 험버트는 자서전 형식의 이 자백서(...) 내내 자신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정당화하고, 희생한 것처럼 포장하고, 사랑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 그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용서해서도 안될 범죄임에도. 위선자.

후반부 전개만 좀 더 질서정연 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된다면 험버트의 급격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에 작가가 속도 조절을 잘 한것 같다. 책 속에서 헤매이다 문득 숨을 크게 들이쉬던 그 순간의 쾌감을 아마 누구는 알고 있지 않을까. 마치 내가 김진규 작가의 『달을 먹다』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 외울 정도로 파고들었던 그 순간처럼.

언뜻 시작부터 끝까지 한 남자의 자서전이며,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자신의 러브스토리처럼 애써 유려한 필체와 묘사를 동원해 두었지만 필자라고 자처하는 험버트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누누이 강조하지만). 다만 글 속에서 영상을 그리다 막 현실로 돌아오고 나면 기분이 좀 묘하다. 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은걸까, 돌로레스는 어째서 험버트를 그냥 두어버린걸까(왠지 총 빼앗아서 머리에...아니, 이러면 겨우 되찾은 자신의 결정권을 다시 박탈당할테니....)...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은 문장들이 가득하긴 한데 그 본질이 한 사람이 어린 아이를 유린하고 억압하다가 자승자박하는 이야기라는걸 떠올리면 입가에 절로 고소가 맺힌다.

그래도 역시 읽지 않고는 아쉬운 책이라 하겠다. 또다시 우울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라던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를 재차 읽었던 것 처럼.


아, 그러고보니 도서관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책이 있었고, 앤 라이스 여사의 뱀파이어 레스타트 시리즈도 있었고...이상하게 책 읽는걸 줄이려고 할 때면 읽고싶어지는 책이 너무 눈에 많이 띄어서 괴롭다. 그래도 아직은...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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