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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라쥬 파리(2012), 이기진 본문

Reviews/헌내기 사서의 독서기록

꼴라쥬 파리(2012), 이기진

alicekim245 2017. 3. 5. 13:51

이 책은 일단...음, 가벼워서 집어들었다. 제본에 쓰인 종이가 고급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표지가 뭔가 빌 브라이슨 스러워서 덥석 집어든건 덤(정작 빌 브라이슨 문체는 익숙하질 않아서 다 못읽는다). 가방에 책을 두어권 넣다 보면 어깨가 짓눌려서 힘든데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표지를 보다가 이 작가분이 아이돌 가수의 아버지라는데 한 번의 놀람.

 

솔직히 기대 않고 펼쳤는데 문장에서 소위 아련한 섬세함(?)같은게 묻어나서 좋았다. 슬쩍 넘어가려다 눈에 띈 문장이 나를 이끄는 그런 매력적인 문장들이 많았다. 글 연습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부러울 정도였달까.

 

그냥 이 사람의 이야기, 파리의 분위기, 기억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사실 물건은 물건이다. 내가 눈길을 주지 않았을 때는 물리적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과 '소통'하는 순간, 그 물건은 '물건 이상의 물건'으로 살아난다.

특히 오래된 물건을 보여주면서 곁들여주는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오래된 골동품, 콜렉션.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주는 강렬한 임팩트는 없었지만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적어두고 나중에 보면 이것 나름대로 얼마나 멋진 문장인지 실감하게 된다.

양치기는 화가 나서 치즈 먹은 파타펑을 막대기로 때려죽인다.

이건 무려 동화의 스토리인데, 직접 읽어야 그 강렬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꼭 읽어보길.

 

사람들은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 흘려보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을 표현하려는 마지막 열망이 책이리는 사실입니다.

이 작가의 이야기도 책으로 남겼기 때문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포스팅도 할 수 있던 것이니 꽤 중요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다 보면 그 과정이나 인물의 배경설정에 지나치게 치중해서 이야기 하나도 온전히 만들어내지 못할 때도 있다. 길을 헤매다 겨우 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단어 하나에서 무수히 많은 가지로 뻗어나가게 되지만, 그게 오래 걸릴 적도 혹은 단숨에 닿을 때도 있다. 복불복이라기보다는 내가 사람을 잘 안만나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최근에 들어서야). 바깥에 돌아다녀야 가을 하늘이나, 서늘한 바람이라던가 가을 장미라던가 느긋하게 바라보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을텐데.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역시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창작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는 '내 이야기'를 쓴다면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그 실마리를 찾아가면서 읽었다.

 

 

누구에게는 그저 그런 파리 생활기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여행에는 도움이 안되는 책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여행이라던가 파리라던가 그것과는 다른 과제(!)를 안겨준 셈이다.

그래도 책 읽는 동안은 즐거웠어요:)

 


 

덧붙여서 내가 생각하는 진짜배기 여행기(책)란:

1. 선현경 이우일의 신혼여행기 <- 이건 아마 재출간한 것도 단종되어서 신간 구매는 힘들어진걸로 기억

2. (허영만의) 맛있게 잘 쉬었습니다.

이런 책들이다.

 

헌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이 책은 일전에 읽었던 크레이그 타일러의 '런더너'랑 비슷한 계열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여행기라기 보다는, 그냥 그 나라(혹은 도시)에 얽힌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 이걸 여행기라고 묶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않나...해서 뜯어봤다.

일단 KDC 분류로는 982.602가 붙은 책이다. 어떻게 뜯어 보는거냐면:

980(지리) -26(프랑스와 인접국가) -02(잡저)

이렇게 풀어볼 수가 있는데(뜯으면서 24 영국과 26 프랑스 헷갈린건 안자랑), 잡저(표준구분표 기준) 붙은건 좀 의외다. 여튼 굳이 코멘트를 더 하자면 이 책은 프랑스와 그 인접국가를 다룬 지리 잡저(...)가 된다.

처음에는 982(유럽지리)+602(미술 재료 및 기법)으로 분해했는데 책 내용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아예 틀린 말이 아니긴 하다. 넘어가자.

 

기실, 여행기라고 태그가 달린 책은 잘 안 읽는 편이다. 대부분 여행기의 탈을 쓴 가게 소개가 태반인 까닭이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따위의 정보는 그 도시에 갈 예정도 그럴 여유도 안되는 사람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행기라고 자청하는 책은 여행자의 '여행 이야기'가 실려야 진짜배기라고 생각한다. 근데 의외로 내 기준에 충족하는 책은 별로 없다. 물론 내 기준이 괴랄할 정도로 특이하다는 사실은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요 근래 서점가를 둘러보면 자기계발서와 여행기의 탈을 쓴 하이브리드 잡종이 여행기의 주류를 차지하는 느낌이 강하다. 책을 사람처럼 대하는 내가 유일하게 소각장에서 불사른 책이 바로 그런 쪽이긴 한데...고소당할까봐 서명은 언급 못하겠다. :)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란 휴식이라서, 한 도시에서 한주 길게는 한달 정도 그 지역에서 생활하며 문화를 체험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지런히 돌아다니는 것을 여행이라 생각하고, 여행에서 자기 발전, 자기 발견을 추구하기 때문에 책을 고르다 보면 상당한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책에서까지 타인의 긍휼(!)과 성실함 따위를 배우고 싶지는 않다.

내 취향에 맞는 여행기가 별로 없다는건 내가 이 정도로 괴랄한 취향과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이따금 마음에 맞는 책을 찾으면 상당히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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