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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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HG4

alicekim245 2025. 10. 11. 15:09

마스터베드룸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까 만난 희우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별다른 말을 하지 않다가, 1층에 도착하자 마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당히 신중한 타입의 사람인듯 했다.
"우선...식당부터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식당이요?"
도착한 곳은 광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넓은 식당이었다.
발을 딛자 마자 대리석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머리 끝까지 올라와 있지도 않은 열기를 식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은 소리마저 반사될 듯이 닦인 대리석 바닥 위에, 여덟 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을 듯한 커다란 월넛 식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바닥을 따라 시선을 벽으로 옮기자, 상아색 벽지가 보였다. 그림이나 거울은 하나도 장식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벽들 사이로 정원을 향하는 통창이 나 있었다. 특이하게 이 창문에는 빛을 가리기 위한 커튼이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 창을 통해, 유리 온실처럼 보이는 건물이 어렴풋 시야에 들어왔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식탁 위로 떨어지는 펜던트 조명은 따뜻한 색감의 빛을 폭포수처럼 쏟아냈지만, 공간 전체의 냉기를 전혀 녹이지 못하고 있었다. 제윤의 침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묘한 냉기가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작은 부엌 겸 식당에도 사람사는 온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비록, 요리를 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 공간은 식사를 하면서 즐겁고 활기찬 시간을 보낼 목적보다는, 무언가의 의식을 치르기 위한 의례적인 공간처럼 보였다. 식당이 맞기는 한걸까?
"넓긴...하네요."
그런데도 내가 내뱉은 말은 아주 단순했다. 어쨌건 여긴 고용주의 자택이고, 내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계제는 못되었으니까.
"식사는 이곳에서 하시면 됩니다."
식사? 계약서에 그런 내용도 있었나? 떠올리려고 해봤지만 식사, 라는 단어는 언제나 내 욕구와 희망사항에서 후순위였기 때문에 기억날 리가 없었다.
"드시고 싶은게 있으시면...요청하셔도 됩니다만." 하지만 희우의 말끝이 흐려지는 것으로 봐서 집주인도 집에서 식사를 잘 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그의 설명을 넘겨버렸다. 애초에 나는 생존을 위한 음식 섭취만을 했을 뿐, 이런 근사한 곳에서 먹는 음식은 제대로 맛을 느끼지도 못할게 뻔했다.

그 다음에 그가 나를 안내한 곳은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처음에 들어서자 마자, 식당과는 다르게 따스함이 느껴지는 배색에 저절로 마음이 놓였다. 향긋한 장미 향기를 눈으로 쫓아가니, 열 송이는 넘는 듯한 붉은색, 분홍색 장미들이 크리스탈 화병에 꽂혀 있었다. 집주인의 취향일까? 이 집에 들어와서 향을 의식한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매끄러운 브라운 컬러의 가죽 소파 위에는 계절에 어울리는 패브릭 쿠션이 놓여 있었는데, 곧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는 듯 노르딕 패턴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파를 중심으로 깔린 러그는 발을 딛기만 해도 폭 빠질 것 같이 부드러워 보였다. 희우가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내게 소파를 권하곤 자리를 비웠다. 주인이 없는 응접실의 소파에 풀썩 하고 앉아보았다. 어쩐지 눕고 싶어지는 푹신함이었다.
"청소를...열심히 해 놓은건가."
보통의 소파나 테이블 밑에서 기대할 수 있는 머리카락이나 먼지는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식당과 마찬가지로 커튼이 달려있지 않은 통창을 통해 아까 내가 걸어왔던 정원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어렴풋 보았다고 느낀 유리 건물이 여기선 더욱 잘 보였다. 유리 안에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온실이 맞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약간 생겼지만, 금새 접어두었다. 어차피 허락없인 내가 갈 수 없는 공간일테니까.
"홍차입니다." 유령처럼 다가온 희우가 티테이블 위에 흰 찻잔을 내려놓는 바람에, 하마터면 소릴 지를뻔 했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나는 그가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 신제윤이 나를 향해 몸을 숙여 속삭이던 순간 내가 느꼈던 시프레 향의 일부가 찻잔에 담겨 있었다. 시프레 향의 구성요소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건, 베르가못의 독특한 향이었다.
"향이 참 좋네요...어떤 얼그레이인가요?"
유학 중에는 크리스티안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주로 커피를 마셨다. 그는 커피 예찬론자였고, 차는 영국놈들이나 마시는거라며 굉장히 다른 종류의 무언가로 지칭하길 즐겼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화헌미술관에 취업하면서부터 나는 주변 동료들-특히, 최수현 이사장의 취향에 감화되어 점차 차를 즐기게 되었다. 직장 동료들도 커피보다는 한 잔의 홍차와 여유를 즐기는 멋을 알았고, 해외출장을 다녀오면 각자 사들고 온 홍차 티백을 교류하는 일종의 모임도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 이 차도 어디선가 마셔본듯 하지만 정확히 떠오르지 않아 희우에게 물어본 것이다.
"마리아쥬 프레르의 얼그레이 프렌치 블루입니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군요."
희우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나는 찻잔 속 떠다니는 작은 수레국화 꽃잎을 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비록 이 저택에서 느낀 위화감은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지만, 아직은 견딜만 하다는 아주 작은 힌트를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차를 마시던 나의 시선은 다시 꽃병으로 향했다. 매일 배송받은걸 장식해 두는걸까? 잎사귀를 정리하고, 가시를 걷어내고, 똑같은 길이로 잘라 불규칙한 듯 하면서도 일정한 패턴으로 꽃을 장식해 둔 형태이니 자연스레 시선이 갈 만 했다. 내 눈빛이 꽃에 머물러 있다는 걸 눈치챈건지, 희우가 한 마디 했다.
"저 장미는...사장님이 취미로 장식해 두시는 겁니다. 오늘도 주무시기 전에 가져오신거구요."
"주무시기 전...? 새벽에요?" 아직 신제윤이 밤에 일하고 낮에 잔다는 그 패턴에 익숙해지지 않아, 하마터면 말을 반대로 할 뻔 했다.
"보통 주무시기 전, 저기 보이는...온실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통창 너머의 유리 건물을 가리켰다.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입니다. 사장님은 저 온실에서 시간 보내는걸 좋아하셔서요."
그런데 방금 이 말, 내가 들어도 되는 거였나? 신제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편이 나았을텐데. 하지만 희우의 말을 지적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속에 든 생각을 삼켜버렸다.
그는 내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려 주었다. 차라리 맞은편에 앉아 같이 마셔주면 좋으련만, 나도 그렇게 넉살이 좋은 사람은 아니어서 서둘러 마지막 액체를 입 안에 털어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오늘 오전만 이렇게 손님 취급이고, 앞으로 응접실엔 들를 일이 없을테니 마지막으로 이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응접실 한 켠의 벽에, 작은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20세기쯤 그려진 표현주의 작품인 듯 했다. 창가에 앉아있는 여성은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정말 그 뿐인 초상화 속 여인은 밤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채, 창 밖의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랑...왜 비슷한 것 같지?'
착각이겠지만 정말 처음 보자마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늘 출근하기 전,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내 얼굴과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양새. 얼굴형? 눈매? 아니면--.
"19세기 말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사장님께서 최근에 구입하셨습니다. 아마 옥션에도 공개되어 있을겁니다, 비공개로 낙찰받으신게 아닌지라."
"최근에요?" 이따가 혼자 남겨지면, 최근 신제윤이 구입한 옥션 목록을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았다.
"네, 2주 전쯤. 그런데 이 그림을...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갑자기 말을 아꼈다. 어쩌면 그림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는 것일까? 하지만 작가의 정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소장자가 아끼고 있는지도 모를 그림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미술작품의 가치는 사람들의 욕망에 비례해 매겨진다. 다르게 말하면, 소장자가 어떤 의미와 스토리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값이 천차만별이란 소리였다. 누군가에겐 백만금을 주고 사들여야 하는 욕망의 대상이, 다른 사람에겐 헐값에 길거리에서 팔아버려도 시원찮을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단어 하나하나, 분위기와 대상을 보고 조심스럽게 고를 필요가 있었다. 어쨌건 신제윤은 지금 나를 고용한 클라이언트니까.
희우는 더는 그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나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벌써부터 공기가 더 오싹하게 느껴졌다.

수장고의 문은 육중한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지하에 금고를 심어놓은 듯한 위압감이었지만, 이런 류의 공간은 화헌미술관에도 있었으므로 크게 위축될 일은 없었다. 희우가 보안시스템에 홍채를 인식시키는가 싶더니,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들였다. 시스템에 내 홍채 정보를 내어주자, '등록되었습니다'란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앞으로는 홍채인식 후 자유롭게 출입하시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막상 공기가,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공조설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듯 했다. 수집만 하고 창고에 쌓아두기만 하는 타입의 컬렉터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공기 중의 습도는 숨을 쉬기만 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다음엔 조도였다. 그다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 아래, 내가 작업할 수 있도록 커다란 데스크와 필기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터라 거의 비워져 있긴 했지만, 차차 내 방식대로 채워나가면 될 일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두 화가의 그림이 이 작업공간에 방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였다.
"수장고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뉩니다." 나의 탐색이 끝난걸 알아챈 희우가 입을 열었다.
"정면에 보이는 문을 통과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수장고에서 가장 넓은 공간으로...대형 작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측에는 소형 작품이 서랍식으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의 작은 문은..." 그는 내가 설명을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듯 일부러 숨을 멈추었다. "귀중품실...입니다."
"귀중품실? 수장고 안에요?" 귀금속이라도 보관해 둔건가? 수집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회화 작품 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들을 홀린듯 입찰하기도 했으니까 아예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제 밤, 계약서의 검토를 포기한 뒤 휴대폰으로 그간 소더비와 크리스티, 전 세계의 온갖 미술품 경매 사이트에서 신제윤의 명의로 낙찰된 모든 미술품들을 찾아봤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수집 범위는 하나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요. 이 안에는 사장님의 개인적인 수집품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희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귀중품실은 사장님만 출입 가능합니다. 억지로 열려고 시도하는 경우...아주 요란한 경보가 울립니다."
"그럼 더더욱 가까이 갈 이유가 없겠네요."
"제대로 물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안내를 드려 대단히 송구합니다만," 그가 책상 위에 놓인 메모패드를 손에 들어보이며 말했다. "오늘 전반적으로 수장고를 살펴보신 후, 추가 장비와 자료가 필요하시면 이 메모패드에 작성하여 퇴근 전 책상 위에 올려놓아 주십시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전문가가 수장고를 살펴 주시는 건 처음이라서요. 요청하신 물품은 다음날 아침, 큐레이터님이 출근하기 전까지는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아주 아날로그적인 일방향 소통. 하지만 화헌미술관에서도 자주 쓰던 방식이라, 아예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최수현 이사장의 취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사장님께서 특별히 먼저 보여드리라고 하셔서."
그가 수장고의 가장 커다란 문을 열어 나를 먼저 들여보내곤, 자신이 다시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장고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지상의 저택이 품격 있게 절제된 규모였다면, 지하는 실용성을 위해 최대한 확장해 둔 듯했다. 아마 정원 아래까지 지하가 뻗어 있을 것이다.
널따란 실내 공간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작품을 최적의 상태로 보관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반사되는 빛을 흡수하기 위해 검은색으로 칠해진 벽을 따라, 작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일부는 흰 천으로 덮여 있었고, 일부는 이미 노출된 채였다. 아마 제윤이 자주 보는 작품들은 덮지 않았을 것이다.
조명은 UV 차단 LED로 설계되어 있었고, 희우가 걸어가는 곳만 필요에 따라 은은하게 밝아졌다. 개장 전의 미술관 같은 정적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건 액자들을 되는대로 쌓아서 방치해 둔 공간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를 전시해 둔 하나의 전시실이었다. 작품에 대한 찬사가 느껴지는 공간이라 아까까지는 위축되었던 기분이 절로 좋아지고 있었다.
희우는 한 공간에 멈추어 서더니, 벽에 있는 스위치를 찾아냈다.
탁.
조명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그림을 덮고 있던 흰 천이 벗겨지자--내 귀는 모든 소리를 차단해버렸다.
큐레이터라면 두 점의 작품을 보는 순간, 캔버스 위에 그려진 물감의 겹이나, 액자의 상태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
하지만 그림들에 완전히 압도당해, 그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명의 각도로 인해 그림 속의 빛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판 데어 헬스트가 빚어낸 어둠 속의 촛불은 진주 귀고리 소녀보다 더욱, 그림 속 소녀의 표정을 관능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신제윤과 내가 서로 해석을 달리했지만, 결국 '사랑'이란 주제로 연결되었던 아주 짙고 깊은 푸른색. 판 데어 헬스트의 그림에 사용된 이 푸른색을 표현하는 안료는 연구결과가 많지 않아 어떤 재료를 썼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 나타난 이 그림에서, 소녀는 청금석으로 빚어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건 누가 보아도 청금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빛깔이었다. 베르메르가 바래길 바라던 청색이 헬스트의 그림에서 영원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레아 크라머의 『The Collector』 속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림 속 여성들의 눈동자는 모두 한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크라머는 이 그림에 '수집가'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서, 이 그림의 소유자가 배경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모든 액자들까지 소유하는 것을 의도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이 그림은 그 자체로 이미 수집가였다. 나는 이 그림을 가진 사람이, 그림에게 수집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처음 사진으로 접한 순간부터 갖고 있었다.
결국 희우가 급하게 다가와 부축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림 속 남자에게 완전히 종속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가녀리게 보였지만 의외로 단단하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몇 초간 그림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 든 생각.
이 그림 두 점은 신제윤이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직전, 나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했을 때는 이정도까지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상대를 홀린 다음 알아차리지 못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내게 각인시킨 것이다.
"큐레이터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에 저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계약서에 서명한 이상, 나는 신제윤의 수장고에 있는 모든 작품들을 정리하고 세심하게 다룰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게 신제윤의 계획이라면?
석연찮은 계약서 상 특약, 내 것이란 의구심이 들었던 몽블랑 만년필, 크리스티안과 델프트를 갔었다는걸 알고 있다는 듯한 신제윤의 반응, 그리고 지금 이 그림 두 점까지.
이성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고. 하지만 이성을 굴복시킨 건, 미술품에 대한 나의 열망이었다. 
결국 떠오른 의문들을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건 간에,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워버리려 해도, 한 가지 의문만은 계속 고개를 들었다. 
왜 하필 신제윤일까? 
나는 그에게 단 한번의 접점을 가진 사람에 불과했다. 애당초, 그와 나는 사는 세계부터 달랐다. 
당장 이런 미술 작품들을 걱정없이 사들일 수 있는 사람과, 월급쟁이 큐레이터는 서 있는 위치부터 차이가 나지 않던가.
"큐레이터님?"
희우의 목소리가 나를 어김없이 현실로 끌어내렸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나를 늘 현실로 이끌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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