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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HG2 본문
거울 속 내 얼굴은 창백했다. 설마, 긴장한거야?
나는 수돗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찬물이 손목을 타고 흘렀다. 심호흡을 다시 한번 깊게 했다. 오늘 내가 무슨 옷을 입었더라?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 네이비 슬랙스와 블레이저. 단정하지만 너무 격식 차리지 않은. 목걸이는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귀에는 작은 진주 귀걸이만. 나쁘지 않았다. 향수는 아침 출근도 전에 전부 날아가버린지 오래였다. 전시 공간의 작품을 손상시킬 우려도 있었고, 관람객들이 처음으로 작품을 마주하는데 내 향에 압도당하면 안되니까, 가벼운 오 드 코롱을 주로 사용했다. 그것도 출근하기 전에 뿌리는거라 직장에 도착할 때면 향이 전부 날아가고 없었다.
메이크업을 확인했다. 혈색을 살려주는 정도의 립스틱, 자연스러운 베이스. 투명 메이크업의 시대는 지나갔다지만 이 곳은 화려한 꾸밈보다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선호하는 직장이었다. 특히, 최수현 이사장과 독대하는 사람들은 유독 그러한 성향이 짙어졌다. 거울 속 나에게 말했다.
"할 수 있어."
이제 로비로 나가 손님을 기다려야만 한다.
화헌미술관 1층 로비는 장엄했다.
대리석 바닥은 회색과 흰색이 섞인 이탈리아산 카라라 대리석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이 반사되는 것이, 일부러 찾아와서 로비만을 봐도 좋을 정도였다. 이 미술관의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천장도 아득히 높았다. 3층 높이까지 뚫린 아트리움. 유리 천장으로 자연광이 쏟아져 내렸다. 오후의 햇살이 공간을 가득 채우면,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경탄어린 시선으로 그 빛들을 감상하곤 했다. 덩달아 로비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빛은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조명을 언제나 능가했다.
중앙에는 이우환의 조각이 하나 있었다.
『관계항』 연작 중 하나였다. 거대한 돌과 철판이 조화를 이루었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만들어낸 극대의 울림이 이 작품의 묘미이기도 했다. 이따금 그 위에 거침없이 앉는 꼬마들이 있어 경비원들이 골머리를 앓곤 했지만, 최수현 이사장은 보고를 받고도 '낙서만 하지 않으면 그대로 둬라.'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는 그 조각 옆 벤치에 앉았다.
검은 가죽 벤치는 길고 낮아서, 관람객들이 잠시 쉬어가기에 좋았다. 나도 이따금 전시설명을 마치면 발을 쉬게 하려고 앉기도 했다.
2시 55분.
손에 든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전시 안내 자료. 베르메르 특별전 도록. 작품 설명들이 화면에 떠 있었지만, 하나도 읽히지 않았다.
무릎 위에 올린 손에 땀이 배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신제윤.'
이사장이 말한 그 이름.
내가 알던 십년 전 그 선배와 동일 인물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 아틀리에를 읽고 나를 찾아왔다면, 그럴 확률이 꽤 높았다. 베르메르 전시회에서 만나,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고 함께 전시를 봤던 그 사람.
'인사를 어떻게 건네면 좋을까?'
오랜만이란 말은 너무 상투적이었다. 십 년이 지났고, 그 사람은 함께 베르메르 전시회를 봤던 일을 아예 잊은 상태에서 나를 그저 호기심에 만나러 왔을지도 몰랐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휘익—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관람객일 수도 있었다. 너무 일찍 반응하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또각, 또각, 또각.
구두 소리. 가죽 밑창이 대리석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명확하고, 규칙적이고, 자신감 있는.
그리고 목소리.
"차현아."
망설임없이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십 년이란 시간이 한 순간에 증발해버렸다.
그는 로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단번에 나를 알아본 듯 했다. 키가 이전보다 더 커 보였다. 아마도 187cm 정도? 여전히 슬림한 체격이었지만 어깨는 더 넓어졌다. 맞춤 정장은 그의 탄탄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아주 까다로운 방문이 아님을 말해주듯, 그리고 자신이 협상에 있어서 확실한 우위에 있다는걸 보여주려는 듯 화이트 셔츠에는 타이를 매지 않았다. 왼손에 든 검은색 가죽 서류 가방에는 그 흔한 브랜드의 로고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오히려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가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턱선이 더 날카로워 진걸까? 어딘가 남성다움이 더 진해진 얼굴이었지만, 웃을 때 잔잔하게 휘어지는 눈꼬리는 여전했다. 그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닌 채, 내게 손을 뻗었다.
그가 이 거리까지 다가오는 동안에도 여태껏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악수하려다, 태블릿을 대리석 바닥 위에 떨어트릴 뻔 했다.
내민 손을 잡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으로 악수를 마친 나는 들키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최수현 이사장님께 들었습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화헌미술관에서 근무중인 권차현입니다."
이 정도면 아주 예의바른 인사였다. 그는 나를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 로비에 놓은 이우환 작가의 조각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한걸까? 하지만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내게로 다시 시선을 두었다.
"신제윤입니다. 그런데...우리 아는 사이 아닌가?" 그가 마치 다른 사람과 착각이라도 한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십년 전, 나랑 베르메르 전시회에서 만나지 않았나?"
"아." 나는 그제서야 이 사람이, 십년 전 그 사람과 같은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긴장이 한 겹 벗겨지자,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선배님."
선배님, 이란 단어에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도 내가 자신을 기억해 내자 안도한 기색이었다.
분명 로비에는 관람객들, 미술관 직원들이 있었는데--시선을 마주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웃는 그 순간엔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햇빛이 유리천장을 통과해 신제윤의 어깨를 비추자, 먼지같은 조각이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는게 보였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처럼.
"변한 게 없네." 그가 말했다. "여전히 그림 이야기를 하면 눈이 반짝여."
"저,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표정으로 다 보이는걸." 그는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겠다는 듯이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하고 있구나? 내가 뭘 갖고 왔는지."
속을 다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신제윤의 수장고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잘 감춘 줄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전시장으로 그와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그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걷는 중이었다. 따라오는 뒤편에서 그의 느긋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일한지는 얼마나 됐어?"
"올해로 3년째네요, 세어보니."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네?"
"하고싶었던 일을 잘 찾아낸 것 같아서."
하마터면 잘 가던 걸음을 멈출 뻔 했다. 고작 십년 전, 딱 한 번 만난 것인데도 그가 나를 이렇게나 잘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조명이 점점 어두워졌다. 천장의 간접조명이 낮게 깔리며, 공간이 좁아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어둠 끝에, 전시실 입구가 보였다.
검은 벽의 입구에 새겨진 글씨: Johannes Vermeer: Light and Shadow.
은색 레터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전시회의 제목 아래, 내가 이사장과 고심하여 지은 부제가 적혀 있었다. '17세기 델프트의 빛, 21세기 서울에서 다시 피어나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잠시 멈추어 섰다. 여기서 만큼은 결코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쉰 뒤, 안으로 그를 인도했다.
전시실 안은 조도가 낮았다. 복도보다 훨씬 어두운, 거의 밤에 가까운 어둠. 천장의 기존 조명은 꺼져 있었고, 오직 작품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곳곳에 조명을 배치한 결과였다. 그리고 벽과 천장은 검은색이 아니라 아주 깊은 네이비 블랙 컬러를 사용했다. 깊은 푸른색. 베르메르가 사랑했던 청금석의 색, 혹은 밤하늘의 빛깔. 그 벽 앞에 놓인 작품들은 마치 별처럼 빛났다.
바닥에 깔린 짙은 회색 카펫이 모든 소음을 흡수한 탓에, 복도에서 들렸던 그의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덩달아 관람객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들도 카펫에 스며들어, 이 공간 안에는 사람과 미술 작품 단 두 가지의 존재만이 남겨졌다.
베르메르의 전반적인 생애를 소개하는 글을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한 그림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평생에 걸쳐 단 37점의 작품만을 남겼습니다."
전시 설명을 시작하면 내 목소리는 평소의 톤보다 조금 더 낮아진다. 목을 아끼기 위함도 있고, 차분하고 잘 전달되는 음성이었다. 최수현 이사장도 이 목소리가, '단어 하나하나가 잘 들려서 좋다'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게 내 진짜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퇴근 후엔 숨겨둘 필요가 있는.
"현전하는 작품은 36점이고..." 한 걸음 더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거라 기대했던 신제윤의 눈동자는 황금빛을 머금은 채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는 진품을 포함하여 총 다섯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상설 큐레이션 시간이 아니었기에, 나의 등장에 지나가던 관람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윤은 자연스럽게 그 뒤로 밀려났지만, 나는 그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경우...베르메르는 이 순간을 포착해서 캔버스에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 풍경 속 빛을 그려냈습니다."
제윤은 팔짱을 낀 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림은 애초에 그의 시야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긴장으로 인해 온 몸의 근육이 바짝 당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깟 일로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허리를 더 곧게 세우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만의 시선을 통해, 빛이 우유 항아리에 닿는 순간과-여인의 팔에 드리우는 그림자,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벽에 반사되는 빛의 흔적들을 담아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한 폭의 그림인 것입니다. 베르메르의 또다른 이명을 혹시 알고 있을까요?"
나는 어느샌가 제윤만을 위한 특별한 큐레이션이 아닌, 모여든 관람객을 위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네, 맞아요. 그는 빛의 화가, 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는 모든 것들은 다 오묘한 빛의 반짝임을 가지고 있어요.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이런 단순한 색깔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피사체에 닿을 때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신만의 화풍으로 표현해낸 화가인 셈이죠."
설명을 마치자, 사람들은 다음 그림을 보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신제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십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그가 미소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나를 향한 미소였고 그 미소 안쪽 어딘가 만족감이 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억하세요?"
"전부 다."
하지만 십년 전, 우리는 단 한 번 같은 지점에서 스치듯 만났을 뿐이었다. 나는 그가 내가 내뱉은 모든 말을 단어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세계에서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할테니까.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그를 이끌고 다음 작품으로 향했다. 카펫 위를 걷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렸다. 이상했다. 평소엔 지나가는 사람들의 숨소리는 의식조차 하지 않는 영역이었는데.
"저기, 선배님."
"응?" 이제 볼 그림은 그와 아주 관련이 깊은 작품이었다. 더불어, 내 인생을 바꿔 준 그림이기도 했다.
"소중한 그림을 빌려주셔서 감사하단 말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의 숨이 아주 잠시, 일순간 멎었다. 나는 말실수라도 했는가 싶어, 그 그림이 있는 특별한 공간에 들어가기 직전 걸음을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대신 신제윤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말했다. 어쩐지 그 눈동자 너머의 열기를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그림이거든. 소중하게 다뤄준다는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이야."
그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림이 같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작품들은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제윤이 대여해 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전시실 내에서도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벽에 별빛이 흐르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특별한 조명을 아주 소량 사용했을 뿐, 복도에는 엄숙함마저 내재되어 있었다. 특별히 의도한 공간의 흐름이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만나러 가기 전 암흑에 잠겨 있다가, 그녀를 만나는 순간--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느꼈던 숨이 확 트이며 사로잡히는 매혹의 순간을 재현하고 싶었다. 덕분에 이 공간을 만드는데 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관람객들의 평은 좋은 편이었다. 이 그림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전시에 올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최수현 이사장이 전해주었을 때의 즐거움은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그림의 존재감이 흐릿하게 보일 무렵, 나는 신제윤을 인도해 작품 앞에 설 수 있도록 잡아 끌었다. 그림을 보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운 조명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옆얼굴에서 경탄하는 감정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그림 속 그녀의 모습은 몇백년 전에도, 우리가 처음 만난 십년 전에도 매혹적이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터번의 푸른 색," 몇 분이 지났을까.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청금석 외에 어떤 재료를 섞었는지 여전히 논란이예요. 색이 바란 탓에."
"네 이론도 기억해. 일부러 불순물을 섞어 빛이 바래길 바랐다고 했었지."
나의 모든 단어를 기억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나는 푸른 터번에 얽은 나의 상상을 신제윤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베르메르가 일부러 저 소녀의 터번에 쓴 색을 바래도록 만들었을거라고 했지. 그의 사랑이었던 여인이라면, 그래야 놓아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거라고."
"네."
신제윤이 그림 속 소녀를 바라보다,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거기에 어떤 말을 덧붙였는지 기억해?"
그가 내 단어들을 기억하고 있는 만큼, 나도 그의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베르메르는 그 청색이 영원하길 바라며 터번을 칠할 때 청금석을 썼을거라고 하셨죠."
"이유는?"
"그래야......"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스칠지도 모르는 거리. "이 소녀가 영원히 남을테니까요. 몇백년이 지나도 지금 우리가 그녀 앞에서 과거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진주 귀고리 소녀를 만난 뒤 우리가 여러 작품을 거쳐 마지막으로 마주한 그림은, 『음악 수업』이었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커다란 것으로, 다른 작품들보다 두 배는 더 컸다.
실내 공간에 버지널(건반 악기)가 놓여있었고, 그 악기 앞에 여인이 서 있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남자와, 벽에 걸린 거울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선이 또렷하기 보다는 번지는 느낌이 났는데, 그래서 더욱 몽환적이고 눈부신 느낌을 주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 역시 날카로운 선으로 이분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림 뒤편 벽에 걸린 작은 거울에는...희미하게 반사된 이미지가 보입니다." 다시 큐레이터 모드로 들어가서 그림의 요소를 하나 짚어냈다.
"무엇이 비추는 것 같으세요?"
"여인의 얼굴인가...?"
"정확히는..."
"거울을 통해서 여인이 남자를 보고 있는 구도."
관람객을 등지고 있는 여인은 거울을 자세히 보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는 곳은, 버지널 옆에 선 남자였다.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단순히 음악 감상을 위해 찾아온 신사였을까, 아니면 그녀에게 음악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 대가였을까? 베르메르는 작품에 대한 일화를 남기지 않음으로서 그 관계를 관람객의 상상으로 채우게 해 주었다.
"하지만 거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구도가 하나 더 있어."
아마도 그를 바라보던 내 얼굴엔 호기심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거울은 빛을 반사하지. 그리고 각도에 따라 옆을 볼 수도, 뒤편을 볼 수도 있어. 이 여인은 우리를 등진 채 그려졌지만, 거울을 통해 우리를 볼 수도 있어. 보이는 자와, 보는 자의 관계성이 캔버스를 넘어서도 성립할 수 있다고 봐."
영화에서 쓰이는 기법 중, 제3의 시선이란 것이 있다.
스크린 속 등장인물이 렌즈를 보는 순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영화 속 인물과 직접 시선을 마주하고 그들과 교감하게 된다. 사실 나는 영화 속의 그러한 순간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영화 제작자나 감독의 사상을 관객에게 억지로 욱여넣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은 달랐다.
나는 항상 그림 속에 뛰어들고 싶어 했다. 화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시선과 빛으로 인물과 사물들을 물감이란 재료를 통해 캔버스에 펼쳐냈는지 알고 싶었으므로. 그래서 베르메르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카메라 옵스큐라를 직접 구해 피사체들을 들여다 본 적도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시절의 일이었는데, 동료 연구원들이 그 집착에 가까운 행동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출구로 나가기 직전, 아직 어두운 공간의 빈틈에서 그가 걸음을 멈추어 섰다.
"기대했던 대로야."
"칭찬 감사합니다."
"디 아틀리에에 네 칼럼이 실려서 솔직히 반가웠어." 『디 아틀리에(The Atelier)』는 전 세계의 컬렉터들이 구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국제 미술 전문지였다. 내 개인 자격이라면 칼럼을 기고하는 것 조차 어려웠겠지만, 최수현 이사장의 제안으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실린 한 장짜리 글이, 그와 나를 다시 연결해주었다.
"처음엔 내가 수집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 이야기라 눈길이 갔는데, 마지막에 네 이름이 적힌 걸 보고 이건 운명이다 싶었지."
그가 '운명'이란 단어를 쉽게 내뱉을 만큼 가벼운 인물은 아니라는 인상을 이미 받은 터라, 단어 선택에 조금 놀랐다.
"잘 쓴 글도 아니고...학회지에 게재했던 논문을 읽기 쉽게 다시 썼을 뿐이예요."
"하지만 그 글을 읽은 덕에 한국으로 와서 널 다시 만났어. 나는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가 다시 한번 내게 다가왔다. 허리를 숙인 그에게서는 연한 샌달우드 향이 났다. 차갑고, 절제되고, 완벽하게 통제된. 아까는 그림들에 압도되어 느끼지 못했던 후각이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너 때문에 일정을 조정해서 여기 온거야. 널 보려고."
전시실을 빠져나오자, 어둠에서 빛으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출구에 최수현 이사장이 서 있었다. 언제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또 그 신선같은 미소를 입가에 지닌 채.
신제윤이 먼저 그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이사장님, 오늘 멋진 전시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 관람이 꽤 만족스러우셨나보군요. 우리 미술관에서 베르메르를 비롯해 빛을 다루는데는 가장 재능있는 큐레이터랑 동행하셨으니." 신제윤이 건넨 담백한 칭찬의 말에, 이사장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돌아온 이사장실에는 여전히 희미한 백단향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되어 있는 백자 찻잔은 세 개였다. 그는 이번엔 보이차가 아닌, 찻잔에 어울리는 백차를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이사장이 먼저 운을 뗐다.
"오늘 관람은 어땠는지 궁금하군요."
"완벽했습니다. 사실 그림을 대여해 드리면서도 의문이 남아있었거든요. 저 그림을 어떻게 다룰지, 어떻게 관람객에게 다가가게 만들었을지. 모든게...최고였습니다."
사실 전시가 아니라 나에 대한 칭찬이나 다름아니었다. 저절로 귀 끝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도 좋을 것 같군요. 나와는 이미 협의가 된 상태지만, 당사자의 의사도 들어야 하니까."
제윤이 고개를 끄덕이곤, 들고 온 서류가방에서 흰색 종이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두툼한 분량의 종이가 들어있는 듯 했다. 그의 희미하게 따스했던 낯이, 차가운 경영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차현 씨, 지금부터 하는 제안은 제가 개인적으로..." 그가 수현을 흘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또한 재단 이사장님의 허락을 받아 드리는 제안입니다."
그러자 내 앞에 봉투 속 종이뭉치가 놓였다. 제목은, 『큐레이터 업무 위탁 계약서』였다.
"제가 개인적으로 모아 온 작품들의 정리를 맡아 줄 큐레이터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내게 한다는 말은, 그 업무를 내게 맡겨보고 싶다는 의미였다. 처음 듣는 형태의 계약으로 인한 두려움보다는, 내가 오히려 기대했던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의 수장고에는 내가 그토록 찾던 두 화가의 진품이 보관되어 있지 않던가.
"소속 변경이 염려되었는데, 그 부분은...이사장님께서 '파견'이란 형태로 이해를 해 주셨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셔도 화헌미술관과의 계약은 해지되는게 아닙니다."
나는 손을 뻗어 계약서의 표지를 살짝 넘겼다. 계약서 상 갑에 해당하는 신제윤의 인적사항이 먼저 기재되어 있었고, 내가 작성하지 않은 을구가 공란으로 남겨져 있었다. 이토록 두꺼운 계약서류는 미술품을 대여할 때 숱하게 접했지만, 큐레이션 계약을 별도로 체결하는 것은 처음이라 모든 문장이 낯설었다. 대신 다행인 점은, 서류의 첫 페이지부터 몇 장은 구체적인 내용의 요약본이라는 점이었다.
"내일 오후 출국해야 해서, 결정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해 주면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이사장님께 들었는데--."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두 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몇 해 전, 옥션에서 낙찰된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회화작품 두 점이 낯선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반 데어 헬스트와 크라머의 모든 작품을 만나러 다녔고, 그 그림들이 촬영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내가 본 적 없는 장소였다. 틀림없이 신제윤의 수장고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이 그림들, 실물로 보고싶어 했던 것 맞죠? 이 계약서에 서명한다면...이것들 외에도, 당신이 보고싶어 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을거예요. 그 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비롯해, 헬스트의 『독서하는 여인과 촛불』, 크라머의 『The Collector』를 직접 소장하고 있다면 그가 감춰 둔 작품들은 당연히 더 많을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최수현 이사장이 소유하고 있는 화헌 콜렉션에도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즉, 행방이 묘연한) 작품들이 얼마나 많이 보관되어 있던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계약 내용을 살펴볼 여유도 없이 계약서의 서명란을 찾아냈다.
"급한 전화로군. 통화 하고 들어오겠네." 최수현 이사장이 핸드폰을 든 채 자리를 비웠고, 나는 블레이저의 포켓에 꽂아두었을 서명용 만년필을 찾았다. 하지만 물건은 꼭 찾을 때 제자리에 없다고, 아무리 몸을 더듬고 주머니를 찾아봐도 펜 하나를 찾을 수 없었다. 자주 엉뚱한 곳을 굴러다니는 모나미 펜 하나조차 손에 들어오지 않자 조바심이 났다. 그때, 신제윤이 서류가방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 펜을 쥔 순간, 시간이 멈췄다.
너무나도 익숙한 무게감이었다. 손에 쥐고 우선 인적사항을 작성하려고 자세를 잡은 순간, 손가락들이 자동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 중지가 받치는 각도. 1년동안 잊어가던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펠리칸 수베렌 M800. 한 눈에 반해 구입을 결정하자 마자, '여성이 다루기엔 조금 무거울텐데요,'라고 염려하던 판매원의 멋쩍은 웃음이 따라왔었다. 녹색 줄무니 바디를 마무리짓는 금장 트림, 클립 끝의 펠리칸 로고에는 희미한 스크래치가 남아있었다. 내가 1년 전 암스테르담의 컨퍼런스에 갔다가, 실수로 떨어트려 생겨버린 그 자국과 정확히 같은 위치.
설마, 그저 우연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종이 위에 마무리를 위해 서명을 하는 순간, 운 몸에 전율이 흘렀다.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이 감촉과, 펜을 쥔 각도에서 오는 저항감은...분명 내 펜이었다. 화헌 미술관에 취업이 결정된 날, 앞으로는 이 펜으로만 서명을 하겠다며 큰맘 먹고 구입한 만년필이었고 2년간 길이 들어 내 손에 꼭 맞아가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펜을, 1년 전 컨퍼런스를 위해 투숙하던 호텔의 카페에서 잃어버렸다. 소중한 물건을 분실한 것이라 한참이나 아쉬움을 놓지 못해, 출장 때마다 찾아서 누군가 맡겨놓지는 않았는지 카페 사장에게 묻곤 했다.
하지만 신제윤이 굳이 내가 잃어버린 만년필을 우연히 주워 갖고 있을거란 생각은...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1년 전 내가 잡지에 기고한 칼럼을 읽고 내 위치를 알았을 뿐 그 전엔 내가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 방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과민 반응인거겠지. 이 펜도 우연의 일치일게 분명했다.
나는 서명을 마치고 그에게 만년필을 넘겨주었다.
한순간 망설였다. 만약 이 만년필이 내가 정말 암스테르담에서 분실한 그것이라면? 하지만 의혹만으로 말을 꺼내는건 예의가 아니었다.
넘겨받은 펜을 쥔 제윤이 능숙하게 계약서의 갑구에 서명했다. 그렇게 두 부의 계약서가 푸른 잉크로 완성되자, 제윤이 내 몫의 서류를 건네주고 펜과 남은 하나의 계약서를 자신의 서류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일하러 오면 돼. 주소는 계약서에 적혀있고, 초인종을 누르면 비서가 나와서 안내해줄거야. 오늘 저녁 집에 가서 계약사항 꼼꼼하게 다시 읽어봐. 빼먹은 일이 있으면 안되니까."
빼먹은 일? 꼼꼼하게 읽어보라고? 아차!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기도 전에, 최수현 이사장이 돌아왔다. 그는 내 손에 들려있는 계약서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벌써 끝난건가? 내 서명은 필요 없고?"
"아, 그러고보니. 제가 조금 성급했군요. 이사장님의 서명은 이 쪽에 부탁드립니다." 제윤이 내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능숙하게 빼 가더니 최수현에게 전달했고,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펜접시에서 펜을 하나 집어들더니 증인 란에 서명해 주었다.
"그럼 차현 씨, 아무리 신 사장의 수장고가 재미있어도 우리 미술관 소속이라는 건 잊지 말고...가끔 차 마시러 오면 좋겠어."
"신경써주셔서...감사합니다, 이사장님." 그리고 나는 보기좋게 이사장실에서 쫓겨났다. 신제윤에게 뭔가 따질 것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사장과 신제윤은 둘이 따로 할 이야기가 더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신제윤이 나올 때까지 이사장실 앞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는 것은 해선 안될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계약서의 첫 부분부터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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