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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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HG1

alicekim245 2025. 10. 10. 15:36

복도는 고요했다.
화헌미술관 본관 3층, 이사장실로 향하는 복도는 다른 층과 달랐다. 일반 관람객의 동선과 완전히 분리된 이곳은 마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공간.
복도 양쪽 벽면에는 화헌 최호 선생의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사군자가 아닌, 산수화.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된 깊은 산과 안개, 그 사이로 보이는 작은 정자 하나. 매번 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나는 그 정자에 누가 앉아 있을지 상상하곤 했다. 아마도 화헌 선생 본인이었을 것이다. 혹은... 지금의 이사장.
'理事長室'
원목 문에 붙은 황동 문패. 한자로 새겨진 글씨는 화헌 선생의 친필이라고 들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두 번 노크했다.
"들어와."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차분하지만 권위 있는 음성.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황동의 감촉이 느껴졌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빛이었다.
통창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 한강이 저 멀리 은빛 리본처럼 흐르고, 서울의 빌딩들이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다. 화헌미술관은 서울 한복판, 그러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이 도시를 굽어보듯. 침엽수와 활엽수가 미술관을 에워싸고 있어, 도심 속 요새 같은 이곳은 화헌 선생이 평생 모은 예술품들을 지키는 금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 이사장이 서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차를 우리고 있었다.
백발. 50대 치고는 조금 이르게 찾아온 흰 머리칼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머리는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네이비 수트, 화이트 셔츠, 타이 없이 느슨하게 풀어헤친 셔츠 깃. 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차분했지만,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이 있었다.
화헌 최호 선생의 손자. 그 타이틀이 아니어도 그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조부로부터 방대한 컬렉션과 함께 그 '눈'을 물려받은 사람. 화헌 선생은 스스로도 수묵화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예술 작품을 보는 데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자손 중에서 오직 최수현만이 그 안목을 물려받았다고, 미술계는 평가했다.
나는 이 사람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그의 앞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앉아."
이사장이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실내로 들어섰다.
공간이 넓었다. 천장이 3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압도적이기보다는 여유로운 느낌. 숨 쉴 공간이 충분한, 사색하기 좋은 높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향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원목 책장. 어두운 월넛 색상의 나무는 세월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책들이 빼곡했다. 미술사 관련 도록, 경매 카탈로그, 고서들. 중간중간 비워진 선반에는 청자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고려청자 한 점, 조선백자 작은 항아리. 책과 도자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묘하게 조화로웠다.
책장 위쪽에는 은은한 간접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책등의 금박 글씨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나는 무의식중에 제목들을 읽고 있었다. 『The Art of Vermeer』, 『고려청자 연구』, 『Sotheby's Catalogue 2019』...
책등에서 시선을 돌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통창이 눈에 들어왔다.
창틀 없는 유리창이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남산타워가 저 멀리 보였고, 한강은 S자로 굽이쳐 흘렀다.
창가에는 앤티크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짙은 브라운 가죽 소파, 그 사이 낮은 티 테이블. 테이블 위에는 백자 다기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가 눈에 띄었다.
이사장의 책상 뒤편은 화이트 톤의 벽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정중앙에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중섭의 소품. 『소』.
진품이었다. 거친 붓질로 그려진 소의 형상. 힘차면서도 슬픈, 이중섭 특유의 감정이 담긴 그 선들. 입사 첫날 이 그림을 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났다.
심호흡을 깊게 하자, 차갑지만 불편하지 않은, 맑고 깨끗한 공기가 폐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 백단향일까? 아니면 침향? 향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공간 전체에 그 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고요함.
창문은 완벽한 방음이었다. 3층 아래 전시장의 소란함, 관람객들의 발소리, 도심의 소음. 그 모든 것이 이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아니 세상을 내려다보는 곳.
가습기에서 나오는 미세한 수증기가 창가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보이차야. 10년 묵은 거라 떫지 않을 거야."
이사장이 늘 그러하듯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처음엔 어색했다. 제가 따르겠다고 손을 뻗었다가, "앉아서 기다려"라는 말에 얼어붙었던 그날이 기억났다. 3년 전, 입사 면접 날. 그때도 이 자리, 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사장은 똑같이 차를 우려주며 물었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었다. 워낙 긴장한 상태라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된 작품이라고 했었다. 그 때, 나는 이사장 앞에서 한 가지 사실은 감추었다. 나는 그 그림 때문만이 아니라, 그 그림에 얽은 내 과거 때문에 큐레이터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 나의 대답을 듣던 그는 한참을 나를 보다가, 입술을 뗐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합격이야."

지금, 같은 자리에서, 이사장은 또다시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입사 면접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이게 황송할 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이를테면, 그는 대접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 찾아오면 물 한 잔을 내어줄 뿐이었고 그것은 분명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무슨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묻는 의례적인 과정조차 생략된.
백자 찻잔에 담긴 차는 짙은 호박색이었다.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따뜻한 열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향 먼저 맡아봐."
잔을 코에 가까이 대자, 깊은 흙내음과 나무 향이 올라왔다. 그 속에 묘한 단맛. 10년 묵은 보이차는 이런 맛이구나. 한 모금 마셨다. 떫지 않았다.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며, 입안에 은은한 단맛을 남겼다.
"어때?"
"...좋습니다."
이사장이 미소 지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신기했다. 평소에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인데, 웃으실 때면 마치 신선 같은 분위기가 났다. 속세를 떠난 듯한, 초월한 듯한. 그런데 이 분위기 때문인지, 나는 그에게서 늘 안도감을 느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믿을 만한 어른을 만난 건 이사장이 처음이었다.

차를 마시며 고요한 시간을 보내던 와중, 이사장이 창밖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저 아래 어딘가에 네가 찾던 그림들이 있어."
나는 따라 창밖을 봤다. 서울 시내. 수많은 건물들.
"어디에요?"
"곧 알게 될 거야."
다시 나를 보는 이사장의 눈빛 속에, 기대와 걱정 그리고 확신이 섞여 있었다.
"오늘 네가 할 선택이, 네 인생을 바꿀 수도 있어."

차를 마시다 문득 시선이 닿은 이사장의 책상은 여전히 간결했다.
큰 원목 책상 위에는 몇 가지만 놓여 있었다. 맥북 한 대, 만년필 한 자루, 문진으로 쓰이는 듯한 작은 옥석 하나, 그리고 가죽 메모장. 저 만년필에 대해서는, 조부가 물려준 아주 오래되고 귀한 필기구라는 것만 알았다.
책상 옆 작은 캐비닛 위에는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흑백 사진. 한복을 입은 노인과 어린 소년. 화헌 선생과 어린 시절의 이사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하지만 눈빛만은 또렷한. 저 조손관계는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상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저 분위기라면 늘 예술작품에 대한 논평이 수도 없이 오갔을 것만 같았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약간 떨렸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했다.
이사장이 나를 부를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작은 일로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3년 전 입사 이후, 이 방에 들어온 건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첫 번째: 입사 면접
두 번째: 첫 기획전 성공 후 격려
세 번째: 박사 학위 취득 축하
네 번째: 『The Atelier』 칼럼 기고 제안
매번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요즘 어때?"
이사장이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난다던 사람...아, 심대용이라 했던가. 그 사람이랑은?"
손이 멈칫했다. 역시 아는구나. 화헌미술관 내부에서는 비밀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사장에게는 비밀이 통하지 않았다.
"...헤어졌습니다."
"그랬구나."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위로도, 추궁도.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
"그럼 타이밍이 좋네."
"...네?"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1년 전에 네가 『디 아틀리에(The Atelier)』에 기고한 칼럼 있잖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레아 크라머와 요하네스 판 데어 헬스트. 그 글 읽고 우리 쪽에 관심을 표한 사람이 있어."
손에 든 찻잔이 살짝 흔들렸다.
"어떤 분이요?"
"정확히 말하면, 네가 찾던 판 데어 헬스트의 『독서하는 여인과 촛불』, 레아 크라머의 『The Collector』의 소장자야. 경매에서 늘 익명으로 낙찰을 받아가는데다, 바로 작품을 숨겨버리니 나로서도 찾기 어려운 상대였어."
나는 입사 전 최수현 이사장의 후원을 받아 두 번째로 유학을 떠난 네덜란드에서 박사를 취득할 때, 레아 크라머와 요하네스 판 데어 헬스트, 30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화두를 다룬 두 작가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었다. 하지만 저 유독 두 점의 그림은 실물로 볼 수가 없었기에 디 아틀리에의 기고문에는 그에 대한 아쉬움을 한 줄 집어 넣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최수현 이사장의 인맥으로도 찾는데 한참 걸릴 정도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데 익숙한 거부일까? 호기심이 가슴 속에서 샘솟았다.
"해외에 주로 있어서 약속을 잡는게 힘들었지만...혹시, 신제윤이란 이름을 알고 있어? 너와 같은 학교 출신이던데, 학번도 비슷하고. 그 쪽도 왠지 아는 듯한 눈치여서." 이사장이 안경을 벗어 눈두덩을 살짝 눌렀다.
신제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약학 전공이었고, 동아리가 같았을 뿐이고, 어쩌다 한 번 베르메르 작품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전부였다. 십년도 더 된 과거의 인물이 갑자기 내 현재에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이라니요?"
"직접 널 만나고 싶어 해서 미술관에 오라고 했어. 일단은 근무시간이니까. 아마도 일종의 시험이 될거야. 오후 3시에 미술관 로비에 도착할거고, 네게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신 사장을 설득한다면, 두 작품의 진품을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오후 2시 45분. 그의 도착까지는 15분이 남았다.
"차현 씨." 이사장이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아직 반절이 남았지만, 내려가서 손님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신 사장은 돈, 인맥...그런 목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보고 쳐 내는 사람이야.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형 호텔 체인을 인수하고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기도 하고."
아니, 그러니까 분명 약학 전공이었는데 어떻게 호텔 체인의 사장이 되어 있는거지? 의문을 해소하기엔 아직 때가 이른 것 같았다. 나는 이사장의 조언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차현 씨와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차현 씨의 글을 읽고 만나고 싶다 먼저 연락해 온 사람이야. 진심을 다하면 알아줄거야."
"그럼......어떤 전시를 안내해 드리면 좋을까요?" 이사장이 아주 명료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베르메르 특별전.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잖아? 그리고 내가 막판에 손을 써 주긴 했지만..." 나는 전시의 중심이 된 그림 한 점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아주 까다로운 소장자였는데, 최수현 이사장이 직접 연락해서 대여 허가를 받아낸.
"그 문제의 그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신 사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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