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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HG5 본문
본업으로 돌아오니, 방금 전 두 그림 앞에서 거의 쓰러질 뻔 했던 기억은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신제윤이 소장 중인 작품들은 모두 입수 순서대로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 준비되어 있던 USB를 노트북에 꽂자 간단히 정리되어 있는 작품목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경매에서 입찰받은 뒤 대략적인 정보만 기록용으로 정리해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소품들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1번부터 초기 수집 작품들은 거의 전부가 소형작품용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다. 몇 점의 상태를 일단 확인할 생각으로, 태블릿에 데이터를 옮긴 뒤 문을 열고 보관실에 들어갔다. 나무 향기가 압도적인 이 공간은 마치 약재상의 창고를 연상하게 했다. 각 서랍마다 다른 처방과 약재가 담긴--어떤 것은 감초처럼 달콤하고, 어떤 것은 고삼처럼 쓰고, 또 다른 것은...투구꽃처럼 독이 될 수도 있는.
눈 앞에 펼쳐진 수십개의 나무 서랍장이 너무나도 웅장해서,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하고 싶어졌지만 겨우 참아냈다.
손끝으로 나뭇결을 매만지자, 오동나무를 쓰고 못을 최소로 사용하기 위해 짜맞추는 방식으로 만든 고급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동나무는 습기와 병충해에 강해, 귀중한 서적이나 작품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인 목재였다. 가격이 상당히 비싼 이런 나무를 몇백그루쯤 베어내어야 이런 전시공간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내 클라이언트의 재력에 감탄하기 보다는, 이런 서랍장을 수십개는 만들어 작품을 보관하는 '마음'에 더 신경이 쓰였다.
솔직히 말하면, 신제윤이 십 년 사이에 그저 많은 재산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거나,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미술작품을 수집하는 사람으로 변한건 아닐까 추측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여기서 찾아낸 그의 수집품들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돈보다는 미술품 자체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사람이 아니라면, 숲이라 해도 좋을 분량의 목재를 이 공간에 전부 때려박지 않았을 터였다.
1번이란 금속 명패가 붙은 널찍한 서랍을 찾아내 열자, 그림 한 점을 볼 수 있었다. 신제윤이 처음으로 경매에서 구입한 작품으로--베르메르 화풍의 초상화였는데, 그림 속 여인은 편지를 읽고 있었고 푸른색 비단으로 만든 담비 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편지를 읽는 여인의 표정은 차분하리만치 고요했다. 무슨 내용일까? 사랑 고백인가, 이별 통보인가. 베르메르는 자신의 그림에서 답을 내어주지 않았고, 그건 그를 닮으려고 한 이 무명의 화가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경매 내역을 확인하자, 작가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 20세기에 그려진 유화라는 정보만 있었다.
나는 액자의 제작 연도와 물감의 상태, 혹여나 그림이나 액자에 남겨져 있을 화가의 정보를 찾기 위해 미리 갖고 들어온 파란색 니트릴 장갑을 착용했다. 면 장갑보다 얇아 작품의 촉감을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액자의 뒷면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화가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액자 뒷면의 캔버스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가 느껴졌다. 아직 이완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캔버스의 직조방식은...특이하게도 18세기 네덜란드식 평직. 20세기의 화가가 18세기의 캔버스를 사용했다는건 드문 일이었다. 확대경이나 다른 장비를 들고 들어오지 않아 구체적으로 확단은 할 수 없겠지만 덧칠 흔적도 바니시 처리도 보이지 않았고, 화가의 서명이나 메모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수집가에게 '1번'은 특별하다. 신제윤은 이 그림의 어디에 마음을 빼앗겼을까? 비싼 값에 되팔 수 없는게 분명한 이 그림을 보고, 어떤 확신을 가졌던 것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화가보다도 이 그림을 구입하기로 결심한 소장자의 심리가 더욱 궁금해졌다.
한 점, 또 한 점. 서랍을 여닫는 동안 허리를 숙여야 해서 팔이 저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서랍장은 특이하게 작품의 크기에 맞추어 그 깊이를 달리했는데, 서랍 바닥에는 무산 보존지가 깔려 있었고 작품과 서랍이 직접 닫히지 않도록 부직포로 쿠션처리가 되어 있었다. 서랍을 열 때마다 미세한 기압 변화가 느껴졌는데, 유압 댐퍼 방식을 채택한 까닭이었다. 처음 들어섰을 때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오동나무 특유의 은은한 향과 함께, 아주 희미한 장뇌(樟腦)냄새가 났다. 병충해는 화학적인 방식으로만 막을 수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1번 작품의 탐색을 마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때마다 서랍은 '착'소리를 내며 완벽하게 닫히고 열리길 반복했고, 나는 그 소리마저 신제윤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시계를 벗어두고 들어온 탓에 시간감각을 상실한게 분명했다.
서랍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보관실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바뀌었다. 배에서 대지를 울릴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서 민망함이 든 것도 잠시, 나는 '한 점만 더. 딱 하나만 더.'그리 생각하며 서랍장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어?"
벼락같은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지는 바람에 바보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느라 하마터면 막 열던 서랍에 다리를 부딪힐 뻔 했다. 신제윤이었다.
"아, 미안." 너무 놀란 탓에 손을 떨고 있던 모양이라,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문 여는 소리가 꽤 크니까, 들었을 줄 알았어."
"바, 방금 들어오신거예요? 정말 몰랐어요..."
"응, 그런 것 같더라. 놀라는거 보니까 몰랐던게 분명하지. 지금 몇 시인줄 알아?" 그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놀리듯 말했다. "오후 세 시야. 비서가 안내해 준 이후로 식사도 거르고 몇 시간째 소품실에 있었어, 너."
"아. 벌써 시간이..." 나는 그의 동작을 따라하며, 시계가 없음을 알려주었다. "전혀 몰랐어요, 그림 보느라."
"비서가 식사는 여기서 해결 가능하다고 알려주지 않았나. 끼니를 거르면 곤란한데, 체력적인 문제도 있고...휴식시간 보장 정도는 하게 해 주지 그래?"
"그보다, 선배님." 선배, 라는 말에 또다시 그가 눈썹 한 쪽을 치켜올렸다. 아니, 그럼 호칭을 뭘로 해야하나. 사장님? "오늘 출장 있으시다면서요.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 안그래도 그것 때문에 들른거야.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일하는 첫 날인데, 널 안보고 가면 서운해 할 것 같아서. 오늘 나가면 이틀 뒤에 돌아올거라서."
서운, 이란 말이 갑자기 가슴에 확 꽂혔다. 내가 왜 서운해 해야 하는거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내가 이 저택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신제윤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희우도 있긴 하지만, 그나마 얼굴을 몇 번 더 본 건 그래도 제윤 쪽이니까.
"궁금한게 있어요."
그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1번이란 명찰이 붙은 서랍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작품은 어떻게 구입하시게 된건가요?"
"그건 왜 궁금해?"
"선배님이 처음으로 구입한 작품이잖아요?" 그가 저벅저벅 걸어와, 내가 아까 탐색을 마친 1번 서랍을 다시 열고는 그 안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모든 수집가에게 첫 번째 작품이란 특별하니까요. 이 그림의 어떤 모습이, 선배님의 마음을 움직인건지 궁금해서요."
다시 되팔아버릴 목적의 수집이라면 이런 질문은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수집한 작품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모습을 이제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첫 경매때부터 지금까지 수집한 모든 목록에 일련번호를 붙이지 않았을거고, 작품에 맞추어 서랍의 깊이와 폭을 맞춤제작하지 않았을테니까. 그는 그림을 바라보다 내게 천천히 시선을 옮긴 뒤, 입을 뗐다.
"십여년 전, 너와 베르메르 그림 앞에서 청금석 이야기를 했잖아, 기억하지? 나는 그 이후로 푸른색을 좋아해. 이 화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푸른색을 다른 재료로도 낼 수 있는데도 청금석을 갈아 색을 만드는걸 고집했어. 낙찰 받자마자 따로 성분조사를 해서 알아. 그림 속 모든 재료들은 공장제 유화물감이지만, 이 푸른색 만큼은...청금석을 직접 갈아서 만들었지. 그래서 표면이 아주 거칠어, 직접 재료를 갈아 반죽한 물감이니까."
서랍이 다시 매끄럽게 닫히며, 착 소리를 냈다. 신제윤이 내게 다가와 가볍게 손목을 쥐려다, 도중에 멈추었다.
"그 고집이 마음에 들었어. 어쩌면 화가도 푸른색, 특히 청금석이 낼 수 있는 푸른색에 매료되었을지 모른단 생각에 구입하게 된거야. 그림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그 색깔 안에 고집이나...집념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원래 푸른색을 좋아하셨던 건 아니구요?"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수집가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는 큐레이터가 관여할 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쉽게 답을 내어주었다.
"아까 말했잖아. 너와 만난 이후로 청금석이 내는 저 짙은 푸른색을 좋아하게 됐다고. 그래서 초기에 수집한 작품들은 대부분 청금석 안료를 사용한 것들이고. 나중에 분석기기 들여와서 직접 확인해봐도 좋아."
순간 너와 만난 이후로란 단어에 홀려 듣지 못할 뻔 했지만, 분석기기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여기 입고 온 옷은 일하러 오는 복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격식을 갖춘 원피스여서 민망했다.
"앞치마는 제 걸로 가져올게요, 내일부터는."
"그 정도는 내가 준비해 줄 수 있어. 아까 비서한테 전달 받았지? 필요한게 있으면 빠짐없이 요청해. 바로 구해 줄테니까. 그리고 만약 옷이 신경쓰인다면--." 그는 아까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는 듯, 내 귀걸이와 원피스를 훑어보다 시선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했다. "1층에 게스트룸이 있으니까, 거기서 갈아입어도 돼. 그럼, 난 출발시간이라 가 볼게. 식사 꼭 챙겨. 식당에 핫 샌드위치 준비해 두라고 지시했으니까 퇴근 전에 가져가던가 이따가 올라가서 꼭 먹어."
신제윤이 떠난 후, 수장고는 아까의 고요를 되찾았지만 흐르는 공기가 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미술관 사람들 외에 이렇게 미술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 다른 상대가 있었나? 크리스티안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긴 했지만 이제는 향수에 더 깊게 몰두해서 최근에는 그림을 두고 길게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고, 전 애인은...내가 미술작품 이야기만 꺼내면 화를 내거나, 작품의 값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가면 미술품 경매 내역을 스마트폰으로 보거나, 유망한 신진 작가들의 개인 SNS를 찾아보며 침묵한 채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데...나만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난 뒤,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내게 호의적인 사람과.
호의? 방금 그게 호의가 맞긴 한걸까? 그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게 아닌가? 생각이 복잡해지려던 찰나,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렸다.
필요한 물품 목록을 적고 있던 메모패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휴대전화로 손을 뻗었다. 신제윤의 문자였다.
-이틀 뒤 저녁에 들어오니까, 그 사이에 편하게 작업하고 있어. 상의할게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식사 꼭 챙겨.
식사. 내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제때 끼니를 챙기는 일이었다. 큐레이터 일을 위해 화헌미술관의 수장고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당연했고, 퇴근하고 나서는...심대용은 야근이 잦았으니까. 음식 냄새가 집안에 풍기기만 해도 난리였던 지난 밤들. 심지어 이웃집의 음식 냄새에도 그런 반응이었다. 자연스레 일어날 때부터 잠들 때까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일이 몇 년간 없었다. 그나마 대용의 기분이 좋을 때, 집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가끔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식사를 챙겨라'라는 말을, 정말 오래간만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계를 다시 손목에 착용하고, 퇴근을 위해 1층으로 올라오니 복도에서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났다. 갓 구운 빵의 향긋한 냄새가 나를 저절로 식당으로 이끌었다. 아까와 같은 삭막한 느낌은 여전했지만, 식탁 위에 놓여진 종이봉투 안에 샌드위치와 디너롤이 들어 있었다. 버터를 듬뿍 써서 그런지 고소하고 좋은 향이 포장지 바깥으로도 풍겨나왔다. 그리고 봉투의 손잡이에 작은 하늘색 카드가 달려 있었는데, 이름은 써져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신제윤의 필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녀올게.
마치 내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는 듯.
따뜻한 빵 봉투를 들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빈 집을 나서는 내내, 가슴 속에 묘한 설렘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나도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