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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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HG3

alicekim245 2025. 10. 10. 18:17

제1조, 제2조...업무 범위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콜렉션 관리, 경매 자문, 이따금 경매나 출장에 동행하는 일.
제3조, 근무 시간과 장소.
제4조, 특별...업무. 특별 업무란 부분에 손이 멈추자, 나는 맨 앞의 계약 요약내용을 살펴봤다. 이 4조의 업무는 그 요약문에 없는 내용이었다.
'매 근무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0시까지, 갑의 침실에서 제공된 문헌을 낭독.'
침실. 몇 번을 읽어봐도 그 글자는 분명 침실이었다. 서재도 아니고, 응접실도 아닌 집주인의 가장 내밀한 공간.
'향수 사용 금지'. 이건 미술품에 향수가 미치는 영향이 분명했으므로 납득 가능한 영역이었지만, 특별 업무에 굳이 이런 내용을 적을 필요가 있었을까?
'별도 노크를 요하지 않음'. 클라이언트의 침실에 들어가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통상적인 범주는 아득히 초과한 듯 했는데, 심지어 노크 없이 들어오라는 건 개인적인 공간에 초대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말로, 신제윤이 애인과 정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알아채지 못하고 들어가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것 말고...또 이상한 내용은 없나?" 나는 어느새 계약서에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조항보다는, 불리하거나 이상한 조항을 찾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제 8조, 비밀유지 의무.
- 갑의 사적 공간에서 목격한 모든 사항
- 갑의 개인적 취향, 건강 상태, 일과, 친애관계
- 갑의 콜렉션 목록, 구매 내역, 투자 전략
- 갑의 저택 내부 구조, 보안 시스템
'계약 종료 후에도 영구함. 위반 시 계약금의 10배에 해당하는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며, 별도 법적 조치가 이뤄질 수 있음.'
이 정도면 일반적인 수준일까? 컬렉터들은 본디 비밀을 유지하는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도난의 위험도, 세금 문제도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최수현 이사장도 화헌 콜렉션의 일부 작품은 공개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일견 이해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갑의 사적 공간에서 목격한 모든 사항'이라니. 대체 무엇을 목격하게 될지 알 수 없어 더 긴장감이 들었다. 평범한 호텔 오너가 이렇게까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걸까?
나는 그제야 크리스티안이 떠올랐다. 유학 시절, 네덜란드에서 사실상 나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그라면 이 계약서의 기묘한 점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그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명품 향수 브랜드의 조향사로 일하고 있는--그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휴대전화 연락처로 뻗었던 나의 손은 금새 멈추고 말았다.
'을은 갑의 사적 공간에서 목격한 모든 사항에 대하여, 제3자에게 누설하지 않음'.
제3자.
크리스티안도...이 계약서 상에선 분명한 제3자였다. 핸드폰을 천천히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이라지만 계약서에 서명한 날짜는 분명 오늘이었다. 그 말은, 계약서에 내가 서명한 시점부터 비밀유지에 대한 의무는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크리스티안에게 전화해 '신제윤 사장과 계약했다'는 말을 꺼내는 것 조차 비밀유지 의무 위반일 가능성이 있었다.
-따릉!
알람이 울렸고, 혹시나 크리스일까 싶어 확인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거금이 통장에 들어왔다는 알림이었다. 입금자는, 신제윤이었다. 회사의 명의도 아니고 개인 명의로 입금된 이 계약금이, 우리가 맺은 계약의 무게를 무겁게 알려주고 있었다.
'괜찮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액 자산가들은 프라이버시가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보안에 철저했다. 나는 그저 큐레이터로서, 신제윤의 자택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수집품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일만 수행하면 되는 거다. 지금껏 잘 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고가의 미술품이 화헌컬렉션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누설한 적이 없었다. 최수현 이사장이 내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는, 그러한 비밀 유지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계약서를 덮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눈에 이상하고 수상한 조항들이 들어왔고, 불안감만 더 커지는 듯 했다.
그러다 나는 크라머의 『The Collector』. 헬스트의 『독서하는 여인과 촛불』 이 두 점의 그림을 떠올렸다. 이 수상하고 오묘한 계약서를 통과하기만 하면, 두 점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신제윤은 그보다 더한, 낙찰된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림에 한해선 내가 홀린듯이, 그리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던진 미끼일지도 몰랐다. 스스로도 '이상한' 계약서에 서명해 놓고선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만년필.
세상엔 수천가지, 수만가지의 만년필이 존재했고 신제윤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만년필이 우연히 같은 종류일 가능성이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간 자신의 손에 길들여진 만년필을 알아보지 못하는 주인은 드물었다. 만약 그게 진짜 내 만년필이라면, 신제윤이 어떻게 그걸 손에 넣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내가 오해를 한 것일까. 신제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석연찮은 의심을 풀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오전 6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계약서 상의 주소를 지도 앱으로 찍어보았을 때,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걸로 나왔지만...서울의 교통은 늘 새벽부터 부산스럽지 않았던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헤어드라이어로 말리며,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성북동. 한양도성 아래, 오래된 부촌이 자리한 곳이었다.
옷장 앞에 서자 고민이 몰려들어왔다. 어제 입었던 크림색 블라우스는 미술관에 어울리는 옷이었지, 누군가의 저택에 처음으로 방문할 때 입을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꺼낸 건, 아이보리 컬러의 실크 셔츠 원피스였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길이에 허리를 살짝 조이는 실루엣,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왔다. 단정하지만 너무 딱딱하지 않았고, 우아하지만 과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특별 전시회를 하기 전날, 후원자들을 초대하는 파티에서 내가 즐겨 입는 옷이었다.
가느다란 골드 체인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귀에는 작은 진주 스터드 귀걸이를 달았다. 거울 앞에 서자, 그럴싸한 외모로 꾸민 사람이 보였다. 이 정도면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현관으로 향하다, 화장대 위에 놓인 향수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구두는 어떤 걸 신을지 이미 결정해 두었기에, 향수 앞에서 고민이 깊어졌다.
크리스티안은 매년 내 생일이면, 자신이 조향한 향수를 직접 선물해 주곤 했다. 그 바쁜 일정의 사람이 나를 위해 그 날만큼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한국에 와 주는 것이라 늘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My precious Galatea, as always.'
유려한 그의 필기체가 적인 카드도 함께. 상자를 열면 언제나 100ml짜리 보틀이 들어 있었다. 대량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만을 위해 직접 조향한 향수였다. 탑노트는 그의 취향에 따라(그는 늘 '너에게 어울리는 향'이라고 강조했지만) 매년 바뀌었지만, 향기의 아래에는 늘 은밀하고 매혹적인 머스크 베이스가 깔려 있었다. 코롱 답게 뿌리면 가볍고 맑은 향이 났지만, 이 향수의 가장 아래에 있는 향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나는 딱 두 명을 만났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 향수를 만든 창조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날 떠난 사람이었다.
'You spend your days with art...so your perfume shouldn't compete with paintings.'
항상 크리스티안이 내게 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그가 조향해 준 향수는 2시간 정도면 사라지고 아주 희미한 잔향만이 남는 오 드 코롱이었다.
습관처럼 손을 뻗어 향수병을 집어들려다, 손이 멈추었다.
'을은 낭독 시, 향수 사용을 금한다.'
계약서의 문장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낭독 시,'라고만 한정지었지만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낭독 시간이었고, 지금 향수를 뿌리면 그 시간까지 남아있을 건 분명했다. 아무리 오 드 코롱이라지만, 크리스의 향은 항상 다른 향수들보다 오래갔다. '너를 위한 향은 오래 남아야 하니까'. 언젠가 발향 시간이 일반적인 머스크보다 조금 긴 것 같다며 묻자 그가 그렇게 답했었다.
결국 향수병을 그대로 둔 채,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근할 때면 늘 크리스티안의 향수가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어딘가 내 마음 속까지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뿌리던 습관을 지키지 못한 것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기 전, 고개를 돌려 화장대를 돌아봤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긴 각양 각색의 액체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미안, 크리스.'
마음속으로 사과를 건넨 뒤,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향 없이 나선 아침은 유독 삭막하게 느껴졌다.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몇 초간 갈등이 있었다. 최수현 이사장의 자택도 이 동네에 있었고, 초대를 받아 다른 직원들과 함께 가 본 적이 있어 익숙한 길목이었지만 지나다니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저택이 신제윤의 집이었단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집에 발을 들여도 되는걸까?
하지만 시계는 이미 오전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에 해야 할 특별 업무를 생각하면, 안에 들어가서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갈등 끝에 초인종을 누르자, 누구냐고 확인하는 의례적인 말도 없이 눈 앞에서 커다란 대문이 툭, 하고 열렸다. 육중한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르는 하얗고 검은 자갈길이 나왔다. 정원에는 커다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잘 손질된 채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토록 완벽하게 가지가 다듬어진 나무는 보기 드물었다.
이 자갈길 끝에 있는 현관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든 건, 내가 아직 신제윤을 아침에 마주할 용기가 없는게 분명하다는 의미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제윤 사장님의 수행비서인 류희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희우 씨." 그가 아주 약간 미소를 지은 것 같았지만, 평소의 얼굴을 알 수 없으니 저 엷은 곡선이 미소인지 혐오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장님은 침실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2층 마스터 베드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예...? 주무신다구요?" 나의 반응에 도리어 희우가 '모르는건가?'란 표정으로, 계단을 향해 걸어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시간이 거의 오전 9시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그런데, 잔다고?
"사장님은......" 희우는 다행이도 내 면전에서 한숨을 내쉬진 않았다. 대신 나를 2층으로 데리고 가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밤에 일하시고, 낮에는 주무십니다. 이미 침실로 들어가신지 한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럼...보통 몇 시에 일어나시는데요?" 돌이켜 보니 그가 내일 오후--그러니까 오늘 오후에 출장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과, 작품을 볼 수 있다는 말에 휘말려 내가 그 기묘한 계약서에 서명한거니까.
"보통은...오후 두 시 쯤에 일어나십니다. 마스터룸은 여기입니다. 저는 다른 일을 하러 가야해서, 이만."
양쪽으로 열 수 있는 거대한 나무 문 앞에 서자, 내가 아침부터 외간남자의 침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습관적으로 노크를 하려다 허공에서 손이 멈추었다. 매끄러운 황동 손잡이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약간 서늘한 기운이 코끝을 스쳤다. 낮에 자는 사람의 방 답게, 창문은 전부 어두운 암막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다. 곧장 침대를 볼 수 없도록 거대한 파티션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걸음을 내딛자 나는 거대한 침실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킹사이즈의 침대와, 매끄러운 회색 실크 담요를 덮은 채 눈을 감고 있는 내 클라이언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를 기다렸다는 듯, 침대맡에는 푹신한 안락의자와 조도를 조절할 수 있는 램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자는 사람한테 책 읽어주는건 오히려 잠을 깨우는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파티션 근처에 서 있다간 변태처럼 클라이언트를 관찰하고 있다는 누명을 쓸 것 같아 종종걸음으로-걷는 소리가 나지 않게 소파에 가서 앉았다. 거기 앉고 나서야 침대 옆에 아주 작은 책장이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 있는 책은 여행잡지 한권 뿐이었다. 몇 해 전 폐간과 복간을 반복하던 것으로, 나도 이따금 휴가지를 고민하며 읽던 것이라 낯익었다. 막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려는데, 눈을 여전히 감고 있던 신제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잠에 막 빠져들려던 참인지,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왔네......"
"좋은--."
이제 자는 사람한테 좋은 아침, 이라고 인사하는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어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내 목소리를 듣더니 쿡쿡 웃음을 보였다.
"무슨 글 읽을지 골랐어?"
호기심 가득한 말투에, 나는 종이 넘기는 소리를 일부러 들려주며 '이제 읽으려구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고른 페이지는, 방문해 본 적이 있는 도시의 이야기였다. 다른 도시들 보다 유독 이 도시가 끌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조심스럽게 시작한 내 목소리가 이윽고 그의 침실을 천천히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Delft ligt op een uur rijden met de trein van Amsterdam..."
네덜란드어는 오랜만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이렇게 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은 적이 없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입에 붙으면서 오래 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en geraniums in bloempotten bloeien rood."
침실에는 여전히 내 목소리만이 어둠 속을 떠다녔다. 신제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규칙적인 호흡. 금방 잠든걸까? 하지만 나는 계속 글을 읽었다.
"De wind die over de geraniumbladeren strijkt, draagt een frisse groene geur door de straten.."
창문마다 펄럭이던 새하얀 레이스 커튼과, 화분에 심긴 붉은 제라늄. 그리고 그런 제라늄 잎을 스치는 바람은 청량한 그린노트를 담고 거리를 떠돈다.
읽으면서, 나는 그곳에 다시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안과 함께 걷던 새벽녘 돌길에서 나던 미네랄 향. 치즈 가게에서 시식하던 토요일 오후. 니우커르크 종탑에서 본 주황색 지붕들.
"De mensen van Delft haasten zich niet..."
델프트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목소리가 저절로 느려졌다. 마치 그곳에서의 시간처럼.
"De beroemdste persoon uit deze stad is ongetwijfeld Johannes Vermeer..."
베르메르. 그의 이름을 네덜란드어로 발음하는 순간,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나는 그와 서 있었던 곳과 같은 곳에 서서 똑같은 풍광을 넋놓고 바라보았던 시간을 떠올렸다.
"Het licht van Delft is bijzonder. Het licht dat Vermeer vastlegde, lijkt op de structuur van een parfum."
델프트의 빛은 특별하다. 베르메르가 포착한 이 빛은 향수의 구조와 닮아있다.
침대에서 이불이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제윤이 움직인 것 같았다. 나는 잠깐 읽기를 멈추고 그를 살짝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만,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면서도 웃을 수 있나?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칼럼을 마저 읽었다.
"Het licht dat eerst weerkaatst op de gracht is scherp en transparant, zoals citrus. Het licht dat zachter wordt terwijl het langs de gevels kruipt, wordt subtiel als een bloemige middennoot."
운하에 반사되어 처음 튀어 오르는 빛은 시트러스처럼 날카롭고 투명하다. 건물 벽을 타고 오르며 부드러워진 빛은 플로럴 계열의 중간 향처럼 은은해진다.
나는 이 작가가 묘사하는 향이, 크리스티안이 내게 선물해주는 향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듯 향의 층을 쌓아올렸다. 베이스는 늘 머스크였지만, 그 위에 우리의 추억을 담았다며 여러가지 향을 담아 선물해주곤 했다. 그렇게 받은 향수에서는 그와 처음으로 커피를 즐겼던 스튜디오에서의 하루, 함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날들, 교외로 나가 반짝이는 풍광을 보던 낮의 정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렇게 그가 향기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이 글의 작가가 글을 쓸 때 선택하는 단어들과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도 어쩌면 향기의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 델프트는 빛의 도시였고, 또 다른 이에게는 향으로 기억될 도시였을테니까.
"Een plek waar licht en schaduw, geur en stilte, tijd en stilstand samenleven."
빛과 그림자, 향기와 침묵, 시간과 정지가 공존하는 곳.
칼럼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나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속삭이는 것처럼.
"...of wachtte op iemand van wie hij hield."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을 것이다.
침실 안이 더 고요해졌다. 신제윤의 숨소리가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완전히 잠든 듯 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다.
"Delft is een stad die een geur bewaart die niet verandert, zelfs als de tijd verstrijkt."
델프트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향기를 간직한 도시다.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변하지 않는 향기. 크리스티안이 늘 머스크를 베이스로 만들어주는 향수. 그저 그가 머스크를 선호하는 것 뿐일 수도 있었지만...그가 만들어준 향기는 항상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테면...심대용이라던가. 그는 내가 샤워 후 크리스티안의 향수를 뿌린 날이면 예민하게 굴었고, 그런 날의 끝에는 언제나 거칠게 나를 안았다. 지금 와서는...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다.

낭독을 마쳤지만, 신제윤의 침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깊이 잠든 듯, 미동조차 없었다. 이불이 반쯤 흘러내려 한쪽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살며시 다가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런데, 푹 잠든 줄 알았던 그가 눈을 감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꽤 즐거운 여행이었나보군. 그 남자랑."
"네?"
"아무것도 아니야. 난 이제 잘거니까 나가. 비서가 수장고로 안내해줄거야."
머리가 무거운 것에 맞기라도 한 듯 멍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설마 칼럼을 읽다가 무심결에 크리스티안의 이름을 말하기라도 했나? 곰곰히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제윤이 그런 말을 했다.
"제가...읽다가 다른 말을 했나요?"
"아니. 나가라고 했을텐데."
그에게선 답을 얻을 수 없을 듯 했다. 
신제윤의 태도는...어딘가 이상했다. 어째서 내가 누군가와 델프트에 갔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 잠꼬대인가? 하지만...석연찮은 의문이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계약서, 그 다음엔 만년필, 이번엔 델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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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이 읽은 칼럼의 한국어 원문과 네덜란드어 번역본(Claude를 활용하였음):

 

# 델프트 기행
델프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벽돌집들은 17세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문마다 하얀 레이스 커튼이 펄럭이고, 화분에 심긴 제라늄이 붉은 꽃을 피운다. 제라늄 잎을 스치는 바람은 청량한 그린 노트를 담고 거리를 떠돈다.

좁은 돌길을 걸으면 자갈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온 뒤 돌에서 올라오는 미네랄 향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온다. 작은 치즈 가게, 골동품 상점, 도자기 공방이 예고 없이 나타난다. 빵집 문이 열릴 때마다 따뜻한 버터와 효모, 캐러멜의 단내가 거리를 휘감는다. 관광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도시 사람들이 300년 전부터 그래왔듯이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 치즈 가게 앞에서는 숙성된 치즈 특유의 풍부하고 복합적인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니우커르크(Nieuwe Kerk) 종탑에 오르면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황색 기와지붕들이 퍼즐처럼 맞물려 있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운하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담고 있다. 운하에서 올라오는 물 냄새와 이끼 낀 돌의 습한 향이 이 도시의 오래된 숨결을 전한다.

델프트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혹은 그저 멍하니 앉아 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로스팅된 원두의 쓴 향과 오래된 나무 가구에서 풍기는 바닐라 같은 냄새, 그리고 습한 운하의 냄새가 복잡하게 얽힌다. 이 도시의 향은 단순하지 않다. 층층이 쌓인 시간의 향기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그는 평생 델프트를 떠나지 않았다. 이 작은 도시의 빛으로 36점의 그림을 그린 그는, 델프트와 네덜란드를 넘어 전 세계가 사랑하는 화가 중 하나가 되었다. 관람객들은 그가 바라보았던 특별한 시선을 느끼기 위해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오게 된다.

델프트의 빛은 특별하다. 베르메르가 포착한 이 빛은 향수의 구조와 닮아 있다. 운하에 반사되어 처음 튀어 오르는 빛은 시트러스처럼 날카롭고 투명하다. 건물 벽을 타고 오르며 부드러워진 빛은 플로럴 계열의 중간 향처럼 은은해진다. 그리고 좁은 골목 끝에서 갑자기 쏟아지고, 카페 창문을 통과해 테이블 위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는 빛은, 마치 앰버나 머스크처럼 오래 남는 잔향이 된다. 베르메르가 사랑한 빛. 그가 평생 그리고자 했던 빛.

델프트에 오면, 왜 그가 이곳을 떠나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도시는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곳이다. 빛과 그림자, 향기와 침묵, 시간과 정지가 공존하는 곳.

아침 8시, 마르크트 광장에 서면 종소리가 들린다. 300년 전에도 이 종소리를 들으며 누군가는 빵을 사러 갔을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지금 우리가 맡는 것과 같은 향기를 맡았을 것이다. 아침 빵의 향기, 운하의 습기, 꽃의 향기. 델프트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향기를 간직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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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lft**

Delft ligt op een uur rijden met de trein van Amsterdam, maar het is een stad die de illusie wekt dat de tijd heeft stilgestaan. De bakstenen huizen langs de grachten behouden hun 17e-eeuwse uitstraling. Witte kanten gordijnen wapperen voor elk raam, en geraniums in bloempotten bloeien rood. De wind die over de geraniumbladeren strijkt, draagt een frisse groene geur door de straten.

Als je door de smalle straten loopt, knarst het grind onder je voeten, en de minerale geur van natte stenen na de regen stijgt op vanaf de grond. Kleine kaaswinkels, antiekzaken en aardewerkateliers verschijnen onverwacht. Telkens wanneer de deur van de bakkerij opengaat, omhult de warme geur van boter, gist en karamel de straat. Ze zijn niet voor toeristen, maar bestaan daar gewoon, zoals de mensen van deze stad al 300 jaar doen. Voor de kaaswinkel prikkelt de rijke, complexe geur van gerijpte kaas je neus.

Klim je de toren van de Nieuwe Kerk op, dan ligt de hele stad aan je voeten. De oranje pannendaken passen als puzzelstukjes in elkaar, en de gracht die ertussen door loopt, bevat de traag stromende tijd. De geur van water en het vochtige aroma van met mos bedekte stenen brengen de oude adem van deze stad over.

De mensen van Delft haasten zich niet. Ze zitten in cafés, een uur of twee uur lang, met een kopje koffie voor zich, lezen een boek, kijken uit het raam, of zitten gewoon voor zich uit te staren. Als je in een café zit, vermengen de bittere geur van gebrande koffiebonen, de vanille-achtige geur van oud houten meubilair, en de vochtige geur van de gracht zich ingewikkeld. De geur van deze stad is niet eenvoudig. Het is de geur van tijd, laag op laag opgebouwd.

De beroemdste persoon uit deze stad is ongetwijfeld Johannes Vermeer. Hij verliet Delft zijn hele leven niet. Met het licht van deze kleine stad schilderde hij 36 schilderijen en werd een van de meest geliefde schilders ter wereld, niet alleen in Delft en Nederland. Bezoekers komen naar deze kleine stad om het bijzondere perspectief te voelen waarnaar hij keek.

Het licht van Delft is bijzonder. Het licht dat Vermeer vastlegde, lijkt op de structuur van een parfum. Het licht dat eerst weerkaatst op de gracht is scherp en transparant, zoals citrus. Het licht dat zachter wordt terwijl het langs de gevels kruipt, wordt subtiel als een bloemige middennoot. En het licht dat plotseling uit het einde van een smalle steeg stroomt en door het caféraam gaat om een klein vierkant op de tafel te tekenen, wordt een langdurige nasleep, zoals amber of musk. Het licht waar Vermeer van hield. Het licht dat hij zijn hele leven probeerde te schilderen.

Als je naar Delft komt, kun je een beetje begrijpen waarom hij deze plek nooit verliet. Deze stad is niet een plek om te zien, maar om te voelen. Een plek waar licht en schaduw, geur en stilte, tijd en stilstand samenleven.

Om 8 uur 's ochtends, als je op het Marktplein staat, hoor je de klokken luiden. 300 jaar geleden zou iemand deze klokken ook hebben gehoord terwijl hij brood ging kopen, of wachtte op iemand van wie hij hield. En zij zouden dezelfde geuren hebben geroken die wij nu ruiken. De geur van vers brood in de ochtend, het vocht van de gracht, de geur van bloemen. Delft is een stad die een geur bewaart die niet verandert, zelfs als de tijd verstrij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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