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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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HG6

alicekim245 2025. 10. 12. 21:27

집으로 가져온 샌드위치는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림을 보느라 밀어두었던 허기가 뒤늦게 찾아들자,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허겁지겁 그것들을 입 안에 집어넣기 바빴다. 
신선한 채소와 잘 구워진 햄과 치즈, 아주 단순한 조합이었는데도 그건 내 빈 속 뿐만 아니라 이미 몇 년째 잊고 있었던 맛에 대한 기억도 일깨웠다.
이건 정말로...맛있는 음식이었다.

심대용과 동거했던 몇 년간, 나는 음식에서 맛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깔끔한 성격은 내게 늪이나 다름아니었다. 겉보기엔 근사해 보이지만, 발을 딛는 순간 발목을 잡아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그는 집에 음식냄새가 나는걸 정말로 못견뎌 했고, 그 탓에 나는 부엌에서 어떠한 요리도 할 수 없었다. 이웃에서 나는 음식 냄새에도 신경질을 냈다. 손찌검은 하지 않았지만 역한 냄새가 난다며 나간 뒤, 그 다음날 저녁에 들어오기도 했다. 어디서 잤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그는 친구가 많았고, 바깥에서 하룻밤 자는 것쯤은 애인이 넉넉히 이해해주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바보같게도 그가 집에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퇴근 후 집에 가기 전,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거나 가게에서 샐러드를 사 먹는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맛?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영양소와 배를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이 단순한 샌드위치가, 내 미각을 다시 깨우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준비한, 그리고 따뜻한 식사. 한입 더 베어물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크리스티안이었다.
-요즘 뭐 해? 네 생각이 갑자기 나서.
"음-." 입 안의 샌드위치를 급히 씹어 삼키며 대답했다. "계속 일 하지. 새로 맡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요즘엔 거기 몰두하고 있어."
화헌미술관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미술품을 다루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대충 그렇게 둘러댔다.
-...잠깐만.
그런데 크리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너...지금 뭐 먹고 있어? 네가? 이 시간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크리스티안은 내가 혼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용과 함께 살 때도, 그와 헤어지고 혼자 지내게 되었어도 여전히 그런다는 걸. 그래서 그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나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가곤 했었다. 그리고 내가 야위어 간다며 걱정했다.
"어, 샌드위치."
-샌드위치...? 네가? 별일이네.
그가 짧게 웃었다. 분명 웃음이었는데,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오늘 일이 잘 안풀렸나?
"뭐야, 내가 식사도 혼자 챙길 줄 모르는 열 살 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가볍게 투덜거리자, 크리스가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요 몇년간 네가 제때,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걸 본 적이 없잖아. 누가 챙겨준거야?
그 순간 식탁 위에 있는 갈색 종이봉투에 시선이 갔다. 누가 챙겨주긴 했지. 하지만 그게 '누군지'에 대해서는 크리스티안에게 조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묘하게...그에게 이 사실을 말해선 안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세계를 내게 전부 공유해주지 않듯, 나도 그에게 공유할 수 없는 세계가 생긴 것이다.
"그냥, 오늘 이사장님이 한 턱 크게 쏘셨는데...취향이라서 조금 가져왔어."
결국 나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크리스티안은 내 대답을 듣고 몇 초간 말이 없었다.
-그래? 네가 다시 뭘 먹기 시작해서 다행이네. 맛있어?
"응."
또다시 말이 없었다.
"크리스티안, 오늘 안좋은 일 있었어?"
-아니, 없어. 너는 이제 잘 시간이네. 잘 자. 내일 출근 잘 하고.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손에 든 샌드위치는 여전히 내 식욕을 자극했다. 한입 더 베어물었지만, 맛이 다시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유학시절 그가 내게 보였던 따스한 보살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내가 식욕과 미각을 모두 잃은 시기에도 유일하게 나를 챙겨 준 사람이었다.

'아파? 괜찮아?'
수화기 너머 그의 다정한 음성을 들으면, 온 몸에 남은 전날 밤의 흔적과 통증이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종이가방에 손을 뻗자, 에그타르트가 잡혔다. 포장을 열자, 달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문득, 크리스티안이 내 생일이라며 오 드 코롱을 선물해 주었던 날이 떠올랐다.
'마음에 들거야.'
바닐라와 베르가못이 섞인, 그리고 그 아래 머스크가 은은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달짝지근하고 매혹적인 향. 시향을 해보라며 그가 내 목덜미에 직접 뿌려주었다. 달콤해서, 몇 년째 받지 못한 생일케이크가 떠올랐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를 맞이한건 대용의 차갑고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거,  뿌렸어?' 아마도 탑과 미들노트는 다 날아가고 베이스노트만 희미하게 남아있을거라, 그가 그 향을 알아챘을거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한숨을 길게 내쉰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생일선물로 받은거야.'
'누구? 아니지, 물어 볼 필요도 없겠네. 그 친구라는 새끼겠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 새끼한테, 생일이랍시고 안기고 온거냐.'
그날 밤 대용의 행위는 평소보다 더욱 격렬했다. 피를 보진 않았지만, 몸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찢기는 것만 같았다. 준비되지 않은 몸에 그를 받아들이는건,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괜찮아? 아파? 어제 들어가고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
크리스티안은 내가 대용에게 거칠게 안긴 다음날이면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라며 꼭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가 왔다는걸 대용이 알고는, 또다시 나를 거칠게 다루는 날이 이어졌다.

거기까지 기억이 닿자, 저절로 얼굴이 굳어지는게 느껴졌다.
생각하지 말자.

손 위에 놓인 에그타르트를 눈으로 먼저 감상했다. 바삭한 테두리, 필링 위에 살짝 올린 설탕을 토치로 지진 형태. 크림 브륄레를 떠올리게 했지만, 이건 혀 끝뿐만 아니라 마음 속 응어리를 녹여버릴 만큼 달콤했다. 입 안에서 녹아가는 달달함에, 나는 내 과거의 기억도 조금씩 희미해지길 바랐다.
이날 먹은 에그타르트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제대로 된 단맛이었다.

다음날 오전 10시.
수장고에서 작업 중, 휴대전화의 진동이 들렸다.
-홍차 우려놓으라고 했어. 잠깐 올라가서 쉬어.
출장 중이라던 신제윤의 문자였다. 소품들을 살펴보던 중이었고, 아직 수장고의 냉기에 적응이 덜 되었던 터라 그의 제안이 고맙게 느껴졌다. 장갑을 벗어두고 1층 식당으로 올라가니, 정말로 티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과분할 정도로 귀여운 세이보리가 3단 접시에 놓여 있어서, 저절로 식욕을 자극했다. 어제 저녁 샌드위치를 먹은 일 이후로, 내 입맛은 그간의 무관심을 보상받겠다는 듯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고용주가 신경 써 준 것이니 만큼 감사의 답장을 보내는게 좋을 것 같았다. 읽었다는 표시가 바로 뜨지 않아 휴대전화를 옆으로 밀어둔 다음, 고맙게도 날 위해 차려진 티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 위로 붉고 투명한 찻물이 떨어졌다. 최수현 이사장이 왜 그렇게 차를 즐겨 마시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식당은 여전히, 예의 '따스한 빛의 삭막한 조명'이 빛을 내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홍차 한 잔 만큼은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온기이자 배려였다. 신제윤이 무심하게 보낸 문자 한 통이 금새 내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제 마신 마리아쥬 프레르와는 다른 홍차였는데, 가향이 되어있지 않은 실론 계열이었다. 크리스티안이 보면 '그런걸 왜 마셔!'라고 기겁할 만한 일이란 생각이 들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의 격의없는 반응과 행동이 좋았다. 자신의 배경과는 무관하게,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그의 모습들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크리스티안이 내 인생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한국에 와선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있다고 그에게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크리스티안이 종종 한국에 들어오면 늘 커피만 마셨기 때문에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접시에 담긴 작고 귀여운 세이보리들은 짠 것부터 단 것에 이르기까지 맛의 조화가 훌륭했는데, 특히 마무리로 먹은 미니 몽블랑은 소위 '바밤바'맛이 아니라 정말 달달하게 졸인 밤의 맛이 나서 입이 즐거웠다. 주전자의 무게가 가벼워질 무렵, 휴대전화가 또다시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경매 카탈로그를 캡쳐한 이미지 파일 하나와, 신제윤의 문자였다.
-이 작품 어때? 피터 드 호흐의 『푸른 성모』. 지금 옥션에 나왔는데, 곧 경매 시작할거야.
카탈로그 속 그림에는 제목 그대로 푸른 옷을 두른 성모마리아가 그려져 있었는데, 내가 주목한 부분은 그 그림의 소장자였다. 애쉬포드 자작. 논문을 쓸 때 애쉬포드 콜렉션을 자주 보러 갔던 터라 익숙한 이름이었지만...뭔가 이상했다. 급히 찻잔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작품 자체는 훌륭합니다만...애쉬포드 콜렉션에서 나온 작품이라면 소유자가 갑자기 이 작품을 내놓은 이유를 확인해야 합니다. 현 7대 애쉬포드 자작은 성격 상 본인이 아끼는 그림을 경매에 내놓으실 분이 아니라서요.
-애쉬포드 자작과 아는 사이인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애쉬포드 콜렉션을 연구하면서 허가를 위해 몇 번 뵌 것이 전부입니다. 진품은 확실해 보이지만 이게 불법적인 루트로 경매에 온거라면, 입찰하지 않으시는게 나을 듯 해서요.
-확인해볼게.
그러고 한동안 신제윤에게서는 답장이 없었다. 애쉬포드 자작은 300년 전통의 콜렉션을 갖고 있는, 예술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고 특히 네덜란드 회화에 일가견이 있어 어지간한 전문가들도 그와 대화한뒤 진땀을 뺄 정도로 '마니아'에 가까웠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모든 회화 작품의 보존 상태도--현대의 전문가들을 편견없이 수용하는 다소 진보적인 행보에 의해--수준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또한 자작은 미술품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런 그가 아끼는 작품인 『푸른 성모』를 내놓았다는 것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카탈로그 캡쳐본 속 성모의 옷은 별다른 장식이 없었지만, 귀하고 비싼 청금석을 아끼지 않은 색채로 인해 몇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카메라 렌즈를 한 번 거쳤는데도 불구하고 화려한 푸른빛을 자랑했다. 저절로 스크린 위로 색을 쓰다듬고 싶어질 정도로. 신제윤이 어제 한 이야기를 미루어보면, 청금석이 내뿜는 푸른빛이 강렬할 수록 그의 이목을 끄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오전에 한시간 가량 살펴본 그림들의 대부분의 공통점도 그러했다.
-확인했어. 장남이 성가신 스캔들에 휘말려서, 수습 비용이 급하게 필요하다더군. 자작의 인장이 찍힌 문서도 경매측에서 가지고 있었어.
아. 그 문제였구나. 어렴풋 짐작은 갔지만 막상 사실이라 확인받으니 저절로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자작이 무척 아끼는 작품이, 자작의 자녀로 인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실물을 본 게 아니라 제 의견이 그다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그 그림은 3~4겹의 청금석 레이어가 확인되는데, 당시로도 상당한 비용을 들여 제작된 작품입니다.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성모의 푸른 옷이 미묘하게 다른 색채로 반사되는 것이 특징이라, 네덜란드 왕립 미술관에 자주 초대되었어요. 현재 소장중인 판 데어 헬스트의 작품과 나란히 놓으면 청금석으로 완성된 '델프트 블루'라는 하나의 서사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추정가는 350만 달러인데, 『푸른 성모』는 왕실에서도 탐을 내던 작품이라 경쟁이 예상됩니다. 특히 애쉬포드 컬렉션이라면 보존 상태가 좋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긴 코멘트를 적고, 그걸 발송하고 나서야 괜한 참견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장 문자 옆에 '읽음' 표시가 떴고,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 휴대전화를 뒤집어 둔 뒤 차갑게 식어있는 남은 홍차를 단숨에 마셨다. 차가 식을 정도로 그림에 열중했던 탓이었다.

수장고로 돌아간 뒤 또 시간을 까맣게 잊고 그림의 보존상태와 물감 성분 분석에 열중하던 찰나, 휴대전화에 문자가 도착했다는 걸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로 알아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잔뜩 굳어있던 몸이 스트레칭을 필요로 했다.
-낙찰받았어.
네? 나는 이 믿기지 않은 문장을 보며 한심하게 눈을 비비고 말았다. 이 다섯글자는 순식간에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신제윤이 네 시간만에 보낸 문자 답장은 그것 한 줄이 아니었다.
-이번엔 익명으로 낙찰받았어. 네가 직접 경매 결과 확인해 봐. 일주일 뒤에 우리집에 배송될거야. 미리 잘 부탁해.
나는 잠시 문자 창을 끄고, 서둘러 경매 사이트에 접속해 낙찰결과를 확인하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420만 달러. 한화로 50억이 넘는 금액.
눈 앞이 암전당하듯 어두워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깐, 잠깐만. 50억? 그림 한 점에? 내가 일을 하면서 저축한 금액은, 이 낙찰가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안될 것이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가슴속 어딘가가 답답하게 조여왔다.
'내가 5년간 모은 돈을 그는 네 시간 만에 썼다.'
비교하면 안 되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꾸 비교하게 되었다. 국내 탑급 미술관에서 일하며 부족하지 않은 급여를 받고 있긴 했지만, 이건 궤 자체가 다른 금액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50억을 쓸 수 있는 신제윤.
진짜 부유한 사람들은 쓰는 돈의 단위부터 다르구나.

신제윤이 뭘 운영한다고 했더라? 분명 약학 전공인 사람이 경영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해도...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지배하려는데, 또다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신제윤의 문자였다.
-점심은 챙겼어? 너, 어제처럼 식사 거르다가 진짜 쓰러질 수도 있어. 제때는 못먹더라도 거르지는 마.
아주 먼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던 사람이 곧장 현실감 있는 걱정을, 날 위해 하고 있었다.
-식당에 수프 준비해 두라고 했어. 바쁘면 그거라도 마시면서 일 해. 퇴근길 조심하고.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내용일 뿐인데, 그가 보낸 단어 하나하나에 어째서인지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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