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1 | 2 | 3 | 4 | |||
| 5 | 6 | 7 | 8 | 9 | 10 | 11 |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 26 | 27 | 28 | 29 | 30 |
- 신비한동물사전
- 게임
- 티스토리챌린지
- 제인 오스틴
- 인공지능
- AI
- Claude
- 크루세이더킹즈
- 습작
- 동물의숲
- 오만과 편견
- Be
- Jane Austen
- 모바일
- 글쓰기
- 독후감
- 심즈4
- 모동숲
- 창작
- 오블완
- 영화
- 서평
- 마스터오브이터니티
- 섭정시대
- 러브앤딥스페이스
- 배바웍
- 일상
- MyFavoriteThings
- 사진
- regency era
- Today
- Total
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습작(from 메모장) 본문
몸을 감싸는 검은색의 실크 드레스 위에 시선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선이 있다면, 그건 그녀의 목을 감싼 티파니 블루 컬러의 리본이었다. 다이아몬드로 세팅된 하이주얼리도 아닌 리본 하나가 눈길을 끌다니, 우스운 일이었지만-도저히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모양 때문에 목의 길고 고운 라인이 그대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든데, 그 목덜미 뒤편에서 흔들리는 리본은 누군가 그녀를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우아하고도 파괴적인 표현이었다. 리본의 한쪽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면 드레스가 전부 벗겨질 것이라는 암시가 아니라, 그 리본을 풀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파트너 한 명 뿐이라는 강력한 수컷의 과시였다.
정작 그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샴페인 잔을 든 채 대화를 나누느라 본인이 그 '은유'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다는걸 전혀 모르는 듯 했다.
→ 차현 1인칭 시점으로 바꾸면:
신제윤이 내 객실로 보내준 드레스는 아주 평범한 검은색 홀터넥 실크 드레스였다. 동봉된 지미추 하이힐 보다 눈에 띄는건 이 홀터넥을 고정하는 수단이 블루 컬러의 실크 리본 하나 뿐이라는 점이었다. 걸핏하면 풀리는 리본을 묶어대는 내가 마무리를 했다간 파티 도중에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 뻔했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드레스에 몸을 끼워넣은 후, 흘러내리는 가슴 부분을 팔로 가린 채 그 원흉을 객실로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드레스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묶어줄게."
이 드레스는 등이 훤히 드러나는 화끈한 디자인이었지만, 평소엔 아무도 볼 일 없는 부위를 노출한다는 민망함 보다는 홀터넥의 리본이 잘 묶였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리본을 묶은 뒤 나를 커다란 거울 앞으로 데려가, 어떻게 묶어두었는지 확인시켜 주었다. 아무것도 덧입지 않은 맨살 위에 닿는 두 가닥의 끈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골라도 왜 하필 이런......얌전한 디자인 많을텐데."
"알겠지만, 이런 파티에서 드레스는 무기야. 내가 옆에 있지 않아도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그는 거울 속 나의 입술에 살짝 손을 대며 말을 이었다.
"립도 조금 진한 버건디 컬러를 칠하는게 좋겠어. 귀고리는 잘 어울려. 아까 상자 안에 가터 있는거 확인했어? 그것도 해."
"가터는 왠지 노출광인 것 같아서 싫어." 그가 무언가 대꾸하려다, 허공에서 말이 멈추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가 '어차피 나만 보면 되니까'란 생각을 감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리본은 나만 풀 수 있어. 그리고..." 뒤에 바짝 선 신제윤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에 놓인 서랍장 위에 두 손을 짚었다. 허리가 숙여지면서 서 있을 땐 노출되지 않던 드레스의 빈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뜨거운 손이 그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어 내 피부를 움켜쥘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꽤 참고 있었어. 네가 움직일 때마다 옆가슴이 보여서 미칠 것 같더군. 다른 놈들이 눈으로 널 탐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르지?"
귓가에 속삭이는 음란한 말 한마디마다 그의 거친 숨이 섞여들어왔다. 예민해진 중심을 문지르는 손길은 자제력을 잃어갔고, 찌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지금 내가 원하는건 단 하나였다.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꽤 즐기더군. 안그래?"
"그런 적 없어."
"그럼..." 그가 자신의 손가락이 끈적한 액체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젖어있었어?"
"아니야......"
"그럼, 나 때문인건가?" 아직 메마른 그의 한쪽 손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그 주변을 애타게 간질였다. 이토록 누군가의 손길을 갈망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결국 몸을 돌려, 그의 목에 팔을 감싼 뒤 입꼬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승낙을 얻어낸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간 것을 본 것도 같았지만, 곧장 내 시야는 어두워졌다. 그날 밤,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눕혀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숭배받았다.
남의 집 안에서 길을 잃을 확률은?
헨젤과 그레텔 동화에 나온 것 처럼 과자를 복도에 뿌려서 길을 기억해 둬야 하나 싶은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운 좋게도 신제윤의 비서가 복도의 수많은 문 중 하나를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희우 씨......"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나는 진짜 이대로 집에서 길을 잃은 천하의 멍청이가 되는 줄 알았단 말이다. 그는 단박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내게 수장고와 서고, 그리고 몇 개의 방을 찾아갈 수 있는 힌트를 알려주었다.
복도의 문들은 전부 똑같아 보였지만, 문 앞의 장식이 약간씩 달랐다. 그가 알려준 유의점을 머릿속에 쑤셔넣고 있으려는데, 희우는 그런 내가 더 안타까워 보였는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겠는지 물었다.
"맛있네요."
정작 차를 내 준 사람은 아까부터 별 말이 없었다.
"희우 씨는 수행비서라고 했죠? 여기 있다는건..."
"사장님은 지금 주무시는 중입니다."
로봇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지금 딱히 클라이언트를 만날 생각은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 사람은 필요하지 않은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는게 습관화 된 듯 했다. 동작도 군더더기가 없었고, 마치 무거운 자물쇠가 사람처럼 행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장고까지 동행해 드릴까요?"
하지만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다정한 말이 그가 로봇이 아닌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익숙해지려면 직접 길을 찾아가는 편이 나을거라 말한 뒤, 그의 배웅을 받으며 야심차게 복도로 걸음을 내딛었다.
30분 후, 나는 육중한 나무 양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길치도 아닌데 이건 좀 너무한 처사였다. 이 집이 마법에 걸린 미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지도라도 하나 주면 안되는거야?" 혼잣말을 하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웅크렸던 몸이 뒤로 넘어가버렸다. 당황스러움과 민망함에 겨우 다시 뜬 눈에는 신제윤의 얼굴이 말짱하게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아...놀이 중인가?"
"아니야!"
"마침 잘 됐어. 수장고로 가려던 참이니, 데려다 주지."
"길 헤맨거 아니라니까?"
"나한테 거짓말은 안 통해."
"진짜...자는거야?"
감긴 눈 위로 손을 휘적휘적 해 봤지만 찡그리는 것도 없었고, 옅고 고른 숨소리로 잠든 것임을 겨우 알 수 있었다. 계약서 하단에 사기처럼 적혀 있던 특약사항을 알게 된 직후엔 파기할 생각이었지만, 그깟 일로 파기하기엔 계약서의 전반적인 조건이 너무나도 좋았다. 최수현 이사장도 '좋은 기회가 될거다'라며 등을 떠밀었고.
하여 나는 임시 고용주이자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인 신제윤 사장이 낮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도록, 그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책을 읽어주는 일을 막 마친 참이었다. 오늘 읽은건 여행잡지의 칼럼이었다.
내가 무슨 오디오북도 아니고.
하지만 그가 침대맡에 준비해 두는 책이며 잡지들은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미처 읽지는 못했던 것들이어서 꽤 이득인 셈이었다. 이따금 해외에서 발행된 잡지가 놓여있기도 했는데, 한번은 친구인 크리스티안이 인터뷰를 한 것도 있어 반가웠다.
그가 잠든걸 확인하고 십여분 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살금살금 카펫 위를 걸어나가 침실 문을 닫자,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자, 그럼 오늘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사장님은 원래 세 시간 이상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희우가 커피가 든 머그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는 다른 곳과는 달리 수장고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말이 평소보다는 조금 더 많았다.
"깊이 주무시지도 않고요."
듣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도 내 계약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적어도 신제윤은 내가 책을 읽는걸 듣다가 잠들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는 깨지 않았고 가끔 복도에서 마주쳐도 그에 대한 불만을 표한 적은 없었다.
"잠들기 전에 책을 읽는 습관도 없었어요?" 그냥 던져본 질문인데 희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런데 왜 저한테 그런 이상한 일을 시키는거죠?"
"그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침실에 계실 때 들어가는 사람은...차현 씨가 처음입니다."
"희우 씨도 안들어가요? 회의나 업무 일정 때문에..."
"그랬다가는," 그가 옅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해고당했을겁니다. 모든 업무는 사장님이 기준이고, 사장님께 맞추도록 다른 사람들의 일정을 조율하는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대학생 때 생각했던 신제윤의 인상과는 어딘가 달라진 듯 했지만, 내가 그의 일상적인 생활에까지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지 않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희우가 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이따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회화나 조각작품을 살펴보는 경우가 있었다. 문자 알람이 와서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니 벌써 오후 여덞 시였다. 수장고는 외부와 거의 단절된 공간이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무뎌지기 일쑤였는데, 퇴근시간을 한참 넘긴 일은 드물었다.
어쩐지, 어깨가 아프더라. 뭉친 어깨를 매만지며 책상 근처에 아무렇게나 놓아 두었던 가방을 들고 수장고를 나섰다. 보통은 보안에 신경을 쓰느라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부터 했겠지만, 신제윤도 그렇고 희우도 그렇고 문은 잠그지 않고 그저 닫기만 하라 했다. 의문이 들긴 했지만 넘어가는게 나았다.
이미 어두워진 창문을 센 빗방울이 투툭거리며 연신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천둥에 창문이 우르릉 흔들렸다.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복도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힘이 빠진 다리는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바보같아. 충격이고 뭐고, 지나간 일이니 신경쓰지 않아야 하는데. 왜 나는 자꾸 그 때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거지?
하지만 의지와 반대로 몸은 자꾸 움츠러들었다. 머리가 아파. 추워. 움직이고 싶지 않아.
"차현아."
어깨 위를 덮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고개를 들자 비오는 날 밤, 나와 시선이 마주쳤던 그 눈동자가 똑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는 당혹감이었다면, 지금 그의 눈에는 안도감이 새겨져 있었다. 너는 왜 지금 내 꼴을 보고도 안심하는건데?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가늠할 여력조차 없었다.
"차현 씨. 혹시 귀가가 늦어지면 앞으론 2층 손님방에서 주무셔도 된다고...사장님의 지시입니다."
아침부터 미열이 약간 있었다. 몸이 조금 무거웠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감기약을 하나 먹었으니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희우가 수장고에 들러 내게 건네준건 고맙게도 이온음료였다.
"고마워요, 그건 생각해볼게요." 클라이언트의 호의이니 단칼에 거절하기도 좀 그랬다. 일하다 조금 쉬고싶어지면 책상 옆에 의자도 있었고, 잠깐 바깥으로 나가 정원을 산책하는 정도의 휴식으로 충분했다. 설마, 밤에 여기서 신세를 질 일이야 있겠어?
동경했지만 나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내 스스로 포기해버린 사람과 십여년 만에 재회한 날, 열로 인해 의식을 잃고 꼬박 이틀을 깨어나지 못했던 그 일로 민폐는 이미 충분했다.
희우가 나가고 한시간쯤 흘렀을까, 콧속을 익숙한 뜨거운 액체가 내달렸다. 하마터면 며칠째 골몰하던 작업물이 펼쳐져 있는 책상을 피범벅으로 만들뻔 했는데,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블라우스에 떨어지는건 막지 못했다.
일단 티슈로 코를 막아두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수장고 옆 화장실에서 찬 물로 핏자국만 지워낼 요량이었다. 어차피 복도엔 아무도 안 다닐테니, 캐미솔 차림으로 다니는데 거리낌은 없었다.
그랬어야 할 터인데...화장실로 가기 위해 수장고를 나선 순간, 나는 회색 니트를 입은 신제윤과 눈이 딱 마주쳤다.
"뭐 해...?"
그는 틀어막은 코와, 흰 블라우스를 보고 곧장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한 듯 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다행히 안에 흰 티셔츠가 보였다) 내게 건네 준 다음, 손에서 블라우스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돌려줘."
"손아귀 힘은 내가 더 좋을걸? 몸부터 따뜻하게 해."
결국 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니트를 몸에 걸쳤다.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입었던 것이라 그런지, 옷이 따끈했다.
흰 블라우스의 얼룩을 빼려면 흐르는 찬 물에 피가 묻은 부위를 문질러야만 한다. 나는 그 허드렛일을 호텔 체인 오너가 하게 만든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민망함에 몸둘 바를 모르는데 정작 당사자는 핏자국을 완벽하게 빼낸 뒤, 어디선가 집어든 옷걸이에 블라우스를 걸어두는게 아닌가.
"이건 세탁하고 나서 집으로 보내줄게. 그리고 차현아." 학부생 시절보다 더 간결해진 그의 호칭이 귀를 파고들었다. "감기 걸렸으면 희우한테 문자 하나 보내고 집에서 쉬어도 돼."
최수현 이사장의 집무실에선 항상 차향이 났다. 그의 조부가 커다란 차밭을 그에게 물려주었다던가.
그가 조부인 화헌 최호 선생으로부터 상속받은건 막대한 예술품 컬렉션 뿐만이 아니라 차에 대한 취향도 포함되는 듯 했다.
찻잎은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청차, 녹차, 백차, 홍차 등 다양한 차로 마실 수 있지만 결국 그 근본은 같았다. 이사장이 가장 좋아하는건 봄 이슬이 내리고 딴 첫 잎을 번철에 정성스럽게 덖은 녹차였다. 특별한 취향이었고, 그의 선호를 아는 이들이 호의를 얻기 위해 귀한 찻잎을 갖고 방문하는 일은 예삿일이게 되었다.
그와 미술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집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언제나 찻물이 담긴 주전자가 찻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문하는 이의 취향을 고려한 그 나름의 배려였다.
"잘 지냈어?"
나이는 열 살 남짓 차이났지만 그에게선 세상 다 산 사람, 어쩌면 신선같은 분위기가 났다. 누군가는 그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직후부터 사람이 바뀌었다고들 했다. 직원들이 함구하기로 마음먹은 그 일에 대해 이제 어렴풋 알고 있었으나, 나도 일부러 그의 비극을 마음속에서 끄집어내 동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금의 단정하고 청아한 그를 만나는 일을 즐겁게 여기고 싶었다.
"출장 선물 드리려구요." 해외에 출장을 다녀올 때면, 그를 위해 몇 가지 과자를 사는걸 잊지 않았다. 내 유학을 주선해 주고, 미술관 큐레이터 자리까지 만들어 준 은인에 대한 소소한 감사인사 중 하나였다.
"힘들지는 않고? 소더비 애프터 파티에서 사소한 충돌이 있었단 소문을 들어서."
역시 최수현. 그 현장에 없어도 사방이 그의 눈과 귀였다. 사소한 충돌이라 하기엔 여러 사람의 눈에 띄었으니 그가 아는게 이상하진 않았다.
"제 지인인데, 클라이언트가 오해하는 바람에."
"그럴 것 같았어."
어디가? 하지만 수현은 설명을 덧붙이진 않고, 내게 차를 권했다.
"신 사장이랑 일해보니 어때? 신 사장이 구입해 간, 우리 갤러리에서 나간 작품들은 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끔 '밤에 조각상이 돌아다닌다'고 말하는 것만 빼면 흥미로운 작품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아서 즐거워요."
"하하, 그 이야기를 한건가."
엉뚱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이게 진짜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덕분에 수장고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등 뒤에서 무슨 소리만 나면 움찔하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또 그 자식이랑 어울리고 온거야?"
크리스티안을 만나고 오면, 대용은 내 손에 들린 화려한 종이가방 때문에 그걸 금방 알아채고는 빈정거렸다. 정작 본인은 그를 만나는 날이 내 생일이란 걸 아주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적어도 내가 하영을 그의 세상에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으르렁댈지언정 그는 크리스에게 적대감을 갖고는 있었다. 나는 그의 식어버린 적대감을, 대용이 크리스를 인정한 것인 줄 오해했다.
대용과의 밤은 우리의 메마른 관계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그는 성욕을 푸는 정도로만 나를 탐했고, 헤어지기 몇 달 전부터는 내게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 나는 프로젝트 때문에 피곤한 나를 배려하는 행동인 줄로만 알았다.
그는 이따금 술을 마신 채 집에 들어와선 다른 누군가를 찾듯이 나를 탐욕적으로 더듬곤 했지만, 나는 그게 전 연인을 무의식 중에 찾는 주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일쯤은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인 사이에는 늘 일정한 깊이의 샘물이 흘러야 한다. 한 쪽으로 기울더라도 그 총량이 유지되어야 하는. 우리는 이미 가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음에도 서로를 놓지 않은 미련한 자들이었고, 어쩌면 그날의 결말이 내게 가장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해?"
흰 시트 사이로 그의 체온이 나를 가두는 것이 느껴졌다. 온 몸을 지배하다 터져버렸던 쾌락이 아직 피부 위에 남아있었다. 그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싼 뒤, 가까이 끌어당겨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옅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져나갔다.
손목을 붙잡혔다. 익숙한 꽃향기. 나는 꽃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이제 싫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얼굴을 보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일 뿐, 더이상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채면 어떻게 생각할까?
최수현 이사장의 집무실에서 즐거운 근황 보고를 마치고 막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
"나랑 얘기 좀 해."
하영이었다. 그녀는 리넨 앞치마를 하고 있는 업무 모드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러 온 듯 은회색 샤넬 트위드 자켓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나 일하러 가야 해. 짧게 말 해."
"너, 일부러 이사장님한테 우리랑 거래 끊으라고 말했어? 오르비스 호텔도?"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 아닌거 알잖아." 네가 보기에 나는 그저, 뭣도 아닌 주제에 악착같이 이 자리를 거머쥔 독한 년이었을까? 아니면, 한 때는 자기 곁을 잘 따르던 시녀 중 하나였을지도. 하지만 내가 툭 내뱉은 말은 그녀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내 결혼식에 신제윤 선배가 다녀간 그 날부터 TH 계열사랑 오르비스 호텔 체인에서 주문이 안 들어와. 네가 그 둘을 들쑤신게 아니면 이게 뭔데? 왜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굴어?"
상황을 보아하니 어느 시점부터 계약이 끊겼는데, 그 원인을 나한테 돌리는 듯 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하마터먼 내가 진짜로 최수현 이사장과 신제윤에게 읍소해서 하영의 꽃집을 망하게 해달라고 애원한 줄 착각할 뻔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고,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데 관여할 만큼......"
"내 결혼식에 와서 둘이 커플인걸 다 드러내놓고 발뺌하는거야? 적어도 오르비스 쪽이라면 네가 얼마든지!"
"할 얘기는 그게 다야?" 드라마를 보면 이런 상황에서 도리어 당황해 손을 떨거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건 주인공 쪽이었는데. 하지만 머릿속은 무섭도록 차분하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있었고, 내 몸은 떨리지도 않았다. 이게 너와 나의 인연이라면, 안타까워 해야 할 결말인 걸까.
"나는 관련 없는 일이고...두 번 다시 이깟 일로 날 찾아오지 말아줘."
"이깟? 지금 남의 사업체 망하기 직전으로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이 쉽게 나와?"
"네가 지금 잘 정의해 줬잖아." 듣고 있자니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여차하면 뺨을 한 대 쳐 버릴 수 있었지만, 참는건 그저 과거의 정이 티끌만큼 남아있어서였다. "남이라면서."
제 말에 목을 잡혀버린 하영이 흠칫하더니 입을 다물어버렸고,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는게 보였다.
아, 따분해라. 저 눈물에 대용도 넘어갔겠지?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하영을 커다란 대리석 기둥의 그림자에 내버려 둔 채,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와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걸까?
(메모: 침투를 허용하도록 익숙하게 만들어. 원하는걸 말해. 그가 잘 해낸다면, 포상해줘. 그리고 너의 가장 약한 부분을 그에게 드러내. 그렇게 해서 네가 그에게 더 의존하고 있다는걸 보여줘. 그래서 그가 널 떠나있는다면, 죄책감을 느끼도록. 그러면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네게 보상하려고 할거야.)
온몸이 아팠다. 감기몸살에라도 걸린 것 같았지만 맞아서 생긴 통증이란 걸 안다. 눈을 뜨면 어떤 천장을 보게 될까, 그게 두려웠다.
기절하기 직전, 무거운 것으로 뒤통수를 맞은 감각이 떠올랐다. 그 전엔 모르는 사람들에게 쫓겼고, 공포감에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했었지?
결국 납치당한건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깨끗한 흰색 천장이 보였다. 일단 납치해서 가둬둘 만한 거친 공간은 아닌 듯 했다.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팔다리는 붙어 있나?
환상통이라는걸 들어본 적이 있다. 손가락이나 다리를 절단하고 나서도 그 부위가 아직 몸통에 붙어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는 감각. 만약 그런거라면...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여전히 흐린 시야와 명료하지 않은 정신 틈새로 한 사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콧속을 가득 채우는 지독한 소독약의 냄새 사이로 아는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건, 내가 잘 아는 사람의 향이었다.
클라이언트가 프랑스로 일주일 출장을 떠났다. 때문에 원래 소속인 미술관에 잠시 출근하는 중이었다. 출장 소식도 제윤이 아닌, 비서인 희우에게서 전달받았다. 어쩐지 섭섭함이 몰려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감정을 지워버렸다. 우린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그 사이 하영과 만나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익명의 발신전화로 알 수 없는 전화가 몇 번 왔지만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곤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시기를 살 만큼 잘난 삶을 사는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재산이나 탐을 낼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해치려고 드는 사람의 마음따위 내가 헤아려 줄 필요도 없었고, 그게 내가 간과한 부분이었다.
-갖고싶은 거 있어? 곧 경매장에 들어갈건데, 보낸 카탈로그 중에 마음에 드는거 말해 봐.
제윤이 새로운 수집품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줄 알고, 나는 태블릿을 연 뒤 그에게서 받은 pdf 파일을 넘기면서 물품번호를 몇 개 불러주었다. 대부분은 회화 작품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어쩌다 경매까지 흘러들어 온 현대적 디자인의 주얼리였다. 사진으로도 전달되는 루비의 붉은색이 핏빛보다 더 깊게 반짝이고 있었는데, 실물을 한 번 본다면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자의 길다랗고 고운 목에 기쁨으로 걸릴 만한 물건이었고, 감상용으로 전시하기에도 좋은 보석이었는데-크기를 보아하니 옛 귀족들이 하던 물건을 리세팅한 것인 듯 했다. 해체된데다 보석 자체를 재가공까지 한 터라 근원을 알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보석들은 '스토리'란 상상력을 더하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실물로 보면 더 대단할거야. 이따 연락할게.
그 날 새벽, 내 핸드폰엔 신제윤이 '낙찰받았어.' 란 문자와 목걸이 사진을 보낸게 도착해 있었지만 내가 그걸 직접 확인한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첫 큐레이션을 맡았던 전시 마지막날의 꿈을 꾸었다. 동료들이 축하한다며 품에 꽃다발을 잔뜩 안겨주었다. 크리스티안이 '축하해!'란 카드가 꽂힌 꽃다발을 퀵서비스로 보내준 것도 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온전히 해 낸 듯한 효용감이 무척 기분좋았던 기억이 났다.
집에 혼자 돌아왔을 때의 적막감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도.
유독 큰 행사를 마치고 집에 오면 느껴졌던 그건 감정의 공허라고 불러야 할까, 그저 내가 감당해야 할 성취의 단맛이었을까. 한가지 확실히 기억나는건, 여러번 겪어도 무뎌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선물받은 꽃다발을 처리하는 요령은 점차로 늘었다. 생화는 자칫하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생기를 잃기 쉬웠는데, 대용이 알려준 방법대로 하면 퍽이나 오래 감상할 수 있었다. 집 안에 꽃을 장식하는 생활은 생전 처음이었고, 그래서 행복감이 들었다. 동경하던 생활이 내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 같아서.
대용은 꽃다발의 리본을 풀고, 감싼 종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엔 여러 꽃들을 어떤 모양으로 재배치 해야할지 순식간에 머리에서 떠올리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컨설팅 회사가 아닌 꽃집이 그에게 어울릴거라 생각했고 자연스레 하영을 소개해줘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둘의 동업이 결정된 날, 대용은 꽃집으로 쓸 상가를 계약했다며 내게 튤립이 잔뜩 담긴 꽃다발을 선물해 주었다.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한 영향으로 나는 튤립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건 그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꽃 선물이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튤립을 좋아했다. 그깟 사람 하나 때문에 평생을 좋아하던 것 중 하나를 잃고싶지 않다는 오기가 반영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제윤이 분홍빛 장미 꽃다발을 든 채 내 앞에서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꽃다발을 옆에 내려놓고는,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 손바닥 위에 붉은 루비 목걸이를 손에 쥐어주었다. 생각했던대로, 루비의 색이 피처럼 검고 붉었다. 마치 사람의 몸 속에 흐르는 혈액처럼.
그가 몸을 숙인 채 달콤한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이제 꿈에서 깨어 날 시간이야, 차현아."
숨이 한순간에 폐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과 함께 몸을 찢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꿈에서 깨어난 대가가 이렇다면, 차라리 과거에 갇혀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어느새 내 손목을 쥔 제윤은 나를 거기 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네가 필요해."
어째서? 그런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꿈 속에서의 나는 목소리가 없었다. 눈 앞의 장미도, 그가 준 목걸이의 펜던트도 점차 흑백으로 바뀌어갔다. 내 세계에서 색이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꿈이었다. 아름다운 빛의 세계를 볼 수 없게 되는, 내가 맞닥뜨릴 지도 모르는 끔찍한 결말.
내 꿈은 애초에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적이 없었다. 물에 빠진 듯이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신제윤이 이끄는대로 이 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갔다. 이 흑백의 악몽에서 그가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습기가 느껴지는,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진 온실이었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흔들린 덤불에서 마른 가지가 하나 바닥에 떨어졌는데, 눈을 깜빡하는 순간에 사라졌다. 툭, 소리가 나지 않았던 터라 나는 내가 착시를 본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 마른가지는 내 시야에 들어왔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피어난 각양각색의 장미 향이 정신을 아찔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장미나무들은 칼로 베인 듯 날카로운 선을 자랑하고 있었고, 피어난 꽃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지만 이 공간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정원에 기하학적 가치를 더하는 것이야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초록의 잎사귀들에선 생기보다는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마치, 금속으로 잎과 꽃을 조각해 낸 뒤 그 위에 페인트를 덮어놓은 듯한 느낌이 났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서자, 정원의 중심에 커다란 와인색 소파가 놓여있는게 보였다. 플란넬 담요가 위에 덮여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커다란 발이 그 위에 걸쳐저 있는게 보였다. 희우가 저런 흐트러진 행동을 할 리가 없었으므로, 저 발의 주인은 집주인과 동일인물일 터였다.
오늘은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우니 아침에 늘 하던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전달받은 터라 이 뜻밖의 만남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초간 그의 자는 얼굴을 위에서 물끄러미 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미 이 표정을 알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그에게 안긴 뒤 다음날 새벽, 옆에서 이어지는 규칙적인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조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잘생긴 사람이 알몸인 채 내 옆에서 기분좋게 잠들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쇄골 아래의 근육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리 와."
신제윤은 눈을 뜨지도 않고, 자신이 누운 소파 옆의 빈 공간을 툭툭 두드렸다. 그 명령에 홀린듯 이끌린 내가 소파에 앉자, 그가 팔을 뻗어 나를 품 안에 가두곤 담요로 어깨를 덮어주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둘 다 옷을 입고 있었다.
"따뜻해..."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침까지 일하느라 잠이 모자라. 나 재워줘."
일반적인 사업체를 운영한다 해도 밤낮이 뒤바뀐 이 생체 패턴은 어딘가 석연찮았다. 필요한 경우엔 낮에도 깨어있긴 했지만, 주로는 밤에 움직이는 듯 했는데-해외 지점을 관리하는 것 때문에 호텔 오너가 이런 삶을 고수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윤은 내 속에 피어오른 의문을 눈치라도 챈 듯, 나를 더 세게 끌어안은 뒤 마치 어린애를 재우듯 등을 토닥였다. 도리어 그 소파 위에서 먼저 잠든 사람은 나였다.
"차현 씨, 반지 예쁘다. 새로 샀어?"
오랜만에 들른 사무실에서 선임 큐레이터가 알은체를 했다. 나는 엷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제윤은 내 신체 사이즈를 다 알고 있는게 분명했다. 왼손 약지에 끼워주는 반지의 의미를 알텐데도, 그는 그 손가락을 고집했다. 미리 주는 생일선물, 이란 말에 넘어가 이런 멋진 반지를 받아버린 나도 문제긴 했지만.
선물받은 반지는 루비를 메인으로 하고, 작은 다이아몬드를 여러개 박아넣은 디자인이었는데, 육중한 칵테일 링이라기 보다는 약혼반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게 정말 생일 선물로 받을만한 디자인이 맞는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마음에 들긴 해서, 출근할 때마다 착용하고 있었다.
그 선물을 준 사람은 일정이 있다며 또 해외에 나간지 두 주째였고 한참을 더 있어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나는 핸드폰에 뜬 알람을 보고 반색했다. 크리스티안이었다. 내 생일이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뜻밖의 얼굴이, 크리스티안보다 먼저 공항에 나타났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무심결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싱긋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미소가 무서웠다. 왼손 약지의 반지를 문지르고 있자니,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온 신제윤이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내 뺨에 키스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입술을 잡아먹혔을 것 같았다.
"마중 나온거야? 기쁜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걸 알고 있는 사람의 표정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왔다. 나는 제윤의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크리스티안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를 뿌리친 뒤 크리스에게 다가갔지만 이내 손목을 붙들리고 말았다.
"크리스!"
"플뢰르...아." 나를 발견해 환하게 미소짓던 크리스티안의 얼굴에 이내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신제윤이 붙든 내 손목을 세게 쥐었다.
그 힘싸움에서 이긴건 공교롭게도 신제윤 쪽이었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크리스티안 옆에 나타난 것이다. 한 명은 지난번에 내게 말을 걸었던 그 사람이었다.
"예전처럼 네 생일만을 축하해주러 들어오지 못해서...미안해."
"제가 잘 챙길테니, 일부터 잘 처리하시길." 제윤이 어쩐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것도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제윤이 이 상황을 의도했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걸 항의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그의 차 뒷좌석에 실려있었다. 내 손에는 크리스가 그 난리통에도 기어이 쥐어 준 종이상자가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리본 묶인 상자를 소중하게 매만지는 날 신제윤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무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처럼 미행이라도 붙인거야?"
"네 생일인데 같이 있어주고 싶어서, 일정을 앞당겼어. 그 반지, 잘 하고 다니네."
턱을 괸 그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민망함에 반지 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자, 그가 내 왼손을 잡아 당기더니 손등에 입술을 갖다댔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에 순식간에 나는 그와 보낸 밤들을 떠올렸다.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두려움을 음미하는 듯한 불타는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나의 망설임을 눈치 챈 그가 아예 자신의 품에 나를 끌어당겼다. "...아직 모르겠어?"
"어...?"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혀가 내 입술을 훑었다. 운전하고 있는 희우는 아랑곳 않은 채,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무릎 위에 놓여있던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시트 위에 눕혀져 있는 나는 그 상자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상자가 떨어진 방향으로 시선을 잠깐 주더니 이내 내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앞으로 네 세계엔 나만이 존재하게 될거야."
조금씩 쓰는 연습을 하는 중. 시간대가 뒤죽박죽인 것도 있고, 이어지는 것도 있는데 즉흥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줄줄 써 내려갈 수 있지만 생각보다 높은 턱에 막힐 때도 있다. 제윤이나 크리스티안의 속내가 전혀 표현되지 않는 상황이라 차현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느냐가 주안점이긴 한데...꽤 어려운 일. 제윤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고, 차현이 원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이게 되는 흐름까지는 도달했는데 이걸 차현이 어떻게 대처할지도 즐거운 작문 포인트.
제윤은 감정이나 생각을 대놓고 표현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그리고 이따금 '너는 왜 모르지?'라면서 자기는 다 표현하고 있다는 듯 굴고 있는게 캐릭터성인데-잘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다듬다 보면 확고해질지도?
크리스티안은 어쩐지 제윤에게 밀리고 있지만, 얘는 제윤의 진실(진짜 정체까지는 모르지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이번엔 밀려났지만 다음엔 과격한 수단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신제윤이 그렇게 하도록 둘지는...
차현은 하영과 대용에게 계속해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본인은 아닌 척 쿨하게 넘어가려 하지만 무슨 일만 생기면 하영, 그리고 대용과의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데-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무심한 척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상황판단을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누구보다 제윤과 크리스티안,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있는건 차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제윤이 '차현이 내 마음을 모른다'고 판단해서 과격하게 나온다면 버틸 수 있을까?
차현의 시점에서 차현, 제윤, 그리고 크리스의 '삼각 관계'를 주로 다루게 되었는데 중간중간 제윤의 진짜 정체에 대한 의문도 섞어보는 중. 오늘 습작 중에는 '밤낮이 뒤바뀐 비정상적인 생활패턴', '마른 가지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기묘한 온실'이 힌트.
'Writings > Di 245(BE, A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HG2 (0) | 2025.10.10 |
|---|---|
| HG1 (0) | 2025.10.10 |
| 메모장에서(습작) (0) | 2025.09.30 |
| 습작 중, 버리기 아까워서 (1) | 2025.09.12 |
| 습작 (1) | 2025.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