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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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메모장에서(습작)

alicekim245 2025. 9. 30. 11:03

전하영에 비해 나는 이목구비도 밋밋하고, 어딜 가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와 함께 연합동아리 행사에 지원을 갔을 때, 하영은 의전팀에 바로 선발되고 나는 등록 데스크에 마지막으로 지명되었고 나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외모가 보잘것 없다면, 얼굴을 그려서라도 만들어야 사회에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외모와 집안을 애초에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는 것도.

하영에게 접근하기 위해 날 이용하려는 일들을 몇 번 더 겪었고, 하영의 메이크업이나 스타일을 따라 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무조건 한 번은 돌아갈 만큼 예쁜 그녀를 내가 따라하는 건 뱁새가 황새마냥 다리를 찢어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걸 금방 알아버렸다.
그래서 포기하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전시회에 갔다. 거기서 동아리의 '아이돌' 취급인 신제윤을 마주쳤다. 조명이 어두웠고, 그는 어차피 날 기억도 못할 것이기에 옆에 나란히 앉아 베르메르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청금석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내 의견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소녀의 귀고리가 아닌, 머리를 감싼 푸른 터번을 매만지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은 시선을 공유하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체념하는 것이 쉽게 느껴졌다. 공간에서 벗어나면 두 번 다시 이 사람과 단 둘이 얘기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신제윤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지, 걱정하는 척 하며 나를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누군가는 두근거렸을 테지만, 연애감정이 피어날 리 없는 나라서 오히려 발이 아픈게 더 신경쓰였다.
"집에 가서 꼭 소독하고 자."
다정한 말을 저리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저 외모에, 재산에, 능력이라면 세상 사는게 얼마나 편할까? 인생에 딱 한번 뿐일 호의를 받은 채 집으로 향하는 내내, 기분이 아까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크리스티안은 내 기숙사에 들어오는데 전혀 거침이 없었다. 태도가 너무나 당당해서 태클을 걸 기회를 번번히 놓쳤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가 내 공간에서 달그락거리며 만들어 준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대로 먹고 다니긴 하는거야?" 어쩐지 엄마처럼 다정하게 구는 표정인데, 입은 옷은 다 찢어진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입은 영락없는 로커 스타일이라 나도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마치 찹쌀떡처럼 길게 늘렸다. "햄스터같네."
두 번째로 들은 말이라 크게 타격은 없었다. 한국에 있을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나는 금세 그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다 마시고, 저녁 먹으러 가자. 내 스튜디오가 이 근처거든, 부엌도 있고. 한국 라면은 좀 갖고 있어?"
"너, 설마 그게 목적인건-."

나는 늘 하영이 나보다 우위에 있고, 누구보다 주목받고, 사랑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영도 그 사실을 어릴때부터 깨달았고, 자신의 타고난 것들을 이용해 세상을 살아가는걸 개의치 않았다. 내게는 없는 것이었고, 손에 쥘 수 없는 것이어서 그저 부러워만 했다.
크리스티안은 하영보다 더 멋진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내게 휘두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 자신을 온전히 봐 주며 때로는 냉정한 평가를 저질렀다. 그의 격려와 평가에 깎이고 단련되면서 자신감을 잃기보다는 나 자신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하영을 통해 이런 변화를 경험했을지도 몰랐다.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

"너, 후원재단에 원고 보내면 원고료 좀 받는다고 했지?"
"어디의 사기꾼 같은 멘트 하지 말라니까?"
"됐고, 그거 다 들고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자."
"동네 사람들! 여기 외국인 유학생 갈취하는 부잣집 총각이...!"
"가보면 알아!"
그렇게 해서 처음 발딛은 곳이 명품 빈티지 샵이었는데, 크리스티안을 알아본 직원이 그와 몇마디 대화를 하더니 나를 잡아가는게 아닌가.
"이런거 살 돈 없다고!"
나는 양배추를 삶아 먹는 걸로도 충분하단 말이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 크리스티안을 막을 수 있는건, 그의 화구가방 속 물감이 떨어졌을 때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가지고 있는 색깔을 어떻게든 섞어서 원하는 색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천으로 엉성하게 가린 탈의실 바깥에서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노출이 너무 심해!"
"일단 입고 나와봐." 커튼을 걷고 바깥에 걸음을 내딛은 순간 그의 표정은 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몇 초간의 어색한 침묵 후 그가 헛기침을 하며 내 어깨를 잡고, 거울을 보게 했다.
"잘 어울려. 데리고 오길 잘했어. 너 진짜 이쁘다, 내 취향이야."
"마지막 말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화실 안은 역한 냄새가 가득했다. 조명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고, 암막커튼까지 쳐서 밝은 햇살은 조금도 발을 디디지 못한 이 한가운데 짙은 늪을 바라보는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크리스." 이름을 부르자 그의 연두색 눈동자가 나를 쫓았다. 손을 더듬거리며 어둠 속들 헤매던 그가 내 허리를 휙 끌어안았다. 그 손을 풀어내며, "약이라도 한거야?"라고 묻자 그가 팔을 뻗어 조명을 하나 켜 주었다.
"그런거 안하는거 알잖아. 대신 저 그림은 약을 했지."
"늪인가? 약쟁이들이 약기운 못이겨서 토하면 꼭 저 색깔일 것 같은데. 근데 냄새까지 재현할 건 없잖아."
"무슨 냄새가 난다고...?"
"늪이랑 역겨운 초록색 냄새가 나."
"너 말이야, 가끔 그런 공감각적인 멘트 자제해줘. 진짜 헷갈린다고. 근데 네 말이 맞아. 이건 약 하고 나서 널부러진 내 친구들 얼굴이야. 그리고, 물감에 뭘 섞진 않았어."

탕!
소리만 들어도 온 몸이 얼어붙었다. 자주 듣진 않았지만 연구실에서 들어야 할 소리도 아니었다.
"엎드려!"
크리스티안이 옆방과 연결된 쪽문에서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내 머리를 눌러 책상 밑으로 끌고갔다.
"저거 폭죽이야...?"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아니다. 저거 진짜 총소리야. 어떤 미친놈이 총 들고 대학에...문 잠그고, 불 다 꺼." 그가 능숙하게 방 안의 연구원들에게 지시한 뒤, 움직일 수 있는 가구들은 전부 문 앞에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게 했다. 동시에 학교 경찰로부터 '당장 대피할 것, 불가피하다면 각자 공간 안에서 숨어있을 것. 경찰 투입 중임'이란 문자가 도착했다. 이건 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크리스티안은 나중에 웃으면서 내가 그의 멱살을 너무 세게 잡고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선 총기 소지가 불법이라 저런 소릴 잘 들을 일이 없지? 너무 놀라진 않았어?"
"아직도 몸이 떨려. 영화랑 다르구나...다들 무사한가?"
"아니." 크리스티안이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세게 안아주었다. 그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 휴일 내내 한국 드라마 봤어." 뭘 봤는지 물어봐 주길 바라는 표정이라, 읽어야 하는 논문을 내려놓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드라마? 나보다 네가 더 한국 연예계를 더 잘 알거야."
"궁금한게 생겼는데."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넌 왜 나한테 질투 안해? 나 네 남사친 아니야?"
"무슨 드라마를 본 건지 짐작도 안 간다." 어깨를 으쓱했다. 남사친 여사친 사이에 질투하고 썸타고 그런 드라마가 어디 한둘인가.
"그리고, 내가 왜 널 질투해...?"
"우리 친구 아니야?"
"친구 맞아."
"남자 사람 친구가 애인이랑 데이트하는거 미주알 고주알 자랑하고 다녔으면 좀 질투도 하는게 한국 여자 아니야?"
그 말에 크리스티안의 이마를 일부러 콩, 하고 때리는 시늉을 했다.
"드라마에 나온 캐릭터하고 현실 사람을 동일시하면 안되지! 그리고 친구의 연애사업은 응원해야지 훼방을 놓으면 쓰나."
"그럼 난 네 수비범위 밖이야?" 오늘따라 집요했다. 듣고싶은 말이라도 있는걸까?
"수비범위 밖이라서 곤란해. 취향이라 큰 문제라고."
"왜 질투 안해?"
"예전부터 손에 넣을 수 없는건 갈망하지 않고 포기하는 방법부터 배웠으니까."
"그럼, 내가 네 손에 들어가 주겠다면?"
"크리스."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싼 뒤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크리스티안은 시선을 맞춰주지 않았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말해봐."
"진짜 너한텐 거짓말을 못하겠다......나 차였어."
"자, 오늘은 이 너그러운 권차현이 품을 내어줄게."
"더 해도 돼?"
"그건 안 돼. 진짜 소중한 사람한테 양보해."
그가 코를 목덜미에 묻고 칭얼대듯 문지르자,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신경이 짜릿하게 달아올랐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인데..."
"그 말을 신중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고민해줄게, 남사친님."

입국장에서 만난 크리스티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키가 한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플뢰르!"
그의 품은 여전히 크고 따스했고, 낯설지만 상쾌한 향이 내 몸을 가득 채우는 듯 했다. 그는 매년 내 생일날에 맞추어 한국에 들어왔고, 그의 손에는 새롭게 조향한 향수가 늘 들려있었다.
몇 년간은 그가 한국에 들어올 때 늘 가볍게, 혼자 왔지만 최근엔 그의 입국에 맞추어 누군가가 꼭 사람을 보내곤 했다. 그들이 나에게 '대체 누구시냐'고 물어본 적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크리스티안이 딱 나타나는 바람에 대답할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한국 대형 유통 체인의 계약 관리자이며, 그의 집안이 운영하는 명품 브랜드와의 계약을 원하기에 자신에게 접근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널 알아도 되는건 아니야."

"헤어졌다면서?"
그 말이 어쩐지 비수처럼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내가 잘못한 건 없었는데도.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탓했다.
"설마 내가 매년 널 보러 오는 것때문에 그래?"
"그건 아니야." 크리스티안은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걸 한번씩 못 견뎌 하던건 대용 쪽이었다. 마치, 나는 이런 '잘난' 친구를 둘 자격이 없다는 듯 힐난하는 말들이 돌아왔었다. 유학시절 날 구원해 준 친구라고 항변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대용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나를 떠났다.
"벌써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바쁠텐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 네 얼굴 보니까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
크리스티안에게는 멋진 애인이 있는걸 안다. 그리고 그 파트너도 크리스를 아껴주고, 그의 친구인 내 존재를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었다는 사실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관대할 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크리스의 곁에는 좋은 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선을 넘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결국 두터운 교분만이 남아 둘 사이의 오작교가 되어주고 있었다.

"안녕! 옆에 앉아도 돼?"
화사하게 웃는 여자애가 서 있었다. 나는 그 화려함에 사로잡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교재와 필기구를 꺼내다가, 내 시선을 인지하고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 우리 과 아니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반가워!"
"나도."
"너, 되게 얼굴 작다. 귀여워!"
"어? 나 별명이...큰바위얼굴인데. 그런 얘기 처음 들어봐."
"정말? 너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얼굴이 가장 작은데? 그런 이야길 산 사람들은 바보야. 내 이름은 전하영이야, 너는?"
"권차현. 미학과야."
"나는 경영학과야. 우리 과 진짜 달랐구나! 아무튼 잘 부탁해."
첫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비는듯 해 시계를 살피던 나는 하영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뒤에 공강이지? 나랑 카페 갈래? 미학과는 무슨 과인지 궁금해!"
악의없는 호기심이 그녀의 눈빛에 가득했다. 나는 그런 호기심을 무시할 만큼 냉정한 성격은 못되었다. 하영은 카페에서 자리를 잡자 마자 미학과는 뭘 하는 곳인지, 미술 작품은 어떤걸 좋아하는지 쉴새없이 묻고 내 대답을 들으며 신기해 했다.
"나는 꽃이 좋아. 특히 화병에 꽃을 장식해 두었을 때나, 꽃다발을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선물했을 때 그 표정들이."
"나중에 플로리스트로 진로를 정하려고?"
"응. 대학이야 부모님 기대 때문에 경영학과로 왔지만 역시 좋아하는걸 하면서 사는게 제일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근데, 나 너한테 하고싶은 말 있어!"
격식없는 말에 속절없이 내가 당하고 있는데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걸 익숙해 했는지도 모른다.
"연합 동아리 중에 재미있어 보이는게 있거든. 미술 작품 감상 동아리인데, 관심있어?"
"어? 그런 동아리도 있었어? 근데 나, 사람들이랑 잘 못 어울리는데..."
하영이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관심이 없는건 아니구나?"
가끔 살다 보면 휘말려도 좋을 순간들이 찾아오는데, 내게는 그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이런 자리는 도통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초라하게, 겨우 빌린 검은색 미니 드레스를 입은 채 기둥 사이에 숨어 있었다. 하영이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가 싶었는데,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곧장 걸어왔다.
"내가 못살아! 왜 이런데 숨어있어?"
"분위기가...익숙하지 않아서. 그나저나 목걸이 예쁘다, 잘 어울려."
"칭찬 고마워! 근데 너도 오늘 드레스 멋진데? 내 친구들 소개해도 될까?"
"아, 그건-."
"로르, 여기 있었네?" 넥타이를 하지 않은 가벼운 정장 차림의 남자가 샴페인 잔을 든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내게 시선을 잠깐 두는가 싶더니, 하영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여긴 내 친구 차현이야. 오늘 나랑 같이 왔어.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려고!"
"그래?"
"차현아, 이 사람은 빅터야. L사에서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고 있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악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장 하영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드는건 순식간이었다.
"잠깐만, 오빠. 제대로 차현이를 소개 못했잖아."
"그런건 됐고, 저기서 너 데리고 오라고 부탁받았어."
하영의 곤란한 기색이 얼굴 위에 드러나자, 나는 그녀를 더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자,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저 깊은 심연에서 용솟음 치듯 올라왔다. 나는 하영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걸 방금 전 그 남자의 태도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영은 분명 호의로 내게 참석을 제안했을테지만, 한 사람의 따스한 선의로 참석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부모도 없고, 물려받은 재산이나 막대한 배경도 없는, 저들의 눈엔 모래알처럼 많은 낯선 서민에 불과했다. 어쩌자고 이런 장소에 호기심만으로 나올 생각을 했던걸까.

"차현아."
수장고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자주 들르던 희우인 줄 알고 무시했었다. 하지만 저 목소리는 희우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걸 싫어하는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조명 아래 신제윤의 모습이 드러났다. 회색 스웨트셔츠 차림의 그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어수선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빨리 일어났네?" 하지만 스마트폰에 떠오른 시각은 오후 한 시였다. 그는 오전 아홉시 쯤 잠들어서 오후 늦게 일어나는 뒤틀린 생체시계를 갖고 있었다.
"일어나니까 네가 옆에 없어서. 더 잘 수가 없었어."
그리고 우리의 기묘한 계약관계. 나는 그가 낮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있도록 매일 낮, 그가 잠들기 전 한시간 가량 곁에 있어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의무가 있었다. 그의 수장고를 정리하고 작품 목록을 갱신하는 것이 주 계약사항이긴 했지만. 제윤은 가볍게 툴툴거리고는 내가 작업하고 있는 책상 옆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거기 있으면 방해되는데."
"오히려 내가 있으면 안심해야 하는거 아니야? 여기 물건들, 밤에 걸어다니고 말도 한다고." 또 실 없는 소리. 그 전엔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던 신제윤은 알 수 없는 포인트에서 비이성적인 말을 하곤 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유독 돋보이곤 했는데, 나는 하마터면 그로 인해 흐트러질 뻔한 정신을 끌어모아 일에 다시 집중하려 노력했다. 미술품을 보고 그들의 근원을 파악하는 것은 나를 언제나 사로잡는 일이었다. 그래서 금방 신제윤의 존재는 잊를 수 있었다. 뺨을 건들이는 따뜻한 머그의 감촉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어느새 내 업무용 의자 옆으로 바싹 다가온 뒤 커다란 종이 위에 펼쳐진 도식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살펴보는 중이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는 고용인에게 주는 일종의 보너스였다.
"생각해봤는데," 나는 그에게 18세기 회화 작품 목록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 작업은 더 잘 어울리는 전문가가 있을텐데 왜 나한테 맡긴거야?"
"너는 나와 작품을 보는 눈이 비슷하거든." 그가 어깨를 으쓱한 채 목록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키보드를 몇번 툭 툭 건드리더니 허공에 그림 작품 하나를 띄웠다. "네가 집중하는걸 보면 알 수 있어. 작업하면서, 내가 옆에서 빤히 보는 것도 모를만큼. 나는 내 콜렉션을 나 만큼 몰입해서 분석하고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한거지, 특정 시기나 주제의 전문가가 필요한게 아냐."
"아, 저 그림은......"
"이틀 뒤 소더비 경매에 출품될건데, 직접 보러 갈거야. 같이 가자."
"소더비에 나오는 다른 물품도 봐도 돼?"
다른 물품, 이란 말에 그의 눈썹 한 쪽이 치켜올라갔다.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가까이 다가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미처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알지 못한 채, 허리가 먼저 굵은 팔에 붙들렸다. 귓가에 속삭이기도 전에 향을 맡자마자 알았다. 크리스티안이 여기 왔구나. 하지만 내 동행자의 반응속도가 더 빨랐다. 상황이 파악되었을 땐, 이미 허리를 감쌌던 크리스티안의 손목이 제윤에게 거칠게 낚아채진 뒤였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고, 황급히 제윤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신제윤, 이 쪽은 내 친구야!"
"......" 하지만 그는 크리스티안을 향한 매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내가 억지로 그에게서 크리스의 손목을 빼냈다. 그의 흰 피부에 난 손자국이 붉어서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 괜찮아? 미안해."
하지만 크리스의 반응이 곧장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는걸 알았다.
"이 분은 이번에 나한테 프로젝트를 맡긴 클라이언트야. 갑자기 이런 일 겪게 해서 미안해.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봐. 손목 많이 아파?"
"플뢰르," 크리스티안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인 뒤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이 사람 누군지 알아. 그런데...너랑 같이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야. 당장 프로젝트 파기하고 미술관으로 돌아가."
"뭐?"
"이 여자는 내 파트너야. 그 손 놔." 하지만 되묻기도 전에 제윤이 내 손목을 세게 쥐어서 나를 그에게서 떼어놓았다.

"이거 놔!"
세게 잡힌 손목이 부러질 듯이 아팠지만 제윤은 객실로 들어와서도 나를 놔 주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홱 접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의 팔에 들려 화장대 위에 앉혀졌다. 지금 한 팔로 사람을 들어올린거야? 내려가려고 했지만 그의 단단한 양 팔이 나를 가둬놓았다.
방금 전까지 세게 붙들려 있던 손목에 그의 손이 다시 닿았고, 이윽고 팔을 타고 올라 온 몸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나듯 뜨거웠다.
"나는...다른 사람이 내 것에 손대는걸 아주 싫어해."
"내가 물건이야?" 발끈하며 되받아쳤지만 오히려 그의 커다란 손에 턱을 제대로 잡혔다. 그의 눈이 나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고동색 눈동자 안에서 황금빛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묻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그의 갈망과 욕망, 분노의 혼합체였다. 하지만 나를 향해도 좋을 감정은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네가 고용한 큐레이터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의 숨결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귓가에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지금 너와 나의 관계는 그럼 뭐지?" 촉촉한 입술이 귓불을 기습적으로 깨물자,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안돼......"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에게서 몸을 떼려고 하자,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숨은 가빠졌고, 눈 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의 뜨거운 손이 등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입고 있던 드레스의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옷에 가려져 있던 은밀한 부위에 그의 손이 닿자 곧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도, 지금 멈춰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싫으면, 지금 말 해. 그렇지 않으면...못 멈출 것 같으니까."
"이런 방식은 싫어."
"꽤 로맨틱하네. 그럼...이렇게 하면 괜찮아?" 그가 화장대에서 날 번쩍 들어 곧장 침대에 부드럽게 눕혀주곤 이마에 흐른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눈빛은 어느샌가 다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신제윤은 이런 표정을 오직 내게만 보여주었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그는 고개를 휙 돌린다거나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길에 패배한 허리가 초승달처럼 휘며, 호흡이 얽히는 소리만이 귓가를 지배했다.
"후회할거 같아?"
쇄골을 한참이나 지분거리던 입술이 목덜미를 지나 입꼬리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고, 그가 물었다.
"장난치지 마."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언제부터?"
"베르메르 전시회에서 널 만난 그 순간부터."
"그건...꽤 옛날이잖아." 하지만 그는 더이상 대답할 공기를 내게 남겨주지 않았다.
"나한테 집중해."

하영에게 화장하는 방법을 묻자,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윽고 그 커다란 눈에는 기쁨이 담겼다.
"정말이지? 나 한 번은 너한테 메이크업 해 보고 싶었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일은 어렵다. 상대가 거절하거나 불쾌해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거절의 경험들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애초에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을 피하게 된다. 나는 내가 가진 결점들을 감추고 싶었다. 겉을 더 단단하게 둘러싸서 누구도 내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만나기로 한 날, 하영은 아예 작은 회의실 예약을 해 버린 것으로 나를 놀라게 하더니 아예 본격적인 메이크업 박스와 고데기, 헤어드라이기까지 들고 와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은 이 전하영님에게 모든걸 맡겨! 근데...갑자기 화장은 왜 물어본거야?"
"아, 그게...전에 화장 혼자 하고 나가봤더니 안 어울린단 소릴 들어서."
"나쁜 사람이네." 하영은 나의 민망함을 나쁜 사람, 이란 말로 일축해버렸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짓, 함부로 하면 안 돼."

"청첩장 주려고 왔어, 오늘 여기서 열리는 연회에 꽃 장식 하러 올 일도 있었고." 하영이 흰 블라우스를 입고 와선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와서 축하해줄거지?"
꽃을 잔뜩 안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그녀에게서 대용과 똑같은 생화 향기가 잔뜩 풍겼다. 희고 고운 피부,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 조화롭게 들어가 있는 이목구비, 나보다 훨씬 키가 작아 남자에게는 귀엽게 느껴질 체격까지...내게는 없는 것들을 그녀는 평생 가지고 있겠지.
그녀가 건넨 청첩장에는 전하영이란 이름과, 얼마 전까지 내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던 심대용이란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영문을 모르던 직장 동료들이 옆으로 왔다가 하영의 청첩장 속 이름을 보고 얼굴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그 청첩장, 나도 한 장 주지 그래? 전 회장님의 경사인데 아직 청첩장을 못받아서 말이야."
그 순간 제윤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려퍼졌다. 하영이 반사적으로 뒤돌아섰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신제윤은 반색하는 전하영은 무시한 채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마주쳐도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영이 핸드백에서 흰 청첩장 봉투를 꺼내 홀린듯 그에게 건네주자, 그가 봉투 위 두 사람의 이름을 눈으로 읽었다.
"결혼 축하해." 그리고 그는 하영 앞에서 대놓고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현이랑 같이 참석할게. 참, 오는 길에 보니 꽃 장식에 문제가 좀 생긴 것 같던데 바로 보러 가는게 좋지 않겠어?"
하영이 얼굴을 붉힌 채 황급히 달려나갔지만, 내 어깨 위 커다란 손은 치워지지 않았다.

대용의 얼굴엔 커다랗게 금이 갔지만, 제윤은 은방울꽃 부토니에를 단 신랑은 무시한 채 나를 데리고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복도에는 온갖 화환이 놓여져 있었고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인파가 무시무시했지만,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여자들이 길을 내 주며 수근댔다. 작은 말자락 하나에 '남자가 아깝다'는 반응이 내게 실려와 살짝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유럽의 공주를 연상하게 하는 화사하고 풍성한 흰 웨딩드레스를 입은 하영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먼저 얼굴을 들이밀자 베일 밑에 살짝 가려진 하영의 얼굴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떠올랐지만, 뒤이어 나타난 제윤을 보고는 그 입꼬리가 지나치게 흔들렸다.
"결혼 축하해."
이 말을 네게 할 때는 즐거움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란 적이 있는데. 우리 세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사진작가도 감지한 것인지 직전까지 연신 눌러대던 셔터음이 일순간 멎었다.
"와 줘서 고마워."
하나도 고맙지 않다는 걸 안다. 네가 바라는건, 전 남친의 결혼식에 온 내가 누구보다 빛날 신부를 보며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끼길 바라는 것이었을테니까. 제윤이 안으로 몇 걸음 들어와, 하영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그는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이제 나가자.'라고 아주 짧게 말했고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며 신부대기실에서 빠져나왔다. 나오자 마자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힘이 셌다.
신부 측 데스크에서 제윤을 알아본 혼주가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먼저 건넸다.
"신 사장님이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영이가 청첩장을 드렸다곤 했는데, 워낙 바쁜 분이셔서."
초로의 신사는 멀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깔끔한 태도를 갖고 있던데다 나와 대용, 하영 사이의 일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제윤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에 답례를 했다.
"하영이는 제가 아끼는 후배이고, 전 회장님의 따님이니,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와야지요.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데스크로 다가가 하영의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누가 봐도 꽤 거액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두께였다. 그런데, 그 봉투 위엔 신제윤의 이름만 있는게 아니었다. 나는 어렴풋 그 글자들이 내 이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가자." 대용의 시선이 다시 따라붙은 것을 알아챘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붙든 채 말했다.
"오늘 너무 예쁜데, 집에 곧장 데려다 주긴 아쉬워."
"보통은...뷔페 가잖아?" 그가 무슨 말을 하는거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그래도 축의금 냈는데..."
"사람들 틈에 끼어서 식사하는 취미는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다른 사람들이 널 계속 보는거 싫거든. 내가 내 손으로 꾸며놨으니 오늘 넌 온전히 나만 감상할 권리가 있어."
"내가 물건이야?"
"너도 심대용이랑 같은 공간에 있는건 싫을텐데?"
"그건......"
"그럼 결혼식에 왜 온거지?" 그 말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왜 전 연인의, 그리고 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여자의 결혼식에 온 걸까?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미련이 남았어?"
"그건 아니야." 두 사람에게 미련이 남는다는 일 자체가 미련한 짓이었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사이 결혼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음악이 재생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장 안에 들어가 복도는 고요했다. 신부가 대기실에서 나와 입장을 위해 걸어오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제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게 무언가 말하려는 줄 알았는데, 하영이 보는 앞에서 내 목덜미에 입술을 가볍게 갖다댔다. 또각또각 울리던 구두 소리가 일순간 멈추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나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호텔로 가자. 이제 한계야."
그의 날카로운 눈이 나를 꿰뚫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귀가 끝까지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영을 데리고 오던 웨딩플래너가 신부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거의 제윤에게 반쯤 들린 채 나가느라 그녀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깜빡했는데, 원래 자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잖아."
"그러니 나를 더 신경써 줘. 쟤들 말고."

"너 결혼해?"
퇴근하고 오니 식탁 위에 청첩장 샘플이 가득이었다. 나와는 상의한 적 없는 일이었다. 대용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1+1에 대한 답을 말하는 듯이.
"어. 하영이랑 결혼해."
몇 년간의 연애가 이런 식으로 끝장날거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충격이 적었다. 우리 관계는 건조하긴 해도 희미하게나마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만났어?" 친구가 남의 연애를 궁금해 하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화 낼 기운조차 끌어모으기 싫었다.
"동업하고 얼마 안된 시점부터니까 3년 조금 더 됐나."
"그래."
식탁 옆에 툭 하고 내려두었던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여긴 더이상 내가 머물러도 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은 나를 만나자 마자 내 몸에 뭔가 피어나기라도 한 듯 꼼꼼히 살폈다. 무엇을 찾으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 사이에 나온 따스한 에스프레소 두 잔이 놓인 쟁반에는 각설탕이 네 조각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내 클라이언트가 무슨 사람 잡는 야차 취급을 당하고 있는 느낌인데."
"어제 말했지?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위험한 사람이니까 당장 프로젝트 파기하고-."
"크리스. 나는 지금 그 사람의 수장고에서 내가 보는 작품들이 재미있어. 그것 뿐이야."
"정말 그것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그의 말에, 어제 밤 내내 제윤에게 잡혀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최수현 이사장도 이상하네. 널 아낀다면 오르비스 오너한테 널 보내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평범한 호텔 오너 아니야? 왜 그렇게 경계 해?" 밤낮이 뒤바뀌어 있고 가끔...알 수 없는 비이성적인 소리를 평범하게 하는 것 빼면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의 경계는 내게 아직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를 아직도 아껴주는 것 같아서 기뻐, 크리스."
"그걸 알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한 번 시작한 프로젝트를 중간에 그만두는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래서 나 유학도 예정보다 4개월 더 있었잖아, 자비 들여서."
내 말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쇠고집."
크리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처럼 없는 일이라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나는 그의 시선 끝에 신제윤이 서 있는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크리스가 나를 홱 끌어안더니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곤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널 그냥 자유롭게 두고 싶었는데, 저 사람은 진짜 위험해. 너랑 어울리지 않아. 나랑 같이 가자."
"또 그 소리...싫어. 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
"플뢰르...정말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그의 다음 입맞춤은, 어느샌가 우리 테이블에 나타난 제윤에 의해 저지당했다. 신제윤의 눈이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시를 붙였거나, 직접 감시를 했거나. 어느 쪽이든 용인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
호텔 자체를 옮기기 보다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짐을 챙기고, 공항까지 가는데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친밀하게 살을 맞대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사람에게서 나는 전력으로 멀어지려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은 한국에 도착하면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내가 1등석 라운지에서 우아하게 코냑을 마시고 있던 신제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는 눈짓으로 내게 들어오라고 '명령'했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거부한 채 이코노미 석에 탑승할 손님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면 그도 어찌 나서지 못할 거란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탑승구에서 티켓을 제시하자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승객분께서는 좌석 업그레이드 대상이셔서, 이 좌석이 아닌 다른 좌석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분명 그의 농간이었겠지만, 내가 원래 배정받은 좌석을 고집하면 승객 한 명이 탑승하지 못한다는 승무원의 말에 결국 그들이 말한대로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건 갑질이야."
"아니면, 비행기에서 내려서 다음 비행기를 타던가."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을 붙여서 감시했어?"
"전에도 말했지만, 난 내 물건에 누가 손 대는걸 극도로 싫어해."
"전에도 말했지만, 난 물건이 아니야 이 개자식아."
"그래? 이제 싫어도 알아챘겠지만 난 네가 그토록 노력해서 손에 쥔 모든 것들을 다 부숴버릴 수 있어. 오늘 겪은 일은 티끌에 불과해."
그는 무시무시한 협박의 말을, 승무원에게서 따뜻한 물티슈를 받아 손을 닦으며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피냄새 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손을 닦아낸 물수건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분명 수건은 여전히 희고 깨끗했는데도, 나는 거기서 선홍색 핏빛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자기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다음 일은 한국에 도착하면 그때 고민해봐도 좋아. 다만, 기억해 둬." 속삭이는 목소리가 애태울 듯 아련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때, 날 밀어내지 않은건 너야."

희우였다. 조심스러운 노크 후 수장고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조명 아래 여전히 작업 중인 나를 발견하고는, 안도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돌아오셨네요."
"아직 프로젝트 맡은게 덜 끝났는데, 안 돌아오는게 이상하죠. 수장고에는 무슨 일이예요? 혹시 소더비에서 낙찰받은 미술품이 도착했나요? 연락받은게 따로 없는데..."
"아뇨, 그게..."
그 답지 않게 말끝이 흐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희우는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내게 비타민 음료 한 병을 건네주었다. 내가 종종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 찾아 마시는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 계신건 비밀로 할테니, 이따 퇴근하실 때 뒷문으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뉴욕에서 나와 제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걸, 제 고용주의 행동이나 말투로 눈치챈 듯 했다. 나도 지금 제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그 일을 떠올리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황홀한 밤은 생전 처음이었고, 그는 세상에 오직 나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엔? 그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 마저도 통제하려 했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존중하는 친구까지 내게서 절제하기 위해 감시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의 말에는 제윤의 이런 성정 외에도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걸 추측할 수 있었지만, 내가 직접 보거나 겪은게 아니었다.
하지만...지금 하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지 못하는건 마뜩찮았다. 이건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심이 들었다.

"권차현.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넌 내 수장고를 정리하는것 때문에 여기 남은게 아니야." 제윤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툭, 툭,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잡아먹을 듯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시선만으로 그가 내 얼굴의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착각은 네가 하고 있어. 하룻밤 같이 잤다고 내가 네 애인이라도 된 줄 알아? 난 큐레이터라고. 수집하기만 하고 정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수장고를 맡은."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내가 여기 다시 들어왔을 때 그런 표정을 지어보이진 않았겠지."
그와 나의 미묘한 거리감이 순식간에 좁혀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눈동자 색깔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었다.
신제윤의 눈동자는 어두운 고동색이었지만, 그 안에 황금빛이 감돌았다. 마치 금맥이 들어간 광석처럼. 눈을 바라보자 저절로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매만지게 되었다. 그의 숨이 한순간 멎는가 싶더니, 떨리는 숨결이 되돌아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대체...어디까지 나를..." 그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워, 살갖을 태워버리는 듯 했다. "...망가트려야 만족할건데."
대학생 시절, 누구나 공평하게 약간의 관심을 주며 모두의 위에 군림하던 남자 입에서 전혀 들을거라 기대 못한 말들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신제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싶었다.
여자를 너무 안 만나서 갑자기 제정신이 아니게 된건가? 나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잠시는 그런 착각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선 위치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집착도 부잣집 도련님의 한 때 투정에 불과하리라.


삼성 메모장 기준 32페이지. 시간의 흐름은 뒤죽박죽, 가끔 등장인물이 헷갈릴 때도 있지만 1인칭 시점을 연습하고 있다. Claude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여러 시점(인칭)을 쓸 수록 글에 설명적인 어조가 묻어나오는 단점이 있다.
시점을 제한하는 연습을 통해 읽는 입장에서 화자가 아닌 다른 등장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술하지 않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 이번 연습의 주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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