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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마법사 공무원 (4) 본문
4.
한편, 제윤이 혼자 따스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시각–차현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자신을 데리러 온 서율의 손에 이끌려, 관리국 안에 있는 카페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공중에 날아다니는 나무 트레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계적 장치로 연결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마법만이 걸려있어 직원들이 주문한 메뉴를 싣고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카페 바깥으로 나가는 트레이도 있었다.
“과장님, 인기 많으시네요.” 모르는 척 하려고 해도, 시선이 이정도로 모이면 아는 수밖에 없었다. 서율이 차현을 데리고 카페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모든 여직원들의 시선이 신서율을 향하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개의치 않는 듯, 테이블에 놓인 주문용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면서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음료는 어떤 걸로 할래?”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흐음. 초코모카 두 잔.” 서율은 차현의 의견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음료를 두 잔 장바구니에 넣은 뒤, 핫 샌드위치도 두 개 포함해 주문서를 보냈다. 차현이 ‘왜 내 커피 취향 무시하냐’고 발끈했지만, 서율이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특유의 씩 웃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언뜻 차현의 등 뒤에서 여직원들이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세상 복잡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무슨 아메리카노야. 단 거 마셔, 단 거. 안그래도 신무영 과장이 우리 과에 잠깐 들렀다 갔어. 아무래도 비서 최장 근무기록이 가볍게 갱신될 것 같다고. 그 신무영 과장이!”
“총무과장님이 뭐 어때서요. 그리고 무슨 이야길 들은거예요, 대체?”
서율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 했다. 차현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신서율이 저런 반응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아마 서율이 순순히 말해줄 것 같진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서율을 앞에 두고 한숨을 푸욱 내쉰 차현은, 이윽고 트레이에 담겨 날아온 초코모카 한 잔을 손에 쥐었다. 그의 말마따나, 단 것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기분이 확실히 나아지긴 했다. 아무리 일이어도, 다른 부서 직원한테 이거해라, 저거해라 명령조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기로.
“과장님, 오랜만이예요!” 그 때, 낯선 목소리가 서율과 차현 사이를 파고들었다. 테이블 위에 살포시 얹어지는 기분좋은 꽂향기, 부드럽게 잘 관리된 손톱에는 연분홍색 젤네일이 반짝이고 있었다. 굳이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지 않아도, 오히려 그 여자 쪽이 서율과 거리를 좁힌 덕에 찬찬히 살펴보기 편안했다.
“어디의, 누구였지?” 서율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여자는 눈을 흘기며 그의 팔짱을 꼈다. 큰 가슴이 팔에 닿는게 분명히 보였는데도 신서율이 움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차현의 눈에 더 신기하게 보였다. 그녀가 치근대는 덕분에 차현은 여자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광택이 감도는 미니스커트에, 자신의 다리를 돋보이게 해 줄 9cm는 되어보이는 스틸레토 힐, 가슴의 굴곡이 돋보이는 프릴 블라우스와 거기 어울리는 붉은 립과 굵게 말아 찰랑이는 헤어스타일까지. 차현의 상대적으로 ‘단정한’ 차림과는 대조적인 차림에–저절로 주눅이 들고 말았다. 거기다, 시선을 돌려보니 신서율 근처에 일부러 앉아 그에게 시선을 보내는 여자들은 거의 다 그런 스타일이었다.
차현이 아무말도 않고 초코모카가 든 머그잔만 만지작거리자, 신서율은 여자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 다음, 능숙하게 돌려보낸 뒤 찬찬히 차현의 눈을 살폈다. 차현의 심정은 이미 저 깊은 심해로 쳐박힌 뒤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말았던 것이다. 키는 제법 큰 편이었지만 평평한 몸매에, 머리카락도 관리하지 못해 부스스했다. 그런 주제에, 신발은 서율이 오늘 아침 선물해 준 제법 좋을 것을 신고 있었다.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던 신발만이 유일하게 차현에게서 반짝이는 것이란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분이 비참해졌다. 조금도 바뀐게 없는데, 뭐가 첫 출근이라고 그렇게 아침에 열을 냈던가 싶었다.
“차현아?”
서율이 조심스럽게 차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에 염려가 담겨있는게 싫었다. 그래도, 도움은 필요했다. 어쩐지 신서율이라면, 자신의 고민을 비웃지 않고 흔쾌히 도와줄거란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오늘 퇴근하고, 쇼핑 같이 가줄래요?”
예상과 다른 말이었는지, 서율이 차현의 앞에서 3초간 정지했다가 이내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는 자기 일정을 확인도 않고, 흔쾌히 ‘그러자’라고 대답하곤 차현에게 몸을 가까이 붙여서 앉았다. 조금만 기울이면 어깨가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는 신나게 지도를 보며 ‘어디로 가서 쇼핑할까’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가게는 오피스 룩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어. 단정한 스타일부터 조금 대담한 타입까지.” 그의 설명에 문득 차현이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과장님, 어떻게 여성복을 그렇게 잘 아세요……?” 당황하라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서율은 전혀 거리낌없이 대답해주어서 오히려 차현을 당황하게 했다.
“여성복 라인이 진짜 끝내주는게 많거든. 입는건 취향 아니지만 입히는건 취미 중 하나라서. 진짜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서 입은 모습을 보면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그러니까, 날 쇼핑 파트너로 선택한건 정말 네 인생의 베스트 초이스 중 하나가 될거야.”
사실 이 사람에게 아까 차현의 표정이 들켰을 것을 안다. 자신과 다른 스타일의 여직원들을 보면서 위축되었던게 다 티가 났을거다. 그런데 신서율은, 차현이 그런 것을 인지하고 부끄러워할 틈 조차 주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차현의 생각을 꽉 채워주려 하고 있었다.
“이따가 저녁에 퇴근하고, 데리러 갈게. 본부장실 앞에 나와있어.”
가는 방향이 정 반대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신서율은 그예 차현을 본부장실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에스코트가 과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전에 비서실의 내선전화가 울리는게 문 밖까지 들렸다. 다급히 뛰어 들어가려던 차현의 손목을 서율이 잡았다. 힘 있게 꽉 쥔 것도 아니고, 금방 풀릴 것처럼 가볍게 쥔 것도 아닌 세기. 차현은 미묘한 힘에 자기도 모르게 서율에게 몸을 돌려, 그의 눈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까 카페에서 보였던 가벼움과 다른 진지함이 담겨있었다.
“아까 그 여직원들이랑 널 비교하지 마.”
“예?” 아주 바보같이 들렸을 반문이었음에도, 서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오늘 출근할 때부터 다른 남자직원들이 계속 너 흘끔 보고있던건 모르지? 바보같기는. 오늘 쇼핑 같이 가 보면 알게 될거야. 너, 설마 자신이 못생겼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는건 아니지?”
“예쁜 건 아니잖아요. 사실이 그런걸.” 차현의 꾸밈없는 대답에 서율이 대놓고 한숨을 쉬며, 비어있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봐요, 권차현 주무관.” 그러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달콤했다. “너 아파서 잠들었던 날, 옷 갈아입히면서 내가 얼마나 참은 줄은 모르지?”
“야!!!!!” 사자후가 복도에 울려퍼지자, 서율이 잽싸게 차현의 손을 놓고 자기 사무실로 사라졌다. 차현은 그를 쫓아가지 못하고, 비서실로 뛰어들어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들기 전 짧게 심호흡을 하지 않았더라면–하마터면 헉헉, 거친 숨소리로 전화를 받을 뻔 했다.
그건 타이밍 좋게도 신제윤 본부장의 전화였다.
정시에 퇴근하는게 몇 년 만이더라. 차현은 신무영이 남긴 ‘카펫 교체 공지’가 찜찜하긴 했지만, 서율이 정말 비서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망설임없이(신제윤은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린 채) 그와 함께 쇼핑몰로 향했다.
정말 옷가게의 직원은 신서율을 알고 있었고, ‘네가 또 다른 애인이로구나’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차현은 그 사실이 일단 너무 웃겼다. 신서율과 자기가 애인이란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어서. 그리고 그 다음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서율은 차현이 ‘생각할 틈’ 자체를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그 가게에 새로 입고된 신상은 전부 한 번씩 입어보게 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기장의 하이 웨이스트 스커트, 검은색 슬랙스, 화려한 꽃무니의 블라우스, 푸른 실크로 만들어진 셔츠, 허벅지가 절반 넘게 보이는 미니 원피스까지–옷을 갈아입다가 진이 빠진다는게 무엇인지 알아버릴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었다. 서율이 옷을 골라주고 그걸 입고 나올 때마다, 차현은 자기가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조금씩 눈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전에 옷을 사러 갔을 때는, 무조건 할인하는 옷, 아니면 한 번 보고 마음에 든 것을 무작정 사 오고 나서 후회하는 일들이 반복이었다. 점원이랑 옷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고, 무엇보다 옷을 입고 나오면 사람들이 보는 시선이 불편했었다. 그런데, 신서율과 같이 옷을 고르는 이 상황에선 그 어떤 불편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서율은 냉정한 평가자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열렬한 코디네이터가 되기도 하며 차현을 드레스룸에 몇십 번이나 들락날락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품평과 감탄사는 오로지 차현만을 위한 것이었다.
“과장님……나 이제 진짜 지쳤어요.” 차현이 애원을 해도 서율은 이내 다른 가게까지 넘어가서 옷을 고르게 했다. 결국 두 시간 넘게 네 곳이 넘는 옷가게의 마네킹 역할을 하고 나서야 차현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겨우 가게의 푹신한 의자에 앉은 차현은, 서율이 그 산더미같은 옷을 다 결제하려는걸 겨우 말리고는 몇 개만–서율이 ‘강력 추천’한 것들 위주로–고르고 카드를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저, 이렇게 옷 많이 사본거 살면서 처음이예요.”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마에 땀이 송글, 맺혀있는 서율이 차현 옆에 살짝 앉아서 씩 웃어보였다.
“그렇지? 옷 입혀보면서 이렇게 신나기도 오랜만이다, 나도. 덕분에 즐거웠어. 그런데, 지금 뭐 봐?” 서율이 기가막히게, 차현의 시선이 닿는 곳을 알아차렸다. 방금 전 옷을 마지막으로 산 가게 맞은편에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무릎이 살짝 보이는 기장의 딥 버건디 컬러의 H라인 스커트였다. 앞이 트여있는 스타일이라 걸을 때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스커트는 이 가게로 올 때부터 차현이 눈여겨 보던 것이었다. 차현의 시선이 거기 맺혀있는 것을 본 서율이 차현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차현은, 옷을 막 입어보면서 정신없는 와중에 서율이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걸음을 그 쪽 가게로 옮겼다.
‘네가 마음에 드는거. 그게 바로 네 취향이야. 넌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고.’
그날 밤, 차현은 옷 상자를 정리하다가 자기가 고르긴 했지만 결제하지 않았던 옷이 몇 장 더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신서율에게 빚을 더 진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옷장에 아직 남아있는 원피스에 눈이 갔다. 구둣발에 짓밟혀 찢어지긴 했지만, 차현이 처음으로 ‘고심해서’, ‘마음에 들어’ 고른 옷이었기에 세탁 후 옷장에 보관해 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옷이 아주 초라해보였다. 아까워서 남겨둔 것이지 앞으론 입을 일이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옷걸이에서 그 원피스를 빼낸 뒤, 버릴 옷을 담아둔 상자에 던져넣었다.
이윽고 오늘 쇼핑할 때 같이 산 화장품과 악세사리들도 가방에서 꺼냈다. 진주가 반짝이는 귀고리 한 쌍, 차현의 입술색과 잘 어울린다며 서율이 기어이 사 준 립밤 하나, 벨벳 스크런치도 악세사리들 틈에 끼어있었다. 이전의 차현이라면 ‘거추장스러울거야’라고 생각한 채 스쳐 지나갔을 물건들. 자신의 집 화장대에 그것들을 가볍게 올려놓자, 이제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집이 채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까짓게 무슨 사탕이야!
순간, 머릿속을 채우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부모에게 졸랐지만 손에 넣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손에 넣었던 딸기사탕을 뺏기고, 바닥에 던져저 부서졌던 광경. 오빠란 사람은 차현이 성당 수녀님의 심부름 값으로 받은 오백원으로 겨우 산, 그리고 차현이 너무나도 맛보고 싶어했던 딸기사탕을 우악스럽게 빼앗고는 바닥에 던지고 짓밟았었다. 부모는 그 모습을 보고도 오빠를 나무라지 않았다. 너무 잘나고 소중한 아들이었으니까, 오히려 그게 그들에게는 당연한, 훈육의 결과였다. 작고 왜소하고 못생긴 딸은 그들에게 그저 거추장스러운 혹이었다. 완벽한 가정에서 유일하게 없어져야 할 존재.
차현은 립밤의 딸기향을 맡았을 때, 그 기억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 얄궂게도, 그건 차현의 기억 속 딸기사탕의 향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실리콘 립브러시를 꺼내 그 립밤을 듬뿍 떠서 입술에 펴 발랐다. 그러니까, 이 립밤은 그 사람들이 빼앗아갈 수 없는 차현만의 것이었다. 그 세 사람은 아주 오래 전에 차현의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용서도 복수도 못한 채 단절되어버린 시간 탓에 차현의 기억엔 아직 그 때의 광경이 남아있었다.
차현은 무릎을 세운 채 거기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웅크린 채 있었다. 얼굴을 들었을 때, 부드러운 잠옷의 무릎에 물기가 묻어 축축했지만 속은 조금 후련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걸 손에 넣어도, 누구도 빼앗아가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었고, 가져도 되었다. 그걸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하는 걸 고를 수 있었다’는 기억이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오래 전 잃어버린 딸기사탕의 맛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차현은 지금 입가를 은은하게 채우는 이 딸기향이 자신의 평생을 따라다닐 것을 알았다.
4.1.
신제윤은 막 출근해, 책상 위에 서류가방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 때, 신서율의 인스타 릴스에 사진 하나가 올라와 무심결에 누르고 말았다.
‘또, 애인 옷을 사 주러 간 걸 자랑하는건가.’
익숙한 사진이어서 그냥 신경 끄려고 했다. 그런데, 와인색깔 스커트를 집고 있는 손이 묘하게 낯익었다. 그리고 이윽고 떠오른, 자신의 셔츠 목깃을 거칠게 잡아채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권차현?’
이 두 사람, 하루만에 같이 쇼핑을 갈 만큼 친해진건가. 아니면, 사귀는건가. 신제윤의 머릿속에 갑자기 여러가지 가정들이 떠올랐다. 그는 신서율의 행동패턴을 잘 알았다.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는 거침없이 대시하고, 자기 취향의 옷을 입히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인스타에 슬쩍 올리는 사진 속 여자들은 같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번 사진에는 자신의 ‘비서’가 들어가 있었다.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러니까, 품위유지 차원에서–신서율과 자신의 비서가 잘 지내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선 권차현이 신서율의 ‘마수’에 넘어가지 않고 사무실에 제대로 출근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막 출근한 차현이 본부장 집무실의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신제윤은 결재 서류에 서명을 위해 집어든 만년필을 하마터면 검은 카펫 위로 떨어뜨릴 뻔 했다. 권차현이, 아까 그 사진 속에 자기가 집어 든 스커트를 입은 채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차현의 베이지색 구두에서부터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와인색 스커트에 이어, 속살이 살짝 비칠 것 같은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아랫부분에 컬을 넣어 단정하면서도 우아하게 꾸민 머리카락과, 적당히 구색을 맞춘 화장.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 차현에게는 왠지 모르게 당당한 태도마저 느껴졌다.
“오늘 회의 일정 중 변경된 것이 있어서, 일정에 업데이트 해 두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침 일정은 따로 없으신데, 아메리카노 따뜻한 것으로 내려드릴까요?”
그런데 정작 이 변화의 당사자는 자기 상태가 어떻게 신제윤에게 받아들여지는 줄도 모른 채, 태연하게–아니 자연스럽게 제윤의 커피를 챙겼다. 제윤은 차현의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선이 자꾸 와인색 앞트임 스커트로 가는 것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건 부자연스러워. 옳지 못한 일이다.’
속으로 애국가를 몇 번이나 불렀을까, 차현이 에스프레소를 책상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고 나간 뒤에야 제윤은 속에서 깊은 한숨을 불러냈다. 차마 그녀 앞에서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저 빌어먹을 스커트에 시선을 빼앗긴 자기가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져, 양 손으로 얼굴을 부벼 마른세수를 했다.
“신서율, 이 개자식.”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서율이 명확한 의도를 갖고 저지른 짓이 분명했다. 딱 한 번, 신서율이 가지고 있던 패션 잡지들을 손으로 훑어보다가 오피스룩에 시선이 몇 초 오래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한 것이다. 대놓고 놀리지 않더니 이제와서 아주 치졸한 방식으로, 그것도 권차현을 통해 제윤을 곯려먹고 있었다. 신제윤은 양 셔츠 소매에 암가터를 단 뒤, 자리에 단정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엔 속절없이 당했지만 오후엔 저 스커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4.2.
“이게 정말, 본부장실에 필요한 커피머신의 금액이 맞나요?”
차현은 갑작스런 신무영 총무과장의 호출에, 총무과 사무실에 와 있었다. 그녀가 며칠 전 올린 비품 구매 신청서에 떡 하니 적혀있는 커피 머신의 가격을 본 무영이 점잖게 ‘잠깐 총무과로 와 달라’는 전화를 했던 것이다. 가끔은 비서실에서 나와 기분전환도 하라는 신무영 나름의 배려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는 차현이 제출한 물품의 견적서와, 다른 커피 머신의 견적서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고심중이었다. 보통 사무실에서 갖추는 전자동 커피머신과 다르게, 에스프레소를 제대로 가압식으로 추출할 수 있는 기계였고, 카페에서나 쓸 법한 크기의 물건이었으니 고민하는 것이 당연했다.
신무영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차현을 바라보았다. 기존에 그가 대리하던 본부장의 비서 역할을 며칠 안에 확 휘어잡아버린 것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이런 의외성이 툭툭 튀어나올 때면 솔직히 웃음을 멈추기 쉽지 않았다. 이 당돌함이라니. 그 덕에 아마 이전 조직에선 적응 못했을 거란 추측도 함께 그의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이유를 설명해줄래요? 알잖아요, 일반적인 요청이 아닌 것.”
그가 점잖게 차현을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차현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녀가 커피머신 견적서를 슥 훑어보더니 말했다.
“본부장실에서 근무해 보니 깨달은게 있습니다.”
“깨달은 점?”
“네. 본부장님의 업무 효율은, 그 날 커피가 얼마나 맛있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요.”
차현의 이 말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처음엔 그냥 탕비실에 있는 전자동 커피머신으로 싸구려 원두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머그잔에 따라 내 주었다. 그 날의 업무효율은, 1을 기본치로 잡았을 때 0.5 정도만 발휘되었다. 차현은 그날 신제윤이 결재한 문서들을 다른 부서에 배분하고, 서류를 편철하고 캐비닛에 보관하느라 오후 9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했다.
다음엔 관리국 내 카페에서 가져온, 신선한 풀 로스팅 원두로 만든 아메리카노. 그날 업무 효율은 다행히 1에 가까웠고, 차현은 오후 6시를 조금 넘겨서 퇴근할 수 있었다.
차현은 이 상관관계에 주목하여, 커피를 다양하게 바꾼 시도 끝에 ‘좋은 커피머신, 좋은 원두로 에스프레소를 먹인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실제로 그에게 각설탕 두 개를 넣은 에스프레소를 아침에 건네주었을 때, 오전에 그가 결재하는 문서의 수가 에스프레소를 투여하지 않은 날의 1.5배에 달했다.
그녀의 이 당찬 설명을 듣던 무영은 저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실제로 신제윤이 결재를 많이 해 준 날과, 차현이 딱 짚어준 날짜(에스프레소를 ‘투여’한)가 정확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결론은!” 무영의 끄덕임에 신이 난 차현이 책상 위에, 자기가 구입을 요청한 커피머신의 견적서를 탁 올려놓으며 말했다. “고성능의 커피머신, 맛있는 원두, 일 빨리하는 본부장님, 모두의 퇴근, 노 추가근무. 어때요?”
무영은 하마터면 그녀의 말에 박수를 쳐 줄뻔 했다. 대신, 이마를 짚으며 일부러 ‘고심하는 척’했다. 한번에 원하는 물품들을 흔쾌히 사 줄수는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랬다간, 차현이 다음에 본부장의 요구사항이란 핑계를 들며 뭘 사달라 할지 예측 불가였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 척을 더 하다가, 일부러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요청서 하단에 푸른색 잉크가 든 만년필로 서명했다.
“앗싸!”
“차현 씨, 그런 말투는 본부장님 앞에서 쓰지 마세요.”
“커피 기계 들어오면 과장님도 자주 드시러 오실거죠? 원두 좋은걸로 구해둘게요.”
어쩜 저렇게 좋아할까. 무영은 즐거워하는 차현을 보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다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기 물건이 아닌데도 ‘이 비품을 사달라’는 요구를 당당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게 통과되니 꼭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왜, 왜 웃으시는건데요!”
“그게, 차현 씨,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요. 보통 직원들은 자길 위해서 비품을 사달라고 하거든요. 업무적인게 아니라 심지어 본부장의 업무 효율 향상인게 진짜, 정말,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서.”
한참을 옅게 웃은 무영은 얼굴이 약간 빨개진 차현을 앞에 두고, 손가락을 튕겨 막 결재를 마친 서류를 구매팀으로 넘겼다.
“가능한 빨리 구입해달라고 얘기해 둘게요. 업무 효율 향상,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차현이 바람같이 비서실로 돌아간 직후. 무영은 자신의 편안한 사무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방금 전 차현의 멘트를 곱씹었다. 업무에 능숙한 어른인 것 같다가도, 저럴 때 보면 진짜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만약 여동생이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매일 굳은 얼굴로 직장에 다녀와서는, ‘오늘은 누가 괴롭혔어~ 힘들어!’라고 집에서는 칭얼대는 여동생. 그런 모습을 상상하자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썩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4.3.
관리국의 직원들이 밤새도록 일하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내 온전한 뜻은 아니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런던 쪽에서 들어온 IWC(Internatioanl Wizardry Conference) 관련 요청 때문에, 비서실의 권차현을 비롯해 총무과, 약재연구과 직원들 모두가 철야를 한 다음날이었다. 일부는 도중에 잠들기도 했다고, 나중에 신무영을 통해 알았다. 나는 나대로, 그 쪽 담당자들과 직접 영상통화를 하고 의제를 조율하는 한편, 타국에서 약재가 들어오는 일로 외교부나 기술과학부와 협조할 일이 있어 정신없이 밤을 새웠다. 차현이 최근에 바꾸어 준 커피머신에서 내린 커피는 그 철야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새벽 세 시쯤, 신서율이 다크서클 가득한 상태로 본부장실을 제집인 양 들어와,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능숙하게 뽑는 걸 보고 한소리 하긴 했다.
“여기가 네 집이냐, 신서율.”
“어쭈,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이 기계, 차현이가 자랑하더라고. 커피 맛이 그렇게 좋다며? 네 덕에 다들 철야하는 거니까 이 정도는 양보해라.”
솔직히 좋은 기계이긴 했다. 그래서 더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신서율이 내 비서를 격의없이 ‘차현이’라고 부르는게 무척 거슬렸다. 어쨌건 철없는 둘째형은 에스프레소를 그 자리에서 원샷하더니, 휘적휘적 본부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두시간쯤 지났을까, 바깥에서 인기척이 더 들리지 않아 차현도 ‘집에 잠깐 갔나’싶어 집무실에서 비서실로 향하는 문을 살짝 열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비서실 책상 옆, 차현이 그대로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졸고 있었다. 양 손은 키보드에 얹은 채. 키보드 옆에는 차갑게 식어가는 아메리카노가 한 잔 있었다. 이걸 마셔가면서도 졸음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담요라도 덮어줄까, 싶었지만 어차피 졸기 시작한거–업무 효율도 나쁘니, 그냥 수면실로 보내기로 마음먹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일어나라, 권차현 주무관.”
“으응……본부장님?”
어쩐지 살짝 열린 입에서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비주얼. 그래도 권차현은 내가 어깨에 손을 대자, 별 저항 없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 몽롱해 보이는 것이, 아직 잠결인 것 같기는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떼고, 허공에서 담요를 하나 불러낸 다음–
“비서실은 내가 있을테니 집무실 소파에서 눈 붙이도록. 한시간 뒤에 깨우겠다.”
수면실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거긴 다른 직원들이 있을테니 차라리 집무실에서 재우는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는지–아니면, 다른 누가 권차현의 자는 모습을 보는게 싫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웃긴건, 권차현이 정말 아무런 의심 없이, 홀린듯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기가막혀서 그걸 따라 들어간 나도 바보였다.
그녀는 그대로, 내 집무실 안의 가죽소파 위에 풀썩 쓰러지더니 웅크린 채 다시 잠들어 있었다. 정말 졸리긴 했던 모양이라, 내가 다가가 어깨 위에 담요를 얹어주는데도 눈을 뜨지 않았다. 담요 끄트머리로 나온 스타킹 신은 발이 가냘프면서도 안쓰러워 보여, 차현의 얼굴을 덮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손끝에 살짝 닿은 얼굴의 체온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잠든 차현의 얼굴을 보다가, 담요 속에 살짝 손을 넣어 차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마력 순환을 조금 도와줄 요량이었다. 마법사라는걸 인지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마법을 쓰는데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내 눈에 훤히 보였다. 주로, 서류를 불러온다거나 하는 과정에서 입술이 가끔 하얗게 변하곤 했으니까. 익숙해지면, 자기 마력의 총량을 알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지만–지금은 그녀를 ‘몰래’ 도와줄 마음이 들었다.
맞닿은 피부 아래로 마력을 흘려넣자, 웅크린 그녀가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그녀의 몸 속에 남은 마력을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다른 마법사에게 이런 일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낯설고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순환을 마치자, 아까만 해도 차갑던 그녀의 손이 조금 따뜻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놓기 아쉽다는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몇 초간 차현의 손을 잡고 있다가–나는 겨우, 손을 빼내고 차현의 몸에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길게 드리운 속눈썹에는 눈송이가 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잘 자라.”
그리고 그녀에게 한 말이 있으니, 한시간은 비서실에서 다른 업무를 할 요량으로 집무실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몇 장 들고 조심스럽게 내 방을 나섰다. 잠든 차현의 숨소리는 이제 집무실 안에, 옅고 고르게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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