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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마법사 공무원 (3) 본문
3.
차현이 한사코 사양했지만, 신서율은 ‘저녁식사 대접에 대한 보답’이라며 기어이 첫 출근 날, 차현을 집 앞까지 데리러 왔다. 순간이동은 싫다, 는 그녀의 말을 기억이라도 한 듯 처음 만난 날처럼 차를 끌고 집 앞 골목에 와 있던 그 모습은, 출근길 지하철을 타러 가는 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엇, 이게 뭐예요?”
“밥값.”
말은 짧았지만, 서율은 왼손은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뒷좌석에 있던 갈색 상자를 두둥실 떠오르게 한 뒤 차현의 무릎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열어본 상자 안에는 베이지색 스틸레토 힐이 매끄러운 광택을 내고 있었다. 굽은 한 7cm쯤 될까, 차현이 잘 신지 않는 높이였지만 디자인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차현은 바로 구두를 꺼내 신어보았다. 발 사이즈를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마 차현이 끙끙 앓고 있던 시점에 집안을 쓱 둘러보고 알아챈 것이리라. 신자마자 발이 편안했다. 보통 굽이 높은 신발은 발이 아파서, 맞지 않아서 잘 신지 않았었다.
“발에 딱 맞아요! 고맙습니다.”
격의없는 감사의 말에 서율이 웃었다.
“좋은 구두는, 좋은 곳에 데려다 준다는 말이 있더라고. 첫 출근이니까 선물해 주고 싶었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옷도, 잘 어울리고.”
차현이 밤 늦게까지 고심해서 고른 의상이었다. 아무리 문제 있는 발령이었어도 첫 출근이니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신제윤한테는.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기장의 검은색 스커트와,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귀고리는 귀에 착 붙는 핀 스타일. 출근 직전에는 어떤 립스틱을 바를까 고민하다가, 색깔이 있는 립밤을 도톰하게 펴 발랐다. 입술이 작은 탓에 립스틱을 바르면 펭귄같아 보이는 것이 그녀의 고민 중 하나였다. 그래도 출근 직전 거울 앞에 섰을 때는 너무 평범한 것 같아 자신감이 없었는데, 서율의 말 덕분에 조금은 용기가 났다.
이윽고 서율의 차가 매끄럽게 어느 고층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서율은, 입구의 직원에게 차키를 넘겨주고는 곧장 차현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짓궂은 미소를 띈 채,
“도착했습니다, 비서님.” 같은 멘트를 치면서. 그 장난 덕분에 차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또각, 발소리에 건물로 들어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차현에게 향했다. 하지만 차현은 그게, 눈에 띄게 ‘잘생긴’ 서율을 향한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는 아무리 양보해도 누군가의 주목을 받을 만큼 외모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서율의 장난스러운 에스코트를 받아 건물로 들어가려던 찰나, 신제윤과 차현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녀가, 도망가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그의 시선은 차현의 구두에 향했다가, 이내 차현의 얼굴 어딘가로 향했다. 정확히 눈이 맞닿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가 대체 어딜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현은 이 얼음장 같은 양반에게 장난을 쳐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에게 성큼 다가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총괄 본부장님께서, 비서를 마중씩이나 나오다니 영광이예요.”
그런데, 서율이 본부장의 눈앞에서 차현의 손목을 살짝 붙잡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세 사람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신제윤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어제, 맛있었어.”
그때 대접해 준 저녁식사의 답례를 구두 한 켤레로 받았으니 분명 거기에 대한 인사였겠지만,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차현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구요.”
그런데 신제윤이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휙 돌려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차현은 자기도 모르게 다급히, 서율에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그를 뒤따라 들어갔다. 힐을 신고 뛰는 일은 쉽지 않아서 하마터면 휘청일 뻔 했지만, 차현은 겨우 신제윤이 탄 승강기에 같이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숨이 헐떡였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옅게–그러나 조용히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사람이 인사를 하면 받아주던가, 아니면 승강기라도 좀 잡아주던가! 나, 본부장실 어딘지 모른다고!
차현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신제윤을 쫓아가느라 고생 깨나 했다. 겨우 그의 그림자를 따라 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금빛 금속판에 ‘총괄본부장실’이 새겨진 것을 알고 안심할 수 있었다.
한 번 닫혀있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비서실 처럼 보이는 공간이 먼저 나왔고 그 오른쪽에 ‘집무실’이란 팻말이 달린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마치, 차현보고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이.
집무실의 공간은 색맹이 아닌 차현이 보아도 흑백으로 보일만큼 흰색과 검은색의 가구 일색이었다. 심지어 서류를 넣어두는 캐비닛의 문도 검은색이었고, 유일하게 색을 띄는 것이 바깥을 보이는 널다란 통유리창과, 본부장 책상 위에 놓인 녹색 뱅커스 램프 뿐이었다. 거의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흑백에 집착한 듯한 그 광경에 차현이 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있던 때, 집무실 안의 또다른 문에서 나온 신제윤이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책상으로 향했다. 그는 아까 입고 있던 자켓을 입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내실로 부를 만한 공간을 드레스룸 따위로 쓰는 모양이었다. 셔츠소매는 방해되지 않도록 암가터로 고정했고, 넥타이는 완벽한 윈저노트였다. 감색 바탕에 두꺼운 은색 사선이 쳐진 넥타이가 차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때, 신제윤의 검지가 천천히 까딱-하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손짓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차현이 그 지시에 따라 조용히 걸어와야 마땅하다는 듯. 차현은 그 손짓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신제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손짓은 했으나 그녀에게 시선을 조금도 주지 않은 채, 손으로 무언가의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다.
“오늘, 일정 보고하도록.”
원래는 오늘부터 정식 출근이었기에 ‘정석대로라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차현은 오늘 새벽, 신무영 총무과장으로부터 신제윤의 하루 일정을 이메일로 전달받았었다. 새벽에 아마 잠을 일찍 깨지 않았더라면 숙지하지 못했을 일정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시험인가? 하지만 의도를 되짚기도 전에 차현의 입은 이미 신제윤의 오늘 일정을 거침없이 읊고 있었다.
“금일 오전 열시, 인사처 조직혁신담당관과 제6회의실에서 내년 인력충원을 위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배석자는 총 10명이며, 담당관 외에 인력 충원과 관련된 인사처 직원 다섯 명, 특수인원관리국 총무과장을 포함한 관리국 측 인원 네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일전 회의에서는 자료를 보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셨더군요.”
이틀 전, 차현이 물색없이 반발했던 것과 다르게 완벽한 ‘업무모드’를 보여주자, 만년필을 쥔 신제윤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후 두시 삼십 분, 외교부와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외교부 제5차관이 참석 예정이며, IWC를 위한 다자간 협력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이전 회차 IWC 백서와, 담당자로부터 전달받은 메모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회의 입장 전 검토하실 수 있는 시간이 한시간 정도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요점만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겨우 한다는 말이 네 글자였다. 차현은 신제윤에게서 몇 마디 말을 더 듣고싶다는 미친 생각을 스스로 해 냈다가, 고개를 살짝 저어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자기를 초면에 ‘문제인물’이라고 단정지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녀는 상대를 직접 겪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사람을 선입견을 갖고 대하면 안된다는 것이 차현의 신조였다. 그 예로, 그녀의 부모는 다른 이들에게는 ‘상냥한 부모’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차현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전부 부모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오늘 회의 일정은 보고드린 두 건이 전부입니다. 그 외의 업무가 발생할 경우, 보고드리겠습니다. 대면으로 보고드릴까요, 아니면 서면으로 보고드릴까요?”
“추가업무는 내가 집무실에 있을 경우 대면보고를 원칙으로 한다.”
돌아오는 말 하나하나에 가시가 서 있었다. 차현은 어쩐지 자기가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좀처럼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이 앞에 서 있으면 눈을 한 번은 마주쳐야 하지 않나? 지금 한 보고를 아주 한 귀로 흘려버리는 듯한 태도에, 절로 부아가 났다. 솔직히는 책상을 한번 쾅, 내리쳐서 신제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었지만, 그녀가 이 얼음같은 상사에게 내보일 태도는 딱 한가지였다.
무시당해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쳐지지도 않았으니 딱 이 정도 거리감이 좋을 것 같았다. 냉정하게 돌아서서 비서실로 가려던 차현의 발걸음을, 신제윤의 말이 잠시 멈추게 했다.
“구두소리, 거슬리는군.”
“제가 무슨 구두를 신든 그건 제 자유라서요! 아니면 집무실 바닥을 전부 카펫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욱 하는 마음에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당황해 차현이 훅, 하고 말을 멈추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할 말을 다 해버린 차현을 물끄러미–그러나 뚫어져라 보던 신제윤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나 지금 ‘또’ 무시당한건가?
“알겠다. 바꾸도록 하지.”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더 뜻밖이었다. 차현은 그날 저녁, 신무영으로부터 ‘금일 밤 퇴근 후, 본부장실 바닥을 전부 검은색 카펫으로 교체합니다.’라는 업무 메시지를 받았다.
열시가 되기 전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신제윤은 자리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드레스룸으로 추정되는 문을 겨우 찾아 열어보았지만 거기에도 그가 없었다. 자유시간인가? 고민하다가 신제윤의 책상 위에 작은 쪽지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전: 외교부 회의 자료 정리.
마치 그녀가 자기 사무공간을 살펴볼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 처럼, 딱 한 줄의 지시만 책상 위에 남아있는 것을 보고 차현은 머릿속을 채우려던 복잡한 생각을 싹 날려버렸다. 대신, 캐비닛에 들어있는 외교부 관련 문서를 싹 다 찾아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전자형태의 결재문서를 보는 것도 도움은 되었지만, 이번엔 인쇄된 문서 속에 정답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적으론 무시당해도 상관 없어, 하지만 업무적으로는 하자 없는 사람이라는걸 증명하고 말테다. 차현은 스스로가 어린애 같다고도 생각하면서, 그 단순한 생각을 그치지 못했다. 어느 하나라도 증명하지 못하면 차라리 그만 두는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인생을.
이전 회의기록은 상당히 난잡했다. 결재된 문서에 도달하기 까지 한참이 걸린 것은, 끊임없는 자료 수정과 계속되는 회의, 녹취록과 속기록 사이의 차이, 악의적인 왜곡과 해석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신제윤의 말을 정부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정부기관 본부장이라면서,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국가안보국에서 골칫덩이 문제인물이긴 했지만, 차현도 고위 공무원들이 배석하는 회의에 제법 여러번 참석해 분위기는 잘 알고 있었다. 사전에 의제를 조율하고, 회의 석상에서는 해당 의제가 크게 문제가 없는 이상 이렇게 지리멸렬할 정도로 회의를 거듭해 상대 부서의 진을 빼놓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도 계속, 회의를 잡았단 말이지……?”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상대 부서에 업무 과중을 일으켜서 ‘나자빠지게’ 만드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런데, 신제윤은 그걸 알면서도 오히려 ‘나는 지치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다른 기관에 보여주려는 듯 했다. 어느쪽이 효율적인지는, 아직 신제윤의 회의 스타일을 접하지 못해서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차현이 판단하기에 ‘굉장히 효과적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당면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업무 메신저를 통해 이틀 전 있던 문화부 제2차관과의 회의록이 본부장의 결재 라인에 올라왔다는 알람이 떴다. 아마도 상사에게 알려주라고 알람이 뜬 듯 했지만, 차현도 결재중 문서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에–그녀는 곧장, 그 회의의 녹취파일과 속기록을 모니터에 띄웠다. 이런 일을 하라고 모니터를 세 대나 비서실 책상에 한꺼번에 올려둔 것이 분명했다. 보통은 두 개에서 끝나는데, 세 대라니.
“좋아. 본부장을 돕고 싶지는 않지만 너네가 이런 알림을 띄운 이상 그냥 허투루 넘기진 않을거야. 징계 세 번이나 먹은 문제 공무원의 분노를 맛봐라.”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싶은 마음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래도—이건 기본 중 기본 아닌가?
“특수인원관리국 총괄본부장 비서실입니다. 이하나 주무관님 연락처가 맞나요? 아, 자리 비우셨다구요. 급한 건이라고 전해주시면 더 좋겠네요.”
몇 초 후, 전화기 너머로 다소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회의록 정리는 몇 번 해보지 않았을, 초짜 공무원인 듯한 앳된 목소리. 그런데, 차현은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봐 줄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만약 개인적인 용무로 민원대에서 응대 중인 공무원을 마주한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그녀는 완벽히 ‘총괄본부장 비서’모드였다.
-전화 받았습니다…….
“특수인원관리국 총괄본부장 비서 권차현입니다. 우선, 결재선에 태운 회의록 잘 봤습니다. 그런데, 당시 회의의 녹취와 속기록을 비교했을 때 굉장히 다른 부분이 많이 보여서요. 수정 할 부분,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이메일로 전달드릴까요?”
-네?
그 한 마디에 당혹감이 제대로,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그 이전 담당자에게 아마도, ‘신제윤 본부장이 들어간 회의는 네 맘대로 해도 된다, 어차피 본부장이 알아서 수정본 다 보내준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르지. 차현이 아주 잠깐, 그 이전 모든 회의 기록들을 검토했을 때–전부 그런 식이었다. 신제윤은 초짜 주무관들과 입씨름을 할 바에는 ‘이렇게 수정해라’하고 완벽하게 수정된 회의록을 넘겨주었던 듯 했다. 그러니 아마 이 ‘여자애’도 이 일이 ‘편한 일’이라고 믿으며 업무를 맡았겠지.
“회의 중 발언 순서, 그리고……이건 큰 문제인데, 왜 신제윤 본부장님의 발언에만 ‘해석’이 추가되어 있는지 해명도 들어야겠네요. 문화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늘 회의록을 작성하십니까? 결재가 나긴 했지만 예전 회의록에도 문제가 있는데, 전부 다 수정요청 해볼까요?”
“그건……전임자가 한 일인데, 저는 업무 분장 다시 받은지 얼마 안 되어서…….”
“지금 회의록, 결재선에 올리신 분이 담당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몰아붙이자 여자애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소리가 끊기자, 차현은 짜증이 났다. 이건 분명, 전화 너머에 있는 사람은 생각도 없고 양해도 없이, 상급자나 전임자를 찾는 순간이었다. 예상대로, 몇 초 지나지 않아 조금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회의록은 저희 쪽에서 문제가 없다고 정리된 사항인데. 지금, 신입 직원한테 너무 뭐라 하시는거 아닌가요?
“아, 팀장님이신가요? 잘 됐네요. 그 직원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예?
“설마, 특수인원관리국에서 회의록 가지고 꼬투리 잡는다고 하던가요. 그럼 조금 서운한데. 저는 회의록에 오류가 있어서 수정요청 드리려고 전화한거라서요.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회의록에 오류는 없어요. 이미 차관님 결재까지 마친 버전이라서요. 수정해드릴 수 없습니다.
“아, 그래요?” 이 말에 건너편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차현은 놓치지 않았다. “아쉽네요, 본부장님은 결재 안하실거예요. 제가, 그렇게 요청드릴거라서요. 엉터리 회의록 가지고 결재 받을 생각 마시죠. 그리고, 결재 순서 잘못된거 아시죠? 지금 총괄본부장님 협조 전인데 이미 차관 결재가 났다고 말씀하셨나요?”
문화부와 특수인권관리국 간 회의결과는 담당 주무관이 기안을 상신하고, 그쪽 팀장(아마도 이 여자)의 검토를 받은 뒤 신제윤의 협조, 그 후 차관이 결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그 말은? 애초에 문화부는 신제윤을 배제한 회의록을 따로 갖고 있다는 추측도 가능했다. 사실이라면, 이건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아니면, 문화부에서는 회의록을 이중으로 작성하고 계셨나요? 설마, 차관님이 지시하셨을까요? 제가 직접 연락드려볼까요? 방금 그 말씀, 간과할 수가 없어서요.”
-당신, 그냥 본부장 비서 아닌가요? 그냥 기간제 같은데, 차관님한테 왜 연락하려고 하세요? 그 분은 바쁘세요, 기간제 따위랑 한가하게 통화할 수 있는 분이…….
그 말에 차현이 자기도 모르게 하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보통 비서는 기간제니까 그렇게 생각하는게 무리도 아니지. 그런데, 차현은 공무원이었다. 그 말이 정말 기분나빴다. 기간제면 무시해도 된다는 그 심보, 국가안보국에서도 많이 봐 왔지. 직급의 차이이지 사람을 구분하는 단초가 되어서는 안되었는데도, 기간제라며 대놓고 무시하는 그 행태가 아주 오래 전부터 공무원 조직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설령 제가 기간제라 해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될 것 같은데요.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 건은 차관님이랑 직접 통화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보통이라면 상대가 수화기 내려놓기를 기다린 다음 전화를 끊었겠지만, 차현은 이때만큼은 자기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흥분한 탓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함도 가슴 한 구석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벼락같지만–은근히 고요한 목소리와 발걸음이 차현에게 다가왔다.
“그 팀장, 아마 차관한테 깨지겠네요.”
놀라서 돌아보자, 검은색 셔츠 소매를 두 번 단정하게 접은 남자가 이미 차현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어쩐지 제윤이나 서율을 닮은 듯한 외모였지만 분위기는 그 둘보다 더 차분하고, 가라앉은 듯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얼굴은 지금 처음 보네요. 총무과장 신무영입니다. 신제윤 본부장의 비서 대리였어요, 차현 씨가 역할을 잘 해주는 것 같아서 기쁘네요.”
“혹시……다 들으셨어요?”
“문이 살짝 열려있었었어요. 다음엔 조심해요. 안 그러면 신제윤보다 더 무서운 사람으로 등극할지도 모르니까.” 그가 시덥잖은 농담을 하면서, 차현의 책상 위에 흰 머그를 하나 툭, 올려주었다. 코끝을 스치는 이 향기는 분명 캐모마일이었다. 진정하라는 뜻이 확 와닿자, 차현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이전 직장에서 7급이었죠? 사실은 6급 승진을 위한 최소연차도 채웠고. 아, 왜 알고 있는지는 말 안해도 알거예요. 신제윤 본부장 지시로 차현 씨 인사기록카드를 가져온게 나니까.”
차현은 손을 뻗어 머그잔에 담긴, 잘 우러난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심장은 두근거렸고 귀는 빨갰지만, 입가에 머금어진 좋은 향이 마음을 천천히–그리고 느긋하게 가라앉혀주는 것이 느껴졌다.
“본부장은 정부 공무원 직급으로 따지면 1급이라, 차현 씨도 사실상 5급 사무관 대우 정도는 받아요. 1급 본부장 비서를 별정직으로 채용했을 때는, 5급 비서관이라고 부르거든. 그러니까 팀장들 대할 때 거리낌없이 움직여도 된다, 그렇게 이해하면 편할거예요. 그리고, 총괄본부장이 회의록 결재 안하면 다음 회의는 없는거 알죠?”
“그렇겠죠. 회의 마무리가 안됐는데 다음 회의란게 존재하면 안되니까.” 당연한걸 묻는 무영의 질문에 차현이 막힘없이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의 시험을 아주 가볍게 통과한 것 처럼.
“차현 씨가 아까 그 회의록 때문에 차관이나 그 이상의 직급한테 전화한다고 해도 이상한게 아니라는 말이예요. 신제윤 본부장이 왜 차관이랑 회의를 했는지 짐작이 가요, 혹시?”
“격을 일부러 낮추려는 시도로 보였어요, 지난 기록들을 언뜻 훑어봐도.”
“네, 장관이 바빠서 도저히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때만 그렇게 해 왔어요. 공교롭게도 요즘은 그런 빈도가 늘었죠. 본부장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바로 잡을 때가 되었죠. 차현 씨가 와서 다행이예요, 솔직히 나 혼자는 조금 버거웠거든요. 신제윤 본부장도, 그를 이겨먹으려고 드는 정부 사람들도.”
“지금 그거, 업무 짬처리–.”
거기까지 말하려고 하자, 무영의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그가 차현의 머그잔 옆에 작은 초콜릿 하나를 더 놓아주었다. 은근히 위스키 향이 나는 것이, 술이 들어간 초콜릿이 분명했다. 차현이 눈을 흘기자, 무영이 이번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문화부 차관한테 전화해 보는거 어때요? 궁금하거든, 그 사람들 어떻게 반응할지.”
신제윤은 인사처에서의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문화부 차관의 전화였는데, 그가 그 사실을 확인하자 마자 여섯번째 전화가 울렸다. 느긋하게 귓가에 가져다 댄 전화 너머에서는 다급함과 당혹감이 전해져 왔다.
일전에는 고자세로 나와서 ‘그냥 지켜볼까,’ 했던 그 남자가 신제윤에게 ‘사과’라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화부에서는 회의 기록을 다시 정정중이라, 결재까지 하루가 더 걸릴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정중한 사과의 의사를 전달해왔다. 더불어, 다음 회의부터는 장관이 직접 참여할거라는 단서도 덧붙여서.
안그래도 요새 회의 배석자들이 차관급, 심지어는 국장급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신경쓰이던 참이었다. 어디까지 하는지 두고보려고 가만히 뒀더니, 대놓고 국장급 회의에 본부장인 자신을 불러대기 일쑤였다. 한 부서에서 그런 일을 벌이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는지 다른 부서에도 앞다투어 같은 짓을 벌였다. 그런데, 문화부에서 온 연락을 필두로 오후에 있을 외교부 회의에서도–갑자기 일정이 업데이트 되었다. 권차현이 업데이트했을 업무일정에 배석자가 국장에서 ‘외교부 장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그는 휴대전화로 권차현의 사무실 내선번호를 눌렀다.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아마도 오늘 중에는 저장해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린 뒤, 차현이 전화를 받았다.
-특수인원관리국 총괄본부장실, 권차현입니다.
며칠 전 그녀를 ‘잡아’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어조와 톤에, 오히려 제윤이 당황해 몇초간 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그를 알아챘다.
-본부장님, 오후 회의 배석자가 변경되어 일정 어플에 업데이트 해 두었습니다.
“문화부 차관이랑 무슨 통화를 한건가.”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비서가, 상관 지시도 거치지 않고 타 부서 장차관과 통화한 것은 분명 결례였다. 그렇지만 회의 배석자의 직급이 계속 낮아지는 일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그는 타이밍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마음먹고 아직 옮기지 않은 걸음을, 차현이 먼저 앞서나갔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것도 발령받은 첫 날에. 무슨 수단을 쓴 거지?
신제윤은 차현을 제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연이 겹친 일일 수도 있었다. 아직 자기 눈으로 차현의 능력을 검증한 것은 아니었다.
-회의록 관련해서, 문화부 담당자들이 결재선을 잘못 지정해 그 부분에 대해 차관님과 건설적인 통화를 몇 분간 했을 뿐입니다.
“그것만이 아닌 것 같던데.”
처음 마주했던 그 당돌함–초면에 고백을 하고, 비서로 발령을 내겠다던 신제윤의 멱살을 잡던–의 연장인가? 수화기를 손에 쥔 제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회의 내용에 자의적인 해석, 곡해, 그리고 하지 않은 발언이 포함되어 있어 현재 담당자에게 수정 요청 중입니다. 더 지시하실 사항 있으신가요? 오후 회의 관련 자료는 태블릿에 송부했습니다. 검토해보시고 추가로 확인할 사항 있으신 경우 전화 주시면 됩니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담담하고도 당당한 말투의 보고. 이건 그냥 ‘내키는대로’ 움직인 일은 아니었다. 특수인원관리국에 대해서, 그리고 신제윤 본부장에 대해 알았다면 섣불리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신제윤이 만약 자기 비서에게서, ‘절차의 문제를 따지기 위해 차관과 직접 통화하겠다’는 보고를 받았으면, 당연히 그러지 못하게 막았을테니까.
그런데 차현은, 아무렇지 않게, 신제윤이 확립해 온 세계를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변화가, 그는 의외로 기분나쁘다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렴풋 느낄 수 있었다. 자기는 앞으로 권차현이 벌일 일들에 대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일부러 져 줄 것이라는 사실.
“다음에는,” 권차현을 마주보고 얘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제윤은 약간 아쉬움이 든 상태에서, 옅은 한숨을 대놓고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지르기 전에, 보고해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만!
“저지른게 맞다. 누가 상관 허락도 없이 차관한테 전화해서 행정 절차를 따지나. 끊겠다.”
통화 종료. 신제윤은 바로 차현이 태블릿에 업데이트 해 준 데이터를 살펴보다가, 드물게 허기를 느꼈다. 점심을 건너뛰고 다음 회의로 갈 때가 많아, 식사를 챙기는 일이 귀찮게 느껴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정말 오래간만에 제대로 배가 고팠다. 그는 카페 한 구석에 자기가 앉아있음을 떠올리고, 몸을 일으킨 뒤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를 마주한 여직원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권차현이 업무 첫날 자신에게 저지른 이 변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신제윤은 권차현과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따뜻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 날 마신 커피는, 그가 살면서 마신 커피들 중에 가장 신맛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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