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결혼한다.”
청첩장을 건네준 성윤의 표정이 그야말로 꽃밭, 유영 입장에서는 가관이었다. 얼마 전부터 혜인이 드레스를 입어보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에 성윤이 따로 유영을 불러냈을 때부터 이미 짐작 가능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현실은 더 비참하게 다가왔다.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그래서 팬으로서 머물 수밖에 없던 사람을 면전에 두고서, 정작 청첩장을 준 사람은 새롭게 출발한다는 기쁨에 들떠서, 유영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축하해요, 선배님.”
결국 유영과 성윤 사이를 정의하는 단어는 이 두 개일 뿐이다. 선배, 그리고 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는 아주 단순한 관계. 나는 네게 뭘 받아 보겠다고 이토록 오랫동안 곁에 머물렀던 것일까? 유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을 보면서, 웃는 낯을 유지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그 때, 타이밍 좋게도 성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대는 예비신부였다. 화면에 뜬 이름에는 빨간 하트가 붙여져 있었다. 그걸 보고 만 유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윤은 면전에서 전화를 받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가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이래서였다. 빌어먹게도, 이런 틈을 그가 주었기 때문에 여태껏—결혼이 발표되고 청첩장을 받는 지금까지도 그를 매몰차게 마음 속에서 밀어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도 곧, 그의 결혼과 함께 급류에 실어 보내야 맞았다. 이 이상의 감정은 특히 유영 자신에게 좋지 않았다. 한 때의, 그래도 이십대까지 이어진 긴 짝사랑의 끝이 이런 식이라니. 술 기운을 빌어서라도 자신을 달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벌써 가게? 오랜만에 만난건데. 너, 지난번 설날 장사 대회때 안 와서 협회장님도 조금 서운해 하시던데.”
“아, 그 때 일이 조금……있었어요.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지금 말 할 단계는 아니라서.”
“무슨 일 있는건 아니지?”
“네. 아마도.” 유영은 말끝을 흐리다,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결혼 축하드려요, 선배님.”
“그래? 고마워.” 감이 좋은 성윤은 뭔가 석연찮은 기분을 느꼈지만, 유영의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딱히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고 죽자는 생각에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성윤의 팀 동료이자 유영의 선배이기도 한, 인호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하마터면 넘어질 위기였으나 인호가 재빠르게 허리까지 잡아챈 덕분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어디 가냐?” 흔한 남자 후배를 대하는 듯한 말투. 방금 전까지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던 유영은 그의 너스레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손에 그거 청첩장? 결국 뿌리기 시작했나보네. 어디 사는 누구는 신났겠구만. 근데 너 표정 지금 죽상인거 알아?”
“생각나는걸 일일이 다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어요!”
“됐고, 너 술 사주려고 쫓아온거니까 가자.”
“쫓아왔어요?”
“카페에서 회의 중인데 눈에 확 띈 걸 어떡하냐? 우리 성윤 나으리께서는 골수팬의 마음을 전혀 헤아려 줄 능력이 없으니까, 나라도 챙겨줘야지.”
일부러 분위기를 띄운다고 하는 너스레 덕분에 결국 유영은 하르르, 한바탕 웃으면서 그와 함께 펍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어서 그런지 가게에 들어온 손님은 인호와 유영 둘이 전부였다. 가볍게 시작하자는 의견에 동의한 두 사람의 테이블에는 맥주가 가장 먼저 올라왔다.
“그래서, 그냥 둘 생각이야?”
“무슨 숨겨진 애가 있는 것 같은 그런 막장 드라마 말투는 하지 말고요. 안그래도…….”
“성윤이 쟤는 늘 고백만 받아봤던 애라 자기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그렇다고 그 대상이 제가 될 리가 없잖아요. 나는 항상 대회마다 나타나는 흔하디 흔한 팬 중 하나고, 그나마 같은 학교 같은 과 후배일 뿐이지. 기대하게 하지 마요, 기대해서 더 힘들어지고 싶지도 않고, 애초에 그럴 리 없으니까.”
“으이구, 그러냐.” 인호는 답답함에 맥주를 거칠게 들이켰다. “엎을 거라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왜, 요즘 소문 도는거 못들었어?”
생각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맨정신의 유영이라면 일부러라도 입에 올리지 않았을, 망측한 소문.
“혜인이 선 보러 다닌다며. 식장 잡아놓고 날도 다 받아놓고, 어머니가 시켜서 그런다는 이야기를. 벌써 다른 동기들은 몇 번쯤 카페에서 선 보는 걔 목격했어. 언제쯤 그 놈 귀에 들어갈지는.”
“그런 일이라면 제가 아니라 동기분들이 미리 말해주는게 당연한거 아닌가요. 어지간히 밉보였나봐요?”
“동기 남자애들은 저 둔한 놈이 언제쯤 알아차리나, 하면서 열심히 구경 중이긴 하지.”
“악취미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성윤이는 늘 고백만 받았던 놈이라. 한 번 된통 당해 봐야, 정신 차릴 것 같아서.” 인호가 유영의 빈 잔을 치우게 하고, 맥주를 더 시켜주면서 말을 이었다. “안주 챙기면서 마셔라, 너 지금 앉자 마자 두 잔 째다. 여하튼, 한 번 제대로 뒤통수를 맞으면 여성 불신이 생기든, 제 진짜 사람이 누구라는걸 알아차리든 할 거 아니냐. 그래서 내버려 두는거야. 그리고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것도 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냐?”
“다시 말하지만 진짜 악취미네요, 선배님도, 다들.”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는 너도 성윤이한테 말 안했잖아?” 인호가 유영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는 너도 공범자.”
“어제도 오늘도 우리 모두 공범자. 성윤 선배가 언제쯤 깨질지 기대하는. 여러가지 의미로.” 유영이 배시시 웃었다.
그 이후로 여러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유영은 잔뜩 취한 자신을 인호가 호텔에 데려다 주고 떠난 것 까지만 겨우 기억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휴대전화는 충전기에 꽂혀 있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숙취해소 음료와 작은 쪽지가 하나 남겨져 있었다.
[숙박비는 걱정하지 말고, 모레 오후 두 시 일 마레 카페로 가 봐.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시켜 줄줄 테니.]
“미친……아이고, 머리야.”
그래도 고주망태가 된 채의 유영을 집에 데려다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유영은 그가 남겨 놓은 쪽지를 다시 읽으며, 숙취 해소제를 원샷했다. 그보다 인호가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혜인의 성격 상 떠벌리고 다녔을 확률이 컸다. 그런 여자였다. 조심성은 부족하지만 향기를 뿌리고 다니는 화려한 꽃.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도 남을 만큼의 미녀였고, 그런 그녀가 성윤을 손에 넣으려고 마음을 먹은 이상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고백을 한 번도 못한 자신의 탓도 있었다. 유영은 사방에 넘치는 자신의 술냄새를 지우기 위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체크아웃 할 채비를 했다. 그래도 술이 어느정도 기분은 잘 정리해 준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