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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가] 99일의 황태자비

alicekim245 2020. 7. 17. 10:00

"친구와 연인의 차이가 뭐일 것 같아?"
"......"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깊이가 달라. 너는 앞으로 친구로서만 그 분의 곁에 존재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정치적인 이야기만을 나눌 수 있겠지. 하지만 황태자비인 나는 그 분의 마음 속 이야기까지 서로 나눌 수 있어. 시간이 흐를 수록 이 사소한 격차는 점차 벌어지겠지. 정무를 논하기만 하는 과거의 친구와, 후계자까지 낳아 줄 자신의 부인 사이에서 갈등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야."
"랑엔펠트 백작 영애,"
"난 황태자비야!"
카틀레야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를린은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백작 영애'로 부르길 고집했다.
"아직 약혼을 겨우 했을 뿐인데 감히 대공한테 그런 호칭을 강요하려는건가? 백작 영애, 원래 황태자비로 정해져 있던 상대는 나였어. 태어났을 때 부터."
"내가 그깟 일 하나 모를 것 같아? 날 무시하지 마. 아르덴에서 오랜 시간 보냈다고 해서 날 정보에 무지한 멍청이로 몰지 마. 불쾌해. 네가 태어나자마자 둘째 황자의 비로 약속되어 있다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러다 화헌대공이 황태자 자리를 버리고 황궁을 떠나면서 밀려났다는 것도! 한심하지. 나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선택했어. 빌어먹을 윈스턴 대공위를 손에 넣을 명분으로."
"뭐......?" 카틀레야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그깟 대공위가, 황태자비 자리보다 소중했다고?"
"귀족가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너는 잘 모르겠지. 어머니가 그 아르덴 왕국의 왕녀니까." 랑엔펠트 백작이 그 많은 구설수를 감수하면서까지 왜 아르덴 왕녀와, 윈스턴 대공과 이혼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는지는 그녀를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화려하고, 한편으로는 가련하기까지 한 여성을 보고 홀리지 않을 남자는 없었다. 그러니 백작부인에게 예의 '귀족 여성의 도리'를 강요하지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이미 전처 소생의 장남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실로 시집 온 여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후계자 낳기를 강요당하고, 액정에 틀어박힌 한 송이 꽃이 되어, 언제 찾아올지 기약없는 남편을 기다리기만 하는 삶. 나는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황태자비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을 때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르덴의 여왕이 될 수 있는 상속권도 포기했고. 나는 나로서 살고 싶었으니까."
아르덴 왕국의 상속권과 관련해 왕국에서 사절이 찾아왔을 때, 아를린은 아버지와 상의도 하지 않고 단번에 그것을 포기하겠노라 대답했다. 아르덴 왕녀의 적녀 중 둘째였던 카틀레야에게 왕위 계승권이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사신은 화색이 돈 채 돌아갔다. 아르덴에 머무는 카틀레야는 쉽게 왕권을 내 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윈스턴 대공은 '남은 기대마저 네가 갈기리 찢어놓았다'며 바깥에서 아들을 얻어 오겠노라고, 외동딸 앞에서 선언했다.
"그깟 몰락한 대공위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네가 여계 대공인 이상 너도 그런 기대에서 벗어날 수 없을텐데? 인정해. 루트비히와 결혼하는 내가 부러워서, 내 앞에서 어깃장을 놓는 것 뿐이라고.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첩 노릇 하는 것도 용인 못할 건 아니야. 어떻게 할래?"
"그 빌어먹을 인간이 망쳐놓긴 했지만 내가 지금은 윈스턴 대공가의 주인이라서. 그런 모욕을 웃어 넘기는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입을 놀리는 것은 쉬어도 내뱉은 말을 주워 담는 일은 어려울테니까. 내 위치가 어떤지는 곧 알게 되겠지."
"하! 웃기는 소리는 집어치워. 이부 언니라고 해서 호의를 보여주었더니 그걸 제 발로 걷어 찼잖아. 앞으로 황태자한테 접근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직 성혼하지 않은 백작 영애가 대공한테 보이는 말본새가 아주 볼만하네. 랑엔펠트 백작은 알고 계셔? 이부언니한테 이러는 것을."
"아버지는 이런 일에 개입하실 분이 아니야. 군무대신 가문을 너 따위가 어떻게 해 보려고? 웃기는 소리 집어 치워."
"할 수 있을지는 두고보면 알겠지? 그럼 나는 작전회의가 있어서 이만. 평온한 저녁 보내시길, 랑엔펠트 백작 영애."
"이게, 끝까지-!"
담담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막상 동궁을 나선 아를린은 속에서 천불이 터져나왔다. 때마침 윈스턴 대공을 데리러 오던 기사단장, 랑엔펠트 경이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주변의 나무 정도는 불타버렸을 분노였다.
"또 카틀레야를 만나고 오셨군요, 대공 전하."
"동궁에서 호출이 오는 건 전부 거절해야 할지 고민중입니다."
"아르덴에 오래 있다 와서 그렇다고...말하기엔, 이제 황태자비가 될 아이이니 제가 좀 더 다그치겠습니다."
"명민하신 분이니 알아서 잘 하실겁니다. 이제 백작 영애도 성인이시니."
랑엔펠트 경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를린 윈스턴 대공은 자신에게 있어서, 이복 누이의 이부 누이라는 아주 복잡한 관계였다. 그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현재의 상황이 버거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윈스턴 대공이 그에게는 사적인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아르덴과 맞닿은 국경에서 분쟁과 크고 작은 도적단의 난립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의 첫째 서자와, 타국의 황태자비가 될 1순위 상속자-이 기묘한 두 파벌이 대립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전투들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차, 황제는 아를린 윈스턴을 아주 잠시 국경에 출진시켰다. 그리고 국경에서 근무하던 모든 병사들이, 그녀의 신력을 목도했다. 이후 일시 소강 상태가 찾아왔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였으나, 아르덴 왕국의 병력은 의욕을 잃고 야반도주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아를린 윈스턴 대공의 국경 단기 출전은, 황제가 손짓하면 언제든, 국경의 '모든' 병사들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윈스턴 대공이 전장에 나서는 이상 손실 없이 이 상황이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윌 피츠로이 아르덴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제국의 유력 귀족과 아르덴 왕녀의 결혼, 그리고 이어진 재혼은 사교계를 비롯해 두 나라의 사이에 대단한 충격이었다. 아르덴 왕녀가 제국의 대귀족-윈스턴 대공과 결혼한 것에 대해서 어째서인지 '그럴 만 하다'는 반응이 주류였다. 혼전 임신이 아니라는 발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정일보다 두 달이나 일찍 왕녀가 출산을 했음에도 다들 그런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 랑엔펠트 백작과 결혼하였을 때는, 다들 대놓고 수군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파격적인 재혼으로 카틀레야가 태어났고, 아를린은 원치 않게 이부 누이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를린은 랑엔펠트 백작 부인을 만나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뿐, 특별히 친모에 대해 애틋하다거나 증오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카틀레야가 아르덴 왕국에 계속 머물렀다면, 카틀레야에 대해서도 친모와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아르덴의 왕위 계승 구도가 윌 피츠로이의 반발과, 아를린의 상속 포기 선언으로 인해 복잡해지면서 자신이 이제 살해 위협을 받게 되자 카틀레야가 제국령 스콜라에 급히 편입하게 되었고, 이부 자매의 만남이 극적으로 성사되고 말았다.
상속권 포기 이후 아버지에게 없는 자식 취급 당한 채, 그가 오입질을 하는 것을 목도만 하고 있던 아를린은 처음에 제 이부 자매라고 카틀레야를 나름 친근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서로의 결이 달라 친밀의 기회는 무색해졌다.
그리고 두 여성 사이에서 루트비히는, 카틀레야를 선택했다. 십여년 전 이미 황궁을 떠난 제 형을 이기기 위해, 아르덴 왕위를 성공적으로 제국에 귀속시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결심을 아를린에게 기쁘게 알린 그였다.
루트비히가 카틀레야에게 청혼을 결정하던 날, 아를린은 제 아버지를 칼로 찔러 손가락을 잘라내 대공의 반지를 손에 넣고 스스로 대공위 계승을 선포했다.
루트비히가 카틀레야와 약혼하던 날, 아를린은 복상사로 죽은 전 대공의 자식을 배고 있다며 한참 전 사라졌다가 다시 찾아온 제 직속 시녀를 마차에 치이게 방치한 뒤, 잔인하게 죽였다.
황태자에게 청혼을 받아 지위가 공고해진 카틀레야가 아를린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확신한 것은, 아를린이 황태자의 약혼날 자신을 모시던 직속 시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였다. 그녀가 분명, 루트비히를 '가지지 못하게 된' 일로 자신에게 분노하였지만 결국 졌다는 패배감에 그런 추악한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를 손에 넣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카틀레야 자신이었다.
아르덴 왕위까지 순조롭게 물려받으면 그녀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었다. 지금의 국왕이 빨리 죽어준다면 아르덴 여왕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할 수도 있었으며, 장차 황제가 될 루트비히와 각각 제국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는 일도 가능해 질 터였다. 역사상 한 번도 유례가 없던, 공동 통치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시아버지가 될 황제 역시, 혼인을 통해 왕국을 제국 휘하에 두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카틀레야가 나서지 않아도, 황제가 군사를 움직이고 아르덴 국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서자를 압박해 주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자기 손에 황태자비--미래의 황후 자리와 여왕의 직위가 굴러 떨어지는데 속으로도, 겉으로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단지 하나, 아를린의 존재가 계속해서 거슬렸다.
루트비히는 카틀레야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를린을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로서, 조언자로서 곁에 둔다고는 했지만 카틀레야는 불안했다.
외모도, 정치적 배경도 모두 카틀레야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지만 아를린과 그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다. 신력이 있는, 대공이라는 점이었다. 황태자비로서 내궁의 일들을 관장할 의무 뿐인 자신과는 다르게, 황제가 주관하고 대신들이 배석하는 어전회의에 나아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가문을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 공을 세우며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카틀레야가 결코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허락조차 되지 않은 일들을 아를린은 할 수 있었다.
아를린이 카틀레야에게 일부러 숙여주는 것으로 잠시 봉합되어 있는 듯 했던 예비 황태자비와 윈스턴 대공 간의 갈등은, 그녀가 아르덴 왕국의 '공동통치' 대신 카틀레야에게 주어질 왕권을 황제에게 예속시켜야 한다고 어전회의에서 발언했다는 사실을 카틀레야가 알게 되자 마자 폭발했다.
황궁에 따로 위치한 윈스턴 대공의 관저에 황태자의 약혼녀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궁에 딸린 시종보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 중이던 아를린이 먼저 알아차렸다. 시종이 미처 저지할 틈도 없이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아를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람이 여럿 드나드는 본가에서 벗어나 모처럼 서류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든 방해였다.
"황궁에서는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법입니다, 랑엔펠트 백작 영애."
"법도? 지금 감히 누구한테 할 소릴......!"
"보아하니 오늘 어전회의 때의 일 때문에 오신 것 같은데, 일단 앉으시지요. 술이라도 한 잔 내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술 마시러 널 찾아온 것 같아? 당장 어전회의에서 한 발언을 철회해!"
소리를 질러대는 카틀레야와는 달리 아를린은 평온하게, 크리스탈 잔 두 개에 둥근 얼음을 넣은 뒤 호박색 액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하나를 카틀레야 쪽으로 밀어주었다.
"내가 어떻게 아르덴에서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잘 압니다." 상대의 침착한 반응에 카틀레야가 더 성을 냈다.
"넌 몰라! 네가 상속권을 포기하면서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이 적으로 돌아서고, 상속권을 포기하라는 압박에 암살 시도까지 겪었어! 기를 쓰고 살아남았는데 네가 뭐라고 내 인생에 어깃장을 놓는거야! 당장 가서 황제 폐하께 말해. 오늘 오전에 어전회의에서 낸 의견은 너의 실수였다고. 아르덴 왕위는 정당한 제1순위 상속자에게 예속되어야 한다고!"
"그럴 수 없습니다. 방금 전에 본인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왕위 계승권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 그 순간부터 목숨을 위협받으셨다고. 저는 랑엔펠트 백작 영애를 보호하기 위해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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