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습작(99일의 황태자비) 1 본문

Writings/Di 245(BE, AE)

습작(99일의 황태자비) 1

alicekim245 2020. 8. 1. 06:30

그 날은 복상사로 죽은 윈스턴 전 대공이 숨겨둔 유언장이 우연히 발견되어, '관계가 좋지 않았던' 외동딸 대신 황태자가 그걸 공표한 날이었다.
비가 내린 탓에 사방에 습기가 가득했고, 눅눅해진 책장을 넘기던 찰나 거기 끼워져 있던 긴 은제 책갈피가 하필이면 아를린의 눈에 들어왔다. 윈스턴 대공가를 상징하는 장미꽃 문양의 물건은 그녀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다 내다 버리라고 했는데......"
작은 침실에서부터 서재, 응접실에 이르기까지 죽은 아버지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은 것은 싹 다 갈아엎어버린지 세 달이나 지난 시점에 이런 사소한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자못 불쾌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유언장의 내용이 계속 그녀의 머릿속에 마치 속박처럼 맴돌고 있었다. 유복자, 혹은 사생아 중 남자아이가 있을 경우 그에게 대공가를 물려준다는 문구.
결국 그렇게 비참하고 우스꽝스럽게 죽고 나서도 그는 외동딸을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고 온 세상에 공표한 셈이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딸이 대공위를 물려받고 한참이 지나서야 유언장이 발견된 경위도 석연찮은 점이 많았지만 그의 글씨가 분명했기에 아를린은 유언장을 공개해야겠다는 황태자를 굳이 막지 않았다. 유복자건 사생아건 무슨 염치로 나타나서 대공가를 물려받겠다고 주장할 거라곤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었다.

한참을 서재에 앉아 바깥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던 아를린을 노크소리가 방해했다. '들어와'라고 한마디 하자 부른 배를 앞세워 한 여인이 서재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아버지가 죽던 날, 현장에 있었던 아를린의 전 시녀 안나였다.
"오랜만이예요? 아를린 아가씨."
"......"
"대공 전하께서 유언장을 남기셨다고 들어서 찾아왔어요. 곧 대공저를 비워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에요," 안나가 자신의 배를 자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대공 전하의 아들이 자라고 있거든요. 의사가 알려줬어요, 아들이라고."
"그래서?"
"유언장에 이렇게 적혀있지 않던가요? 유복자, 사생아 상관 없이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이 나타난다면 그에게 대공위를 물려줄 것."
"그러니까?"
"제가 대공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이에게 대공위를 돌려주셔야겠어요. 자격도 없으신 분이 그 자리에 앉아계시면 안되죠."
"뭘 믿고 그렇게 건방지게 이야기를 하는거야?"
참다 못한 아를린이 쏘아붙였지만 안나는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견지했다. 제국에 딱 다섯 가문만 존재하는 대공가 중 하나의 수장에게 이런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그야 당연히 오늘 유언장을 발표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공언해 주셨는걸요. 그 태중의 아이가 대공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대공위는 이 애가 물려받아야 한다고요."
"일개 평민인 네가 그렇게 쉽게 황태자를 만났다고?"
"잘 알아보시던데요. 아를린 아가씨의 하녀였던 여자애가 아니냐고 하시면서."
그야 당연히 알아봤을 터였다. 아버지가 복상사 하던 날, 그 때 상대가 안나였으니까. 삼 년이었다. 여태껏 자신을 보필해 왔던 시녀들 중 가장 오랜 기간 곁에 있었던 여자가 바로 안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뢰를 무참하게 부수고 달아난 여자도 바로 안나였다. 아버지는 이 여자와 성관계를 즐기던 도중 심장마비로 복상사 했고, 안나는 죽은 사람이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리자 너무 놀라 질경련을 일으키는 바람에 도망도 못가고 꼼짝없이 구원을 기다리는 상태로 있다가 아를린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중의 아이의 친부가 죽은 그 인간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거야?"
"대공님의 품에 안길 때 저는 순결한 처녀였어요. 제가 처녀였단 걸 아시고 대공 전하께서는, 당신의 일이 정리되면 저를 대공비로 맞이해 주겠다고 약조하셨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신건 오직 당신이 살아남아서예요. 당신이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사고에서 순순히 죽어 주었더라면, 저는 대공비가 되었고 이 뱃속의 아이도 유복자가 아니라 정당한 윈스턴 대공가의 장자로 태어날 수 있었겠죠. 기분이 어때요? 남의 행복한 미래를 빼앗아 행복을 누리고 있는 지금의 기분이."
"그 인간이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속여서 품에 안은 여자가 너 하나일것 같아?"
아를린이 의기양양한 안나의 면전에서 일부러 싱긋 웃어보였다. 전 대공이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버린 여자들 중 아를린의 기억에 남는 사람의 수도 열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른 새벽, 저택에 침입해 대공은 당장 나오라며 문을 두드리는 남자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딸을 하녀로 들여보낸 아버지, 그리고 아내를 일꾼으로 저택에 보낸 남편들.
입을 하나라도 덜려고 대공가에 딸을 하녀로 들여 보냈다가 그 하녀가 대공이 속삭이는 헛된 사랑의 속삭임에 홀랑 넘어가 순견을 잃고, 농락당한 줄도 모른 채 자신이 이별을 겪었다고 자조하며 빠져 자살하는 경우도, 혹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유부녀도 그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 대공은 가장 손쉬운 곳에 있는 하녀들부터, 나중에는 귀족가의 순진한 젊은 아가씨들에게까지 손을 뻗어 악명을 높여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윈스턴 대공이었기 때문에, 황제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면책권을 부여받은 남자인 탓에 누구도 대놓고 그에게 반발하지 못했다. 황제는 그저 친구를 불러 '작작 하라'는 이야기만 했을 뿐 이렇다할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귀족들은 그나마 딸들이 대공이 주최하거나 참석하는 파티에서 그와 이야기 하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서 피해를 줄였지만, 공석이었던 대공비가 되려는 야심찬 꿈을 품은 평민 여자애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평민 출신 대공비가 되어 보이겠다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몇 년 전 자살한, 화헌대공비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실제 사례가 있으니 자기도 그 두번째 사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헛된 망상.
그건 결코 이룰 수 없는 헛된 욕망이었다. 처음에는 진절머리를 내던 아를린은 스콜라로 떠나면서부터는 아예 그의 방사와 치정에 관심을 끊어버렸다. 애초에 딸이 신경을 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왜 그 인간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재혼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야. 그 사람은 누구도 대공비로 앉힐 생각이 없었다."
"이제와서 아가씨가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대공위를 넘기지 않겠다는 추악한 발악으로 보여요. 알아요?"
"난 네 말을 바로잡아 주는 것 뿐이야."
"바로잡을 문제도 아니죠. 내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리지 말아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대공저를 정리하시고, 물러나 주세요. 한 주 정도면 충분하겠죠? 임신 중이라, 저는 이런 이야기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아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윤허해 주신 부분이고."
"황태자가 뭐라 말했다고?"
"태중의 아이가 대공의 유복자이니, 가서 아를린 아가씨에게 이야길 하고 유언장대로 상속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셨다니까요. 내 말은 대체 뭘로 들은거예요?"
안나가 이번에는 아를린의 면전에서 대놓고 혀를 찼다. 자신은 중요한 요점만 전달했는데, 아를린이 미련이 남아 말꼬리를 잡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세간에는 아가씨가, 친자가 아니라 전 대공부인의 사생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신력도 없고, 외동딸이라는 지위만 내세워 대공위를 물려받은거라고."
"안나, 미안하지만 대공위는 넘겨줄 수 없겠어."
아를린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자 안나가 당황하여 '뭐?'라고 내뱉었다. 그녀의 눈 앞에는 이윽고 아를린이 양 손에서 내뿜는 찬란한 빛의 실이 보였다. 아를린이 일부러 숨겨둔 힘이었다. 황실과 마찬가지로 대공의 핏줄인 아를린이 행사할 수 있는, 마력과는 다른 종류의 신비한 힘. 이게 드러나면 황제에 의해 전장을 돌아다닐 것이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신력이 아닌 자기 자신이 대공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함부로 내보이지 않은 힘이었다.
"신력이 없어서 전 부인의 사생아 의심을 받는다, 신력이 없어서 외동딸 자격으로만 대공위를 물려받았다, 세간에 그런 소문이 도는건 나도 알아. 굳이 나서서 반박하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 머리를 굴려봤으면 알텐데. 나는 이 힘으로 내가 피곤해지는건 원하지 않아."
"하지만 내 뱃속의 아이는 아들이야! 이 아이가 신력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은 후순위, 저택에서 꺼져야 한다고!"
궁지에 몰린 전 시녀가 악을 썼지만 아를린은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자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실로 안나의 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아무리 무례하게 군다고 한들 임신한 여자를 패대기 칠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어떤 놈팽이의 씨를 배고 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야. 지금 물러난다면 얌전히 돌려보내줄게. 하지만 계속해서 쓸데없는 주장을 하겠다면 목숨까진 보장 못 해. 난 지금 꽤 많이 네 무례를 참아주고 있어."
"그렇게는 못 해. 내가 어떻게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이 아이만 낳으면 나는 대공의 어머니로 대접받으면서 누리지 못했던 당연한 것을 손에 넣게 될거야. 너만 없으면! 너만 그 때 뒤졌어도!"
아를린이 안나의 몸 어디를 찔러서 죽여야 하나 고민하던 때,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벼락같이 들려왔다. 실은 풀어주었지만 안나의 손목에는 검은 줄이 여러개 남아버렸다. 하지만 아를린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전하, 동궁에서의 연락입니다. 지금 당장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마차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 됐네."
아를린은 손을 뻗어, 의자에 걸쳐두었던 망토를 어깨 위에 둘렀다. 안나는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 분해 방방 뛰고 있었는데, 아를린은 서재를 나서면서 그녀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더는 대화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의도된 무시였다.




황태자가 있는 동궁으로 향하는 마차는 아를린의 예상보다 빠르게, 거센 빗줄기를 뚫고 그녀를 정문에 데려다 주었다. 경비가 문가에 있다가 윈스턴 대공의 도착을 알고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를린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늘 오전, 황태자가 만난 사람들 중 평민 여성이 하나 있어? 이건 황태자를 보호하는 대공의 직권으로 물을게. 대답해줘."
"예. 그렇습니다. 윈스턴 대공가에서 일하던 시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에, 처음에는 태자께서 만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만...자기 이름을 말하면 알거라고 하기에 그렇게 했더니 단독으로 면담하셨습니다."
"그래? 고마워. 내가 캐물었다는건 황태자에게 함구해 줘." 그리 말하며 아를린이 경비병의 손에 금화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입막음의 대가였다.
이윽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는 집무실에 들어선 아를린은, 코끝에 진하게 느껴지는 술의 향기에 미간을 좁혔다. 업무 중에 술을 곁들이는 것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그가 맨정신일 때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일로 부른거야?"
"너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내일 어전회의도 있으니까. 안건 검토 겸 사전 의견 조율이랄까."
그의 책상 위에는 귀족 아가씨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적힌 서류가 몇 장 이미 펼쳐져 있었다. 아를린은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을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카틀레야 랑엔펠트. 아를린의 이부 여동생.
"이건 몰라도 돼, 잊어버려." 루트비히가 다소 당황한 듯한 손짓으로, 아를린이 서류를 보지 못하게 뒤집어 놓은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늦은 시간인데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그게 아니라 내 이부 여동생과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부른게 아니야?"
아를린은 차라리 루트비히가, 먼저 '안나를 만났어'란 이야기를 해 주길 바랐다. 아니면, '대공위를 네가 물려받지 않았더라면,'따위의 말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 둘 다 루트비히는 이루어주지 않았다.
"내가? 적어도 나한테는 선택권이 있어. 강제로 누구와 결혼하는 상황은 없을거라고."
아를린이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인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죽은 전 대공의 애인을 만나 그 유복자에게 대공위를 되돌려 준다는 논의를 했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으니 속에서 천불이 일어야 했을텐데.
아를린의 심경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루트비히는 크리스탈 잔에 진한 호박색 액체를 따라 주었다.
"루티."
아를린이 그를 어릴 때의 애칭으로 불렀다. 아주 어릴 때 부터 황궁에서 함께 뛰놀던 그를 아를린은 루티라고 불렀다. 주변에서 무례라고 그녀를 나무랐지만 루트비히는 흔쾌히 그녀에게, 그리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친애의 상징이었고, 둘 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드물게 불렀던 호칭이라 그가 동그란 눈으로 아를린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한테, 정말로 지금 사과하거나 상의할 일 없어?"
제발 지금 말해줘. 내가 그 여자를 만났다고. 유언장에 대해 언급했지만, 너에게 상처 입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 말해줘.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 술로 입가를 적신 루트비히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이야길 하는지 모르겠어, 아를린."

황태자가 동궁의 침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옆에 고운 피부의 미인이 아닌 흰 리넨 커버를 씌운 커다란 베게가 놓여 있었다. 
그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목으로 지그시 누르며, 침상 옆 시계에 손을 뻗었다. 새벽 다섯 시였다. 인기척이 들리자 침실 옆의 쪽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시종이 밀수를 한 사발 가지고 들어왔다.
"윈스턴 대공은?"
"전하를 침실로 모셔드리고 귀가하셨습니다."
"이 쪽으로 와달라고 해. 마차를 보내."
루트비히가 꿀물로 숙취를 달래며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을 때, 시종이 당황한 얼굴로 들어와 윈스턴 대공의 말을 전했다. 대공을 태워 오라고 보냈던 마차가 텅 빈 상태로 동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어전회의에서 뵙겠습니다, 라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그건 그대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대공의 용태는?" 어제 꽤 술을 퍼마셨으니 상태가 적잖이 걱정되었다. 아를린은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동궁에 있는 독주란 독주는 다 가져오게 해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던 것이다. 
"무척 평온해 보이셨습니다. 다만 신경쓰이는 점이 하나."
"하나?"
"어제 윈스턴 대공저에, 일을 그만 두고 사라졌던 시녀가 찾아와서 태중에 전 대공의 아들이 있으니 대공 관저를 비워달라, 이는 황태자가 윤허한 일이다, 라는 이야길 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이야길 한 적이 없는데."
"어제 그 여자와 이야기 나누실 때 전혀 언급하신 바 없으십니까? 대공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말로는, 그 일로 대공 전하께서 대노한 상태로 동궁으로 향하셨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루트비히는 어제 아를린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 여자, 분명 '헛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황태자에게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동궁을 들렀다가, 대공저를 찾아간 것이었다. 아를린은 안나와 황태자가 독대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어째서, 면전에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걸까. 차라리 자신의 멱살을 잡고, 네가 왜 그런 소릴 했냐며 따졌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했을 것 같았다. 대답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루트비히는, 지금 이 사실을 안 이상 당장 수습하지 않으면 자기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갈 것이라 직감했다.
"말을 준비해 줘. 바로 윈스턴 대공저로 갈거야. 그리고 당장 그 여자 잡아 와. 윈스턴 대공의 전 시녀였던 여자."
어전회의 시간이 머지 않았지만, 루트비히는 시종이 끌고 온, 안장도 얹지 않은 말을 급하게 타고 윈스턴 대공의 황궁 내 관저로 향했다. 아직 외투 조차 걸치지 않은, 겨우 바지 위에 셔츠만 걸친 차림이었던지라 사람들의 눈에 띄면 결코 좋은 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런 체면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아를린-!"
윈스턴 대공이 어전회의에 가기 전 매무새를 단장하는 방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뜯어 말리려던 시종도 뿌리치고 그예 뛰어 들어가 문을 열어 젖힌 사람을 보고 아를린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그녀는 아직 가벼운 가운 차림이었다. 당황하는 시종을 내보낸 그녀는 감히 황태자가 보낸 마차를 돌려보낸 사람 치고 표정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왜 어제, 이야기 안 했어? 내가 그 여자한테 '가서 대공위를 달라고 해라'라고 시켰다는 말을 듣고 정말 믿었어?"
"......"
"적어도 나한테 물어봤어여지. 유언이 그리 공표되긴 했지만 내가 왜 너를 물러나라고 해? 네가 윈스턴 대공위의 정당한 계승자라는건 나도, 폐하도 인정한 사항이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었나? 대답해."
"나를 이렇게 극진히 생각을 했다면, 한밤중에 불러놓고선 책상 위에 신부 후보 사진을 펼처놓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게 문제야? 아를린. 어제 네 전 시녀가 와서 했다는 말은--."
"듣고싶지 않아."
"아니, 끝까지 들어. 이건 명령이야. 난 그 따위 이야기를 그 여자한테 한 적이 없어. 내가 왜 그런 소릴 해? 아니, 오히려 넌 지금까지 날 어떻게 생각했어? 친구조차 아닌거야?"
루트비히는 대답하지 않는 아를린의 손목을 잡은 뒤, 거칠게 끌어 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불안한 기분이 들게 해서 미안해. 무시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 미안해. 그 여자의 처분은, 네가 하라는 대로 할거야. 유산을 시키든, 죽이든, 아니면 더한 처벌을 내리든 간에. 너에게 거짓말을 해서 뒤흔들어 놓은 대가는 제대로 치르게 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가 아를린의 목덜미에 고개를 푹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 곁에서 사라지지 말아줘."

'Writings > Di 245(BE, A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습작(9월 12일)  (0) 2020.09.12
[아카이브 이펙트] 7년 전, 청첩장 받던 날  (0) 2020.09.02
[가] 99일의 황태자비  (0) 2020.07.17
습작(99일의 황제)  (0) 2020.06.05
습작(99일의 황제, 조각1~3)  (0) 2020.05.2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