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황녀가, 한 남성의 팔짱을 낀 채 문을 나서고 있었다. 때마침 내 방에서 창 밖을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볼 일 없는 광경이었다. 미소짓고 있는 황녀의 눈이 나와 맞닥뜨렸다. 누가 보아도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이었다. '이겼다,'고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만약 나오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저택을 나서는 이가 자신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엎어버린 물그릇에 다시 물을 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아를린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나갈 채비를 했다. 계약 기간이야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여길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복원 재료는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르고 싶어 늘 하던 아주 평범한 외출이었을 뿐이다.
대공 저택을 나서자 마자 수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시야가 검게 가려진 것을 제외하면.
"사서님, 혹시 무도회 가 볼래요?"
반납받은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남작 영애가 싱긋 웃으면서 얇은 봉투를 하나 건넸다. 무엇인가 싶은 표정으로 보니 설명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무도회 티켓을 구해 왔는데 상대가, 절대로 춤 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 대신 가 달라는 말이었다.
재산이 대단한 남작가의 맏딸이 한사코 거절하는 춤 상대가 대체 누구인가 싶어 호기심에 살짝 봉투를 열어보았을 때, 아를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가겠다,'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한 마디가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한 채.
딱히 결혼할 생각이 아직은 들지 않아 무도회에 적극적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선 모금을 위한 무도회라면 평판을 위해 몇 번은 나가는 편이었다. 나오와 춤을 추는 파트너 여성의 집안에서, 댄스 카드(순서를 알려주는 카드)를 얻기 위해 거금을 낸다는걸 알게 된 이후로는 참석 횟수를 줄이긴 했다. 왠지 어딘가에 팔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상대로 만나는 아가씨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보여서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다.
쓸모없는 환상을 심어주어 여럿 고통받게 하는 일은 취미로 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무도회 역시 시즌 중 의무로 참석하는 몇 안되는 자선 연회 중 하나였다. 춤 선생이 별로던가, 아니면 본인이 긴장을 너무 했던가-첫 연회에 나온 조그마한 아가씨에게 발을 잔뜩 밟혀 가며 춤을 춘 이후로는 기분이 아주 별로여서, 다음 파트너에게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가고픈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음 파트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주 다른 사람이 있다는걸 눈으로 본 순간, 그 빌어먹을 호기심과 즉흥적인 성격이 발동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남작 영애로 가장한, 평민 여자와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다행히 이 여자는 내 발을 밟지 않았고,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귀족들만 모이는 이 파티에 용감하게 나타난 것인지. 결국 춤이 끝나고, 내 할 일은 끝났으니 그대로 이 여자를 두고 집으로 돌아갔어도 되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칵테일 잔을 건넸다. 주변에서 그녀에게 시선을 쏟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지금껏 연회에서 단 한 번도, 나와 춤을 춘 상대에게 술잔을 건넨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