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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99일의 황제, 조각1~3) 본문

Writings/Di 245(BE, AE)

습작(99일의 황제, 조각1~3)

alicekim245 2020. 5. 28. 11:37

카틀레야의 강짜에 일부러 지는 척, 연회 순서를 양보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 그 여자가 눈독을 들이던-황태자에게 계속해서 요구하던 그 보석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음을 대놓고 보여주고 싶었다.
흔한 여성들의 자존심 싸움, 그런 것이었다. 더군다나 죽은 황후가 소중하게 여긴 붉은 루비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최상급의 보석이었고, 황제가 직접 아를린의 대공위 즉위를 축하해 주기 위해 만들도록 명한 백금 초커에 장식되어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상자를 하사해 줄 당시에는 열어보지 못하게 했었기에, 아를린은 선물의 정체를 알고 처음에 의아하게 생각 할 정도였다. 며느리 될 여자가 이 보석을 갖고 싶어 한다는게 사실상 공공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일부러 그것을 윈스턴 대공에게 준 저의를 알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윈스턴 대공으로서 나가는 아를린의 첫 연회 드레스를 제작하게 된 영광을 얻은 디자이너는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넣어 옷을 완성했다. 목에 둘러진 백금 초커의 붉은 루비에 어울리는 붉은색 드레스는, 각도에 따라 검은 빛깔이 아른거리는-패션에 눈을 뜬 아가씨라면 누구나 감탄하게 만드는 디자이너의 역작이었다. 검은색 머리칼은 틀어올렸고, 아를린은 조금 망설이다가, 십년 전 황자에게 약속의 증표로 받은 은방울꽃 머리꽂이로 꾸밈을 마쳤다. 
연회장에 들어선 아를린은 걸음을 내딛는 모든 순간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시선을 이제는 즐겨야 했다. 곧장 인사를 위해 다가간 예비 부부는 대공의 등장에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다가, 카틀레야가 입을 뚝 다물어버리는 바람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았던 것이다.
자기가 노리던 보석이, 대공의 목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을.

금번 대의 대공이 남성이었다면, 황후가 죽고 없는 지금 카틀레야가 황실 여성 순위에서 가장 상위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아를린이 대공위를 손에 넣음으로서 상황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방대공을 제외하고 제국의 유일한 대공 가문인 윈스턴 대공가의 수장이, 황태자비와 위치가 같음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나이도 비슷하니 필연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첫 대면에서부터, 아니 이전의 연회 순서를 양보받은 것에서부터 카틀레야는 지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대공의 충성 서약일에 약혼 기념 연회를 열어야겠다며 강짜를 부린 것도 그녀였고, 황후의 상징과도 같은 보석을 아를린에게 '빼앗긴' 것도 그녀였다.
패배를 직감한 카틀레야의 얼굴이 순간 붉어지는가 싶더니, 루트비히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쥐는 것으로 일시적인 소강이 찾아왔다. 약혼 관계라고는 하나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을 본능 레벨에서 알고 있는 카틀레야는 금방 제 감정을 숨기고, 패배감을 묻어버린 뒤 아를린의 면전에서 다시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첫 춤은 온전히 황태자와 그 약혼자에게 바쳐지게 되었기에, 아를린은 플로어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커플을 바라보며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의 소파에 편하게 자릴 잡고 앉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용기있게 춤을 청할 대공이 아닌 남자 귀족은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대공을 이겨먹은 카틀레야와 랑엔펠트 백작가에 밉보이지 않아야 삶이 편해질 테니까.

술이 달콤하게 느껴질 때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함이 옳았다.
아를린에게 처음으로 춤을 청하는 남자는, 이번 시즌 내내 어떤 의미로는 회자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위험' 요소를 안고 싶은 정신나간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남자만 승계를 하던 대공위를 기어이 물려받은 최초의 여계 대공이었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제 뜻대로 휘두를 수 있을 만큼 대공이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성격이 아님을, 멍청이가 아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작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없는 귀족가의 차남, 삼남이 작위 계승권을 가진 여성 귀족들과 결혼하려 하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 그리고 본능에 가까웠다. 더불어 결혼 시 체결하는 '서약'에 따라 자신 아니면 자신의 자식이 그 귀족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성의 작위 계승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여전히 남계 계승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귀족가의 여성은,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기예를 갈고 닦아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후계가 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재력에 따라 정부를 두거나 뒷방에서 늙어가며 잊혀지는 일생을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화려한 연회의 끝은 약혼, 그리고 결혼이었지만 그 결혼의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로맨스를 기록하고 지어내는 작가들은 관심이 없었다.

첫 춤이 끝나가는 가운데,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려 아를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플로어에서 댄스에 열중하는 한 커플만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으나, 아를린은 이내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사내 하나를 금방 눈으로 짚어낼 수 있었다.
십년 전의 위광에 비하면 나이 든 태가 났으나 여전히 미형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고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묻어나는 그녀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황태자 자리를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던 미하일이 크림색 예복을 입은 채 단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아를린의 연보랏빛 눈을 알아차렸다. 아를린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가 여전히 꿈인 것 같았다.
아를린이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타이밍이 좋게도 첫 곡이 끝나고 약혼한 커플을 축하하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미하일은 그 와중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아를린에게 정중하게 춤을 청했다.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가는 아를린의 등 뒤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그 사람들 중에는 막 춤을 마치고 잠시 인사를 받기 위해 내려간 예비 부부도 있었다.
형이 갑자기 찾아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하필이면 이번 연회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루트비히는 그가 춤을 청한 상대가 아를린이라는 점에 두 번 당황했으며, 카틀레야는 모두의 관심이 아를린과 미하일을 향하는 것이 불쾌했다.
스콜라 동기, 동년배, 위치가 비슷한 지위.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는 이상 평생을 비교당하며 살 거라는 위기감이 새삼 들었다.
호기심과 질투어린 시선과는 별개로, 미하일의 손에 이끌려 플로어로 나선 아를린은 이미 술을 약간 마신 덕분에 양 뺨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아를린."
어쩐지 다른 곳을 바라보기만 하는 듯한 아를린의 시선을, 미하일의 느긋한 목소리가 사로잡았다. 여전히 그는 아를린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컸다.


"어머나, 대공 전하. 에스코트도 없이 혼자 오신걸까요? 자립심을 보여주신 것도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어서 '제가' 좋은 짝을 소개해 드려야겠네요."
카틀레야가 분홍색 비단을 바른 부채를 살랑이며 높은 음조로 말하자, 아를린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예비 황태자비의 면전에서 소리를 지른다던가 노려본다던가 하는 품위없는 짓을 저지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두가 그녀와 카틀레야의 대화를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더더욱 그러했다.
"아마 황태자 전하만큼 완벽한 반려는 없을테죠? 무척이나 부럽네요, 랑엔펠트 백작 영애."
모두가 예의 상 카틀레야를 황태자비로 지칭하는 가운데 아를린이 정확한 명칭을 불러주자, 상대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졌다.
약혼을 했다고는 하나 아직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주는 것이 맞다고, 아를린은 생각했다. 곁에 가까이 서 있다가 '백작 영애'란 말을 들은 황태자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두 여자의 신경전을 지금은 말릴 필요가 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카틀레야를 백작 영애로 지칭한 것은 실제 그녀의 지위가 그러한 것도 있지만, 아직 귀족가 아가씨에 불과한 그녀가 대공인 아를린 자신을 하대하려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그러했다. 황후가 없는 지금, 귀족 여성 서열은 아를린이 가장 위로 대우받는 것이 당연했다.
황태자가 끼어들어 정면충돌은 없었지만 아를린은 불쾌감이 남아 있었다. 짝이 없는 자신에 대한 조롱을 그냥 넘어가기엔, 이전에 이미 쌓인 앙금이 여전했다.
"아를린."
인사를 하러 찾아온 다른 귀족에게 카틀레야를 보내놓고, 루트비히가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꼭 이 자리에서 해야할지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아를린은 그런 황태자의 붉은 눈동자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비록 황태자와 대공의 지위로 마주하고는 있으나 이전에는 스콜라 동기였고, 훨씬 전에는 궁에서 같이 뛰놀던 소꿉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루트비히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애정과 추억을 넘어 철저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고 아를린은 생각했다. 비록 황궁을 떠났다고는 하나, 버젓이 살아있는 형을 대신해 황태자 자리를 물려받은 남동생의 입지는 견고하다고 보기엔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러니 군무대신인 랑엔펠트 백작의 여동생, 카틀레야와의 결혼이 필요했을 터였다. 이 결혼으로, 루트비히는 막강한 군사적 지원이라는 배경을 얻을 수 있었다.
개국 공신 가문이란 혈통적 우월성을 지닐 뿐인 윈스턴 대공가와의 혼약은 야심가인 루트비히에게 매력적이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야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닌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카틀레야와 루트비히가 약혼을 발표하기 일주일 전까지, 아를린과 루트비히는 연인이었으므로.

"혼자 온 것이 내 탓은 아니잖아."
어색한 침묵 끝에, 아를린이 아까의 예의바른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놀리듯 황태자에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가지게 되는 감정은 이제 미묘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 랑엔펠트 백작영애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대공으로서 자립하고 싶었던 아를린을 위한 것도 있었다.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다고 미워하고 원망한다고 말하기엔 서로에게 소중했다.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미소가 서로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카틀레야가 끼어듦으로서 중단되었다.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 다른 여자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걸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대놓고 루트비히의 품에 안겨들었다.


"...가는거야?"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황태자가 자리를 버리고, 황궁을 떠난다는. 누군가는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를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황태자가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어쩔 수 없이 나간다는 소릴 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달이 후원을 옅게 물들일 무렵 미하일을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아를린? 이 시간에 여긴 왜 온거야?"
"그냥...발걸음이 여기로 이끌렸어. 이 시간에, 연못에 비친 달 보는거 좋아하니까. 미하일은 왜 여기 혼자 있어? 일 할 시간 아니야?"
"윽, 너도 그 소리구나."
"그야, 황태자 자리를 받자 마자 계속해서 일에 몰두하느라 나랑 루티와는 잘 놀아주지도 않았는걸."
"음..." 미하일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아를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두어서 미안해."
"당분간은 못 보겠네."
예전부터 아를린은 눈치가 빠르다고 보기엔, 석연찮은-이상한 통찰력 같은게 있었다. 어쩌면 미하일의 눈에 담긴 온갖 감정들을 본인보다 더 잘 알아채는 것 뿐일 수도 있었으나, 지금의 그에게는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한마디였다.
"나, 들었어. 여러가지 이야기."
"그랬구나."
"미레이유?"
작은 소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미하일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적어도 모르는 사람이 한 둘은 있기를 바랐는데.
"안 가면 안돼? 꼭 떠나야 하는거야?"
"내가...책임 져야 할 일이 있어."
"미레이유를, 좋아해?"
"그런걸까."
우물쭈물하는 어린 아이의 얼굴을 보자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혹은 동정인지는 스스로도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모두가 황태자 자리를 왜 내치느냐,고 물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뿐이라고 말해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아직 미숙한 자신을 설득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미레이유에 대한 것도.
"돌아올거라고 약속해 줘."
약속을 함부로 해 주어도 되는걸까. 오늘이 지나면, 불확실의 세계에 뛰어든 자신이 일 년 후에도, 이 아이가 성인이 되는 그 해까지도 살아남을 것이라 자신할 수가 없는데.
"아를린이 지금의 나만큼이나 강해지면, 그래서 날 지켜줄 수 있을 때가 되면 돌아올게."
"그게 뭐야. 이상해. 내가 어떻게?"
훗날의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부탁. 아를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미하일이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다녀올게. 아를린. 잘 지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대공위를 상징하는 반지는 미리 줄 테니 알아서 끼우라며 사라진 한량같은 아버지의 초상화를 저택에서 다 치워 화랑에 쳐박아 두라는 것이 대공으로서 아를린이 사용인에게 내린 첫 명령이었다.
황제 앞에 나아가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절차는 종료였고, 관례대로라면 연회를 개최해야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 날 저녁, 황태자의 약혼 기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황후가 없는 지금의 위계 서열을 생각하면 사방대공과 동급인 아를린의 연회가 우선시 되어야 했으나, 황태자비가 될 랑엔펠트 백작의 여동생이 이 날짜를 고집한 탓에 일주일 뒤로 미뤄진 것이었다. 그 순서를 두고 귀족들이 '벌써부터 권력싸움이냐,'고 쑥덕거렸다.
그냥 상관없다-라고 말하기엔 분명히 문제가 있었으나, 아를린은 그예 카틀레야의 고집을 꺾으려는 황태자를 만류함으로서 오히려 관용을 베푼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대공의 즉위를 자기네 기념 파티로 묻어보려던 얕은 수작에 실패하고 오히려 평판까지 깎아먹었다는 사실을 카틀레야가 알아차린 것은 연회의 순서가 결정된 다음날이었다. 아마도 명민한 랑엔펠트 백작이 조심스레 전했을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가, 서재에 앉아있는 아를린의 귀에 제 발로 찾아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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