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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일의 황제] 3 본문

Writings/Di 245(BE, AE)

[99일의 황제] 3

alicekim245 2020. 5. 8. 08:49

몇십년 만에 열리는 황태자의 결혼식인 덕분에, 식이 열리는 대성당으로 쏠리는 관심이 대단했다. 지붕이 없는 황실의 화려한 마차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흰 예복의 부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식이 이루어질 제단 가장 앞 쪽에 아를린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황족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것을 반영한 배치로, 그 사실을 알고 황태자비가 소리를 질렀다는 소식이 그녀를 미소짓게 했다.
일부러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벌써 히스테리를 부려주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하지만 버진로드를 걸어오는 카틀레야의 얼굴은 환하고 밝아, 그야말로 신혼의 단꿈을 꾸는 새신부의 그것이었다. 흰 장갑을 낀 작은 손을 잡은 루트비히 역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아직도 생각하나? 저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한다, 같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화헌대공이 일부러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그럴리가요."
어릴 때야 저 새신랑을 순진하게 좋아했고, 대공이자 황태자비가 되겠다는 야망도 있었다. 저 사람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모든게 이미 틀어져 있던 것을, 오늘로부터 딱 일 년 전에 알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의 귀에 사랑을 속삭이는 루트비히를 목격했을 때.
자신은 대공위를 손에 넣지 않는 이상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다고. 그러니 대공이 되어 저 인간을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막상 화사하게 웃는 신부의 얼굴을 보니 왜 아버지를 칼로 찔러가면서까지 이 자리를 탐했나, 싶은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에스플리크에 도착한 그 이후부터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므로.

피로연은 황궁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결혼식과 피로연이 연이어 열리는 그 사이엔 시간이 충분했고, 아를린은 화헌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쉬고, 드레스를 갈아입은 뒤 황궁으로 출발 할 생각이었다.
넥타이를 풀어 차림을 가볍게 한 에스프라드가, 아를린이 쉬고 있던 응접실에 유리잔에 얼음을 넣은 호박색 액체를 들고 왔다.
"수고했어."
"아, 감사합니다." 양 손에 쥐고 있던 잔 중 하나를 건네준 에스프라드는, 그녀의 옆에 놓인 소파에 자릴 잡고 앉았다.
한참을 말 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생각나는 일이 많았는데, 말로 꺼내서 더 구체화 하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차가운 음료에서 맛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당분이 들어 있겠구나, 싶은 생각은 들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 아를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만큼 그녀를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화헌대공의 표정이 오히려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슬슬 준비할까? 피로연에 주인들보다 늦으면 안되니."
공교롭게도 황성 내 페트라르카 대공가의 저택이 아직 공사 중이었다. 시즌까지는 시간이 다소 남아있다는 점이 다행이었지만, 아를린은 어젯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그를 흔쾌히 식객으로 맞이하고 가장 좋은 객실을 내어 준 터였다.
지난 일 년간, 그에게 수련을 받으면서 '신뢰'가 쌓였단 생각이 들었다. 도를 넘는 짓만 벌이지 않는다면 꽤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수 있는, 스콜라 선배이자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 황태자의 오랜 친구이자 '친한 형'인 그의 존재는 아를린에게 꽤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드레스룸에 앉아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를 입고 시녀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손질하는 도중, 시종이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에스프라드가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으로, 시종이 나가고 상자를 열어보니 은으로 꽃을 만들어 사파이어로 장식을 마무리 한 머리핀이었다. 아를린의 눈 색깔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꽃은 화헌대공령에서만 자생하던 것이기에 단박에 그가 신경써서 준비해 온 귀한 패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스코트를 위해 드레스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헌대공은 아를린이 틀어올린 머리카락에 마무리로 그가 선물해 준 머리핀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네."
"제가 받아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동안 나한테 하드 트레이닝 받느라 수고했다는 의미야." 긴 드레스를 입는 바람에 계단을 내려가려면 에스프라드의 팔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아를린이 말했다.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고맙습니다."
"간직해 주면 고맙고. 앞으로 네가 슈플리테에 오래 머무를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연회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를린이 화헌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타나자 귀족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무도회가 가진 가벼움의 장점이었다. 격식을 차려 자기보다 신분이 한참이나 높은 상대에게 조아리는 일은 생략해도 되는 자리.
황태자 내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아를린은 다른 사방대공들과 환담을 나눈 뒤 기둥 근처의 소파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흰머리가 히끗한 서방대공에게 발을 붙잡힌 에스프라드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문득 화려한 대리석 기둥을 따라 천장을 올려다 보니 세심하게 완성된 조각들이 보였다. 황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와, 수백년 쌓아 올린 제국의 부와 화려함을 잔뜩 담아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 일부는 실제 보석을 박아 넣었다고 들은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한때는 저 모든게 내 소유가 되지 않을까, 헛된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다. 루트비히의 품에 안겨,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꿈.
하지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그 저녁의 사건 이후로 아를린이 한 생각은, 누군가의 '부인' 위치는 흔들리기 쉽다는 것이었다. 귀족 여성이 이 사회에서 가지는 입지는, 막대한 지참금을 남편의 가문으로 들고 와 가문의 재산을 불리고 후계자를 낳아주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선택을 받기 위해 기예를 갈고 닦고, 초대받은 신사들이 앉아 있는 낮의 응접실에서 그를 사로잡기 위해 피아노 아니면 하프를 연주한다든가...시즌이 지나가면 영지나 별장으로 향해 목가적 시간을 보내면서 정물 스케치를 그리며, 동행한 신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한다든가.
아를린은 천장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왼손 검지에 끼워진 백금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윈스턴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과거 용이 숨결을 불어넣어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독특한-대공위 계승자, 즉 대공의 상징인 반지였다. 아버지가 낙향한 이후 그의 서재 책상 위에 단정하게 놓여있던 것이었다.
누군가 머리 위에 씌워주는 관보다 지금 스스로 손에 끼운 이 반지가 더 가치있었다.
그렇다고 믿어야 지금 이 피로연에서 느껴질 비참함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한 때는 사랑했던 사람의 결혼식날에.

악단이 음을 조율하고, 첫 춤곡은 온전히 황태자 내외에게 바쳐진 뒤에야 남녀가 짝을 지어 다음 춤을 추기 위해 플로어에 나가고 있었다. 별로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던데다, 감히 대공에게 춤을 먼저 청할 귀족들이 없었기 때문에 아를린은 여전히 기둥 가까운 곳에 놓인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윈스턴 대공 전하."
"허리를 숙이실 대상이 아니지 않나요, 화헌대공님."
"이제 엄연한 대공가의 수장이시니, 마땅히 예를 표해야지."
그녀에게 검술과, 신력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준 예의 '스승'이나 다름 없는 화헌대공이, 아까 서방대공과의 이야기가 겨우 끝났는지 아를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살짝 허리를 숙여 보이자, 아를린이 하르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황태자 내외와는 인사를 벌써 마치셨나요?"
"물론. 나는 순수하게 춤을 청할까 해서 온건데 그렇게 경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내 그의 커다란 손에 이끌린 아를린은 두 번째 춤곡의 시작과 함께 플로어의 대열에 합류했다.

감미로운 선율에 맞추어 두 사람이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두 사람은 여느 연인과 같아보였다. 서로를 응시한 채, 한참이나 말 없이 춤을 추던 중 에스프라드는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자신들을 응시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명의 대공이 춤을 추고 있으니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 했다.
"황태자비는 조심하는 것이 좋아." 부부의 서로 다른 시선을 느낀 에스프라드가 경고의 말을 했다.
"그건 말씀 안하셔도. 어제 결혼식장 하객 좌석 배치도를 보고 소리 질렀단 소리가 벌써 제 귀에도 들어왔으니."
아를린이 그렇게 말하며 큭큭 웃어보였다. 솔직히 우스웠다. 황태자가 질리면 이혼당해 황궁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황태자비가 벌써부터 패악질이라니, 간이 커도 너무 큰 것이 아니던가. 그녀의 반응에 에스프라드가 짐짓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래서, 황태자비를 내쫓고 그 자리를 거머 쥘 생각인가?"
"그럴리가요. 카틀레야도, 그 황태자비 자리도 저한텐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은걸요. 대신 그 쪽이 시비를 걸어 온다면 이 쪽도 전력으로 응할거지만...이미 다른 사람의 남자가 된 사내에게는 관심을 주고싶지 않아요. 이제부터 대공의 일에도 익숙해져야 하고. 또..."
"또?"
"정실의 존재 의의는 후계가 될 사내아이를 낳는 것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을 편하게 해 드려야죠, 아름다우신 황태자비를 위하여."

곡이 거의 끝날 무렵, 에스프라드가 아를린을 약한 힘으로 끌어 당기더니 귓속말을 건넸다.
"아를린."
"예?"
"황태자가 이 쪽을 보고 있으니, 잠시 실례."
그렇게 말한 화헌대공은 재빨리 아를린의 머리를 장식한 핀의 위치를 다정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눈빛도, 손짓도 모두 상냥했다.
"숙녀의 머리는 적당히 흐트러지는 것이 더 보기 좋지만, 바로잡아 주는 것이 또 신사의 도리지." 그리곤 그가 아를린의 면전에서, 드물게 씨익 웃었다. 에스프라드는 감정을 다채롭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상기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그러다 제가 반하면 어쩌시려고."
에스프라드가 대답 대신 옅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춤 한 곡이 끝나고, 아까 아를린이 있었던 소파에 이미 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에스프라드가 그를 보더니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손을 놓아준 뒤 휙 뒤돌아서 가버렸다.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아를린 윈스턴 대공."
"청하시니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무도회에서 상대의 춤을 거절하면, 그 다음 춤곡부터는 누구의 초청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차피 재미없는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춤이라도 추는 편이 나았다. "뻔히 보이는 초대가 아닌지요? 전하."
"이제 너보다 서열 높은 사람은 남질 않아서."
"아하, 그런 이유라면 기꺼이."

"그렇게까지 대공위를 손에 넣어서 하고싶은 일이 뭐였어? 카틀레야를 협박하는 것?"
"그깟 여자 하나 쳐 내는 일은 나보다 네가 더 잘 하는 일이잖아?"
루트비히가 먼저 입을 열었고, 곧이어 돌아온 대답은 아를린의 예전 성격 그대로의 것이었다. 그로서는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한 대답.
"야."
"협박으로 끝낼 거였으면 아버지를 강제로 실각시키는 미친 짓은...뭐, 아마도 했을 것 같지만, 그냥 거기서 그 여자를 찔러 죽였겠지. 알다시피 내 신력은 '황가를 수호한다'는 기아스에 묶여 있으니까."
"말 조심해."
"분명 그 여자를 죽이려면 그 때가 절호의 기회였을거야. 내 기아스에 의해, 나는 황족을 죽일 수 없어. 너도 그걸 알고 있었고. 내심 죽길 바랐던거 아니야?"
"그럴리가. 카틀레야는 내가 선택한 최고의 배우자야."
"그 때는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아, 역시 들은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루트비히를 아를린이 살짝 미소지은 채 응시했다. 딱히 기대 못했던 반응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아를린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 장소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지난 일 년 사이에 몇 번은 들었으므로.
"은애하는 연인이든, 배우자든 그 여자가 처한 입장은 나한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있거든."
하지만 아를린이 말한 의외의 대답에, 황태자의 시선이 잠시 아를린이 아닌 황태자비 쪽을 향했다. 그는 그녀가 내뱉은 '집중'이란 단어의 의미를 찬찬히 파악하고 싶었다.
"그것 참 영광이네. 윈스턴 대공가의 첫 여성 대공님께서 황태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대놓고 말씀해 주시다니 말이야."
"유난스런 축하인사는 별로 받고싶지 않아."
"왜 돌아왔는지는 끝까지 말 할 생각 없는건가? 그때 날 선택하지 않은걸 후회하게 해 줄거라는 각오, 같은게 없는거냐고 묻는거야."
"글쎄......내가 아직 널 좋아한다고 말하면, 표정이 어떨지는 궁금하긴 하네."
"--농담으로라도, 그런 이야긴 하지 마."
"초야를 치르기도 전에 이런 이야길 해야 좀 더 재밌는거 아니겠어? 황태자와 여대공의 불륜이라니, 카틀레야가 알면 피눈물을 흘릴까?"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루트비히가 쏘아붙였다.
"일부러 돌아온거잖아. 내 결혼식에 맞춰서."
"일부러 골랐잖아? 카틀레야에게 두 번이나 춤을 청한 그 무도회 날에 맞춰서. 피차일반이지. 그러니 내가 널 아직 마음에 둔다고 말해둬야, 네가 좀 더 즐겁지 않을까."
"하지 마......제발."
방금 전의 말은 어째서인지 진심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제와서? 아를린은 비웃음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그 때 카틀레야를 택한 것은 루트비히였다. 대공위를 가진 여자를 원했지만 실패하자, 스콜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황족과 결혼하길 갈망하는 여성을 택한 것도.
"그깟 백작가의 아름다운 영애와, 제 아버지까지 찌르고 대공이 된 나 사이에 갈등한다는 것도 웃겨. 연기 솜씨는 아직 일품이네. 앞으로도 좀 더 갈고닦아줘.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대답해 줘."
"스콜라 시절 우의의 증표로 들어주도록 하지."
"너와 나는 이제부터 어떤 관계가 되는거지?"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증오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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