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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99일의 황제]2

alicekim245 2020. 5. 4. 12:10

누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는 대공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 덕분에 누님 주변에 꼬이는 작자들이 무얼 기대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에, 윈스턴 대공이 황태자가 배석한 어전회의에서 ‘대공위는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벌어진 모든 일들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 할 정도가 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 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저의를 가지고 접근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었다. 특히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

윈스턴 대공이 어전회의에서 내뱉은 말 한마디로 루트비히 황태자는 황태자비로 고려하고 있던 아를린 윈스턴을 단숨에 내다 버렸다. 대공위를 가진 황태자비를 들여서, 윈스턴 대공위를 황실에서 다시 흡수하고자 했던 계획이 틀어졌던 것이다. 그는 직후, 진작부터 눈독들이던 카틀레야 클레이오 백작 영애가 황태자비가 될 것이라 선포함으로서, 스콜라 졸업식에도 참가하지 않고 곧장 슈플리테로 내달린 누님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아를린의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면전에서 ‘내가 대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되돌아온 대답에, 순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좌절과 경멸의 표정을 나는 여전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안타까웠고, 그래서 더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내가 윈스턴 대공이 되어 허울 좋은 권력과 의무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그 자리를 갈망하고 그럴 능력도 갖춘 아를린이 공위를 이어받는 것이 옳았다. 비록 아버지는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계승하기를 원했지만 말이다.

아를린 영애가 화헌대공령으로 갔다는 소식은 졸업식이 끝나고 일주일 뒤에야 온 황성에 퍼졌다. 화헌대공이 아직 혼인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둘이 어쩌다 마음이 맞아 곧 약혼을 선포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4주가 지나도 둘이 교황의 축복 아래 결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가 없자 다들 아를린을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다. 황태자비로서 약혼을 발표한 카틀레야가 예물로 어떤 보석을 받게 될지, 클레이오 백작가의 재산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가 사람들의 관심사로 자리잡았다.

화헌대공가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일부러 귀를 닫지 않은 이상, 아를린도 그 소식을 들었을 터였다. 스콜라 시절 사귀던 애인이 이별의 말없이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았고, 무도회장에서 보란 듯이 쐐기를 박아 넣었으니까.

몇 분 차이로 세상에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아를린은 내게 ‘누나여서’ 다행인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가 짊어졌을지도 모르는 가혹한 운명을 내 손으로 내렸을지도 몰랐다. 황실이나 대공가의 적당한 사내를 골라 결혼하라고 닦달했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녀가 슈플리테에 가 있는 동안 몇 번 찾아갔을 때, 하루는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를린이 면전에서 하르르 웃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황태자의 결혼식은 스콜라 졸업식 전야의 연회로부터 딱 1년 되는 날 열리는 것으로 정해졌다. 일부러 노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날짜 선정이었다. 황태자비의 드레스 준비, 식의 순서와 규모를 결정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었으나, 황태자와 그 여자가 직접 그 날을 골랐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도 날아든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의심은 타당하다 할 만했다.

누이가 슈플리테에 가 있는 동안 몇 번은 찾아갔었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대공가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었다. 나는 주로 새벽부터 이어진 수련을 마치고 저녁이 되어서야 식당에 들어서는 그녀를 겨우 만날 수가 있었는데, 늘 생글생글 웃고 있는 스콜라 시절의 표정 그대로라 감정을 읽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것도 화헌대공의 교육 중 하나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일 년이 거의 다 지나 갈 무렵. 황성 리프레 안에, 일주일 뒤에 있을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흰 비단 위에 은사로 수를 놓은 깃발이 내걸린 때 그녀가 마침내 편지를 내게 주었다. “이 봉투를, 아버님께.”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은 그 편지에는 윈스턴 대공가의 상징인 해당화가 새겨진 밀랍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를린이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제 사적인 서신에서조차 사용하지 않은 대공가의 물품이었다.

“이제 돌아올 생각이야?”

“그 사람이 하필 이 시기를 정했으니 나도 그대로 되돌려줘야지. 당연하잖아?”

“어딘가의 복수귀 같은 말을 하네.”

“시작한건 그 쪽이고……” 아를린이 유리잔 안의 호박색 액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나도 이젠 때가 되었다 싶어서 움직이는 것뿐이야. 아버님께는 안부 전해드려.”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를린은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무서운 기분이 든 나는 그날 새벽 마차를 깨워 리프레로 돌아갔다. 졸업 직후 집에서 뛰쳐나갔다는 이유로 딸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전한 편지를 보자 마자 얼굴이 붉어져서는 주변의 집기를 집어 던지려고 들었다. 늘 무미건조하게 집무실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씩씩거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그가 결연하게 말했다. 책상에 기대어 편지지에 빠르게 문장을 휘갈긴 윈스턴 대공은 또다시 나를 전령으로 썼다. 자기가 쓴 편지를 루트비히 황태자에게 전해주라는 말이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내였으나, 야심한 시각에 황태자를 독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황궁으로 들어가 황태자를 찾아갔다. 늦은 시각에 손님을 맞이한 그는 일단 놀란 듯 보였고, 그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자 표정이 누그러져서 술잔을 권할 정도가 되었다. 책상 한 켠에 쌓인 이미 처리한 서류들이 무척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윈스턴 대공으로부터 급한 전보라……제가 대신 왔습니다.”

“아, 그런가.” 내게 대공의 편지를 건네받은 황태자는 한 줄을 읽고 나서 바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받아들이도록 하지. 내일이라고? 곧 황태자비가 되실 그 분도 모셔와야겠어. 볼만하겠군. 넌, 이 편지가 무슨 내용인 줄 알고 들고 온건가?”

“편지를 중간에 뜯어보는 일을, 제게 기대하신겁니까?”

“아니. 만약 알았다면, 조금은 말리지 않았을까 싶어서.”

이 사람도 누님을 과소평가 하는구나. 복수에 눈이 멀어, 호기롭게 황궁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 생각에 이르자 저절로 쓴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황태자는 웃으면서 내게 술을 권했지만 괘씸하고, 분한 기분이 들어 그예 거절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를린이 느꼈던 감정이 과연 내가 지금 느낀 이 기분과 비슷했을까.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살 만큼 헛된 꿈을 품은 것도 아닌데, 제가 손에 쥐어야 할 것을 되찾기 위해서 지금쯤 말을 달려, 오고 있을 그녀가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다음날, 나는 새벽에 저택에 도착한 누님을 현관에서 맞이했다. 아를린의 귀환을 환영하는 사용인들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그녀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살폈다. 아직까지 이 저택의 주인은 내 아버지였기에, 밉보일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은 십분 이해가 되었다. 화헌대공으로부터 받은, 날카롭게 벼린 검을 허리 한 쪽에 찬 그녀는 여전히 찬사를 받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얼굴 한 켠에 굳은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패배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아버님은 이미 특설 결투장에. 거기 황태자 전하와, 클레이오 백작 영애도 와 있을거야.”

“관중이 화려한데?” 아를린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결투의 결과가 나오고 나서야 그 코웃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배신감으로 연단된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도.

황태자가 밤중에 준비시킨 결투장에는 소수의 인원들만이 나와 있었다. 이른 새벽이었고, 어차피 아를린이 제 아비에게 패배할 거라 믿은 사람들이 다수였던 탓이었다. 관중석에는 황태자와, 클레이오 백작 영애 그리고 기사단장—세 명뿐이었지만 아를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적의 편에는 윈스턴 대공이, 청의 편에는 내 쌍둥이 누이 아를린이 자세를 갖추고 검을 서로에게 겨눈 채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 격렬한 분노가 서려있던 것은, 딸이 보인 패륜이나 다름아닌 언행 때문이었을까? 가문을 마땅히 남자에게 물려주어 이어 나가게 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딸이 대놓고 반대한 것에 대한 분노였을까?

“이 결투에서, 윈스턴 대공이 이긴다면 아를린은 대공가의 이름을 버리고 모든 지위도 포기할 것을 서약했다. 그 말이 맞는가?”

진행을 맡은 기사단장이 청명한 목소리로 물었고, 아를린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를린 윈스턴 대공 영애가 이긴다면, 대공위는 이 자리에서 아를린 윈스턴이 가져간다. 맞는가?”

이번에는 윈스턴 대공이 그렇다, 고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동작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클레이오 백작 영애가 손수건을 하늘에 던지는 것을 신호로 두 힘이 일순간 격돌했다. 처음에는 검으로 맞부딪히는가 싶더니 이내 양 쪽의 신력이 흘러나와 폭발하는 그 기운이 좌중을 압도했다. 단 한 사람, 모든 신력을 상쇄하는 힘을 가진 황태자만이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를린의 검이 순간 창백한 빛을 내며 아버지의 외투 소매를 깔끔하게 갈랐다. 피를 흘리는 아버지는 그예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검이 자신의 뺨을 스치는 그 순간에도. 불태우는 투지는 인정할 만했으나 이윽고 궁지에 몰려 내뿜은 신력이 딸에게 완벽하게 제압당해 땅에 볼품없이 내던져진 순간, 백작 영애가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죽지는 않았지만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윈스턴 대공을 아를린이 꼿꼿이 서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몇 합 만에 아를린의 완승으로 결판이 난 것이었다. 아버지를 보는 아를린의 시선에 담긴 감정에 적어도 후회나 죄책감은 없었다.

“약조를 지켜 주셔야 겠습니다.”

협박이나 다름없는 승리 선언. 내가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아를린이 곧장 나를 ‘노려’보는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쓰러진 아버지의 셔츠에서 아를린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를 찢듯이 잡아 채 바닥에 거칠게 던진 뒤 장화로 밟아 산산조각냈다. 와그작,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자존심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황태자 전하, 이 결투의 결과로—아를린 윈스턴은 대공으로써 황가를 수호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아를린이 이길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종일관 자신만만한 태도였던 루트비히의 얼굴에 패색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정치가의 면모를 제 속에서 꺼내, 이내 낯빛을 고치고 제 검으로, 앞에 한쪽 무릎만을 꿇고 앉은 아를린의 양 어깨를 두드리는 것으로 충성 서약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옆에, 황태자의 곁을 차지하고 선 카틀레야는 전혀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짜증이었다.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황실로 돌아와, 제 친부를 곤죽으로 만들고 끝내 윈스턴 대공이 되고 만--황태자의 전 애인이었던 아를린이 몰고 올 파멸에 대한 예지와 같은 불안감이기도 했다.

“제가 스콜라를 졸업하면서 대공위까지 물려받았더라면, 오늘의……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를린이 대놓고 들으라는 듯, 황태자가 아닌 백작 영애를 보며 말했다. 스콜라 시절 카틀레야가, 황실의 일원과 결혼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또한 주변으로부터 ‘그녀를 경계하라’는 조언을 받았음에도 안일하게 대처한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순순히 대공위를 넘겨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곁에 루트비히가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그의 품에 잠시나마 안겼던 아를린 자신의 과오이기는 하였으나, 손에 넣은 줄 알았던 것을 타의에 의해 손 쓸 틈 없이 빼앗겨버린 뒤끝이 이렇게나 달콤하고 씁쓸할 것을. 결과적으로 대공위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초대 황제로부터, ‘절대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맹세를 받은 윈스턴 대공가의 수장이 이제 아를린이었다.

두 여자가 눈빛으로 싸우는 사이 나는 잽싸게 결투장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를 부축했다. 어찌 피가 극적으로 쏟아지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만 잘도 찔러 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은 멀쩡한 그였다. 몇 대 얻어맞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별로 믿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내 등에 업혀 결투장을 나가는 그 순간도 말이 없었고, 대공 관저로 돌아가 곧장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낙향할 준비를 했다. 황태자의 명으로, 아를린이 새로운 윈스턴 대공이 되었다는 소식이 온 황궁에 공표된 것은 그 결투 다음 날이었다.

그날은 윈스턴 ‘전’ 대공은 영지 중 과수원이 있는 작은 마을로 낙향한 날이었고, 황태자의 결혼식이 하루 남은 날이었다. 아마도 작년에 스콜라를 졸업했기에 아를린과 루트비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날짜 선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신부가, 자신의 결혼식 날--황궁 서열 상 가장 앞에 아를린 윈스턴 대공이 앉는다는 사실을 알고 시종들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누이가 코웃음을 쳤다. 결투장에 들어서기 전 나에게 보였던 그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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