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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99일의 황제] 1 본문
높다란 회양목 담장은 비밀을 지켜주기엔 너무나도 낮았다.
“그대만을 은애하오.”
달콤한 사랑의 밀어.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그제서야 받아들인 숙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조금도 맺히지 않았다. 다만, 이런 방식만은 아니길 바랐기에 양 손으로 주먹을 꽉 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담 너머 비단이 사각거리며 무너지는 소리는 아마 애정어린 고백 끝에, 사내의 품에 함락된 가련한 여인의 그것이었으리라.
스콜라 졸업식 전날 열린 연회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꽤 커다란 전장이나 다름아니었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어울릴 수 있는 마지막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평민이거나, 보잘것 없는 귀족 가문의 자식들은 저보다 신분이 높거나 재산이 많은 가문의 자손과 혼인하기를 꿈꾸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 결혼을 통해 행운을 실제로 거머쥐는 이는 몇 없음을 일부러 무시하고서라도, 해 볼 만한 도박이었다. 그 결혼의 결말이 행복했는지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평민 여성이 공작가의 삼남과 스콜라 졸업 연회에서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모든 학생들의 입에 한 번 이상은 오르내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올해는 황태자가 졸업하는 해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그가 춤을 누구에게 청하는지에 쏠렸다. 거의 유일한 후보는, 동갑내기인 윈스턴 대공가의 장녀 아를린이었다. 스콜라 시절 내내 티격태격 하며 좋은 케미를 보여준데다, 사방대공 가문들을 제외하면 서열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당연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저녁놀이 질 무렵 바이올린의 솔로 연주로 시작을 연 무도회에서 황태자가 첫 번째로 춤을 청한 이도, 다시 청한 숙녀도 모두 클레이오 백작가의 영애 카틀레야였다. 상냥하고 모두에게 친절하여 인기가 높았으나, 백작가문의 차녀였기 때문에 으레 다른 귀족 가문의 차남이나 삼남과 결혼할 것으로 예상했던 여성이었다. 모두가 두 번째로 황태자의 손을 잡고 황홀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카틀레야 아가씨를 놀란 눈으로 보았지만, 단 한 사람—아를린 윈스턴 대공녀 만큼은 무표정한 채였다.
신열이 가라앉질 않아 어젯밤 산책을 나갔다가, 저 둘의 밀회를 본 것에 대한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이던 달콤한 세상의 모든 언어가 저 여자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면서 황태자비가 될 일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나풀나풀 날아갔다. 자신이 쌍둥이 동생인 앤드류에게 밀려서, 대공위를 물려받지 못할 거란 아버지의 발언이 나온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일이 아마도 화근이었을 것이다. 아를린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태자에게는 그에 걸맞는 배우자가 필요했다. 강력한 가문 출신의 사람이거나,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어떤 신분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아를린은 전자에 가까웠으나 적어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 때 착각했던 사람으로써 분노를 쉬이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연회장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명망 있는 대공가의 장녀로써, 황태자의 면전에서 ‘네가 나를 가지고 놀았다’느니 그런 추한 이야기는 조금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아를린의 옆에, 졸업생이 주관하는 연회의 감독 자격으로 참석한 졸업생 선배—화헌대공 에스프라드가 슬그미 다가와서는 칵테일을 건네주었다. 얼음과 민트 잎을 띄워 열을 가라앉히기엔 제격이었다.
“이제 슈플리테에 올 생각이 좀 드나?”
“처음 들었을 땐 믿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확신이 드네요. 네, 가겠습니다. 장녀의 권리를 마땅히 주장해야겠어요.”
“내일 새벽, 정문에 있을 테니 그 곳으로 와. 미래의 윈스턴 대공 전하.”
“저 두 분을 위해서라도,” 아를린의 쥘부채가 플로어 위에서 화려하게 어우러지는 루트비히와 카틀레야를 잠시 향했다. 그녀의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저는 윈스턴 대공으로써 리프레에 돌아와야겠네요.”
화려한 졸업 기념 무도회 직후 스콜라에서의 교육 과정을 마무리하는 졸업식이 열렸고, 루트비히는 으레 스콜라 차석 졸업생으로써 아를린이 학사복을 입고 대기실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지만—시간이 되어서도 아를린이 나타나질 않자 시종을 시켜 그녀를 찾아보게 했다.
십여분 지나지 않아 그에게 돌아온 시종은, ‘윈스턴 대공녀는 오늘 새벽 졸업장을 미리 받고 스콜라를 떠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혹시 자신에게 따로 전언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시종을 닥달해 보았지만, 아를린이 그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제 무도회 때 그녀에게 춤을 청하지 않은 일로 머릿속이 복잡할 터였다. 하지만 떠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의지였기에,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곧이어 그의 품을 파고드는 ‘약혼녀’ 카틀레야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차석 졸업생님은 벌써 스콜라를 떠나셨다고 들었어요.”
카틀레야에게도 무시하기 어려운 사실. 그녀가 황태자에게 춤을 두 번이나 청했던 어제의 무도회 전에는—아를린이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거의 확정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는 것. 하지만 최종 승리자는 자신이었다. 얼굴을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던 윈스턴 대공이 후계를 쌍둥이 아들로 하겠다고 의사를 표현한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왔으니, 그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공들인 것이 모두 보상 받은 듯한 느낌 한 켠에 불안감이 스며들었으나, 아를린이 화헌대공을 따라 화헌대공령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졸업식 뒤에야 알려지자 승리했다는 생각이 불안감을 압도했다.
화헌대공령 슈플리테에서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는 그가 윈스턴 대공녀를 동행하자 잠시 화색을 띄었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나 성혼하지 않아 가신들을 애태우던 대공이 드디어 결혼하려는건가, 생각했지만 주인도, 같이 온 대공녀도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이내 실망으로 가라앉았다.
화헌대공의 저택에서 아를린이 쓰게 될 방은 안뜰의 수련장이 보이는 곳으로 정해졌다. 침대 하나에 화장대, 책상과 의자가 거의 전부인 아주 소박한 곳으로—그녀가 본가에서 쓰던 방에 비하면 ‘누추’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아를린은 개의치 않았다. 현 윈스턴 대공—그녀의 아버지를 누를 만큼 신력을 가다듬고 나면 어차피 떠날 방이었다.
소박한 짐을 풀고 안뜰로 나서자, 그 짧은 며칠 사이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쌍둥이 남동생인 앤드류가 보낸 전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성 리프레에서 슈플리테까지는 준마를 타고 달려도 꼬박 사흘이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조금도 가쁜 숨을 쉬지 않은 채 공손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은 그녀도 아는, 윈스턴 대공저에 고용인 중 하나였다.
“여긴 어쩐 일이예요? 소식은 또 어떻게 들었고.”
“아가씨의 일이니 당연히 아시는 것일테지요. 윈스턴 대공가는 아가씨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간 맡아 둘 예정이니, 정당한 권리를 찾으러 정당한 때에 찾아오시길 바란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럴 생각이라고……전해주세요. 그리고, 고맙다고.”
앤드류는 애초에 대공위를 이을 생각이 없었다. 이재에 밝아 상단을 꾸리고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고 하던 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리타분한 사람이었고, 역대 윈스턴 대공 중 여성은 없었다며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아들이 대공위를 이어받게 할 것이라고, 황태자가 참석했던 어전회의에서 선포해 버렸다.
덕분에 황태자비가 되려고 했던 한 때의 단꿈에서 단숨에 깨어날 수 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전화위복이었다. 하인은 아를린에게 금화가 잔뜩 든 지갑을 기어이 건네주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혹시나 대공가에서 식객으로 있는 동안 자유롭게 쓰라고 앤드류가 ‘꼭’ 주라고 했다는 부탁도 함께 남았다.
안뜰을 따라 도착한 화헌대공의 집무실에는, 그가 자리를 비운 며칠간 쌓인 소장이 한가득이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대공이 열심히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하고, 때때로 옆에 선 집사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방해하기도 미안해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책을 조금 들여다보던 때, 그가 잠시 집사를 내보내더니 아를린에게 자리를 권했다. 책상 앞에 놓인 검은색 가죽 소파에 어쩐지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공가에서 사람이 왔던 모양이던데.”
“앤드류가……어떻게 소식을 알았던 모양이라.”
“그 녀석이 너한테도 경고하지 않았던가. 황태자의 꿈에 걸려들지 말라고.”
“그랬죠. 제가 부족해서 그랬습니다.”
“자조는 그쯤 해 둬. 앞으로 1년 간은 검술이며 신력이며 전부 처음부터 다시 다듬어 쌓아 올릴거니까.”
“그래야…….”
“졸업 전야, 황태자가 네게 했던 짓을 잊지 마. 복수는 최고의 동력원이야. 그 결말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손에 넣어야 할 것을 멍청하게 흘려보내는 것 만큼 미련한 짓도 없지. 평범한 귀족 여자의 결말을 너도 알잖아? 많이 봐 왔을 테고.”
“적당한 사람과 결혼해서, 적당히 후계를 이을 사내아이를 낳으면, 남편은 더 젊고 싱그러운 첩의 품에 안겨 희희낙락, 정처는 버림받고, 끝내 뒷방 늙은이로 죽어간다.”
“너는 장녀로써 대공위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고, 손에 넣을 수 있어. 그저 황태자의 품에 안겼을 뿐인 그깟 백작가 차녀에 비하면 훨씬,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기본이 되어 있는거야. 내가 일 년 동안 가르쳐 줄 검술, 신력 다루는 방법은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수단이 될 거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여독이 덜 풀렸을테니 오늘은 쉬도록 해. 내일 새벽 다섯시, 수련장에서 보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다시 집채만한 소장 더미를 들고 들어왔다. 아를린은 더는 대공의 업무를 방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인 윈스턴 대공의 집무실보다 서너배는 더 많은 업무량이 무척이나 압박적으로 느껴졌다. 제국의 사방 중 남쪽을 수호하는 화헌대공이니 어느정도 납득이 가는 양이기도 했다. 집무실에서 나온 아를린은 하릴없이 안뜰을 지나 제 방으로 향하다가, 봄 향기를 알리는 매화꽃 향내에 저도 모르게 홀려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본 경비병이 화들짝 놀라 경례를 붙이고는 후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매화가 제철이라, 흰 꽃과 달콤한 향내를 온 사방으로 내뿜고 있었다. 아를린은 동방국의 양식으로 꾸며진 정자에 올라섰다. 정자가 세워진 물 위에는 연분홍색 꽃을 한껏 품고 있는 연들과, 물 위에 비친 푸른색 하늘과 흰 구름이 잔뜩 담겨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몸을 물 쪽으로 한껏 숙여 보았다. 한 쪽으로 단정하게 묶은 검은 머리칼과, 사파이어에 가까운 파란색 눈동자의 얼굴이 수면에 비치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일가의 눈동자. 하지만 관습과 역사라는 이름 아래 가문을 손에 넣을 수는 없는 눈동자. 차라리 눈 색이라도 달랐다면 덜 억울했을지도, 대공위를 강제로 빼앗겠다는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고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뜻대로 살 수 없어.”
이미 여기 오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운명은 자신의 손 위에 놓여진 것이나 다름아니었다. 스콜라 졸업 직후 슈플리테로 도망치듯 가버린 장녀를 아버지는 어찌 생각할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를린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대공위에 더 걸맞는 사람이다’라고 한 두번 이야기 한 것이 아니었다. 신력을 쓰는 것도, 검을 다루는 일에도 자신이 앤드류보다 더 능숙했다. 하지만 그예 돌아오는 대답은, ‘너는 여자니까,’였다. 여자이니, 마땅히 좋은 혼처를 찾아 시집을 가서 후계를 낳아주는 그런 삶—장식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것이 너의 운명이노라, 윈스턴 대공이 좌절하다 못해 소릴 지르는 딸의 면전에서 수십번을 그렇게 말했다.
정자 위에 올라, 온 얼굴로 맞이하는 바람은 달콤했고 한편으로는 쓸쓸했다. 아를린은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거기 있다가 제 방으로 돌아왔다. 바지런한 하인이 미리 불을 넣어 둔 벽난로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간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거지’란 생각이 들었지만 흑발의 아가씨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회할 일은 이미 충분히 했다.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 지금에 안도한다면, 루트비히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한편으로는 나의 다행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표정이 기대되는걸.”
대공위를 물려받지 못할 거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대공이 아닌 너는 필요없다'는 듯이 다른 여자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너를,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걸까. 이게 너를 향한 복수일까, 아니면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발버둥인 것일까. 결과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것이다. 길은 정해졌고, 나는 이제 이 길을 달려가는 일만 남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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