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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 4 본문
두 사람의 교차점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케이윌)
'우리 딸 못 봤어요?'
은방울꽃 꽃다발을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예 나를 찾은 이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딸이 며칠 전 집을 나가 들어오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가출했다는 날짜 다음날이 바로 나를 만난 날이었다. 그 이후론 유영을 본 사람도, 연락을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한 증발이었다.
당연히 찾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십년 넘게 알고 있던 사람이 한 순간 내 인생에서 송두리째 들어내졌는데, 그걸 제정신으로 감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나 빼고 모두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세 번이나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된 탓인지, 이따금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깨어나는 날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유영에게 청첩장을 전해 주던 그 날의 꿈을 꾸면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무릎 통증과 함께 아침에 눈을 떴다. 그 사이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렀는지 눈가를 매만지자 새하얗게 굳은 눈물 가루가 손끝에 묻어나왔다.
벌써 칠 년이나 지난 이야기인데, 여전히 그녀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나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집에 자주 들르는 현성의 주장으론, 거실 장식장에 세워 둔 우승 직후 사진을 치워두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소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미소짓는 내 곁에는 그녀가 있었다. 파혼한 전 애인과도 하지 않던 일이었다. 유영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응원하는 그 자리에 남아 있을거란 확신을 어째서 했던 것일까.
그토록 허망하게 사라진 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채 나는, 내 자리에서 버텨 오기를 칠 년이나 해 오고 있었다. 언젠가는, 혹시나, 그런 쓸모없는 기대를 가지고서.
세수를 하고, 헝크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코트를 챙겨 입고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다. 아래 층에 사는 현성은 아직 한밤중일, 손목시계가 새벽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른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육십대 노인네처럼 새벽녘에 일어난다고 타박을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 같기는 했다.
기제원에 도착하니 아직 아무도 불을 켜지 않아 로비가 어두웠다. 대리석으로 장식 된 화려한 난간, 양 쪽에 늘어진 출입문과, 지하 서고로 내려가는 차단 게이트가 어둠 속에서도 퍽이나 익숙했다. 다섯 해 전, 기록관리학 석박사를 마치고 그 즈음 안면을 튼 황제에게 갑작스레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을 그런 장소였다. 기제원의 최연소 원장으로 발령받아 근무한 지는 어느덧 삼 년 차였다. 경력도 일천한 남자를 그저 얼굴이 반반하다는 이유로 지명한게 아니냐는 기분 좋지 않은 뒷말들이 돌았고, 여전히 희미하게나마 그 때의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성윤은 개의치 않았다.
소문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었다면, 겨우 학교 후배가 사라졌다고 미친 사람처럼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유영이 성윤에게 있어서 조금이라도 덜 소중했다면, 아무 말 없이 자기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전 약혼녀에게 예비 장모가 선을 보게 시키지도 않았겠지. 그 전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갑자기 떠오른 그 때의 기억에, 성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원장실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조각 설탕을 집어 그 안에 퐁당-집어넣었다. 머들러로 휘젓고 한 입 머금자 입 안에 설탕 조각이 날아다녔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설탕을 어금니로 부수는 습관이 있었다. 마주앉은 유영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특이한 습관이라며 농담조로 이죽거리던 날이 다시 떠올랐다.
오늘은 왜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 걸까. 얼굴도 목소리도 이제 어렴풋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별의 별 추억이 다 생각나는 그런 의문스러운 날들이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 네가 떠오르기만 하고, 그리워하기만 하다 끝나버릴 그런 날이 될 터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어쩌면 네게 무례가 될 지도 몰랐다.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살아는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긴 그리움을 품고 살아도 되는 것일까.
성윤은 작은 잔에 조금 남은 액체를 원샷하고, 일에 집중하기 위해 집무실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보면 그녀에 대한 기억도 다시, 평소처럼 그러하듯, 저 편으로 잊혀질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오후 회의는 외부의 장소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방에 설립되어 있는 기록관에서 몇 가지 미분류 사료를 발견했고, 그걸 이관 받아오기 위한 세부적인 절차를 합의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진이 다 빠진 탓에 커피 한 잔이 더욱, 절실히 필요했다. 성윤은 황궁 근처에 그가 단골로 다니는 카페에 들어섰다. 깊은 쪽에 여성 손님이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 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이 작은 카페는 길을 잃고 들어오는 객이 가끔 있었다.
"에스프레소 원 샷에 설탕 하나."
사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카페의 마스터는 그가 들어오자 마자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설탕을 입 안에서 오독오독 씹으며, 안부를 묻는 그에게 짧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바깥으로 나섰다. 동장군이 심술을 부리는 모양인지 찬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문이 세게 닫히면 안될 것 같아 장갑을 낀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준다고 몸을 돌렸는데, 같이 돌린 고개가 향한 시선 끝에 낯익은 실루엣이 걸리고 말았다.
칠 년 전, 청첩장을 건네주는 제 앞에서 하르르 웃으며, 끝내 축하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 시선과 기억에 교차하여 그의 생각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설마.'
유영과 닮은 사람을 마주치면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서서, 그가 유영인지를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제 갈길 가는 짓을 칠 년이나 했다. 저 사람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을 터였다. 그의 그리움이, 다른 사람에게 투영되어, 그녀인가 싶어 잠시 멈추었다가-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축 늘어진 어깨로 가던 길을 가게 하는.
하지만 기제원으로 돌아와 출장 보고서를 작성하던 성윤은 끝내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주소록에서 유영의 이름을 찾아내 발신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여러번 바꾸면서, 더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번호를 지우곤 했으나, 칠 년 동안 전화 한 번 하지 못했지만 그가 그예 지우지 않은 유일한 연락처였다.
실종 직후, 몇 번이나 눌러도 연결되지 않던 전화가 차분하게 제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신호음이 다섯번 째 가던 순간, 찰칵 소리가 나며 그토록 그리워 하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그의 귓가에 흘러들어갔다.
"오랜만이예요, 선배님."
약간은 울먹이는 듯한, 제 터질 듯한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애써 쾌활하게 말하는 목소리. 칠 년 만에 들어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수화기 넘어-그와 같은 하늘 아래 있었다.
내가 너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를 내가 조금만 더 자세히 바라 보았더라면. 익숙함에 가리워졌던 네게 향했던 모든 감정이, 너를 이미 향해 있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텐데.
"지금 그 쪽으로 갈게."
성윤은 꾹 다문 입술로, 코트를 챙겨입고 일은 내팽겨친 채 아까의 카페로 내달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직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서 검은 앞치마를 두른 마스터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안에, 그의 칠년간의 그리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 첫 눈처럼 너에게 가겠다(김범수 버전)
날이 슬며시 회색빛을 띄는가 싶었는데, 이내 새하얀 눈이 시야를 가릴 듯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삼월에 눈이 내리면, 그 해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일들을 겪곤 했다고-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 어렴풋 떠올랐다.
칠 년 만에 밟은 고국의 땅.
삼월, 봄이 태동하는 따뜻한 날 도중에 들어왔으나, 공항에서 그녀를 맞이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칠 년 전, 제 친딸보다 장손의 위신을 우선하는 부모와 척을 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향했던 사람의 귀향이라 그럴 터였다. 그 때 도망치듯 떠나지 않았다면, 칠 년 후 지금의 자신은 대체 어떤 사람으로 살아남고 있었을까.
칠 년 동안 정지해 둔 번호가 아직 통신사에 제 명의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수신차단 서비스에 저장된 번호 목록이 유효하다는 점도 그러했다. 덕분에 제 원래 번호를 살려놓았으면서도, 부모나 친척의 연락을 받을 일이 없어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낳아주고 길러준 정은 천륜이라 끊어낼 수 없다고 배웠으나, 이렇게 쉬운 일을 왜 그 때까지는 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것일까. 장손이자 자신의 사촌 오라비를 발로 걷어 차던 그 때의 통괘함이 떠오르자, 유영은 팔에 닭살이 돋을 것 같은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다 끝난 일이야.'
만약 그 날 집을 나와 미국으로 무작정 떠나지 않았다면, 유영은 모두의 짐작대로 졸업식에 참가해 졸업장을 받고, 평범한 직장에 취직하고, 동경하던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을 터였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그 사람이 알아주길 바랐다. 한편으로는 알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가정을 꾸리고 평온하게 자신의 일상을 누리고 있을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 조차 무례가 되지는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텔에 제 짐을 던져둔 뒤 바깥으로 나섰다. 시차 적응이 필요하다고 몸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바깥에서 커피를 한 잔 해야 한다고 직감이 주장하고 있었다.
유영은 성윤에게 있어서 가족이 아닌 제 1호 팬이었다. 유영 스스로도 그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가 중학생, 그리고 그가 고등학생일 때 처음 만났고, 성윤이 사인을 해 주고 같이 사진을 찍어준 팬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학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기분 전환이라며 직관을 가곤 했고, 그 인연은 유영이 성윤과 같은 대학-같은 학과를 선택하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중, 주변의 성화에 마지못해 온 몇 사람들 중 하나가 성윤이었다. 그는 제가 아끼던 팬이 같은 과 후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영이 긴장해서 구석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하더니 반색하면서 곁에 데려다 놓고 술 게임에서 흑기사를 자처했다. 이미 여성 팬이 많았던 성윤이 대놓고 챙기는 후배라는 점 때문인지 그녀는 대학교 재학 내내 여학우와는 친밀한 관계를 쌓지 못했지만, 부족한 부분을 성윤의 씨름팀 팀원들이나 같은 과 남학생들이 채워주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은 없었다.
성윤은 대학부 금강급에서 전관왕을 차지하는 등 유망주로써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고, 두 번째로 무릎 십자인대 파열을 겪기는 하였으나 재활을 마친 직후 나간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씨름 선수로서의 창창한 앞날을 예약했다.
유영은 모래판 위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성윤을 보면서, 자신도 저 정도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그래도 경기가 있으면 꼬박꼬박 가서 응원을 했고, 우승 직후 포토타임 때 성윤이 매번 불러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학교 내에서는 둘이 정말 사귀는 관계가 아니면 전생에 남매나 그런 거였을 거란 우스개소리도 돌기까지 했다.
그런 성윤은 졸업 직후 자연스럽게 실업팀에 입단했다. 멋진 팀원들과 코치를 만났다며 성윤이, 따로 유영을 불러 커피를 사 주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업고, 성윤은 입단 직후 처음으로 나간 장사대회에서 당당히 금강급 장사로 등극했다. 그가 보내준 VIP 티켓 덕분에 유영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가 우승자의 특권인 용포를 입고, 황소 트로피를 받는 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포토타임에 유영을 부른 성윤이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하는 것이 중계 카메라에 잡힐 정도였다.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 만큼 유영에게 성윤의 존재는 각별했다. 응원하는 선수였고, 존경하는 선배였고, 한편으로는 어느샌가 짝사랑하는 상대였다. 특히 마지막 감정은, 졸업식 때 이야기 하려고 꽁꽁 감춰두고 있었다. 거절 당할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 때는 그에게 말 할 생각이었다.
실업팀 입단 후 일 년 동안 성윤은 네 번이나 장사를 차지하면서 씨름계에서 거의 신화에 가까운 기록을 세웠다. 네 번째 장사이자 두번째 설날 장사 등극 이후, 졸업식 일주일 전 성윤은 자기가 초청한 경기에 처음으로 오지 않은 유영을 따로 카페로 불러냈다. 새해 인사 겸, 오지 않은 것에 대한 타박 겸, 그리고 그의 청첩장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사실 유영은 그 마지막 만남 직전, 술김에 제가 어릴 때 사촌 오빠에게 성추행 당했던 걸 폭로하고 집에서 척을 지고 나와 '가출' 중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티켓을 끊어놓고 성윤에게는 말하지 않은 채로,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간 자리였다. 졸업식 때 말하자는 결심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었으니 그 날에는 제 속을 꺼내 보여야 했다. 하지만 성윤이 인쇄된 청첩장을 건네주면서 결혼식에 꼭 와 주면 좋겠다는 말을 했으니 결국 말은 제대로 할 수 조차 없었다.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정갈히 인쇄된, 축복을 빌어주길 바라는 그 종이를 보고 유영은 하마터면 새신랑의 앞에서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그에게 있어서 유영은 소중한 팬이었지만, 소중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고 그 작은 종이가 말해주고 있었다.
눈물을 겨우 속으로 삼킨 그녀는, 제 졸업식 날 꽃다발을 생각해 두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서는 그를 한참동안 물끄미 바라보았다.
눈에 마지막으로 담을 요량이라면,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시야에서 성윤이 사라지자 유영은 그제야 길바닥에서 웅크리고 숨죽여 남은 눈물을 전부 쏟아냈다. 주변에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이상한 듯 쳐다보는 것은 조금도 신경쓰지 못했다. 제가 몇 해나 품어오고 키워온 마음 하나 꺼내 보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워서 저리 허무하게 떠나 보냈느냐고, 뒤늦은 후회가 유영을 파도처럼 덮쳤다.
황궁 근처를 다니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는, 짙은 녹색 벽과 금동 장식이 어우러져 아늑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검은색 앞치마를 맨 초로의 카페 마스터는 딸랑-종소리가 들리자 입구 쪽을 바라 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위치가 구석인 탓에 찾는 이는 많지 않겠지만 단골들에게는 세상 어느 곳보다 편안할 그런 장소인 것을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유영은 그에게 에스프레소 원 샷에 설탕 한 조각을 부탁했다. 카페 안쪽에 자리를 잡은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 주면서, 마스터가 한 소리 했다.
"저희 단골 중에, 꼭 손님처럼 주문하는 분이 한 분 계시거든요. 그 분이 생각났어요. 맛있게 드세요."
미국에 가기 전 유영은 항상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유학을 하면서는 취향이 점차로 에스프레소 쪽으로 기울었는데, 돌이켜보면 항상 성윤이 마시던 메뉴였다. 에스프레소 하나에, 설탕 한 조각을 위에 떨어뜨리곤 머들러로 젓고 남은 설탕 조각은 입 안에서 으득, 깨물어 먹곤 했던.
그렇게 황망히 도망쳐 놓고도 어느샌가 그녀 자신의 삶에 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녀의 짝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영은 다시 떠오른 성윤의 기억에 쓴웃음을 지었다. 비단 커피가 쓴 것 뿐만은 아닌 셈이었다. 카페 옆에 난 커다란 통유리창 바깥에는 마스터가 공들여 가꾸는 듯한 작은 정원이 있었다. 그녀는 거기 시선을 두느라 카페에 새 손님이 들어온 것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못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누구의 곡이던가 헤아리던 유영은 마스터에게 주문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에스프레소에 설탕 하나."
연인을 떠나보내면, 처음에는 그의 목소리를, 나중에는 그의 얼굴을 잊는다고 했다. 하지만 칠 년이나 지났는데,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성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사람이겠지. 성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지 않고 발음이 깔끔해서 누구나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평하는 톤이었다. 비슷한 목소리겠지. 유영은 일부러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좋다고, 그렇게 말하던 유영에게 '나는 아니겠네?'라고 웃으며 말하던 성윤, 그리고 유영이 좋아하던 그 목소리로 '5월에 결혼 해. 꼭 와 줘.'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다시 유영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잊어버려. 잊어야지. 그 사람의 기억에서도 나는 이미 잊혀졌을텐데.
"아까 저 손님도 같은 것 시키던데. 오늘은 어쩐 일이야?"
"주변에 회의가 있어서 잠깐 나왔다가, 다시 복귀하는 중입니다."
다시 들어도 성윤의 목소리였다. 유영은 차마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거의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젠 추억으로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저 목소리를 듣고, 저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면 그동안 꿈에서도 오열하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아 두려웠다.
뒤돌아서서 가던 그를 붙잡지 못했던 그 날이 꿈으로 나타나는 날이면 그녀는 꿈에서도 울었고, 현실에서도 울면서 깨어나곤 했다. 칠 년이나 지나, 눈물도 거의 말랐다고 생각했지만 낯선 손님의 목소리를 들은 유영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어쩌자고, 대체 어쩌자고 내가 이러는 걸까. 유영이 속앓이를 하는 그 짧은 사이 남자는 커피를 다 마셨는지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그녀는 칠 년 전 그 날처럼, 그가 등을 돌리고 나가는 중에서야 출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커다란 키, 어쩐지 성윤을 떠올리게 하는 잔근육이 잘 붙은 체격, 검은색 코트와 짙은 회색으로 된 서류가방, 카멜색 캐시미어 목도리. 그 순간 그렇게도 많은 것들을 눈에 담았으면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를 성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저 목소리를 닮은 사람을 우연히 본 것 뿐이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고 싶었지만......
문이 거칠게 닫힐 것을 염려해 손잡이를 잡은 채 몸을 돌린 그의 얼굴이 유영의 두 눈에 비춰지고 말았다. 세월의 흔적을 완전히 빗겨간 듯한-여전히 곧은 눈썹과 시원한 눈매에 앞머리를 올려 단정한 느낌을 낸-성윤이 가죽장갑을 양 손에 낀 채 문을 살며시 닫았다. 유리문 너머로 얼굴을 살짝 보이곤, 카운터에 있는 마스터에게 손인사를 한 뒤 어딘가로 걸어가는 성윤을, 성윤이 확실한, 바라본 그녀의 뺨 위로 결국 눈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흘러내렸다.
가게에 유일하게 남은 손님이 갑자기 우는 것을 알아챈 마스터는 아무말 없이 출입구에 달아 둔 영업 표식을 'Closed'로 바꿔주고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몇 번 움직이더니 칵테일을 그녀의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다.
"마가리타입니다. 보내고 나서야 깨닫는 그런 안타까운 사랑을 한 사람만 하지는 않았나보네요."
"......"
"오늘은 칵테일바를 하는 날은 아니지만, 손님께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마가리타를 만든 사람은, 사랑하던 사람을 사고로 잃고 나서 그녀를 잊지 못해 이 칵테일을 만들고, 연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당신은 이런 칵테일의 이름으로 남지 말아요."
술에 전혀 약하지 않은 그녀였으나, 마스터가 건네 준 마가리타 한 잔은 세상의 그 어떤 술보다도 독하게 유영을 잠식했다. 아까의 자리에 앉은 채, 유영이 조금 더 마음을 가라앉히길 기다려 준 마스터가 이번에는 찬 물을 가져다 주었다. 냉수에 정신이 약간 드는 듯 했지만, 이내 후회가 그녀의 가슴으로 몰려들었다.
어쩌자고. 꽁꽁 가리워 둔 그리움을 제 스스로 파헤쳐 바깥에 꺼내둔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잘 마셨다고 인사를 한 뒤 가게를 나서려는 그녀를 마스터가 막아 선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술 더 깨고 가라고 말하려는 줄 알았지만, 그는 그녀 손에 쥐어진 휴대전화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칠 년 동안 한 번도 전화를 먼저 걸지 않았던 번호였으나, 지우지 않았던 성윤의 연락처였다.
떨리는 손으로 유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칠 년 만에 전화로 다시 마주하게 된 우리의 첫 인사는 어떤 것이 좋을까. 수화기 너머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오랜만이예요, 선배님."
내가 당신을 부르는 단어는 이 하나가 전부가 될 터였다. 겨우 말한 그 인사에, 그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 통화 너머에 당신이 보고싶었다. 얼굴을 맞대고, 눈을 바라보며, 내가 당신을 그리워 하였다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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