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3 본문

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3

alicekim245 2020. 3. 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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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으억!"
꿈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손님 방에서 자고 있던 현성까지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날 질펀하게 술을 퍼마시고 일어난 토요일 오전, 머리는 숙취 때문에 지끈거렸고 사방에 술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면 누구든 한 소리 할게 분명했다. 현성이 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선을 보고 온 날 밤, 성윤의 집에 위스키 한 병을 들고 들이닥치지만 않았어도 책을 읽으며 평화롭게 불금을 즐겼을 텐데.
손님 방에서 자다 놀라 깨어나긴 했어도 현성은 제 발로 부엌으로 걸어가, 토마토를 씻어 착즙기에 집어넣고, 원두를 갈아 능숙한 솜씨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렸다. 각자의 숙취 해소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만큼 알고 지낸 세월이 꽤 길었다.
"뭡니까, 아침부터 소리나 지르고." 그래도 짜증이 나는 것은 숨기지 못했는지, 현성이 성윤 앞에 설탕 하나를 넣은 에스프레소 잔을 가져다 주면서 가볍게 타박을 했다.
"꿈에서 안 좋은걸 봤나봐. 썩, 유쾌한 기분은 아냐."
궁금해 한다고 해서 꿈 이야기를 순순히 해 줄 만큼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성윤은 에스프레소를 원샷하고는, 아직 남은 숙취를 풀어야겠다며 토마토 주스를 들고 손님 방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려던 현성을 제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확인까지 한 뒤, 그는 술기운에 쩔어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찬물로 샤워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무슨 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막연히 들었다. 이십대 까지야 꿈을 꾸면 개꿈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는데 서른 중반에 접어든 요즈음에는 도무지 가벼운 꿈은 찾아오질 않아서 골치였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적당히 산책을 다녀 오면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은 맑고 쾌청한 하늘이었다. 성윤은 올해 겨울은 유독 따뜻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코트를 위에 걸치고 집을 나섰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서늘한 바람이 숙취며 신열을 가라앉혀주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거리에는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는 커플이 유독 많았다. 성윤의 부모님 역시, 아들이 서둘러 마음을 잡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잘난 아들은 그예 들어오는 거의 모든 자리를 파투냄으로써 부모님에게 의도치 않은 불효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삼 년 가까이 사귀며 동거까지 했던 여자친구는, '왜 그 쪽 남자는 청혼 안해?'라며 뒤흔드는 주변 친구들의 성화에 넘어가 성윤이 출근한 사이 제 짐만 싸서 도망을 가 버렸다. 의외로 그런 일에 자신이 무덤덤했다는 사실에 더 놀란 그였다.
맞닿은 저 연인들의 손을 보니 이제는 그저 흐뭇하게 미소만 떠올랐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너희들은 봄이로구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족 외에는 응원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고등학교 씨름 선수 시절, 경기에 거의 빠짐없이 직관을 오고 그를 응원해 주던 중학생 팬이 있었다. 그녀와는 선수와 팬으로 만나, 경기장에서 서로 안부도 묻고 우승 후엔 꼭 불러서 같이 사진을 찍는 관계가 되었다. 성윤에게는 1호 팬이라 소중한 존재였다.
운동과는 관련 없는 엉뚱한 전공을 택했으면서도 대학교 씨름부 활동을 계속 하다가, 선배의 부름에 하는 수 없이 참석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녀가 이제부터는 같은 과 후배라며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대학 졸업 후 자연스럽게 실업팀에 입단하고, 처음 나간 경기에서 장사 타이틀을 차지했을 때도 시합장에는 꼭 그녀가 있었다. 꼭 보러 오라며 겅기마다 선수 특권을 내세워 VIP석 티켓을 보내주었으니 어디 앉아 있는지는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네 번의 장사와 수많은 경기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동안, 성윤이 황소 트로피며 우승의 금메달들을 들고 찍은 사진에는 항상 빠짐없이 그녀가 있었다.

걸어가는 중에 작은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성윤은 가게에 불쑥 들어가, 은방울꽃이 있는지 물었다. 주인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오늘 때마침 들여온 것이 있다고 말했고, 그는 그 꽃을 건네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쁘게 꽃다발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품에 안긴 작은 꽃다발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꽃이 예쁘니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긴 다리를 이용해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그는 어느새 한강변에 다다라 있었다. 이런 날 너와 같이 산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막연히 생각을 하다가도,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데.'
졸업식 날, 끝까지 기다렸지만 그예 나타나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후배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꽃을 샀으니 부엌 위에 장식해 두고 시들 때까지 바라보면 기분전환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은방울꽃 꽃다발을 손에 든 채 산책로를 쭉 따라가다가 생각이 난 사실은, 졸업식날 그녀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 사 갔던 꽃이 바로 은방울꽃이었다는 것이었다. 꽃말은, '다시 찾은 행복' 이었다. 설날 떡국장사 차지 축하한다며 그 전에-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제가 받고 싶다고 말했던 꽃이었다.

무슨 일인지 오늘 따라 그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이 그리움이 이제는 꽤 익숙했다.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난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기대만 잔뜩 커지게 될 테고, 그 끝에 현실을 깨달으면 가슴아픈 것은 성윤 뿐이었으므로.

멍하니 길을 따라가다, 귓가를 '드르르륵' 소리가 가득 채웠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소리였는데, 그 소리가 성윤의 뒤를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길 가는데 방해가 될까 싶어 슬쩍 비켜주려는데, 어째서인지 낯익은 향기가 그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게 했다. 커다란 가방을 힘겹게 끈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 제법 큰 키의 여성이었다.
"저기,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상대는 울상이었다. 아마 쭉 이어지는 산책로에 들어왔다가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계속 걸어온 것 같았다.
살짝 보인 여자의 옆얼굴만으로 그녀가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챈 성윤은 하마터면 자기가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바닥에 내팽겨 칠 뻔 했다.
"최유영?" 설마 잘못 본 거겠지. 혹시나 싶어 이름을 작은 목소리로 부르니 그녀가 가방에 쏟고 있던 정신을 금새 성윤에게로 돌렸다. 이윽고 성윤을 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리곤 그녀가 제 캐리어를 버려두고 반대쪽으로 전속력 질주했다. 기가막혔지만 성윤이 재빨리 그녀의 코트 허리끈을 낚아챘고, 안정적으로 잡채기를 시전해 바닥에 주저앉혔다. 카운터랍시고 제 복부에 꽂히는 날카롭지만 전혀 아프지 않은 주먹질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칠 년 만에 만난 그녀가, 자신을 보자 마자 반대쪽으로 달려갔으며, 그걸 쫓아가서 잡채기로 넘겨버린 이 상황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성윤은 유영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주고는 저만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캐리어까지 챙겨 산책로를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성윤은, 도망갈까봐 잡아 챈 유영의 손이 아직도-여전히 얼음처럼 차갑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성윤은 근처의 벤치에 그녀를 앉혀 두고, 도망가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따뜻한 커피를 사서 돌아왔다. 할 말이 아주 많아서 속에서 차고 흘러넘쳤지만, 당장 그를 보고 도망가기까지 했던 애한테 한꺼번에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만이다."
성윤은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 꿈이 아니길, 설령 꿈이어도 여기서 깨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그의 인사를 들은 유영이 면전에서 예전처럼, 하르르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선배님."
마치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난 듯, 그녀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윤은 그녀가 모래처럼 바람에 흩어 날려갈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무 말 없이 유영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슬그미 전해지는 사람의 온기가, 이것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온거니. 성윤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유영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한강을 흐르는 강바람에 얼굴을 묻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어깨를 흔들며 '왜 이제 와서!'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서른 중반의 아저씨가 하기엔 너무 경박한 것 같았다.
"이렇게 만날 거라곤 생각 못해봤는데. 저, 어제 입국했거든요."
"입국......?"
"선배랑 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당당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참, 기제원장 되신 건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유영의 졸업식 전 둘이 따로 만났을 때, 성윤은 유영에게 축하를 받을 일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네 번째 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것, 두 번째는 곧 결혼하는 것. 그 자리에서 유영이 말했다. 자기는 선배가 결혼하면 저 수많은 팬들 중, 더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하나로 남게 될 것 같다고. 그 점이 슬프다고. 유영이 사라지고 나서야, 성윤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나한테는 이제 졸업장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나무랐지만 유영이, 제 스스로를 밀어붙인 절망은 성윤의 짐작보다 훨씬 깊었다. 성윤은 방금 전, 유영이 한 말-'견줄 수 있는'-을 듣고 속으로 제 가슴을 쳤다. 내가 진작에 너를 똑바로 바라보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칠 년 만에 우연히 만나, 어색하게 재회의 인사를 나눌 일도 없었을텐데.
유영이 커피를 마시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금방 빈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시 떠나려는 이 미련 곰탱이 후배를, 성윤이 붙잡았다.
"어제 들어왔다는 애가 캐리어는 왜 들고 한강을 돌아다니고 있어?"
"그게......사실은,"
그렇게 말하며 유영이 털어놓은 일이, 어제 현성과 술을 마시며 보던 뉴스 기사라는 사실에 성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궁 근처의 호텔에서 방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단신이었는데, 황궁 근처 건물에 일어난 방화인 점과 범인이 도주했다는 점 때문에 뉴스에서 한 꼭지를 차지한 사건이었다. 유영이 바로 그 불이 난 방의 옆에 투숙했고, 짐은 1층 컨시어지에 맡겨둔 덕분에 찾았지만 휴대전화며 지갑도 없이 좌절 가득한 채로 한강변을 헤매고 있었다는, 칠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녀 다운 이야기였다.
성윤은 절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유영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해! 나 핸드폰 번호 안바꿨다고! 너, 전에 내 번호 기억한다고 자신있게 내 앞에서 읊었잖아!" 유영은 핸드폰 번호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선배님 번호 드디어 외웠어요!'라고 말했던 것을 성윤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래요! 내 번호도 지웠을거면서! 칠 년이나 지났잖아요. 선배님도 가정이 있을거잖아요. 내가 어떻게-."
"네 번호 지운 적 없어. 그리고 나 결혼 안했는데."
성윤이 유영의 말끝을 침착하게 가로챘다. 성윤이 결혼까지 결정했던 그 때의 여자친구는, 설날 대회 직후 열린 시합에서 성윤이 세 번째 십자인대 파열을 당한 것도 모자라, 후배가 사라졌다며 온 동네를 뒤집고 사방으로 수소문 하는 예비신랑의 꼴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래서 성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성윤의 귀에, 약혼녀가 황궁 근처의 카페에서 선을 보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와 꽂혔다. 우연히 주변에 있는 바람에 현장을 목격한 성윤은 그 자리에서, 예비 신부였던 그녀에게 파혼을 선언했다.
그 직후 장모가 될 뻔 했던 사람이 연락을 해서 '요즘 후배 여자애를 찾는다고 정신없다길래 내가 보게 했다. 그냥 보기만 한 것이니 결혼은 그대로 진행하면 어떻겠냐'고 뻔뻔하게 이야기를 했던 걸 떠올리면 이가 갈렸다.
"벌써 돌싱됐어요......?"
"아니. 식장 들어가기 전에 파혼했다. 너 찾는다고 난리칠 때 그 쪽이 몰래 선 보던거 들켜서."
"와. 큰일 치르셨네요."
유영이 감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대답을 했다. 하지만 성윤은 그녀의 페이스에 말릴 생각이 오늘은 조금도 없었다. 유영은 제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는데 여전히 능숙했다.
"신분증 새로 나올 때까지는 우리 집에 와 있어. 손님 방 비어있다."
"아니, 제가 왜-."
"딱히 부탁하려는건 아닌데? 데려갈거라고, 너. 우리 집으로."
"그거 납치-."
"그렇게 생각하려면 해도 좋고. 칠 년 만에 만난 애를 그냥 보낼 생각도 없고, 난 너한테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그럼 실례할게." 그렇게 말하고는 성윤은 제가 들고 다니던 은방울꽃 꽃다발은 유영에게 자연스럽게 건네주고는,  한 손으론 유영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고 제 집 쪽으로 향했다.
집에 유영을 앉혀 놓고, 묻고 싶은 말이, 듣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얼결에 은방울꽃 꽃다발이 주인을 찾아 갔다는걸 깨달은 것은, 그녀가 소파 위에 그걸 꼭 쥐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2

그 날은 토요일이었고,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서 신분증을 재발급 받는 일부터 난항이었다. 결국 핸드폰도 없는 상태로 성윤의 집에 얌전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경찰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성윤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해 왔다. 목격자 진술을 부탁하는 내용이었고, 일에 휘말리는 것은 원하지 않았지만 투숙객 기록이 남아있을테니 협력을 아예 안 할 수도 없었다.

연락을 전해 받고 의문이었던 부분은, 어떻게 유영을 찾겠다고 성윤에게 연락을 했냐는 점이었다. 나중에서야, 그녀가 성윤의 서재 컴퓨터를 빌려 크리스탄센 박사에게 상황을 알렸을 때 박사님이 자기가 아는 정부 쪽 사람한테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메일에, 학교 선배인 성윤을 만나 무사히 안전한 곳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구를 써 둔 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황송하게도 성윤은 월요일 연차를 내고, 유영이 진술을 위해 가야 하는 경찰서까지 그녀를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 앞에 짙은 파란색 넥타이를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진술 하는 중 배석할 변호사란 말에 유영은 저도 모르게 기함하고 말았다.

"미쳤어요?" 란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그는 후배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한 채 의문의 변호사에게 그녀의 신병을 인도한 뒤 바깥에서 기다리겠다고만 말하곤 반대쪽으로 가 버렸다. 졸지에 변호사와 동행하게 된 유영은, 연락을 한 형사를 로비에서 만나 진술을 위해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신원조회를 하고, 변호사 입회 하에 이틀 전 호텔 객실에서 겪었던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설명이 막힐 때는 종이와 펜을 빌려 그림을 그렸다. 사람의 눈을 살펴보는 습관 덕분에 범인의 눈에 대해서는 묘사를 할 수 있었다. 상스럽기까지 한 투명한 갈색 눈. 유영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누군가는 크고 시원하게 생긴 눈매라 하겠지만 말이다.



한 시간 가까이 되는 진술을 마무리 하고 사무실을 나서니, 성윤이 경찰서 안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변호사가 유영을 그 쪽으로 데려다 주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변호사님."

"성윤이가 경찰서로 와 달라길래 이놈이 드디어 사람을 친건가 싶어 신나게 달려왔더니. 왠걸, 그렇게 찾는다던 후배를 데리고 있을 줄은. 아, 지금 한 말은 비밀이예요."

"네? 그게 무슨."

"저 놈, 전 여친이 왜 도망갔는지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주변 친구들이 그 여자한테 너네는 결혼 왜 안하냐고, 그거 부추겨서 도망갔다고 생각할걸요? 아니요, 장식장에 둔 사진마다, 학교 후배라는 여자애가 모든 사진에 같이 찍혀 있는데. 그걸 어떤 애인이 무슨 정신으로 버텨요. 3년 동안 기제원장 잡아서 한 몫 단단히 챙기려고 버틴 그 여자가 진짜 용한거지. 저래놓고 주변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자기만 안다고 생각할걸요? 저 둔탱이가."

".....?"

"와, 유영 씨도 만만찮게 둔탱이네. 내가 거의 다 말해버린 것 같은데? 한국에 있는 동안 좋은 추억 만들고 가요. 경찰 쪽엔 내 연락처 넘겼으니까 사건 관련해서 연락 오면 전달해 줄게요. 그럼, 안녕."

카페 안에서도 유영이 제 친구와 이야기 하는게 보였는지, 성윤이 그 새를 못견디고 튀어나왔으나 친구를 붙잡지는 못했다.

"표정을 보니 쓸데없는 소릴 한 모양인데, 저 놈."

"옛날 이야기를 약간."

"저 놈은 내 과거를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사람 때린 줄 알고 신나게 달려왔다가 실망했다던데요."

"그건 좀 억울한데. 운동 하던 때도 사람 때린 적 없었다고. 여하튼, 가자. 오늘은 들를 곳이 아주 많아."

유영은 성윤을 붙잡고, 정말 거실장에 자기랑 찍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기는 했다. 주민센터에 들르기 전 증명사진을 찍었고, 그걸로 주민등록증과 여권 재발급 신청을 했고, 통신사에 가서 아예 새 휴대전화를 하나 사고, 그걸로 카드사에 연락해서 새 신용카드 발급도 신청하고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한겨울이라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그닥 길지 않았음을 고려해도, 시계가 어느새 오후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배고프다. 들어가서 밥 먹자. 어제 해 준 파스타 또 해줘?" 성윤이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면서 물었다. "아라비아따 말고 오늘은 까르보나라 해줄까 싶은데."

"크림 파스타 잘 하는 집이 진짜 맛집이라던데."

"갑자기 맛집 취급이냐. 손은 안시려? 장갑은 왜 집에 두고 나왔어, 그렇게 하라고 말 했는데."

"깜빡했어요."

"손 이리 줘 봐." 잠시 빨간불에 멈춘 사이 성윤이 기어에서 손을 떼고 유영의 손을 잡았다. 평소에도 손발이 찼지만, 한나절 동안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인 채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인지 따뜻한 차 안에 앉아있는 지금도 유영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렇게 차갑진 않은데."

"이게? 너 지금 냉수에 손 넣고도 따뜻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장갑 좀 끼고 다녀라, 진짜."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걸 왜 잊어먹겠냐. 흔한 것도 아니고."

티격태격 하면서 집에 들어와 같이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 유영에게는 꿈같았다. 과거에, 한 번쯤은 꾸었던 꿈.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 성윤과 같이 식사를 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평범한 일상을. 어차피 그녀가 손에 넣을 수 없는-누군가가 가져갈 일상이라고 생각했기에 상상에만 그쳤을 뿐이었는데. 지금 부엌에서 앞치마를 매고 열심히 나무주걱으로 파스타 면에 크림을 입히고 있는 사람이 성윤이었다.

그 때,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 신발이 있고 별일이...네...어.....누구세요?!!" 다른 층에 사는 성윤의 부하직원-기제원 부원장 현성이 그가 있을 타이밍을 노리고 저녁을 얻어먹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현관에 놓인 구두를 보고 놀리듯 말하며 들어오다가 부엌에 선 두 남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녁 시간쯤 현성이 오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성윤이 자연스럽게 투덜거렸다.

"초인종 정도는 누르고 들어와라, 좀."

"이 여자는 누군데!" 앙칼지게 말하는 모양새에, 유영은 당황하다가도 금방 누그러져서 하르르 웃고 말았다. 성윤이 그 모습을 보고 면전에서 대놓고 혀를 찼다.

"애인처럼 반응하지도 말고! 전에 말한 후배야, 임마. 한강에서 주워왔다."

"물건처럼 이야기 하지 마요! 안녕하세요, 이 분 대학 후배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현성은 성윤 옆에 서 있는 이 여자가, 저기 장식장에 한가득 채워진 사진 속 그 묘령의 여인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진짜 주워왔어?"

"한강에서 만난건 맞는데 주워오진 않았어요. 내가 무슨 굴다리에서 주워올 수 있는 어린애도 아니고, 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유영이 가볍게 투덜거렸고, 그 사진 속 여인이 제 앞에 있는게 몹시도 신기한 모양인지 현성이 유영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오, 사진으로만 봤던 분이다. 반가워요! 성윤이 형-아니, 기제원 부원장 김현성입니다. 아랫집 이웃사촌이라 밥 얻어먹으러 왔어요...가 아니라, 휴가 왜 냈는지 직원들이 궁금해 해서 염탐하러 왔어요."

"너 진짜 첫인상 강렬하게 박는다. 안놀랬어?" 불 조절을 하느라 잠시 유영에게서 시선을 떼고 있던 성윤이 물었다. 유영은 잠시, 몇 초간 현성의 얼굴을 - 무례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어디가 놀라야 하는 부분.....잘생기셨네요."

"이것 봐, 어딜 가나 먹히는 외모라고 내가 말 했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손 씻고 와서 요리나 거들어. 면 더 삶을테니까."

"네에, 네에. 분부대로 합죠. 손님은 의자에 앉아 있을래요?" 현성이 너스레를 떨며, 유영에게서 앞치마를 빼앗아 자기가 매고는 성윤과 부엌에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둘을 바라보던 유영은, 문득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웃어도 되는걸까, 고민에 빠졌다.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현성이 금방 만든 파스타 한 접시를 유영의 앞에 놓아주며 눈치 빠르게도 물었다. "저녁 식사 시간엔 낮에 있던 모든 일을 잊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자, 이 잘생긴 오빠의 특제 크림 파스-왜 때려!" 그 와중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작업 비슷한 멘트를 내뱉는 현성의 뒤통수를 성윤이 나무주걱으로 가볍게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와인 괜찮은거 하나 꺼내 오고."

"그렇게 엊그저께 마시고도 또 마시려구요? 술 내기 하면 맨날 지면서."

"시끄러워. 반주야, 반주."

"오, 이제 진짜 아저씨 같다."

"그만 하랬지!" 성윤이 또 나무주걱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자 현성이 껄껄 웃으면서 와인셀러가 있는 뒷베란다로 잽싸게 도망을 쳤다. "하, 집 비밀번호 바꿔버릴까보다."

"얼마전에 바꾸자 마자 나한테 바로 알려줬으면서 또 그러네. 아가씨도 한 잔 할래요? 오늘 형님이 기분이 좋아보이니까 좋은 와인으로 꺼내왔는데."

"아, 네! 한 잔 부탁드릴게요."

와인과 파스타로 시작된 저녁 식사는 그 직후 현성이 자진해 카나페까지 만들어 오면서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제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멀쩡하게 현관을 나서는 현성을 보내놓고, 유영은 소파에 어째서인지 웅크리고 있는 성윤을 익숙하게 일으켜 세우고(귀에다 '일어나요,'라고 하면 정신은 없으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 침대에 눕혔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선배님, 술 마시고 이러고 있을 때 숙소까지 내가 데려다 주고 그랬는데." 눕고 나서야 좀 술이 깨기 시작하는지 성윤이 그 소릴 듣고 웃었다.

"그날 코치님한테 거하게 잔소리 들었지. 여자애가 데려다 주고 갔는데 사내놈이 뭐하는 짓이냐고. 오늘도 신세 졌네."

"소파에서 자면 다음날 허리 아플 나이가 됐잖아요. 선배님도, 나도."

"그런가....." 눈을 뜨고 몸을 살짝 돌려, 이불을 덮어주려는 유영을 물끄러미 보던 성윤이 뭔가 말하려다가 다시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더니-이내 아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성윤을 올려다 보던 유영은, '이 닦고 자요.'라고 한마디 하더니 금방 성윤의 침실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말대로 제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이를 닦고 세수를 하다가 성윤이 기가막히다는 듯 웃었다. 방금 전 자기가 하려던 말이 대체 뭐였더라?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어서 억지로 짜내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럴 때 아니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3

"일찍 일어났네? 더 자도 되는데."
성윤이 직접 원두를 갈아 에스프레소를 일부러 두 잔 내리는 사이, 유영이 세수를 해서 말끔한 얼굴로 손님방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다정하게 묻는 안부 인사에 유영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제 현성이 밤 늦게까지 수다를 떨다 가서 피곤할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아침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시계를 보니 새벽 여섯시였다.
"커피 내리는 향이 좋아서 일어났어요. 일찍 출근하시네요?"
"어제 하루 자리 비웠으니 일 해주러 가야지. 평소에 이 시간에 일어나는건 습관이기도 하고.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돼?"
"할머니 납골당에 다녀올까 싶어요. 오랜만에 인사 드리려고."
"부모님한테는 안가봐도 돼?"
한강에서 주워진 그날 밤, 성윤은 제 졸업식에 딸을 찾으러 왔던 부모님의 일을 유영에게 물었다. 오해가 있던 것이라면 풀어주고 싶었지만, 유영은 제 부모와 연을 끊었다고 단호하게 말하여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친딸보다 집안의 장손이 더 중요한 분들이예요.'
그 말 한마디에 오랜 세월의 서러움과 원망이 담겨 있었다. 유영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성윤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에스프레소 잔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만나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아서. 보고싶지도 않고."
"그래, 네가 편한 쪽으로 해. 카드키 챙겨가고. 다녀올게."

"저 왔어요, 할머니."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치매가 심해져서, 유영을 알아보지도 못한 분이셨지만 막상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 길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바로 내려가, 장례식장에서 한 숨도 잠들지 않고 계속 향이 꺼지지 않도록 올렸었다. 병원에서 위독하시단 소식을 들었을 때 찾아뵈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죄책감과, 상실감이 여전히 유영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명록, 남기시겠어요?"
납골당의 직원이 자박자박 걸어와서 유영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록을 남겨서, 그녀가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에게는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가족도 아니고,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함 앞에 가볍게 목례를 올린 뒤 유영은 납골당을 빠져나와 다시 서울로 향했다. 막상 휴가를 받아 오긴 했는데 역시 정처없는 여행은 사람을 외롭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성윤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집에 바로 들어가긴 아쉬웠고, 또 지난번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 미술관 근처의 카페에 들어섰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쳤고, 그렇다고 마치 여기 자신이 올 것처럼 미리 알고 기다렸다고 하기엔 수상쩍은 사람이 거기 있다가 유영을 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유영아! 여기서 다 만나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평범한 직장인은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여기 왜 있어요? 일할 시간 아니야?"
어제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고 어째서인지 코드가 맞아 졸지에 호형호제를 하기로 한 현성이 카페에서 태블릿으로 일을 하고 있다가 유영을 칼같이 알아보고 반색을 하며 제가 있는 테이블에 앉혔다. 그에게 말을 걸거나 번호를 줄 기세였던 여성들의 시선이 대번에 유영에게 향했지만, 이 사람은 그게 몹시 익숙한 일인지 그녀에게 얌전히 앉아있으라고 말하곤 싱글벙글 카운터로 가서 분홍빛 가득한 딸기 쉐이크를 받아왔다.
"주변 시선이 굉장한데. 어떻게 여기서 일할 생각을 다 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중이었어. 지방에 있는 장서고에서 문서 이관받는데 절차 협의할게 좀 있어서. 원래 원장님이 기제원으로 모셔서 이야기 하는게 정례이긴 한데, 어제 연차 내는 바람에 쌓인 일 처리하느라 아~주 많이 바빠. 그래서 이 몸이 공사다망하신 원장님을 대신하여 나왔다는 말씀."
"그거 물어본게 아니긴 한데......확실히, '오빠는' 눈을 끄는 외모긴 해요. 어제도 그랬지만, 그런 양반이 카페에 앉아 일까지 하고 있으니......"
"덕분에 좋았지 뭐. 너 안왔으면 여기 와서 번호 주고 가는 애들 한둘 더 있었을걸."
유영의 입에서 약간 망설인 감이 있었으나, 오빠란 말을 들은 현성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성윤은 그예 '선배'라고 부르길 고집하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 승리감마저 드는 단어였다.
"더? 벌써 주고 간 사람이 있어요? 차라리 연예인으로 데뷔하지 그랬어요."
유영의 말에 현성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태블릿을 서류가방에 넣고 그녀와 가깝게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야? 서울 투어 중?"
"어......할머니 납골당 갔다가, 지금은 정처없이 떠도는 중이라고 하는게 맞겠네요. 딱히 어디 갈 데를 정해두질 않아서."
"그렇구나. 나는 곧 들어가봐야 하는데. 어디 갈데 없으면 이 옆에 미술관 특별 전시전 한 번 가봐. 큐레이터가 아는 사람인데, 영국 박물관 비공개 그림 가져온게 몇 점 있다고 자랑을 하더라고. 뭣하면, 나 퇴근하고 나서 같이 가도 되고?"
가볍게 작업 거는 체를 하는 현성을 보며 유영이 웃었다. 이렇게 잘난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데이트 신청을 하겠느냐는, 단언적인 웃음소리였다. 농담이라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남자와 편하게 대화 할 일도, 아마 그가 성윤의 부하직원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성윤의 집에 얼결에 얹혀 살게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므로.
"한 번 둘러는 볼게요. 얼른 들어가요, 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시겠다."
"그냥 들어가긴 아쉬운데. 아, 맞다. 내 번호 어제 줬던가?"
"아뇨, 괜찮......" 거기까지 말했지만 현성은 재빨리 유영이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빼내서 자기 번호를 입력해, 이름까지 저장해 주었다. 저장된 이름을 보고 유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너무 정직하게 이름 석자만 적은거 아닙니까."
"당연한건데 왜 그렇게 빵 터지는거야......일 있으면 연락 해. 이따가 집에 들어갈 때 연락해도 좋고. 필요하면 집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오늘 원장님 야근 시키고 나는 칼퇴 할거거든."
"어이쿠, 선배님이 피눈물을 흘리시겠네요. 얼른 들어가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현성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갈 뻔 했던 유영의 장갑을 챙겨주었다. 물건 두고 다니는 짓은 하지 말라며 가벼운 타박과, 나중에 또 보자는 인사를 하고 그가 검은색 롱코트를 휘날리며 사라지자 모델은 되어 보이는 늘씬한 여성이 유영을 '저기요,'라는 말로 붙잡았다. 하마터면 시비 거는 줄 알았을텐데, 그녀는 아주 공손한 태도로 유영에게 말을 붙여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 그 분이랑 무슨 사이시냐고. 유영은 그 순간, 현성이 왜 황실에서 일하는지 어렴풋 깨달을 수 있었다. 일반 직장에 다녔으면 일생 사람에게 시달릴 팔자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녀가 아는 한 기제원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남자들만 근무하는 금녀의 기관이기도 했다. 유영은 가볍게, '일 때문에 아는 사이'라고 적당히 둘러댄 뒤, 아쉬워 하는 여자를 두고 미술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국에 칠 년 만에 와서 벌어진 모든 일들에 적응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벌써 밤인듯 하늘이 어두웠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긴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 곧장 적중하고 말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팔을 뻗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 유영의 손목을 세게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상대가 아까 낮에 만난 현성이라는 점이 그녀에게는 놀람 포인트였지만 말이다.

"왠일로 원장님이 가서 챙겨주라고 하길래 설마 했더니 진짜네. 잘 넘어진다며? 가자, 근처에 차 대놨어. 집에 데려다 줄게. 가고싶은데 있으면 살짝 귀에 말해주고."

현성의 바람과는 반대로 유영은 서둘러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 되어, 현성과 함께 미술관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현성은 샤프해 보이는 인상 때문인지 성윤과 비슷하게 세단이나 쿠페를 몰 것이라고 생각한 유영이었으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커다란 대형 SUV를 끌고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조수석에 태웠다.

"궁금한게 있는데, 휴가 받아서 왔다며? 리(Leigh) 박사님 제자라는 것까진 어떻게 캐냈는데."

하루 종일 원장의 곁을 맴돌면서 귀찮게 한 결과 어찌저찌 유영이 미국에서 누구에게 사사했는지는 알았지만, 성윤은 그예 '나머지는 자기도 잘 모른다'며 대답을 더 해주지 않고 현성을 저녁시간 되자마자 내쫓았다.

"휴가 끝나고 LC 객원 연구사로 잠시, 일할 예정이예요."

"오, 거기 들어가려면 비자 문제도 까다로웠을텐데. 그 유명한 리 박사가 아끼는 제자라는게 너였구나. 기제원 들어올 생각은 없어?"

"거기가 금녀의 기관이라는걸 모르는 업계 관계자는 없을걸요."

"아차, 그랬지. 아쉽게 됐네."

퇴근시간이라 역시 차가 많이 막히고 있었다. 현성은 유영에게 양해를 구한 뒤 늘 듣는 채널의 라디오를 켰다. 교통상황, 오늘의 단신, 그리고 음악 한 두곡이 흘러 나오는 평범한 구성의 방송이었다. 한국에 오랜만에 와서 처음으로 듣는 라디오기도 했다.

"예전엔 라디오 들으면서 하늘도 보고 그랬는데, 풀밭에 누워서."

"꽤 낭만적인 취미를 갖고 있었네."

"집이 시골이었거든요. 어쩌다보니 자연인처럼 자랐어요, 어릴 때는."

"주말엔 같이 식물원이라도 갈까?" 현성이 여전히 핸들을 꽉 잡고, 시선은 정면으로 향한 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유영도 그에 맞춰 하르르 웃었다. 현성 정도 되는 사람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이 정도로만 생각하는구나,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였다.

"선배님 말씀으론, 요새 주말마다 선 보러 다닌다면서요." 현성을 만나기 전, 성윤이 제 이야기를 하다가 곁다리로 부하직원의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해 낸 유영이 말했다.

"어우, 말도 마라. 원래는 원장님이 장가를 안갔으니까 이름 팔아가면서 피했는데, 이제 그것도 안먹히더라."

"그래도......어르신들이 신경 써 주시는거라고 생각하시면. 아니다, 그냥 보냈는데도 꼭 여자 쪽에서 먼저 연락 오죠? 만나자고." 유영의 꿰뚫는 체 하는 말투에 현성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딩동댕! 정답이야. 그냥 좋게 밥만 먹고 헤어졌는데 꼭 그날 저녁 연락 오더라고? 가끔은......술 마셔서 정신 없다고. 어쩌라는거야, 대체. 내가 애인도 아니고 왜 오늘 저녁 밥 먹은 여자애가 술 마셨다고 연락오더라고. 왜?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 남자한테 자길 데리러 오라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해."

"너무 텐션이 올라갔어요."

"흠! 아무튼, 그래.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찬사를 듣는 건 익숙해. 네가 아까 했던 말마따나, 연예인 하자고 제안은 많이 받았으니까."

"결혼 할 생각은 있어요? 아니, 일단 여자친구부터는?"

"너 정도면 내가 심각하게 고려해 볼게."

"아직 생각 없다는 말로 들으면 되죠?"

"서운한데. 나 여태껏 살면서 먼저 어디 가자, 뭐 하자 이렇게 말한 여자가 양 손에 꼽을 정도인데."

"소녀, 부원장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유영의 너스레에 현성이 이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매끄러운 운전 솜씨로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문 정도는 알아서 잘 열 수 있어요."

"내 차 조수석에 탄 여성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거든? 원장님이 너 잘 보고 있으라고 당부한 것도 있고. 변호사한테 연락 온 모양이더라."

"왜 그 이야길 이제 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성이 아주 자연스럽게 성윤의 집에 같이 들어가면서 며칠 전의 호텔 사건을 언급했다. 처음에 현성은 그 끔찍한 강간-살인-방화 사건의 범인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하필 성윤이 그토록 찾던 후배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람을 '우연히' 한강에서 만나 납치하듯 데려왔다는데 놀랐지만, 오늘 퇴근하기 전 그가 현성을 붙잡고 짧게 한 이야기가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유영이 손을 씻고 와 거실에 앉기를 기다린 현성은, 냉수를 한 잔 벌컥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너, 한강에서 캐리어 들고 정처없이 걷다가 성윤이 형한테 발견됐다고 했지?"

"네, 그랬죠. 덕분에 여기-."

"용의자 동선 추적 중에 한강변 CCTV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놈이 너 뒤쫓고 있었대. 겨울이라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아무도 못 알아차린 것 같다마는. 둘이 벤치에 앉아 커피 마시고 있을 때도 근처에 서 있는 장면 찍혔어. 가능하면 혼자 다니지 않는게 좋겠다고, 경찰 쪽에서 변호사한테 이야기를 했다고."

"조심.....해야겠네요. 바로 휴가 취소하고 미국 들어가야 하나......"

"그건 그거대로 성윤이 형이 서운해 할 것 같은데. 아무튼, 나갈 일 있으면 나나 성윤이 형 퇴근하고 같이 움직여줬으면 해서. 경찰 쪽에서도 인원을 더 투입한다고 했지만, 돌발 사건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하기는 어려워. 최대한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데리러 오신거였네요. 고맙습니다."

"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 걸. 때마침 집도 바로 아래층이기도 하고. 저녁 뭐 먹을래? 시켜줄까?" 현성이 이내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밝게 웃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유영도 계속 그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어 얼결에 '매운 떡볶이'!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 직후로는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성윤의 이런저런 과거 이야기를 서로 공유하며(유영은 성윤의 대학 시절을, 현성은 성윤의 황궁 입성기부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느라, 오후 아홉시가 지나 성윤이 다크서클을 단 채 들어오는 것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그는 거실에 불이 켜져 있고, 현성과 유영이 이야기하다가-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듣고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유영이 별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집에 있다는 안도감과, 한편으로는 저기 앉아있어야 할 사람이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일종의 질투와 비슷한 것이었다.

"너네 둘이서 거실에서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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