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 2 본문

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 2

alicekim245 2020. 3. 6. 15:38

묶음 이어서:

더보기

#1

조금만 손을 더 뻗으면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얇은 손목이 제 손에 잡히는 일은 없었다. 조금만 더, 더, 그리 반복하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성윤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새벽녘 희미한 빛에 눈을 떴다.
눈가를 매만지니 눈물이 말라 새하얀 가루가 묻어나왔다. 꿈에서 그리 오열하고 있으면 현실의 그도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곧이어 울리는 핸드폰의 모닝콜을 죽여놓은 성윤은 세수를 하기 위해 불을 켜고 욕실로 들어섰다. 부스스한 머리, 이제 삼십대 후반을 달리는 사람다운 피부 탄력, 그 와중에 그나마 덜 바뀐 것이 있다면 곧은 눈썹과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큰 눈이었다. 모래판 위에 있을 때에, 사람들이 그리도 찬사를 보내던 잘생긴 얼굴이 이제 세월의 결에 순응하고 있었다.

지금의 성윤은 황제 직속 기제원의 원장이었지만, 칠 년 전만 해도 전도유망한-아니 이미 유명한 스타 씨름 선수였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때 운동 관련 학과가 아닌 문헌정보학과를 택하여 주변이 잠시 의아해 했지만, 대학에 다니는 4년간 용장급 무패 신화를 써내려간 그였기에 사람들은 금새 그의 전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으레 짐작했듯 그 역시 실업팀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입단 후 첫 경기-구정에 열린 씨름 대회에서 온갖 선수들을 물리치고 단번에 장사 타이틀을 거머쥠으로써, 그가 탁월하고 타고난 씨름 선수임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그렇게 씨름 선수 생활을 계속 해야 했지만, 그는 네 번째 장사-두 번째 설날 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무릎 십자인대 파열을 당하면서 모래판에서 망설임없이 내려왔다. 그 사유에 대해서 대부분은 재활이 어려운 부상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이유 말고도 다른 것이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은 성윤의 주변에 불행한 일들이, 그리고 그에게도 안좋은 일들이 여러차례 겹친 탓이라고 알고 있었다. 결혼식장까지 잡아두었던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칠 년 전, 모교의 졸업식장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 그가 재활을 그만 두고 씨름계를 아예 떠난 가장 큰 계기였다. 제 생각을 나서서 나불거리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던 성윤은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제 속에 감춰두고 있었다.

그토록 꿈에서 붙잡고 싶어 했으나, 그예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어떤 '후배'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아직 사로잡고 있었다.

은퇴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며 성윤은 기록관리학 석박사를 두 해 만에 마치는 기염을 토했고, 그 직후 어떤 이유에선지 대한제국 황제의 눈에 띄어 2년간 비서실장으로 일하고는, 기제원으로 적을 옮겼다. 그것도 현재 황실에서 가장 젊은 기관장-역대 최연소 기제원장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면서 말이다. 과거에 씨름판에서 명성을 날렸던 장사가 황실 기구의 원장에 취임했다는 사실은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나, 그것도 이제 3년 전의 일이었다.

성윤은 드레스룸에 걸려 있던 검은색 철릭을 능숙하게 입었다. 검은색 비단 위에 은사로 구름이 수놓아진 한복은 황궁에서 겨울 행사가 있을 때 그가 입는 옷이었다. 황궁 직원들을 위한 정복이 있었고, 기관장들에게는  푸른색 견장과 허리끈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제복이 주는 위압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철릭을 선택한 것이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손을 본 뒤,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채비를 하는 내내 오늘 꾼 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머리빗을 조금 오래 잡고 있던 탓에,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실 시간이 없었다. 차는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금방 그를 직장에 내려 주었다.
기제원 로비에 들어서는 원장의 표정을 본 부원장 현성이 탕비실로 쏙 들어가더니 작은 잔에 금방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어왔다. 설탕 한 조각이 그 위에서 사르르 녹고 있었다.
"준비는?"
"제현이랑 세진이가 마무리 하는 중입니다. 철릭 근사하네요. 나도 검은색으로 할 걸 그랬나." 현성이 그렇게 말하고는 제가 입은 짙은 곤색 철릭의 소매를 펄럭였다. 성윤은 일부러 미간을 좁히곤 '먼지난다' 타박을 했다.
"그보다 원장님이 커피도 안 드시고 출근하시다니, 드문 일이네요."
"꿈자리가 별로였어."
현성은 더는 묻지 않고 기제원 로비 한 구석에서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포장하고 있는 직원들의 손을 거들어 주러 갔다.
황제가 처음 황궁을 민간에 계절마다 개방하겠다고 했을 때, 그의 면전에서 거친 소리까지 불사하며 기제원의 개방을 반대했지만 그예 지고 만 것이 성윤은 다시금 짜증이 났다. 그나마 합의를 본 것이, 기제원 앞마당 까지만 사람을 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선대 황제들과 신력에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기제원으로써는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기제원의 신입 궁무관, 제현과 세진이 기관 앞마당을 기웃거리던 여성지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바람에 외부 인터뷰 일정을 일일이 확인하고 허가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기제원이라는 금녀의 기관(과거에는 여성 궁무관이 있었으나 외국으로 자료를 매각하려다 실패하고 진노한 당시의 황제에게 신력으로 불타죽은 사건이 있어 내규로 금하고 있었다)에서 일하는 '잘생긴' 그리고 '어린' 직원들이니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해주라고 황제가 직접 찾아와서 언질, 사실은 명령을 내리고 간 탓도 있었으므로.

그보다 새벽녘 꾸었던 꿈이 아직도 신경이 쓰였다. 그 아이가 사라진 날부터 이따금 그를 찾아왔던 꿈이었다. 반복해서 같은 꿈을 꾸다 보면 그 광경의 사소한 부분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었다. 매번 보인 그 헤어짐의 공간이 이제 익숙해지려는 참이었다. 뒤돌아 서서 가는 그녀는 한 번도 성윤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보려 노력을 해 보아도 무용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이번에는 꼭 잡힐 것만 같이, 가까이 다가갔었는데.
나는 그리도 너를 그리워하는 모양이구나. 성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그 날 이후로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나는 너를 끝까지 그리워 하며 살아가겠구나-그리 생각하는데, 성윤의 시선 끝에 하늘색 코트를 입은 사람이 아른거렸다. 칠 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잘못 알아볼 수 없는 실루엣이었다. 오늘도 꿈에서 그토록 갈망하였으나, 손에 넣지 못한.
생각보다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상대 역시 자신을 쫓아오는 검은 철릭 차림의 사내를 눈치채고 전력으로 도망갔으나, 재활 후 취미로 씨름을 계속 하며 운동을 놓지 않은 성윤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코트의 허리끈을 손에 쥐고 순식간에 잡채기로 테이크 다운. 길 위에 살짝 내려놓는 무게가 이다지도 가벼운 것이, 내가 꿈을 아직 깨지 않은 건가 싶은 순간-달콤한 꽃향기가 성윤의 폐부를 깊숙히 파고들었다. 이윽고 복부에 꽂히는 날카롭지만 아프지 않은 주먹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아도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칠 년의 그리움이 이렇게 끝났다.
성윤에게 잡채기를 당해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 역시 하르르, 웃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원장이 갑자기 달려가서 민간인으로 보이는 여자한테 잡채기를 시전했으니 보는게 당연했다) 성윤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껴안았다. 품에 쏙 안기는 이 온기를 손에 넣기 위해, 나는 꿈에서 그렇게도 너를 놓쳤나보다. 그녀 역시 성윤의 넓은 등을 껴안아 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선배님."

#2

월동제 저녁에도 좀처럼 틈이 나질 않았다. 마음같아선 부원장에게 전부 떠맡기고 유영이 남겨 준 호텔 주소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번엔 황제가 무슨 농간을 부렸는지 정전에 설치된 무대에서 한 마디 꼭 해야 한다고 큐시트가 뒤늦게 전해졌던 것이다. 그래도 황제가 직접 기획한 순서였기에 도망간 뒤의 후환을 감당할 생각은 하기도 싫었으니,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유려한 인사말을 한 뒤 스테이지에서 내려온 성윤은 행사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기를 기다려 현성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곤 쪽문을 통해 황궁을 빠져나왔다. 유영의 숙소는 황궁에서 걸어서 3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코끝에, 탄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의 높은 건물에 불길이 치솟아 있는 것이 보였고, 거의 동시에 소방차가 맹렬하게 그 쪽으로 속도를 내며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상부에 달려 있는 간판을 본 성윤이 급하게 같은 방향으로 내달렸다. 유영이 묵는다고 알려준 바로 그 호텔이었다.
날쌘 속도로 달렸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은 나이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로비 앞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 중 호텔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잡아 다 빠져 나왔는지 물었다.
"안내방송은 틀림없이 했습니다. 아마 없을겁니다."
"아마?"
이 사람도 황급히 빠져 나오느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은 알지만, 설마 불타는 객실 층에 유영이 있을거라고-아니, 아래층부터 세어 보니 유영의 객실 층이었......성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며 불타는 호텔로 달려 들어가기 직전, 그의 소매를 누군가 힘없이 잡았다. 이 상황에 뭐야?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그을음이 묻어 있는 흰 가운 차림에, 신발은 어디 팔아먹었는지 맨발인 유영이 거기 서 있었다. 성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가, 외투를 벗어 가운 차림인 숙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신발은?"
"급하게 나오느라. 쨍그랑 소리랑 타는 냄새 때문에 복도로 나왔는데, 옆 방에서 남자가 칼 든 채로 뛰어나온거 보고 아무 생각 못하고 계단으로 도망쳤어요."
그래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라고 말하려던 찰나 근처에서 탐문을 하고 있던 경찰 하나가 성윤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유영에게 다가와 가볍게 목례를 했다. 호텔 투숙객에게 혹시 범인을 보았는지 확인하는 중이라 했다.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기에 유영이 순순히 보았다고, 기억나는 특징을 말해주었고,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혹시 더 자세한 말을 들을 수 없는지 물었다.
성윤이 그 때 그를 가로막았다.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 오늘은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가 보호하고 있을테니, 내일 기제원으로 연락 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가방도 놓고 나와서......휴대폰도 여권도 다 잃어버렸네요......옆 방이라 제 짐은 전부 탔을지도."
"목격자 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알 수 있을지요? 기제원과는 어떻게..." 경찰의 공손한 물음에, 성윤은 유영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자신의 외투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금박으로 압인된 황궁의 오얏꽃 문양을 확인한 그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상관에게 무전을 쳤고, 곧 사건현장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가 하달되었다.  성윤은 곧장 유영을 공주님안기로 들어 황궁 직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려주면 안돼요? 가운 차림이라 민망한데."
"신발도 못 신은 애를 어떻게 걸어가게 두라는거야. 얌전히 안기시지?"
"선배님 와이프 분이 뭐라고 할것 같아서요." 성윤은 유영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청첩장을 준 것'에서 끊겨 있음을 깨달았다. 한참 전에 파혼했기 때문에 와이프란 말을 들어도 별로 타격은 없었다. 대신 투정을 약간은 부리고 싶었다. 마치 옛날처럼.
"결혼 안했는데? 나 아직 싱글이다."
"그럼 그 때 청첩장은 왜 줬어요?"
"식장도 잡았는데, 그 사람이 도망갔어."
"아, 이런. 미안해요. 그런 줄은 모르고."
"너나 나나 칠 년 만에 만났으니까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 하려고 호텔 가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주변 호텔 데려다 주면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너 가방 저 불탄 데 놓고 나왔다며. 거기 신분증이랑 지갑이랑 핸드폰 다 있는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자 유영이 잠잠해졌다. 성윤은 주차되어 있는 차의 조수석에 유영을 앉혀 안전띠까지 매어준 뒤 운전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밀폐된 공간에 있게 되자 그제야 그는 피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급히 유영의 손이며 발목을 보니 생채기가 가득 나 있었다.
성윤은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손님 방이 비어있으니 거기서 하루 자게 하고, 그 전에는 상처 소독을 해 주고, 잠이 안 온다고 하면 위스키나 조금 약한 술을 먹여 재우면 되고, 그 전에 칠 년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시키고,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느라 핸드폰에 현성이 보낸 문자를 확인하지 못했다.
피묻은 옷을 입고 있는 흉안의 남자가 성윤의 차와 그 조수석에 탄 유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역시.

자동차 트렁크에는 어째서인지 검은색 삼선 슬리퍼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유영에게 그걸 가져다 주자 그녀가 반색을 하더니, 그걸 신고 차에서 훌쩍 내렸지만,  발에 난 상처 때문인지 미간을 좁히며 아픈 기색을 내비쳤다. 성윤이 거실 소파에 유영을 앉히고, 구급상자를 찾아서 들고 나오니 유영이 소파 한 켠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살짝 흔드니 깨어난 걸로 봐선 긴장이 풀려서 잠시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았다.
상처를 과산화수소수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리퀴드 폼을 발라주자 유영이 비명을 속으로 삼키는게 눈에 보였다.
"아프면 소리 질러도 돼."
"와, 이거 진짜 아파요......"
"일단 소독은 다 했고, 물에 닿아도 아프지는 않을거야. 구급함은 거실에 둘 테니까 폼이 떨어지면 다시 발라, 다 아물때까지."
유영이 비명을 삼키느라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윤은 그녀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방으로 갔다. 불을 켜고, 침구를 대충 정리하고, 작은 옷장을 열어 파자마를 찾아 이불 위에 펼쳐놓았다. 손님방에 딸린 욕실도 확인해 보니 깔끔한 상태였다.
"저 방에서 자면 돼. 생각같아선 너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마는, 오늘은 일이 컸으니까. 씻고 바로 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 사이 거실 장식장에 놓인 성윤의 황소 트로피며 기념사진들을 본 모양인지 유영이 배시시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휘청였다. 놀란 그가 유영을 잡아 다시 품에 안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평지에서 이상하게 잘 넘어지는데, 더 이상하게도 평발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기억났다.
"사진, 아직 장식해 놨네요."
"당연하지. 너랑 찍은-아니, 아니다. 얼른 들어가!" 저 기념사진의 태반이 우승 직후 유영과 같이 찍은 사진이란 말을 이제와서 할 수가 없었다. 귀 끝이 새빨개진 모습을 칠 년 만에 만난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성윤은 제 차림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랜만에 만난 선배를 놀릴 생각이 얼굴에 가득 찬 유영을 떠밀어 손님 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거실 소파에 털썩, 몸을 편하게 주저앉혔다.
거실 장식장에는 황소 트로피 네 개와, 온갖 대회에서 탄 메달들, 그리고 그 때 찍은 사진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 사진들을 누가 모아서 보면 유영이 친족이나 부인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성윤은 그제야 자각했다. 경기 후 사진을 인화할 때 그가 무의식적으로 골랐던 사진임을 생각하면, 이미 예전에 답이 나와 있는 문제를 가지고 바보같이 먼 길을 돌아 온 셈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존중은 할 것이었는데, 그 인내심이나 배려의 바닥이 그리 깊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성을 날려버릴 혈기왕성한 20대였다면 저 손님방의 문을 열고 벌컥 들어갔겠지. 하지만 내일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하기엔 너무나도 유치했다. 유영이 자신을 그리워한다던가, 좋아한다던가,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온 이상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저도 긴장이 풀린 탓일까,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 든 성윤은 부엌으로 돌아가 얼음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우곤, 핸드폰을 켰다. 유영이 내일 신분증이며 핸드폰 때문에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월차 내고 같이 다녀주는 편이 그녀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덕분에 현성이 아까 보낸 문자를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황궁 근처의 호텔에 화재사고가 났고, 용의자가 도주했는데 목격자가 경찰에게 기제원장의 명함을 남겼다고. 혹시 원장 본인이 준게 맞는지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성윤은 잔을 들고 서재로 들어와 현성과 짧게 통화를 하며, 연차 내는 일까지 마무리를 지었다. 용의자가 도주했다는 점이 적잖이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유영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다.

 

#3

문득 정신을 들었을 때, 호텔이 아닌 낯선 집의 천장이 보였다. 애초에 칠 년 전부터 그녀에겐 딱히 집이란 공간이 없었으므로 언제나 낯선 천장이었지만, '낯설다'는 느낌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응원하던 선수이자 짝사랑하던 선배에게 청첩장을 받고 나서 미국으로 도망가 버린 사람 치고는 과분한 재회였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기억을 돌이켜 보다 다리에 난 상처에 눈이 갔다. 성윤에게 연락처와 호텔 주소를 알려주고 나서도, 그가 애써 자신을 찾아올 일은 없을거라 가정하고 씻고 쉬던 참이었다.

한 달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와서, 평소 묵어보고 싶었던 고급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까지 모든게 완벽했다. 옆 객실에서부터 검은 연기와 유리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난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운을 걸친 채 객실 문을 열었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이 옆방에서 피 묻은 칼을 들고 나오는 남자와 동시였던 것이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계단을 통해 바깥으로 탈출해, 어쩐지 그 남자에게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 하던 차, 호텔 직원에게 말을 하고 있는 성윤이 눈에-정말 팍 하고 들어왔다. 마치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구원자처럼 나타난 그가 신기했다.



하여 유영은 지금 동경하던 선배의 집 손님방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 샤워를 다시 하고, 수건을 빨래통에 넣어두고, 머리를 덜 말린 상태로 거실로 나가니 성윤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에 쏙 들어오는 에스프레소 잔이 귀여워 보였다.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치 오래 전부터 해 온 듯한 익숙한 말투. 유영은 드물게 느껴지는 익숙함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드세요? 에스프레소에 설탕 하나."

"사람 취향이 쉽게 바뀌는건 아니라서. 아침 먹자. 너 일어나는거 기다렸어."

그렇게 말하곤 그는 읽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영이 옆에서 거들어주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유영에게 앉아있으라고 말한 뒤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혹시 손님방 욕실에 파란색 바디워시 있었냐."

"어, 네! 잘 썼어요."

"그거 남성용인거 못봤어?"

"그러고보니. 그냥 있길래 썼는데-."

"어휴, 됐다. 오늘 관공서 들르고 나랑 쇼핑도 가야겠네."

출근 안할거냐는 유영의 물음에, 성윤은 쿨하게 '연차 냈거든?'이라고 대답한 뒤 식탁 옆에 앉은 그녀에게 토스트와 커피, 딸기잼과 버터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자기도 식사를 시작했다. 혼자 산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던가-유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제가 자고 일어난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나가야 하긴 했는데, 큰 문제가 있었다.



"선배니임-." 유영이 울상으로 성윤의 침실 방 문을 열었다가, 화들짝 놀라서 문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이 전에없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닫힌 침실 문 건너에서 성윤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상의는 탈의한 상태로 문을 열고 나와 그 앞에 웅크리고 앉은 유영의 등을 유쾌하게 두드렸다.

"뭐야, 왜 이런 걸로 여기서 이러고 있냐? 너, 씨름 보러 다닐 때 자주 봤잖아, 나 선수복만 입은거."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르잖아요! 가서 뭐라도 좀 걸쳐요, 얼른!"

"침실 문을 갑자기 연 건 그렇다 치고, 이 반응은 뭐냐고." 그리고 웃음을 쉬이 그치지 않던 성윤은 유영의 말대로 들어가서 다시 흰 셔츠를 걸치고 나와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유영의 어깨를 탁탁 쳤다. "자, 이제 옷 입었거든? 너 지금 귀 엄청 빨간거 아냐?"

"그거랑 이거랑 달라요......다르다구요." 성윤이 선수복을 입고 모래판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과, 침실에서 바지만 입고 셔츠를 찾기 위해 흥얼거리는 것은 유영의 입장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칠 년 동안 씨름 경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으니, 상체 탈의인 상태의 남자를 보는 것도 몹시 오랜만의 일이었던 것이다(꽤 건전한 유학생활을 한 그녀였다).

어쨌건 유영의 반응을 한껏 즐긴 성윤은,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잠옷 차림으로 어떻게 나가요......" 그의 이죽거림에 침울해진 유영이 힘이 다 빠져서 말했다. 성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유영을 앞세워 손님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 아래쪽의 서랍을 열게 했다. 어째서인지 여성용 원피스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일부러) 자신을 보는 유영에게, 성윤이 손사래를 치며 마뜩찮은듯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 같이 살던 여자친구가 거기 넣어놨을거라 생각했어. 거의 다 내다 버렸는데. 신분증 재발급 받으러 가기 전에 옷부터 사러 가자. 나도 네가 그 여자 옷 입는건 싫거든."

"저는 이것도 괜찮은데."

전에 같이 살던, 여자친구, 란 말에 유영의 말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성윤은 약간 격앙된 어조로 그녀의 말끝을 가로챘다.

"내가 안괜찮거든? 겨우 만난 후배한테 전여친 옷 입혀서 돌아다니게 하는 미친 인간으로 만들 셈이냐."

그렇지, 유영은 어디까지나 성윤에게는 씨름 선수로서의 인생을 응원해 주던 팬 중 하나였다. 학교 후배라는 것을 제외하면 저기 관중석에 앉아 플랜카드를 흔드는 흔하디 흔한 응원자들 중 하나. 유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 관계는 변하지 않을거고, 그녀의 짝사랑도 짝사랑으로만 남을 거라고-성윤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 이후로는 정신없이 성윤의 손에 이끌려 다니기만 했다. 가장 일찍 여는 백화점에 간 것 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성윤이 여성복 매장에 유영을 들여보내고는 그녀가 입고 나오는 옷마다 종종 결제를 해 주려는 통에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카드 좀 집어넣어요! 내가 나중에 다 갚아야 하는거라니까요!"

"내가 이럴 때 돈 쓰려고 야근하고 황제-아니 상사한테 시달리고 있는거라고! 얌전히 내 카드의 은총을 받아!"

"대딩때 하던 말투 좀 그만 쓰고요!"

옥신각신 하는 그 둘을 보고 직원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려서, 잠시 휴전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다. 성윤은 유영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직원에게 부탁해 전 여친의 원피스를 받아 쓰레기통에 쳐박아 넣었다. 그가 사준 새 옷을 입고 어색한듯 거울에 비쳐보는 유영에게, 성윤이 커다란 종이 가방을 건넸다. 가방 안의 내용물을 본 유영이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큰 매출을 올려 싱글벙글인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성윤을 끌고 백화점 안의 카페로 들어갔다.

"이게 다 뭐예요?"

"너 환복하는 사이에, 전화해서 부탁해 둔 물건 받아서 전달한 것 뿐인데......?"

"로션에, 향수에, 그리고 속옷 사이즈는 왜 알고 있는거냐구요오......" 그녀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 번도 같이 잔 적 없는데 어째서 이 남자가 자기 속옷 사이즈를 알고 있는건지 알고싶지 않았다. 성윤은 정신 차릴 기색이 없는 유영을 어제처럼 번쩍 안아 올려 다음 장소로 갈까 하다가, 조금은 '감격 할'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응이 다채로워 몹시 즐거웠던 것이다.

유영은 곧이어 그가 예약해 둔 스튜디오에서 반명함판 사진을 찍었고, 인화된 사진을 들고 주민센터로 가서 주민등록증과 여권 재발급을 신청했고,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받아 핸드폰을 새로 받았고, 카드도 재발급 신청을 완료할 수 있었다. 다 끝내고 나도 겨우 오후 한 시인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