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 1 본문

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 1

alicekim245 2020. 3. 6. 15:36

브런치에 써 두었던 아카이브 이펙트 글들 엮어서:

더보기

#1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붙잡을 수 있었는데.
마지막 날, 평소처럼 뒤돌아서서 걸어가던 너를 잡았더라면.
"으악-!"

성윤은 침실 바깥에 들릴 정도로 크게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칠 년 전, 갑자기 그의 곁에서 사라진 어떤 후배가 나오는 꿈이 새벽의 그를 짓눌렀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어디가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분간도 잘 되질 않았다. 그녀의 하르르 웃는 목소리도, 미소짓는 얼굴도 점차로 희미해지는 것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제 비명에 놀라 눈을 뜬 성윤은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을 느끼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새하얀 소금기가 묻어나왔다. 또 꿈을 보면서 오열한 것 같았다. 꿈에서 그가 울면 현실세계의 그도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가습기가 도중에 작동을 멈춘 것인지 목에 모래가 낀 것 처럼 까끌거림이 느껴졌다. 모래, 모래-세 번째 십자인대 파열로 그토록 열망하고 사랑하던 모래판에서 내려와 놓고도 여전히 '모래'가 제 사고방식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긴 팔을 뻗어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오늘의 일정이 딱 하나 있었다. '월동제'. 황궁에서 겨울에 열리는 민간 초청 행사로, 현 황제에 이르러 황실과 국민을 연결코자 개최를 시작한 행사였다. 오늘 처리할 일까지 미리 어제 결재를 해 주느라 야근을 했던걸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렸지만, 지엄한 황제의 명이니 대놓고 디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샤워를 마치고 드레스룸에 들어서자 턱하니 걸려있는, 흰 구름이 은사로 수놓아진 검은색 철릭을 보자 성윤은 다시 사소한 분노가 피어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평소의 무감각한 얼굴로 복잡한 매듭을 능숙하게 마무리했다.

평소대로 출근했을 뿐인데 기제원 로비에는 그보다 훨씬 일찍 사택에서 나온 두 막내 궁무관, 세진과 진혁이 나와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줄 황궁 기념품을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있었다. 각각 적색과 청색의 철릭이 두 사람에게 퍽이나 잘 어울렸다.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원장실로 올라온 그는, 결재 서류가 단 한 건도 올라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다들 작정하고 놀 생각인 것 같았다.

황궁 기록원이 별도로 설립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기제원'은 역대 황제들의 기록물을 수집, 보관하고-더불어 '신력'과 관련한 자료도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황제 직할 기구로 운영되고 있었다. 특히 신력과 관련한 자료들이 무분별하게 유출 될 경우 제국의 입장과 권위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기제원장은 대대로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관리학 석박사를 단기간에 마치고 황제가 직접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던 성윤의 기제원 행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였고 또한 그리 되었다. 전직 씨름 선수, 그것도 장사 출신인 점이 사람들의 이목을 잠시 집중시켰으나, 몇 해 뒤 황제의 여동생이 현직 씨름선수(더불어 성윤과 초중고, 대학교 동기이자 실업팀 동료였던)와 결혼하면서 이제는 성윤이 씨름선수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드물어지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현대에도 사람들이 대한제국 황실에 가지는 환상은 여전히 유효했다. 특히 아시아에서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제국은 그 수장인 황제가 '신력'이라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더더욱 주목을 받곤 했다. 손에서 불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기도 하는 그 힘은 타국에서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자국 내에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수년 전 입헌군주정을 선포하여 정치적 실권은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황실에 긍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여 그런 긍정적인 이미지를 극적으로 활용하겠다며 지금 대의 황제가 들고 나온 것이 계절마다 열리는 축제(민간 초대 행사)였다. 한정된 수의 민간인에게 황궁을 개방하여 각 관청(기관)을 구경시켜 주는 것으로 직원들을 '쓸데없이'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성윤의 일관적인 견해였다. 게다가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이 기제원 앞마당을 왔다갔다 하는 것은 기제원장으로써 꽤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자료의 보존 측면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에 처음에는 '절대 안된다'며 버텼지만 내부 회의에서 황제가 강제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마당까지만 개방하게 한 것이 한계였다.

정문이 개방되고 사람들이 점차로 기제원 마당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성윤은 아예 멀찌감치 떨어진 백송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년 여름 개방 행사 때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혀 일약 스타가 되었던 세진과 진혁이 붉고 푸른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기념품을 주고, 같이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보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름선수였을 시적에는 팬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익숙했었지만 거길 떠난지 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그저,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그 와중에 현성이 다가와서 그에게 작은 종이컵을 건네주었다. 설탕 하나를 넣은 에스프레소였다.
"이 와중에 이걸 갖다주고 싶은건가......"
"왜요, 이럴 때 마셔야지. 어차피 저기 안 낄거면서."
"저게 젊음인가 싶다." 성윤이 스트레칭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소싯적에 저랬던 것 같은데. 팬도 제법 있었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아니? 안그럴거야."
그 때로 돌아가 씨름판에 올라갈지, 완전히 내려올지 선택할 기회가 온다 해도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돌아가도, 이제는 응원해 줄 가장 소중했던 팬이 없으므로. 현성은 아쉽다는 듯 저도 다른 손에 들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성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두 막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짙은 남색의 철릭을 입은 현성이 나타나자 이번에는 그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게 눈에 보여 웃음이 났다.
"하기사, 저 녀석 예전엔 모델도 했었다던가." 성윤은 한껏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직원들을 보다가, 문득 다시 떠오른 '그녀'의 기억에 미간을 좁혔다. 커피에 위스키라도 타서 마셔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지났는데."
셩윤이 가장 아끼고 각별하게 생각하던, 그의 씨름선수 인생 1호 팬이자 학교 후배였던 최유영. 그녀는 자신의 졸업식날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고, 그 이후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밟는 동안도 사람들에게 부탁해 행방을 찾았지만, 황궁에 입성하고 나서는 일부러 찾지 않았다. 그토록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지워버렸으니 제 발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있을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찾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생각나는 것도 그만둘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도 오늘 꿈 탓에, 죽은 건 아닌가 불안감이 다시 한 번 그를 엄습했다.
오후 나절이 되어서 사람들이 정전으로 몰려 간 이후에야 막내들도 짬이 났는지, 백송 근처로 와서 자기 팬들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했다. 사탕, 과자부터 팬레터, 머플러까지 그 품목이 다채로웠다.
"공연이나 보러 다녀와......겨울 행사는 또 레파토리가 다르니까."
"원장님은 안 보세요?"
"나? 나는 5년이나 봤어...같은거. 현성아, 애들 데리고 다녀와. 나는 여기 있을테니까. 어차피 오늘 업무도 없고."
"네에, 네에, 다녀옵죠."
현성이 성윤을 놀리며 다른 직원들을 이끌고 메인 스테이지가 설치된 정전으로(황제가 정무를 보는 공간 앞에 공연 무대를 설치한다는 그 발상이 놀랍지 않은가?) 향했고, 성윤은 드물게도 높다란 푸른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겨울바람을 마당에서 즐기고 있었다. 기제원 출입문 쪽에서 연하늘색 코트를 입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뒤늦게 잠깐 구경하기 위해 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두지는 않았다. 떠다니는 구름 모양이 왠지 날아가는 새를 닮은 것 같아 멍하니 바라보던 때, 제가 앉은 벤치 옆에 묘령의 인물이 털썩, 하고 앉는 것을 느끼고 왠 방해인가 싶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성윤은 그 순간 자신이 7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오늘도 꿈에서 본 그 얼굴이, 하늘색 코트를 입은 채 커피 두 잔을 들고 자신을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겨우 뻗어, 자신에게 잔을 건네는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잡아보았다. 전해지는 온기가, 이것이 꿈도, 7년 전의 환상도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불렀다.
하르르, 웃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2
오랜만에 고국의 공항에 발을 내딛었을 때 든 생각은, '피곤하다' 정도였다. 누구는 고향에 오랜만에 오면 흙냄새가 난다던가, 감격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던가 그런 거창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곤 했지만 유영에게는 그런 세세한 표현이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졸업식 직전, 집안을 뒤집어 놓고 부모는 물론이고 세상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모든 연을 끊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향했던 것 치고는, 금의환향이라 할 만 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한국의 연락처 한 곳에 전화를 걸었고, 몇 시간 뒤 그녀는 황궁 근처의 레지던스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돌아왔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하고 명절이라 큰아버지 댁에 찾아갔을 때, 유영은 당시 중학생이던 사촌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날 벌어진 일이어도 그게 '잘못'된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이 걱정할 것이 두려워 입에 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그에게서 어떤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왕래를 거의 끊은 채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갔다. 하지만 유영이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 그 때의 기억은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기 1년 전쯤, 치매를 오래 앓아 요양병원에 쭉 계시던 유영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막대한 것도 아니었으나 어른들이 꽤 탐낼 만한 규모의 재산을 남겼는데, 사촌오빠는 죽은 자기 아버지-유영 아버지의 제일 큰 형-의 몫으로 유산을 받아야겠다며 장례식장에서 난동을 부렸다. 제 아버지가 일찍 죽어 저 모양이라며 유영의 아버지가 그 없는 곳에서 혀를 찼다. 유명한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들어가 김치공장 사장 딸을 만나 결혼하고, 딸자식까지 있는 양반이 재산 내놓으라며 벌인 추태가 대단했다. 결국 그가 원하는대로 큰아버지 몫의 유산을 받아 챙겨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어이 할머니 기제사 때 자기 가솔들을(그래봐야 부인과 어린 딸 하나) 다 끌고 와서는 재산을 더 내놓으라고 술을 마시며 소리를 질렀다.
그 고까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유영이 술을 한잔 하고 한 소리 했다. 그 직전, 졸업은 코앞인데 취업은 왜 못했느냐며 친척들의 십자포화를 맞은 직후라 약이 살살 올라 있던 상태였고, 술이 주는 용기도 더해져 있었다.
"어릴 때 사촌여동생 성추행 한 새끼가 개소리도 지랄맞게 하네?"
"졸업때까지 취업도 못한 병신이 뭔 개소리야?"
아마 본인은 해놓고 잊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술기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 인간이 술병을 잡고 제 사촌 여동생을 내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몸을 일으킨 상태였던 그녀는 병을 옆에 치워두는 평화로운 해결방법 대신 사촌오빠의 얼굴을 다리로 후려 치는 것으로 대답했다. 쾅, 하고 사람이 바닥에 내리 꽂히는게 아주 일품이었다. 옆에서 제 '지아비'의 주사를 빤히 보고만 있던 사촌 형수가(자기도 제 남편의 재산 주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왜 옛날 일 가지고 우리 남편한테 그래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유영의 부모님도 같은 소릴 했다. 왜 옛날 일로, 하필 기제사 때 이러느냐고. 다 지나 간 일이라고.
가족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사촌오빠는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꼿꼿하게 서서는 자신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강짜를 부렸다. 애초에 순순히 사과를 할 거였다면 얼굴을 발로 걷어 찬다는 발상도,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팔짱을 낀 그의 얼굴을 유영이 이번엔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그가 일어 서 있는 덕분에 유영의 주먹이 아주 시원하게 면상에 꽂혔다.
제가 추행하고 나서도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는 듯(심지어 자신은 그 추행 사실을 기억하지도 못한) 평소대로 굴었던 사촌 여동생에게 얻어맞은 충격이 컸는지 그가 생각보다 쉽게 나가떨어졌다. 유영은 발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에 전율하며, 쓰러진 그의 배를 발 뒤꿈치로 콱 짓밟았다. 물컹거리는 감촉이 기분나빴지만, 상대가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는 최고였다.
사촌 형수가 제 남편을 지킨답시고 유영에게 손찌검을 시도했지만 어림도 없지. 이미 이성을 반쯤 날려버린 유영은 자신에게로 향하던 사촌 형수의 손을 낚아 채 그대로 바닥에 메다 꽂았다. 부부가 쌍으로 바닥에서 기는 모습을 내려다 보던 유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할머니 재산 달라고 안할테니까, 그깟 재산 가지고 아등바등 잘 살아라. 나는 여자라서 족보에도 안 올려준댔지? 잘 됐네, 이제부터 당신들 가족 안할거니까. 내 앞에 두 번 다시 그 잘난 면상 들이 밀면 그땐 당신들 다 죽어."
살벌한 협박을 내뱉은 유영이 다시 하르르, 웃었다. 웃고 나서, 의자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입고 제 가방까지 살뜰하게 챙겨서 바깥으로 나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쏟아지는 겨울의 찬 바람이 지금은 감사할 따름이었다. 직후 핸드폰으로 부모님과 친척들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손수 번호마다 차단을 했고, 그 날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녀의 핸드폰은 평안을 찾았다.
그렇게 집안에서 깽판을 친 다음날, 성윤을 만나기로 한 것을 차마 취소할 수 없어 카페로 나갔다. 졸업식 이야기를 하는데 도저히 사실대로 말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제 집안 친척들을 패고, 그대로 가출했다는 사실을, 설날 대회에서 장사를 차지하고 겨우 시간을 내서 자신을 만나러 와 준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평소처럼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그를 보게 될 것 같아 유영은 성윤의 얼굴을 눈에 많이 담아두려고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 진심으로 그가 네 번째 장사에 등극한 걸 축하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가 우승하는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었는데, 이 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다 해도 그는 계속 탄탄대로를 걸어 나가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갈 테지.
하지만 유영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의 뒷배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겨우 학교 졸업장 하나만 가진 채 맨몸으로 사회에 내던져졌다. 성윤이 빛날 수록 자신은 그 빛에 가려 더욱 어두워질 것 같은 강한 직감이 찾아들었다. 설령 지금 마주 앉은 이 순간,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다 한들 달라질 것이 있을까?

유영은 성윤에게 있어서 그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응원해 준 첫 번째 팬이자, 대학 후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 만족하며, 그가 계속 모래판에 서 있기를 바랐고 그런 그를 응원하는 팬으로 남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오면 모래판에서와는 딴판으로 편한 표정이 되는 그에게, 어설프게 마음을 털어놓아 이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십년 가까이 이어져 온 관계를 스스로 나서서 깨기엔, 그에게 받고 있는 듯한 친우로써의 기대와, 자신이 그에게 품어버린 연심이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성윤에게 선택받을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될 터였다. 누가 귀를 부여잡고 소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유영 따위는 금방 잊혀질, 그냥 어딘가에 앉아서 응원하는 흔한 팬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성윤을 차지할 테지.
과연 자신이 그 옆에서 둘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1호 팬이라고 놀리면서도 챙겨주는 일도, 같은 대학교 같은 과 후배라고 티나게 신경 써 주는 일도 한 때의 추억이 될 뿐, 유영 자신은 그가 만들어 준 소중한 추억만을 그러쥔 채 앞으로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삶을 살아 남아야만 하는데.
절대 짝사랑은 없다며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돌아선 성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이 세상 아련하고 씁쓸했을 것임을, 유영은 알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한 번은 말이라도 해 볼걸. 뒤돌아 서서 아무것도 모른 채 가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고 그 한마디라도 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는 길이 이리 길 줄 알았더라면.


월동제 때문에 황궁 정문이 개방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 들어간 덕분인지 기제원 마당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정전에서 있을 메인 스테이지(공연)을 보기 위해 다들 그 쪽으로 몰려간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여기 성윤이 혼자 덩그러니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유영은 마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백송 아래 벤치에, 검은색 철릭을 입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고 있는 사내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칠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게 없는 모양새를 하고선, 그가 다시 그녀의 눈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커피 캐리어가 왠지 더 무거워 진 듯한 느낌으로, 유영은 털썩-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제 옆에 방해꾼이 온 거라 생각한 성윤이 순간 짜증을 담은 표정으로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손을 뻗어 유영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한 것 같았다.
"오랜만이예요, 선배님."
연락도 끊고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칠 년 만에 자기 앞에 뻔뻔하게 나타난 후배를 보고도, 그는 유영이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날의 저녁,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3
일이 아무래도 너무 많았다.
부원장이랍시고 타이틀을 받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에 따른 책임과 업무가 현성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 서고 있었다. 원장인 성윤은 그예 비서를 따로 채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내비쳤다. 현성이 그를 업무의 늪에서 구제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이해는 한다'면서도 그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 의아함이 피어올랐지만, 그걸 해결할 실마리는 없었다. 월요일 정례 회의 때 원장 면전에서 코피가 팍 하고 터지고 나서야 성윤은 마지못해 제 직속 비서를 현성이 구해주는데 동의했다.
채용을 일임받았을 때 그는 그저 신나 있었다. 그리고 의외의 지원자가 나타났다. 기록관리학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크리스탄센 박사에게 사사한 마들렌 최 라는 여성이-한국 이름은 최유영이라고 했다-지원서를 낸 것이었다. 그런 유능한 재원이 어째서 비서직에 지원을 했는지, 스카이프를 통해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물었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겠는가. 아키비스트로서 외국에서 더욱 이름 날릴 기회가 있는 사람이 자진해서 고국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뒷배경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새로 일할 기관을 찾기 전이고, 박사로부터 숨도 돌릴 겸 해서 3개월 휴가를 받은 김에 대한제국 기제원에서 일해보고 싶었다고, 그녀는 꾸밈없는 말투로 말했다. 현성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비서 경력도 있는데다 기록관리학에 대해 빠삭한 그녀를 사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직원들의 의견도 수렴하여(물론 이름은 감추고) 그녀를 최종적으로 기제원장의 비서로 낙점했다.
때마침 월동제가 코앞이라, 인사도 할 겸 그 날 들어와 보라고 초청을 한 것이 아마도 화근이었던 것 같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보고 뭔가 '잘못' 일이 굴러가고 있음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영이 돌아가고 현성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성윤을 다른 직원들도 보고 말았다.

권성윤 원장이 실업팀 입단 후 단 1년 동안 쌓은 업적- 설날 2회, 추석 1회, 단오 1회 총 네 번의 장사를 차지하여 주목을 받는 뛰어난 씨름 선수였다면, 현성은 고등학생 때까지 제 체급에서 전관왕을 차지했던 나름대로 씨름계에서 유망한 선수였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씨름은 그만두었고, 훤칠한 외모 덕에 모델 일을 가끔 하기는 했지만 공부에 전념하여 황궁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씨름을 그만 둔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다른 무엇보다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이 더 컸다. 그는 자신의 일생이 흥미로운 것, 재미난 것을 좇는데 소모될 것임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이 있으면 그걸 온전히 제 것이 되도록 해야 했고, 그러는데 주어진 그의 선천적 재능은 얼마든지 현성을 스스로가 원하는 길로 이끌어 주었다. 씨름도 좋아해서 해 왔던 것이 좋은 기록이 쌓이자 재미를 더더욱 붙여 매진했던 것이긴 했지만, 졸업 이후 황궁에 취업한 지금은 취미 정도로 가볍게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뽑은 비서가 원장의 후배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현성은 새 비서를 돌려보내고 자신을 따로 불러 면전에서 으르렁대는 원장을 보고도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유독 성윤의 평온한-무감각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동요가 없는 얼굴에 금이 가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이 유독 즐거웠다. 이 황궁에서 현성을 노리고 있는 수많은 여직원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S(사디스트)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채용을 했다는 사람이......." 앞에 선 현성이 싱글생글 웃는 것을 보고 성윤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차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닥터 크리스탄센이 자필 추천서를 보내준 것을 제외하면 아무 특이점이 없었겠죠."
한학에 능통한 학자이자 저명한 아키비스트 크리스탄센 박사에게 자필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할 수 있는 한국인. 그 하나 만으로도 유영은 이 나라로 돌아온다면 어디 기관장 하나쯤은 꿰 찰 수 있는 인재였다. 그런 사람을 몰래 비서로 써먹으려고 했던 것이 오만한 판단이었을까? 현성이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맥을 짚고 있을 때, 성윤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과 손짓으로 부원장을 내보냈다. 바깥에서 원장이 보였던 무서운 표정을 목도한 막내 둘이 복도에서 부원장을 강아지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현성은 기가막힌 듯 피식 하고 웃어 보이고는 일부러 두 녀석의 목을 양 팔로 휘감아서 회의실로 끌고 들어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퇴근 안하냐?"
"그래도, 원장님이 저렇게 날 세우는건 오랜만에 본 거라서요. 아까 왔다 갔던 새 비서님 때문이예요?" 눈치 빠른 세진이 물었고 현성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그런 것 같네. 자기 학교 후배라더라."
"오?"
"뭔가 둘 사이에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만......본인한테 물어봐도 될지는 모르겠네. 보통 저런 반응이면 사연 있는 옛 연인 아니냐?"
"그건 그럴 법한 가설이네요.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진혁이 순진하게 말했고, 현성은 그에게 장난기 가득한 헤드락을 걸면서 둘을 달래 사택으로 들여보냈다. 월동제 마치고 피곤할 두 아이들이 무슨 생각에선지 버티고 있는게 놀랍기는 했다마는, 충분한 휴식을 직원들에게 보장해 주는 것도 부원장의 업무 중 하나였다.
원장이 생각을 정리하고 집에 갈 법한 타이밍을 골라 기제원 현관에서 납치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애초에 원장을 보조하는 것이 그의 업무 중 하나였으나, 괴롭히는 것도 그의 낙 중 하나였다). 바둥거리다 이내 술집 가는 것에 동의한 기제원장을 데리고 황궁 인근의 전집으로 들어서니 안면을 튼지 오래 된 여주인장이 막걸리와 모둠전을 금방 내어왔다. 양은잔에 막걸리를 콸콸 따라주며 이 원장이 제 진심을 털어놓길 내심 기대했다.
"내 후배야."
"묻지도 않았는데?" 막걸리 겨우 한 잔에 성윤이 대뜸 꺼낸 첫 마디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반문하고 말았다.
"고등학생 때 중학생 꼬맹이가 응원을 왔길래, 너도 알거야. 중고등학교 다닐 땐 가족 말고 팬이라곤 없는거. 그 때 와서는 씨름 잘 보고 있다고, 사진 같이 찍어달라고 하더라. 웃기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기억하고 있었지." 성윤의 평소 논리정연하고 단순한 말투에 비하면 말이 이미 끊어지고, 되돌아오고 있다는 점이 퍽이나 흥미로웠다. 현성의 눈이 누가 보아도 호기심에 반짝이고 있었다.
"오호. 그런 팬이 있었다니. 그게 유영 씨라고?"
"직관도 자주 오고. 그런 걔가 대학 신입생 환영식 때 와서 보니 우리 과 후배라고 인사하고 있더라고? 반가웠지. 나한테는 1호 팬이었으니까."
"그런 설명으로는 아까 그 표정이 전혀 해석이 안 돼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으면 그렇게......?"
"나, 오늘 걔 칠 년 만에 보는거다."
"그렇......뭐? 칠 년 만에?"
"칠 년 전에 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이제 와서," 성윤이 답답하다는 듯 막걸리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현성은 그의 잔에 술을 다시 꽉 채워주었다. 술기운에 꺼내는 제 옛날 이야기가 힘겨워 보였다. "이제 와서 나타나서는, 나한테 미안하단다. 돌아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고."
"뭐야. 좋아했었어요?"
그렇게 말해놓고는 아차 싶었다. 두 달 전, 성윤은 결혼까지 생각했던 여자친구가 부모의 반대를 이기지 못해 그가 출근한 사이 짐을 다 싸서 같이 살던 집(정확히는 성윤의 집)에서 도망나간 일이 있었다. 3년이나 만난 애인이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성윤은 그날 퇴근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도 현성에게 문자 한 줄(내일 집 정리하느라 못 간다고)만 보내고 애써 그 사실을 감추었다. 그걸 알게 된 것도 순전히 그가 왼손 검지에 늘 하던 단순한 은반지를 하고 있지 않아서 알아차린 것이었다.
애초에 3년이나 교제한 여자 이야기를 부원장인, 오래 함께 일해온 현성에게도 거의 말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다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술 한잔의 힘을 빌어 그녀의 이름을 꺼내고 나서는 일사천리였다. 칠 년 전 성윤과 유영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고, 그 이전에 쌓아왔던 인연 혹은 원망과 그리움이 한 줄기로 섞여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일찍 퇴근하긴 글렀네."
"퇴근하는 사람 낚아서 술 먹여놓고 뭔 소리야."
"내일 오후에 출근하게 일정 조정 해 줄테니까 하고싶은 말 다 해요. 들어줄테니까."
"그거 참 고맙네. 너 오늘 죽었어. 술로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고. 누님,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주세요."
성윤이 손을 들어 막걸리를 더 시키면서 눈을 번쩍였다. 현성은 속으로 이 양반의 주량을 헤아리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성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술로 현성을 이긴 적이 없었다. 술에 취해 속에 든 칠 년의 그리움을 다 토해내면 한동안은 놀려먹을 소스가 생길테니 그 점이 신났다. 그래도 이 남자, 결국 그 날 저녁 내내 유영이 칠 년 만에 자기 앞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만 하고는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소상히 털어놓지 않았다. 제 속에 꽁꽁 감추어 두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는 것 정도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그리움을 토해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그런 생각도 들었다. 사귀던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이상하게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 이미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들어 앉아 있던 유영 때문이라면, 앞으로의 일들이 꽤 볼만할 것 같았다.


역시 예상대로 성윤은 다음 날 숙취가 쩔었는지 오전엔 출근을 하지 못했다.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현성은 속으로 투덜거림을 삼킨 뒤, 다른 직원들이 디지털 녹취록을 컨버팅 하는 일에 이것저것 참견을 하다가 유영의 전화를 받았다. 직원들이 다들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 묻는, 문의의 탈을 쓴 안부전화였다.

"원장님은 안 물어봐요?"

"에스프레소에 설탕 하나." 막힘없이 나오는 성윤의 커피 취향이, 칠 년 전과 변함없던 것임을 현성은 알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유영이 하르르 웃었다. "아마 바뀌지 않았다면요. 그러고 보니, 원장님은 무사하세요?"

"그걸 왜 물어요?"

"어제 왠지 누구 붙잡고 술 마시다가 죽었을 것 같아서요, 아니, 쓰러지셨을 것 같아서요."

"와. 대학 후배라더니잘 아는구나. 맞아요, 어제 저한테 술 내기 지시는 바람에 오전에 출근 못하셨어요."

"역시 그랬군요." 유영과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현성이 소개를 위해 급하게 달려왔을 때, 성윤이 얼굴에 대놓고 드러낸 표정이 아직도 생각났다. 그런 심란하고 무서운 표정도 지어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럼 다음주 월요일 커피를 기대해도 되는 부분?"

"물론이죠. 혹시 더 부탁하고 싶은 거 없어요? 샌드위치라던가."

"신입 비서분께 그런 무리한 부탁 할 만큼 이 부원장은 곤궁하지 않습니다?" 현성이 장난기 있게 받아치자 유영이 다시 하르르, 웃었다. 특이하면서도 듣기 나쁘지 않은 웃음소리였다. "조심해서 와요. 원장님은 제가......특이사항이 있으면 알려드릴테니."

유영과 통화를 마치기 직전 수화기 넘어 여자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때마침 지나가던 진혁과 세진이 현성의 등에 덥썩 달라붙었다. 이 비글같은 궁무관들 같으니.

"무슨 일이야? 수장고엔 다녀 온거고?"

"네, 오늘 아침에 보존처리 완료한 화첩 넣고 오는 길이예요. 결재서류 올렸으니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방금 그거 누구예요? 부원장님이 통화하면서 그렇게 웃는거 처음 봐요."

"어?" 내가 웃고 있었던가? 누가 어떤 말을 하든 능구렁이처럼 잘 넘어가던 현성이 이 때 만큼은 흠칫,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다음주에 오는 비서가 커피 뭐 좋아하는지 물어봐서. 너네는 연유 넣은 라떼잖아."

"그건 맞는데, 말 돌리지 말구요! 비서 누나예요?"

"어. 내가 진짜 웃고 있었어?"

"부원장님은 웃는 상인데다가 장난기도 있어서 다들 넘어가는 부분이긴 한데, 방금 전에 그거 진짜 진심으로 웃은거였어요. 우린 분간할 수 있다구요?"

"농담하지 말고. 얼른 다음 기록물 보러 가!"

"그거 결재 해 주셔야죠."

진혁이 깐죽거리고는 세진을 끌고 작업실로 쑥 들어가버렸다. 현성은 기가 막혀서 복도에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누구와 통화하면서 웃었다고 '지적'받은 일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려나."

그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쭉 켜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몰고 올 파란이라던가,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흥미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니, 솔직히 뭔가 일이 생기길 내심 기대하게 되었다. 그 상대가 누구가 되었던, 유영은 사내놈들만 가득한 기제원에서 일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설령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해도.

'나야 뭐, 저 원장님이 끌려다니면 즐거울 일이지.'

이상하게 성윤이 괴로워하는 것(일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것을 꼭 보고싶은 직원들 중에는 현성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그였다.


#4
월요일 새벽, 비서로 업무를 시작한 유영이 보내준 한 주 스케쥴을 보고 성윤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마터면 피가 날 뻔 했다. 헝크러진 머리를 한 채 차에 시동을 걸고 기제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원장실 옆 비서실에서 뜻 모를 가락을 흥얼거리며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었다. 원장이 제 등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행동이었다.
"오셨어요?" 그리고 성윤의 손에 척, 하고 쥐어주는 에스프레소 잔. 설탕 하나가 그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칠 년 만에 만난 주제에, 이런 것은 기억하고 있다니. 성윤은 복잡한 머릿속 만큼이나 정리가 덜 된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월요일 정례회의는 그렇다고 치자. 너, 칠 년 만에 다시 나 만난거 자각하고는 있어? 그 이야기는 왜 안해? 그리고, 폐하랑 회의 잡아둔건 뭐야?"
나는 너한테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고 생각하는데. 성윤이 허리춤에 양 손을 올린 채 으르렁댔지만 유영은 입가에 살짝 미소만 올릴 뿐 제 할 일을 마무리 할 뿐이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애한테 소리를 지른다던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던가, 하다못해 옛날처럼 헤드락이라도 걸 수 있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확인해 봤더니 폐하께서 예전부터 요청을 하셨던 건인데, 부원장님께서 원장님 컨디션 고려해서 일부러 사양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이제 부원장님이 업무에 좀 더 집중하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 본업을 제대로 하셔야죠?"
"너.....!"
"신입 비서로서 당연한 일이니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성격 나빠졌어." 성윤이 투덜거리며 던진 말에 유영이 줄곧 웃고 있던 낯빛을 바꾸며 힘빠진 말투로 대답했다.
"칠 년 동안 외국에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 거리다 보면 바뀌게 돼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대체."
표정이 바뀐 유영을 보니 더 추궁하면 안되겠다 싶어 한 발 물러났더니, 그녀가 대번에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인쇄한 한 주 스케쥴과 오늘 오전 정례회의 안건을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원래 그녀에게 했던 과거의 태도대로라면 한 소리 덧붙여야 했으나, 어쨌건 그녀는 자신의 비서였고 자기는 기관장이었다. 할 일은 해야 하겠기에, 에스프레소를 원샷한 다음 성윤은 자기 집무실로 들어섰다. 금요일 퇴근 전에 해 두고 간 것과 크게 변화는 없었으나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다르죠? 환기 한 번만 해도 이렇게 바뀌는걸. 아, 방 안에 뭔가 찬 공기에 영향 받는 문서는 없는 거 확인하고 했어요."
"너무 본격적으로 그러지 말아줘......적응 안돼."
"적응 하셔야 해요, 저 여기 삼개월만 있을거거든요."
"그 이후로는?"
"아직 안정했지만, 애초에 삼개월만 일하기로 했잖아요? 그 이후론 제 마음이고."
"꼭 그 이후로 다시 사라질 것 같은 말이네."
"글쎄요?"
"뭐?" 유영의 아리송한 대답에 발끈한 성윤이 되물었다. 아침부터 계속 화만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유영이 그 때처럼 다시 사라진다고 하면 자신은 또 어떤 심정일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성윤이 눈으로 찬찬히 읽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비서로 일하는 기간 동안에는 연락 끊고 도망간다던가, 사라진다던가 하지 않을거니까 그건 불안해 하지 않아도 돼요."
"그걸 물어본게 아니라는거 알잖아."
유영이 대답 대신 하르르 웃었다. 그녀는 곤란한 질문을 받을 적이면 저렇게 웃고는 금방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가곤 했다. 대답을 기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대답이기도 했다.
"오늘 퇴근하고 두고보자, 어제까지는 기제원 소속 아니니까 그냥 뒀는데, 난 너한테 칠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전부 들어야겠어."
다시 웃기만 할 뿐 대답을 시원스레 해주지 않는 유영을 찜찜한 기분으로 내보낸 성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성의 방문을 받았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부원장인 그가 이전에는 성윤의 스케쥴을 조정했으므로, 월요일부터 황제를 만나게 한다는 이 정신나간 계획은 그와, 신입 비서인 유영-둘이 작당해서 꾸민 것이 분명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으흐흐' 하는, 평소의 현성이 몹시 신났을 때 하는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당연히 부아가 치밀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월요일 오전에, 황제를 마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그 남자라면 유영이 어느 학교 출신인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객관적인 자료를 이미 보고 받았을게 뻔했다. 어쩌면 성윤 자신보다 상세히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기록을 찾다 보면 유영이 성윤은 물론이고 지금 황제의 매제인 신은호 장사와 대회 우승 직후 찍은 사진도 찾았을 터였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무슨 관계냐고 캐묻겠지.
뻔히 예상되는 일에 골치가 아파진 성윤은 고개를 저으며 현성을 내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양반, 무슨 생각에선지 집무실 책상 앞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꿈쩍도 하질 않았다.
"회의 준비는?"
"방금 전 유영 씨랑 다 마치고 들어왔어요. 안건 검토는 다 하셨습니까?"
"하긴 했는데," 유영 씨, 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 성윤의 눈썹 한 쪽이 치켜 올라갔다. "너 너무 표정 좋은거 아니냐."
"좋을 수 밖에요? 비서님 오셔서 제 일이 줄어들었으니 당연하죠. 자, 시간 다 되어가니까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권성윤 원장님."
"이상한 소리 하지 마......너네 둘 다 오늘 왜 그러는거야."
"너네? 유영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둘 다 성격 나빠......이따 폐하 오시게 생겼다고. 거기서 또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짐작도 안가."
"오, 폐하를 뵈면 내년 분기 예산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너, 월동제 때 폐하가 무대 올라가서 노래 한 곡조 뽑으신거 보고도 그 소리가 순순히 나오냐."
성윤은 불참해서 실제로 볼 수는 없었지만, 월동제 메인 스테이지가 진행되던 중 흥이 오른 황제가 마이크를 들고 올라가서 트로트 몇 곡을 불렀다는 사실이 이미 각 언론사 메인 기사를 장식한 직후였다(사진도 커다랗게). 황제의 권위를 드높여야 하는 승정원과 비서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겠으나(그 와중에 자기가 비서실장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탈하고 서민적인 황제의 모습이었다며 언론이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보면 또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생각하는 방식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한데 그 결과값이 상상 이상인 사람이 과거 그의 직속 상사이자, 지금도 어쨌건 상사인 현 대한제국 황제였다.

월요일 오전 정례회의의 내용은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이번 주에 보존처리 할 문서를 확인하고, 새롭게 입수한 정보의 분류를 정하는 등 일상적인 내용이 전부였다. 디지털 자료의 경우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매체로 옮기거나, 사진의 경우 경계가 흐려지지 않도록 약품을 뿌려 색을 단단히 잡아두는 작업에 대한 확인과 승인이, 그리고 장서고의 온습도 기록 등 일주일 간의 진행 업무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보고받는 점검이 이어졌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 갈 무렵, 현성이 비서실에 남아 있던 유영을 잠시 불러 인사할 시간을 주었다.
"앞으로 삼 개월 간 원장님의 업무를 보좌하게 될 최유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서로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나서, 유영은 회의를 마무리하고 회의실을 나서는 원장을 잡아서는 원장실로 거의 끌다시피 데려갔다. 그 모습을 본 현성과 다른 직원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관람을 하는 것을 보고 성윤은 자기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웃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고민했다.
그를 원장실에 집어넣은 유영은 곧장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성윤이 손을 넣어 막아버리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오실 예정입니다. 원장실에서 계시면 되어요?" 그리곤 생글생글. 성윤은 과거의 유영이 이런 캐릭터였던가? 하마터면 착각할 뻔 했다.
"성격만 나빠진게 아니라 무서워져서 돌아왔잖아, 너!"
"선배랑 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봐 주세요. 부원장님이 험하게 다뤄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신 것도 있고."
"걔가 그랬어......?" 이 녀석을 그냥, 콱. 성윤은 속으로 욕을 집어 삼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보다, 나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럼 칠 년 전 사라졌던 이유가 그거였나? 성윤은 더 물을 말이 있었지만 멍한 틈을 타 유영이 원장실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곧장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황제가 기제원까지 납신다면 도망을 생각하는 것은 무용이었다. 그냥 얌전히, 질문을 듣고, 적당히 대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차피 기제원이 하는 일에 대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제원 정례회의가 끝났다는걸 따로 승정원에 보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영이 문을 닫고 나가자 마자 황제가 원장실 창문을 열고 훌쩍 나타났다.
기제원의 원장실은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력을 이런 데 써먹는걸 보면 선제가 통탄할 것이라며 한 소리 하기도 했지만, 그예 신경쓰지 않는 황제는 어디 놀러갔다 왔는지 화려한 클럽 룩을 하고 있었다. 풀어헤친 와이셔츠를 보면 아마 어떤 도도한 미녀든 품에 안길 것 같았지만, 이 인간의 본질에 뭐가 자리잡고 있는지 어렴풋 알고 있는 성윤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화내는 것은 잠시 밀어두고 그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권했다.
"아드님이 그러고 다니시는 것, 아십니까?"
"오자마자 차 주길래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다. 우리 아들은 당연히......알지, 지 아빠가 늘그막에 신분 속이고 클럽 놀러 다니는거. 모르기 어려울걸? 아침 문안인사 받아본지가 몇 년 되었으니까."
"제발 걸려서 기사 나오지 말아라. 제발."
성윤의 대놓고 들으라는 혼잣말에 황제는 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웃었다. 그의 비서 노릇은 세상에서 가장 피곤하고 힘든 일이 틀림없었다. 비서실장 못하겠다고 황제 면전에서 일정표를 집어던진 적이 있는 그였다.
"이제 비서실장도 아니면서 무얼 새삼스레 그리 걱정을 하시나? 오호, 기제원장님이 이 황제의 안위를 걱정해 준다니 참으로 고맙구려?"
"일국의 황제께서 한밤중에 경호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홀로 클럽에 납셨단 기사가 나면 무슨 이야기가 들릴 지 아시지 않습니까."
"뭐, 날라리 황제라고 한 줄 정도 나겠지. 다른 나라 황족도 망나니는 많잖아."
"본인이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은 아직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신지요?"
"와우, 오늘따라 언변이 날카로운걸." 황제가 두 눈을 반짝였다. 술을 마신 것이 분명한데도 눈 만큼은 어릴 때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던 그 청명함이 담겨 있었으니 기이한 노릇이었다.
"오늘은 회의하러 온거 아니다. 일정 안 잡으면 대비마마께서 진노하실거라서. 기제원장 만난다고 하면 성은 안내시더라고."
"그래서 새벽까지 클럽 가셨다가 오신겁니까......"
어머니를 피해 도망다니는 아들이, 그것도 대한제국의 황제라니 통탄할 일이 분명했으나 그나마 지금이 그의 몇 안되는 휴식시간이라는걸 알고 있는 성윤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의 빈 찻잔에 차를 더 따라 주었다. 물론 클럽에 간 건 순전히 이 사람의 의지였지만,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일 그를 너무 몰아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푹 쉬다 가십시오. 눈 붙이셔도 되고. 이제 폐하도 삼십대 후반인 건 자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바와 다르게 기제원장의 신입 비서에 대해 캐묻지 않아서 한숨 돌린 그였다. 황제는 그의 속은 생각도 안하고 피로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기제원장의 노고를 내 치하하노라. 잠깐 자고 갈게......" 그렇게 말하며 황제가 소파에 웅크렸고, 눈을 감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도로롱-가볍게 코 고는 소리가 서류로 시선을 돌린 성윤의 귓가에 들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곤 담요를 찾아 웅크린 남자에게 덮어주었다.

'Writings > Di 245(BE, A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3  (0) 2020.03.06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묶음 2  (0) 2020.03.06
아카이브 이펙트, 3  (0) 2020.02.20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2  (0) 2020.02.19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1  (0) 2020.02.19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