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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1

alicekim245 2020. 2. 19. 09:10

"설날장사 축하드려요!"
그 때 알아 차렸어야 했다. 환하게 웃는 네 마음 한 구석엔 이미 그 날의 계획이 다 세워져 있던 것일까.
"그래, 고마워. 너 졸업식이 언제였지? 2월 14일?"
"네, 대강당에서 한대요."
"졸업식에는 꼭 찾아가야겠는걸. 꽃다발 받고싶은거 있어?" 2월 14일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발렌타인 데이였다. 화사한 꽃을 껴안고 웃고 있는 그녀가 보고 싶어 물어보았다. 의외로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은방울꽃이요."
나중에 찾아본 그 꽃의 꽃말은 '다시 찾은 행복'이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그 꽃을 받고싶다고 말했던 것일까. 졸업식 날 다시 물어보자, 생각하는 바람에 그걸 물어볼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좋아! 이 바쁜 선배가 관대한 마음으로 특별히 참석해 주도록 하지!"
하르르 웃기만 할 뿐 네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아차렸다면, 너를 붙잡고 사라지지 말아달라 애원이라도 했을 것을.

또 그 꿈이었다.
아끼던 후배가 제 졸업식 날부터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기 일주일 전, 잠깐 까페에서 만났던 일의 회상. 어쩌면 그녀의 졸업식 날 꽃다발을 주면서 제 마음을 털어놓을 것이라 결심했을 날.

성윤은 새벽 다섯시를 알리는 요란한 알림에 눈을 떴다. 좀처럼 웅크리고 자는 일이 없던 그의 베갯잇이 축축했다. 꿈에서 오열하다 깨어나면 으레 베개가 눈물로 적셔져 있었다. 살짝 깨어난 상태에서도 그걸 느낄 수가 있었다.
목에 모래가 잔뜩 달라붙은 것처럼 까끌거렸다. 실업팀 입단 1년 만에 세 번째 십자인대 파열로 그토록 사랑하던 모래판에서 내려와 놓고도 여전히 모래, 모래를 제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분리하지 못했다.

눈부신 스마트폰 화면은 오늘이 월동제(황궁에서 매해 12월 마다 개최하는 민간 초대 행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 처리해 주어야 할 일까지 전날 미리 봐 주느라 야근을 하고 들어와선지 두 눈이 때꾼했지만, 평소처럼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올해는 기제원에서 철릭을 입기로 하여, 여러 색상 중 그나마 눈에 띄지 않을 검은색을 택한 덕분에 커다랗고 긴 검은색이 그의 옷걸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름과 꽃이 옅게 드리워진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철릭은 언뜻 보면 저승사자 같기도 했지만, 성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기제원에 들어서자 일찌감치 와 있던 막내 직원 둘이 각각 적색과 청색의 철릭을 입고 로비에서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분류하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원래 이 시간에 출근하던 성윤으로서는 그 반응이 오히려 더 낯설었다.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곧장 원장실로 올라갔다.

역사상 최연소 기제원장. 황궁 기록원이 별도로 있기는 하였으나 기제원은 황족들에게 계승되어 온 '신력'에 관련된 자료를 따로 다루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황족들이 신력으로 저지른 일들이 외부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면 제국의 권위나 입장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각별히 신뢰하는 인물이 대대로 기제원장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관리학 석박사를 마치고 바로 황제의 비서실장으로 황실에 입성했던 성윤의 기제원 행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였고, 또한 그렇게 되었다. 전직 씨름선수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케 하는데 한 몫 하였으나, 이미 취임한지 3년차인 지금은 그걸 기억하는 이들이 드물었다. 오히려 황제의 여동생, 장공주의 남편이 현직 장사라는 것이 더 화제였다.

급하게 처리해 줄 업무가 있는지 내부 결재망을 체크했으나, 오늘은 다같이 놀기로 작정한 것인지 단 한 건의 문서도 올라오지 않았다. 성윤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원장실을 나섰다. 직원들이 저리 들떠 있는데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도 썩 좋은 리더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현재도 사람들이 황실에 가지는 환상은 여전히 유효했다. 특히 아시아에서 중립국이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제국은 그 제국의 수장인 황제가 '신력'이라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주목을 받곤 했다. 손에서 불을 일으키고, 때로는 미래를 보기도 하는 황족의 힘은 타국에서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자국에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수십년 전 입헌군주정을 선포하여 정치적인 실권은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황실에 가지는 이미지는 긍정적이었다.

하여 그런 긍정적인 이미지를 살리고, 제국의 전통을 널리 알리겠다는 명목 하에 현재의 황제가 생각해 낸 것이 '황궁 개방 행사'였다. 정확히는, 한정된 수의 민간인을 초청하여 황궁을 열어주는 것이었고 계절마다 한 번씩 그런 축제를 통해 직원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성윤의 견해였다. 게다가 부서마다 다른 옷을 입고 바깥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라니, 대부분의 업무가 베일에 싸여 있는(물론 기록보존에 대한 것은 공개되어 있었지만, 그 컨텐츠가 거의 극비인) 기제원-그리고 그 원장의 입장에선 골치아프고 귀찮은 일이나 다름아니었다.

올해 여름엔 입사 1년차인 신입 궁무관 둘이 하필이면-신문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바람에, 기제원 마당을 기웃거리는 사람들-특히 여성들의 비중이 몹시 높았다. 준비한 황실 기념품이 금방 동나 몇 차례 창고를 다녀오기를 반복했으나 그 둘(진혁과 세진)은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서로 덕담과 선물을 주고받는데 여념이 없었다.

"저게 젊음인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광경. 성윤보다 네 살 어린 부원장 현성이 옆으로 쓰윽 다가와 한 소리 거들었다.
"젊음이죠. 원장님이 저랬어봐,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제발 상상하지 말아줘."
기제원 마당 한 구석의 백송 근처 벤치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감상하고 있자니 저절로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행사가 적당히 진행되고 나자 모두에게 숨 돌릴 시간이 주어졌다. 다들 메인 스테이지라 할 수 있는 정무관에 공연을 보러 간 것이었다. 무려 5년이나 봐 왔던 것이라 성윤은 현성을 시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정무관에 다녀오라고 했다. 아침에 꿈까지 그리하여 도저히 즐겁게, 그 뻔한 공연이라도 봐 줄 자신이 없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성윤이 왠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드문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기제원 마당으로 한 사람이 사뿐하게 걸어 들어왔다. 행사가 끝나가는 마당에 기제원에 찾아왔으니 황궁 직원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성윤은, 묘령의 인물이 자박자박 제 가까이 걸어오는데도 불구하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마당이나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걸음이 점차로 가까워지자 저절로 고개를 그 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
성윤은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오늘 꿈에서 보았다며 오열했던 그 얼굴이 자기 눈 앞에 있는데, 손을 뻗어 얼른 현실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온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겨우 입술을 움직여 이름을 불렀다. 칠 년 전, 그녀가 사라진 이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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