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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3 본문
“오랜만이예요, 선배님.”
처음 말문을 연 것은 유영 쪽이었다. 그리고 칠 년 전, 그가 기억하던 마지막 얼굴처럼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윤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체감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유영의 손목을 휙 낚아챘다. 화를 내야 하는데,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소리라도 질러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겨 품 안에 가두었다.
“유영아.”
“네.”
“지금 널 놔주면, 그 날처럼 또 사라질거니?”
“아뇨, 이제는 달아날 이유가 없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어쩐지 과거보다 차가워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성윤은 품 안에 안겨있는 유영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기로 하고 살짝 풀어주었다. 그녀가 성윤의 눈을 잠시 올려보았다. 그 마지막 날 이후로 일부러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체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윤이 기제원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약간은 놀랐지만, 그 날 그 얼굴은 칠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 듯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련한 눈망울을 제외하고. 성윤이 자신을 이런 눈으로 본 적이 있었던가? 유영은 집에서 막 뛰쳐나온 날 오열하던 자신을 떠올리다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그동안 어디서 지내다 이제 나타난거야?”
“미국에서. 기회가 닿아서 기록관리학 공부를 계속 했어요. 한국에 온 건 몇 주 안됐고.”
“왜 연락 안했어? 적어도 나한테는 할 수 있었잖아. 내가 얼마나—”
얼마나 너를 찾았었는데. 성윤이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유영이 그의 말끝을 가로챘다.
“선배님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은 되고 싶었으니까.”
갑작스런 유영의 발언에 성윤이 당황해 다음 말을 고르지 못하던 찰나, 타이밍 좋게도 정무관에서 공연 관람을 마친 현성이 기제원 마당에 들어섰다. 그는 성윤 옆에 있는 묘령의 여인이 누군지 대번에 알아채고는, 다른 직원들을 두고 황급히 그 둘에게 뛰어왔다.
“소개가 늦었네. 원장님, 여기 이 분은 최유영, 다음주부터 원장님의 비서로 출근할 예정입니다.”
“뭐—?”
성윤이 대놓고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자, 뒤따르던 다른 직원들이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슬금슬금 기제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늘 차갑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견지하던 원장이 좀처럼 보이지 않던 태도였기에, 현성은 대체 무슨 일인가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고, 졸지에 이 사태의 중심에 서 버린 유영도 곤란한 미소를 지은 채, 현성이 뭔가 말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지난번에 비서 채용하라고 말해줘서 계속 채용절차 진행중이었는데? 어제 최종 통보했고, 때마침 월동제라 인사 오시라고 말씀드렸고.” 현성은 유영과 성윤이 아는 사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력서에는 최종 학력만 적어두었고 면접에서도 한국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이야기 할 일이 없던 것이다.
“그래서, 최종을 정해 놓고도 나한테 보고를 안 했다고?”
“서프라이즈로 남겨두려고 했는데. 왜? 문제 있어?”
“부원장님, 실은—” 아직까지는 잠자코 듣고 있던 성윤이 폭발할 조짐을 살살 보이고 있었기에 유영이 중간에 끼어들고 말았다. “권성윤 원장님이 제 학교 선배님이세요.”
“아. 아—? 네? 뭐라구요?”
그제야 성윤이 왜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거의 노려보고 있었는지 알아챈 현성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비서 채용 치고는 뛰어난 재원을 선발했다고 신나서 원장이 만족할 거라고 생각만 했지 설마 이 둘이 대학 선후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사연이 있어 보였다. 현성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색하게 ‘하하’ 웃어 보인 뒤 잽싸게 도망쳤다. 성윤이 벌떡 일어나 태클을 걸려고 했지만 다년간 운동을 꾸준히 해 온 현성의 속도를 뒤쫓지는 못했다.
“선배님도 이제 운동신경이 예전같지 않네요.”
“그래. 십자인대가 세 번이나 파열됐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성윤이 비꼬듯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은퇴했군요. 차마 당사자 앞에서는 할 말이 아니다 싶어 유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실업팀 데뷔 후 입단 첫 해에 네 번이나 장사를 차지한 그에게는(설날장사는 무려 두 번) 성공가도가 열려 있었지만, 고등학생 때 부터 이어져 온 고질적인 부상이 그의 선수인생을 좀먹고 있었다. 유영이 사라지고 나서, 성윤은 세 번째로 십자인대가 파열되자 재활 대신 은퇴를 결정했다.
평생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모래판을 떠나야 했던 그 심정을 헤아리기엔 유영은,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어스름이 짙게 내리 깔리고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 성윤은 한기가 찾아드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 유영이 그의 옆에 같이 앉아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 다음주에 올게요.”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성윤의 입에서 먼저, ‘저녁 같이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터였지만 유영은 어째서인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춥기도 했고, 성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든 탓도 있었다. 가정을 이루었다면—왼손 약지에 반지는 없었지만—속히 집에 들여 보내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테지. 유영이 그렇게 말하자 성윤은 애써 서운한 감정을 감추며,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선뜻 잡아준, 여전히 작고 차가운 손이 반갑기까지 했다.
“정문까지는 데려다 줄게.”
“아, 고맙습니다. 조금 어두워서 잘 안보였거든요.”
성윤이 기억하는 것 처럼, 여전히 유영은 어두운 곳에 익숙지 않아 했다. 정문으로 함께 걸음을 옮기는 동안은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만 두 사람의 사이를 가득 채웠고, 이윽고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가 보이자 유영이 성윤의 손을 놓고는 먼저 앞서 걸어가려고 했다. 결국 성윤은 다시 한 번 유영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서 지내는지 물어봐도 돼?”
“황궁 근처의 레지던스요. 주소 알려드릴까요?”
“아니. 내가 그거 알아서 뭣하게. 지내는 곳이 있다면 안심이긴 한데—부모님은? 알고 계셔?”
“아.” 부모님, 이란 단어가 나오자 유영이 그의 손을 놓고는 하르르 웃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성윤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기 직전, 유영이 웃음을 그치고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한 채 대답해 주었다. “졸업식 직전에 제가 연 끊었어요. 어디에 사시는지, 살아계시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
졸업식 직전. 그리고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부모와 의절할 만큼 큰 일이 있었고,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어야 했을 만큼 속으로 혼자 앓았는데, 그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자 비참함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그 감정이 얼굴로 다 드러났는지, 유영이 팔을 뻗어 성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이 지금은 따뜻했다.
“선배님이 날 기억해 주길 바라고 호기롭게 저지른 짓은 아니예요. 지금도, 말 하기 어려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왜 그렇게 도망쳤는지 다 말씀드릴게요.”
“나는, 그런 이야길 할 상대도 아니었던거야?”
“아뇨. 오히려, 선배였기 때문에 연락할 수가 없던 거예요. 내가 사라져도 아무 일 없을거라고 그 때는 생각했었으니까. 참 바보같죠. 그 때 도망가지 말고, 선배한테 달려와서, 한 마디 했어야 했는데.”
“뭐라고?”
“저는 항상 선배의 1호 팬이었고, 같은 학교까지 쫓아온 후배였죠?”
“…….”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저, 선배님 좋아했어요.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고 싶었는데, 어차피 선배 곁에 있을 사람은 내가 아닐 테니까, 포기하려고.”
유영이 쏟아내는 말을 감당하지 못했던 성윤이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지금, 내가, 이 애한테 무슨 말을 들은거지? 나를 좋아했다고? 오, 세상에. 맙소사.
“너, 집 주소랑 전화번호 나한테 찍어주고 가. 그만 말해.”
“왜요, 찾아오려구요?”
“그건 내 마음이야. 칠 년 동안 사람 고생시켰으니까 내 마음대로 할거야.”
“예, 드릴—잠깐만, 뭐라구요? 칠 년 동안?” 성윤이 내민 휴대전화에 순순히 제 연락처를 찍어주던 유영은 하마터면 그걸 바닥에 떨어트릴뻔 했다. 칠 년 동안, 누가 누굴 고생시켰다고?
“됐고, 집에 얌전히 들어가라. 후배님.” 갑작스런 그의 태도 변화에, 유영이 오히려 이번에는 말문이 막혔다. “칠 년 동안 너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나중에 은호 전지훈련 복귀하고 들어오면 물어봐. 설마 은호가 장공주랑 결혼했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겠지. 집에 들어가면 잘 들어갔다고 보고 해. 옛날에 그랬던 것 처럼.”
“지금 내 나이가 몇인줄 기억은 해요?”
“알아. 나 보다 네 살 어리니까 이제 서른 하나. 애기네, 애기.”
사실 계속 유영을 붙잡아 두었다가는 자신이 칠 년 동안 무슨 짓을 해서 유영을 찾으려고 애썼는지 구구절절, 그리고 그 비오는 졸업식 날 어떤 감정이었는지 다 털어놓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윤은 어째선지 떠나지 않으려는 유영의 등을 떠밀어 퇴궁시킨 뒤, 제 손으로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기제원으로 돌아왔다.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집에 잘 들어갔다며 유영이 문자를 한 통 보내주었다. 칠 년 전과 완전히 다른 번호였다. 이 번호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귀찮게 하고도 손에 넣지 못했는지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다음 주에 그녀가 기제원에 출근하면 꼭 칠 년어치 원망을 담아 괴롭힐 것이다. 성윤은 그리 굳게 다짐하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문간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부원장 현성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음주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야근은 오늘이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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