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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한밤 중, 여러 이야기들

alicekim245 2020. 2. 9. 01:12

#. 어느 황녀님의 이야기

Music with. Rewrite the Star, Zac Efron & Zendaya(The Greatest Showman OST)

손에 닿으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신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황제의 딸로 태어난 이상 내가 적어도 이 나라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처음 마주친 순간,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확신이 내게는 있었다. 얼결에 황녀를 만난 그 사람은 처음부터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황궁으로 끌고 가 오빠에게 결혼하겠다고 선포했을 때 제 친구에게 끌려 나가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나는 그를 끌고 가기만 했고, 한 번도 그의 생각을 묻지 않았다. 조급한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손에 넣는 것에만 집중할 뿐 그 과정에 마음을 헤아려 주지도,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냥 억지로 내 곁에 붙잡아 두면,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어리석게도.

그러니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따금 내비쳤던 따뜻한 감정들은 아마도 나를 향한 동정과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내게 남은 것들은 온갖 비참함으로 뒤덮였을 것이므로.

칼부림이 나기 직전 나는 그제야 나를 멈춰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어떠한 광기가 내 속에서 솟아나 사랑하는 그 사람을 갈기리 찢어놓기 전에 멈추고 싶었다. 나의 이런 마음을, 나는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감정을 그는 알까. 알려고는 했을까. 열렬하게 사랑하던 이 마음을 스스로 그쳐야만 하는 내 심정을 알아채기는 했을까. 뒤돌아서 가는 걸음이 한없이 가벼워 보였고, 단 한 번도 멈추어 서지 않았음을 상기하면 나는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었다.

평생에 단 한번 사랑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부모나 형제보다는 당신이 그 사람이기를 바랐는데. 당신이었으면 좋았을걸. 우리가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사랑을 키워가고, 평범하게 결혼해 평범하게 살아갈 운명이었다면 어땠을까. 전지훈련을 떠나는 당신을 다정하게 배웅해 주고, 시합에 나가서 이기는 당신을 보고 환호하고 울어주고, 집에 돌아오는 당신을 두 팔 벌려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런 관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녀왔어, 다정하게 말해주며 내 뺨에 입을 맞춰주는 당신과, 우릴 닮은 착한 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꿈만 내게 남았다.

안녕. 내가 사랑했던 사람아. 앞으로도 사랑할 사람아. 그리고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을 나의 사랑아.

 

#. 기제원장의 갈등

Music with. Never Enough, Loren Allred(The Greatest Showman OST)

그 여자가 갑자기 내 일상에 뛰어 든 이후로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특히 직원들과 작당해서 기제원 뒷마당의 커다란 백송에 그네를 걸어두었을 때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나무를 잘라버릴까, 그 생각도 했었다. 다행이도 그 파멸적인 계획은, 그네를 보고 황제가 흡족해하는 바람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폐기해야만 했다.

늘 마시던 에스프레소가 그 여자의 취향대로 아메리카노로 바뀌었다. 이 까만 물이 뭐가 맛있냐고 타박하던 과거의 내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태연하게 아메리카노를 찾았을 때, 카페 주인장의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기제원에 들어왔을 때 로비 바닥에 누워 있던 현성을 밟아버리곤 자기가 소리를 질러 직원들이 다 뛰쳐나오게 했던 그 강렬했던 대면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순간이었다.

같이 씨름 경기를 관람하러 갔을 때, 돌고래를 연상케 하는 환호성과 응원 덕분에 다들 신이 나서 난리를 쳤을 때는 나도 실은, 꽤 즐거웠다. 그 전까지는 모래판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 일부러라도 자리를 피했을 터였지만, 권유 받길 잘 했다고 내심 생각했다. 부상으로 인해 그토록 사랑하던 씨름을 그만 두어야 했을 때 느꼈던 절망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진 그녀를 내 집에서 지내도록 두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놓고 행복하게 웃었던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을 잠시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 사람이 여기 계속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놀란 사람을 진정시켜 준답시고 놀이공원을 갔었고, 야근을 마치고 들어오니 그녀가 발이 뜨거워 잠이 안온다며 베란다에 맨발로 서 있기에 타박을 했었고, 막 집에 들인 다음 날 내가 쓰던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는 바람에 남자화장품 향을 잔뜩 풍기며 돌아다니기에 아카시아향이 나는 것을 사다 주었다. 그 이후로 바디로션도 똑같은 브랜드의 같은 향으로 구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해 놀려주고 싶어 일부러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더니 실망하던 것이 아주 일품이었다. 평소의 나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놀리는 성격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그 때부터 이미 내 안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퇴근 후 그녀가 내 집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부터 그랬던 것 처럼, 내 집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편안함이 익숙해질까 두려워, 서둘러 마지막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쪽에서 먼저 도망치던가. 전여친이 찾아와 손찌검을 할 뻔한 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은 것을 보고 강심장이다, 라고만 생각했지 다른 뜻은 없을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지막 회식을 마치면 이제 정말 남이 된 것 처럼-예전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얌전히 보내줄 생각이었다. 전 여자친구가 내 집에 들어와 이 여자는 뭐냐며 난리를 쳤을 때 진작 내보내기만 했어도, 은방울꽃으로 만든 작별의 꽃다발을 받아 들고 자기 일상으로 얌전히 돌아가기만 했어도, 그 전날 밤 거실에 나와 자기 속에 든 이야기를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늘 그러했듯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윈 신경쓰지 않고 기제원의 원장으로 돌아가 전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나는 지금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보고싶었다.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다시 한 번 보고싶었다. 만약 내게 기회가 있다면, 가능하다면, 옆에 붙잡아 두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보고싶어. 미칠듯이 보고싶어. 떠난 다음 알아차린 이 바보같은 아저씨를 위해서 한 번이라도 내 앞에 다시 나타나 준다면, 어설프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 주었던 그 날 밤으로 시간을 돌려서라도 너를 붙잡을텐데.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부디, 한 번만 내 인생에 다시 한 번 나타나 다오. 그리 해 준다면 나는 네게 훨훨 날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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