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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아카이브 이펙트, 습작 2 본문
칠 년 전, 유영은 졸업식을 앞두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언과,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는 나무람이 번갈아 그녀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졸업하기 전까지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으니까. 어쩌면 그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집안은 평화로운 채 유지되고 있었을 터였다.
구정 직후, 할머니의 기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유영이 설날 장사를 차지한 학교 선배 성윤을 만나고 들어오니 집에 친척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큰댁에서는 몸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일찌감치 제사를 막내동생인 유영의 아버지에게 넘긴 터였다.
어린 유영을 성추행한 사촌 오빠가 번듯한 제약회사 연구원이 되고, 결혼을 하고, 딸까지 얻고 나선, 할머니의 재산을 자기가 일부 물려받아야겠다고 식사 후 술을 마시며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폭발했다. 너는 고등학생 때 초등학생이던 사촌 추행해 놓고도 그런 뻔뻔한 말이 나오냐고 쏘아붙였다.
유영의 갑작스런 고백에 부모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사촌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며 개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고, 유영은 친척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부모에게 반강제로 끌려 가장 작은 골방으로 들어갔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잘못했다고 비는 척이라도 했었겠지만, 유영은 부모의 쏟아지는 질타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들어가 어느샌가 티비를 보며 왁자지껄 웃고 있던 사촌오빠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 갈긴 뒤, 쓰러진 그의 허리를 숨을 쉬지 못하도록 세게 짓밟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토록 무참하게 난도질 해 놓고,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사는 꼴이 기분나빴다.
갑작스런 행동에 거실에 모여 있던 친척들 그 누구도 유영을 말리지 못했지만, 그 옆에 있던 사촌형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영에게 대들었다.
"왜 옛날 일 가지고 우리 남편한테 그래요!"
그 순간 유영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래, 옛날 일이겠지. 그런데 유영에게는 옛날 일이 아니었다. 꿈에 나오고,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 그 때의 기억. 그녀가 절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옛날 일로 치부하는 것에 화가 났다.
"이놈이 잘 먹고 잘 사는 꼴 보자고 여태까지 버틴거 아니거든?"
유영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형수가 반사적으로 유영의 뺨을 치려 손을 올렸지만 그녀가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평생 공부만 하는 얌전한 샌님인 줄 알았던 유영이 제 부인의 목을 휙 낚아 채 바닥으로 내던지자, 갑작스런 일격에 당황해 바닥에 덜덜 떨며 웅크리고 있던 사촌오빠가 황급히 안방으로 내달려 문을 잠갔다.
철컥-
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오열했다.
"난장판이네. 안그래요? 아, 진작에 이럴걸!"
유영이 부모와, 경악에 가득 차 자신을 보는 친척들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할머니 재산은 손 안댈 테니까 알아서 잘 먹고 잘 사세요. 그깟 얼마 안되는 재산 가지고 아둥바둥 재밌게 싸워들 보시던가. 나는 여자라서 족보에 안 올린댔지? 그래, 어차피 가족도 아닌데 뭐. 내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찾지도 말고."
유영이 소파에 걸쳐두었던 하늘색 코트를 입으며 아직도 오열 중인 사촌 형수한테 말했다.
"지금 나한테 더 쳐맞기 싫어서 자기만 안방으로 도망간게 네 남편이다? 잘 먹고 잘 살아보려고 해 봐, 성추행범이랑."
그리고 다시 하르르. 유영은 망설임없이 자기 가방까지 살뜰하게 챙겨서 본가를 나섰다. 달아오른 얼굴에 쏟아진 찬 바람이 너무나도 시원했다. 휴대전화를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내던졌다. 액정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 졸업식에 와 주마, 자신있게 말했던 성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그 사람한테 달려간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방해가 되겠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보다 당신은 훨씬 반듯했고, 빛날 가치가 있었다.
내가 없어지고 나서도 당신의 하루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새벽부터 훈련을 하고, 경기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도 밝고 곧은 길을 걸어 나갈테지.
하지만 갓 대학을 졸업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뛰쳐나온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지금 당신에게 달려간다 한들, 바뀌는게 있을까?
결국 선택받는 사람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며 찬사를 받으며, 집안에서 사랑받은 태가 나는 고운 아가씨가 되겠지. 과연 내가 그 옆에서 진심으로 축하는 해 줄 수 있을까. 1호 팬이라고 놀리면서도 챙겨주는 것도, 학교 후배라고 티나게 신경써 주는 것도 한 때의 '추억'이 될 뿐, 나는 그 추억만을 그러쥔 채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남아야 하는데.
절대 짝사랑은 하지 않겠다며 굳게 마음을 먹었어도 그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중학생 때, 팬이라며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있는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에 갔었더라면.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한 번은 해 볼 걸.
유영은 그날 밤 모텔 한 구석에 웅크려 앉아 실컷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끝내 마르지 않아 새벽 해가 떠올랐을 때에도 여전히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나치기를. 그래야 내 마음이 덜 아파질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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