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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마법사 공무원 (8) 본문
8.
신제윤은 지금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권차현의 보호자 자격으로 퇴원 수속을 밟고, 한 주간의 휴식 기간동안 그녀를 돌보기 위해–병실 문을 열었을 때,
권차현은 링거를 제멋대로 뺀 채 병실 침대 위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도중이었다.
“권차현.”
이번 만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제윤이, 병실 문을 쾅 닫으며 차현을 불렀다. 차현은 하마터면 그의 목소리에 균형을 잃을 뻔 했지만, 목표로 하던 동작은 완벽하게 마쳤다. 어쩐지 개운하다는 표정의 차현을 보고 제윤은 한동안 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아, 본부장님! 손에 든 그 서류들은 다 뭔가요?” 차현이 오히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퇴원 관련 안내 문서. 집에서 충분히 휴식해야 한다더군.”
“잘 됐네요. 며칠 집을 비웠으니 청소를 제대로 해 둬야–.”
“며칠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내가 집에서 제대로 케어를 해 줘야겠군.”
“지금, 누구 집 말하는거예요? 설마, 본부장님 집?”
“그럼 누구 집을 말한다고 생각하나?”
서로 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아 벌어진 바보같은 대화에, 차현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본부장님 집에서요? 왜요?” 방금 전 환자복을 입고 앞구르기까지 한 여자가,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윤의 보호를 벗어나려 시도 중이었다. 제윤은 대답 대신, 차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환자복의 첫번째 단추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서, 차현이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아직…아픈데.” 그리고 어제 다섯시간이나 이어졌던 격렬한 사랑의 행위를 차현이 부끄럽게 고백하자, 그의 손이 두번째 단추에서 겨우 멈추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내 집에서 쉬지 않겠다는건가.”
“그것도 있는데요,” 솔직한 차현의 대답에 제윤의 눈썹 한 쪽이 올라갔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 병간호 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쉬려고 했죠.”
“하지 않을거란 장담은 못하지만–” 그의 말에 차현이 제윤의 한쪽 뺨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할 말을 했다. “내가 널 간호하는게 문제가 있나?”
“간호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간호는 제 집에서도 해 주실 수 있잖아요.”
“나도 내 집이 편하다.”
“저도 제 집이 편하거든요?”
“간호를 받는 건 너고, 간호를 하는건 나다. 행위 주체가 더 편안한 장소에서 일주일간의 행위를 지속하는게 뭐가 문제가 된다는거지?”
“와, 방금 전에 그 멘트 진짜 공무원 같았어요.”
“공무원 맞다. 거절당하려고 널 데리려 온게 아니다. 민폐란 생각도 금지다. 나는 상사로서 부하직원인 널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굳이 네가 이 말을 듣고싶다면,” 제윤이 고개를 숙여 차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픈 애인을 간호하는데 장소가 문제인가?”
너무나도 달콤한 목소리의 속삭임에, 차현의 귀가 새빨개졌다. 제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그녀가 환자복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차현은 제윤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프레임에서 세로로 뻗은 크리스탈 기둥들이 마치 수정 막대처럼 가지런히 늘어져 있었고, 천장 조명이 그 투명한 면들을 통과하며 거실 벽면에 작은 반짝임들을 흩뿌리고 있었다.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아름다움, 그리고 완벽한 정렬. 딱 신제윤다웠다.
“쉬는 동안은 이 쪽 방을 사용하면 된다.” 그가 문을 열어주며, 안쪽으로 그녀를 안내하느라 거실을 전부 상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우드 톤의 커다란 소파가 있는 것을 보고 의외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무실을 꾸며 둔 취향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집도 온통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꾸며놓았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작 차현이 놀란 것은, 그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손님용 침실의 인테리어였다.
놀랍게도–지극히 평범했다. 웜그레이 계열의 실크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큼직한 창문 너머로는 한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 무렵의 강물은 도시의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그 창문 앞에는 차광이 잘 되는 두꺼운 린넨 커튼이 우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의 흰색 원단은 마치 고급 호텔의 것처럼 무거우면서도 부드러워 보였다.
퀸 사이즈 침대는 흰색 가죽 헤드보드가 달려 있었고, 그 위에는 호텔에서나 볼 법한 새하얀 이불과 베개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시트는 고급 코튼 소재로 보였고, 베개 커버와 이불 커버 역시 같은 소재의 순백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갓 세탁한 리넨 특유의 깨끗하고 상쾌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마치 5성급 호텔 객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방 한쪽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화장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문이 닫힌 작은 옷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윤은 차현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도 몇 초간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몰라서……사진을 참고하긴 했는데.”
“설마, 지금 저때문에 이 방을 아예 새로 인테리어 한거예요?” 차현이 놀라서 묻자, 제윤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냥 창고같은 방에 있어도 되는데.”
“환자를 창고에 넣으라고? 상식이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말은 솔직하게 해요. 나 여기 데려올 생각 하면서 꾸민거잖아요?” 차현이 정곡을 찌르자 제윤이 ‘하아아-’ 한숨을 내쉬고는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머리칼에 코끝을 파묻었다.
“응. 기대했어.” 처음으로 듣는 그의 편안한 말투에 차현이 움찔했다. 이 사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구나. 지금 자신에게만, 신제윤이 ‘본부장’이나 ‘상사’가 아닌 신제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여기서 아예 살라고 이렇게 꾸며놨어요?"
두 번째로 정곡을 찔린 제윤이 이제는 팔을 뻗어 차현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는 제윤의 이런 변화가 낯설면서도 기뻤다. '진작, 그 때 고백했을 때 넘어오지.'란 생각보다는 제윤이 지금 순수하게 자신을 원하고 사랑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제윤의 팔을 자신의 손으로 조심스럽게 풀어낸 뒤, 그의 얼굴을 살짝 잡고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고마워요. 진짜 예뻐요, 마음에 들고. 저 옷장에 설마 옷 잔뜩 채워둔건 아니죠?"
고맙단 말에 미소짓던 제윤이 '옷장'이란 말에 세 번째로 흠칫했다. 이번엔 아예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차현은 '설마–'하는 생각으로, 제윤을 두고 옷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그 안엔…… 차현은 처음 보는 온갖 브랜드들의 셔츠, 스커트, 드레스가 가득했다. 색깔별로, 종류별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가격표까지 그대로 달린 것들도 눈에 띄었다. 캐시미어 니트, 실크 블라우스, 면 원피스부터 시작해서 정말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이—그리고 그 모든 옷이 차현의 신체 사이즈에 딱 맞다는걸 그녀는 눈으로 보고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옷장 안 작은 서랍에는 속옷까지 들어 있었다. 브랜드도 제각각이었다.
"본부장님."
"이름으로 불러." 하지만 차현은 팔짱을 낀 채, 돌아서서 제윤에게 말했다.
"이거 범죄예요! 내 쓰리사이즈는 대체 언제 잰건데요!"
"......." 제윤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말 안해주면 나 집에 갈거야!" 차현이 내민 비장의 한 수에, 제윤이 결국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어제... 섹스할 때. 손으로 전부 쟀어."
그럼 그 때 열심히 만지던 손길이 전부 사이즈를 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차현은 이 놀랍고 소름돋는 사실에 몸을 오소소 떨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을 양 손으로 쓸어내린 뒤, 차현은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제윤에게 앉기를 청했다. 제윤이 조심스럽게 침대 끝자락에 앉자, 차현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해준건 고마워요. 고마운데, 이런건 나랑 상의하고 해요. 스토커나 하는 짓을 본부장님이 애인한테 하면 어떡해요?"
말 하다가 떠오른 사실은–신제윤이 저 수많은 옷을 반나절만에 구해놨다는 거였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이건 너무한거 아니냐고!
"그럼... 이제 이름으로 불러줘." 제윤이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생각 좀 해 볼게요!" 차현이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제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차현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결국 항복의 표시로 양 손을 들어보인 뒤 차현을 가뿐하게 공주님처럼 안아들고는 거실로 향했다.
“뭐, 뭐하려구요?” 그런데 제윤의 침실로 향할거라는 차현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는 거실 소파 위에 차현을 앉혀두고는 앞치마를 매며 부엌에 자리를 잡는게 아닌가.
“요리.”
“본부장님, 요리도 할 줄 알아요?” 그러고보니 차현은 점심시간이나 야근 중 제윤에게 샌드위치나 도시락을 챙겨준 경험은 있었지만 제윤이 뭘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바깥에서 끼니를 다 해결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윤이 앞치마를 하고 서 있는 덕분에 시선이 간 부엌은 평범한 자취생의 부엌과는 거리가 멀었다.
“혼자 사는 남자에 대한 편견이 다 그런거긴 하지.” 그는 가볍게 투덜거리고는, 마법을 쓰는 대신 직접 칼을 손에 쥐었다. “마법으로 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어라, 다시 말투 바뀌었네요. 본부장님.”
“네가 이름 부르기 싫다며. 그럼 나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에이, 그래도 듣기 좋았는데.” 왠지 남들은 모르는 신제윤을 독점하는 기분이 드니까. 제윤은 이상한 소릴 다 듣는다는 듯 그녀를 살짝 노려보고는, 이내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현은 어쩐지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도마 위를 칼이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 물 끓는 소리, 달그락거리며 조리도구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녀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다정한 어느 가족의 저녁식사 시간을 떠오르게 했다.
제윤은 닭 가슴살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넣고, 양파와 당근, 감자를 곱게 다져가며 차현이 소화하기 쉬운 크기를 계산했다. 야채들이 충분히 익으면 믹서기에 갈아 부드러운 질감을 만들고, 마지막에 생크림을 조금씩 넣어가며 간을 맞췄다. 평소에도 요리만큼은 직접 손으로 하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이 익숙한 과정 하나하나가—누군가를 위해, 그것도 차현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새삼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가 사는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차현이 아니었다면, 아마 남은 평생을 이런 감정은 모르고 살았을 것이 뻔했다. 그러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 차현을 만나기 전엔, 무영의 예언을 듣고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거다’라고 자신만만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녀는, 성큼성큼 제윤의 인생에 걸어들어 오더니 ‘두 번 고백은 안할거다’라고 제멋대로 선포해놓고서, 정말로 제윤이 먼저 고백하게 만들었다.
“차현아.”
하지만 요리를 다 마치고, 식탁 위에 보기 좋게 세팅을 마쳤는데도 차현은 소파 위에서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제윤은 순간 서늘한 불길함이 들어, 앞치마를 채 벗지도 못한 채 그녀에게 달려갔다. 소파 위에 엎드리듯 누운 차현의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눈은 감겨있었다. 그녀는 지금 소파 위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에 꿀밤을 먹이려다가, 그는 옅은 숨을 내쉰 후 앞치마를 벗어두고, 차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멀리 있는 담요를 불러 와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긴 했지만, 잘 자고 있는 차현을 굳이 억지로 깨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병실에서 그녀가 의식을 완전히 잃었을 때, 손을 대어 마력을 점검해보고 ‘살아있는게 기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살아서,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만족스러웠다.
차현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차현이 헛소리를 하다가 아예 코마 상태에 빠진 직후부터 하루도 병실을 비우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정말로 못 견딜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그녀가 없었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공포감이 드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눈이 한 마디는 안으로 쑥 들어갈 정도로 피로와 공포가 그의 며칠을 파괴해 놓았지만, 정작 깨어난 차현이 처음 한 말은 드디어 죽은건가, 였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해 놓고 하는 말이 그거라니, 기가막혔다.
그런데 그런 감정보다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마자 안도감이 모든걸 뒤덮어버렸다. 사흘만에 코마에서 깨어나 놓고, 차현은 자신보다는 자기가 보호하던 아이가 무사한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녀를 영영 놓칠 지도 모른다는 절망으로 가득했던 제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때 말하지 않았다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몰랐다. 차현은 제윤을 ‘좋은 상사’정도로 취급하면서 여전히 거리를 둘 테니까. 남들한테 목숨을 위협당하고 말도 안되는 일에 휘말려도 제윤과는 선을 분명히 그으며, 첫 대면 때 그녀가 내뱉은 말(두 번 고백하는 일은 없을거다)을 끝까지 지킬게 분명했으니까.
그의 입술은 그 때 누구보다도 무거웠지만, 그는 무영의 예언을 결국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제윤은 그 예언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일 뿐, 자신이 차현을 사랑하게 된 것에는 후회가 없었다.
“본부장님.”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차현은 서재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제윤의 옆에 앉아, 쿠션을 껴안고 있다가 그의 옆에 가서 모니터를 슬쩍 들여다 보았다. 제윤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차현을 그대로 끌어안아 무릎에 앉히고는, 아무렇지 않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서류를 검토했다.
“이래도 되는건가요? 제가 알면 안되는 문서 보고 계시는 것 같은데.” 차현이 가볍게 키득거리자, 그는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결재하는 문서 전부 열람권한 가지고 있으면서, 이제와서?”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출근해야 좀 감이 돌아오려나. 내일은 원래 살던 집에 잠깐 다녀오려구요. 청소도 며칠이나 안했고…….”
“그냥 부동산에 내놓는게 어때?”
“네? 왜요?” 오히려 차현의 물음에 제윤이 더 놀란 듯 그녀의 어깨를 살짝 깨물며 대꾸했다.
“이제 나랑 같이 살거잖나.”
너무나 당당한 선언에 차현은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녀는 제윤의 가슴팍을 장난스럽게 밀면서 하르르 웃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교제 중이라곤 하지만, 지금은 병간호를 핑계로 여기 잠시 지내는 것 뿐이지 그녀에게는 엄연히 지내던 집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아주 초라한 수준이지만.
“그리고, 아직 회복도 덜 됐는데 가서 청소하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마법으로 대충 정리만 하려고 했는데…….”
“안돼. 아직 마력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데 며칠 묵은 집안 먼지를 마법으로 다 정리하겠다고 나섰다간 또 피를 토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처럼 차현이 고집을 꺾을 기세를 보이지 않자, 제윤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한 가지 묘안을 냈다.
“그럼 내일, 내가 퇴근 후 데리러 오지. 같이 가면 된다.”
“아! 그런 방법이 있긴……한데, 역시 집 상태를 본부장님한테 보여주기엔 조금.”
“어차피 정리해서 부동산에 내놓을거라면 내가 봐도 문제는 없겠지.”
“결론이 그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해서 다음날 저녁, 차현은 진짜 데리러 온 제윤을 따라 자기가 원래 살던 집에 도착해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에 갑자기 사람이 들어가면 옆집에서 신고라도 들어갈 것만 같아, 일부러 도어락 누르는 소리를 내며 제윤과 함께 들어간 것이었다.
좁은 스튜디오 타입 원룸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거실 겸 침실이 보이고, 한쪽 구석에는 간이 주방이, 침대 너머로는 작은 베란다가 이어져 있었다. 제윤의 넓은 펜트하우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차현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해둔 흔적이 역력했다.
제윤은 먼지 쌓인–차현의 살림살이들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차현의 사적인 생활까지는 그동안 그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는데, 이건 정말로 현실감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나름 깔끔하게 정리해 둔 티가 역력했지만, 사람의 손길이 며칠이나 닿지 않은 집구석이 어떤 꼴로 변모하는지는 그가 차현에게 설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침대 위 이불이 저절로 정돈되고, 간이 주방의 설거지가 끝나며, 베란다 쪽 빨래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차현은 제윤의 손짓 한 번에 집안이 말끔해지는 걸 보며, '그럼 왜 요리는 직접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가–자기도 요리나 간단한 가사 정도는 손으로 직접 하는걸 선호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지만 일상처럼 하던 일들을 전부 마법으로 대체하지는 않은 그녀였다.
한편, 서랍장이 스스로 착착 정리되어가던 와중에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 물건이 제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동시에 그걸 눈치 챈 차현이 잽싸게 낚아채려고 했지만, 이미 그것은 제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바로 무엇인지 알아 챈 제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권차현.”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 차현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제윤이 그걸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그에게서 그걸 뺏어오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이런건 필요 없을텐데, 버려도 상관 없겠지?”
“버리는건 상관없는데 제가 버릴테니 일단 주세요!”
“싫다.”
제윤은 이미 자신이 손에 든 물건의 모양과 기능을 이미 파악한 뒤였다. 차현이 이런 류의 장난감을 좋아한다면 침대 위에서 그녀를 안을 때 어느정도 적용해 봄직 했다. 결국 차현은 제윤이 그걸 알 수 없는 공간에 숨기는 걸 본 뒤에야 되돌려받는 것을 포기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지. 순간이동으론 가지 않을건가?”
“방금 전에 시도는 해 봤는데요,” 차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역시, 아직 안되겠어요. 저한테는 마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인지, 어지러워서.”
그 대답에 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현의 손을 잡은 채 순간이동을 하려던 찰나,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야, 권차현! 이 문 열어! 안에 있는거 다 알고 왔으니까!”
제윤은 누구인지 몰랐지만 차현은 아는 목소리에, 저절로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인지한 제윤이 차현을 등 뒤에 세우고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대신 문을 열었다. 문 바깥에 서 있던 초로의 여성과 남성은 아마도 부부인듯 했는데, 차현이 아닌 키 큰 남성이 문을 열어주자 처음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 뒤에 서 있던 차현을 알아보고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는 사람인가?”
“아는 사람이고 뭐고, 넌 또 누구야? 이번엔 남자까지 끌어들인거야?”
“......친척이요.” 차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늘 당당하고 당돌하기까지 했던 차현에게서 들리는 목소리가, 하필이면 그런 톤이라 제윤은 벌써부터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도망친다고 해결될 줄 알았어? 네가 할 일은 아주 명확해 - 너한테는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지. 네 죽은 애미애비도 너를 자식으로 인정 안 했거든. 그런데 뻔뻔하게 유산 다 챙겨서 잠적했더라?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어? 장례식장에서 분명히 말했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네가 훔쳐 간 우리 집안 재산 전부 다 회수할 거라고.”
그 말에 제윤은 머릿속으로 한 가지 사실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차현을 이 집에 살게 계속 두면 안된다는 것.
“법적 상속자는 저예요. 제가 죽지 않는 이상 친척들은 상속권한도 없다는거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입 다물어! 어른 말씀 드릴 때는 조용히 듣고 있는 게 예의라고 학교에서 안 가르쳐줬어? 너네 엄마아빠랑, 우리 조카 죽고 나서 항공사에서 받은 보상금도 혼자 다 챙겨놓고선 뻔뻔하기는. 당신, 얘랑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나 그래요?”
“이 사람 친척이라는 건 알겠고, 돈에 미친 사람이란 것도 알겠는데.” 잠자코 있던 제윤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신경이 긁혔는지 차현의 숙모가 더 흥분하며 떽떽거렸다.
“차현아, 스폰이라도 받고 있는 거야? 그 돈도 모자라서 이런 식으로까지 살고 있어? 그 사고 때 차라리 네가 대신 죽었어야 했는데!”
“.......” 차현의 입은 무겁게 닫혀 있었다. 제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 당당했던 차현이 이렇게 위축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사실 어디까지 사람이 더 돈 앞에서 추해질 수 있는지 살펴볼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언어폭력의 수위가 차현이 지금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강했다. 평소의 차현이라면 멱살이라도 잡고, 반박했을거지만 그녀가 지금은 그러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아마도 가족과 연관된 다른 기억 때문에, 일시적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 듯 했다.
“가자.”
그렇지만 제윤은 차현의 친척이란 사람들과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차현의 손을 이끌고, 현관문을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차현의 숙부가 그를 가로막았다.
“걔는 내가 가져온 서류에 사인하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
“권차현.” 낯선 남자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것에 몹시 기분이 상한 제윤이 차현의 손을 여전히 굳게 쥔 채, 그녀에게 돌아섰다. “집에 안 갈건가?”
“--!”
집, 이란 말에 순간 차현의 눈이 예전처럼 반짝거렸다. 저 눈빛을 바랐다. 제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가로막고 버티는 중인 차현의 친척을 향해 말했다.
“권차현이 부모에게 학대당하는걸 알고서도, 그걸 방조한 것도 모자라 이젠 유일한 상속인을 겁박해서 상속포기를 하게 만들려고 한건가?”
“학대? 그런 건 처음 듣는데요? 당신, 증거라도 있어요? 얘가 그런 거짓말까지 지어냈나? 어디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고자질하는 법 배웠어? 그런 걸로 우리 신고한다고요? 시간 낭비일 텐데.”
“고소할 가치가 있다면.” 제윤은 이제 우위를 점할 차례라는 것을 느꼈다. “상속 포기는 없을거다. 그리고 앞으로 권차현과 접촉할거라면 내 변호사와 먼저 조율하도록.”
“어이가 없네, 정말. 차현아, 진짜 스폰이라도 받고 있는 거지? 이런 애를 어떻게 스폰하고 있어요, 아저씨도?” 숙모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지만, 제윤은 그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차현의 손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에게 차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지만, 그런 말을 이 사람들 앞에서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차현의 눈이 한 번 더 반짝였다. 그녀가 제윤의 손을 스스로 놓고는, 숙모와 숙부 앞에 나섰다. 피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눈빛이었다.
“이 사람 제 애인인데요. 들으셨죠? 저랑 이제 이야기하시려면 변호사 통해서 해 주세요, 이렇게 교양없이 찾아오지 마시고. 그리고, 밤중에 아파트 복도에서 소리 지르면 민폐인거 모르세요? 아, 맞네. 내 부모가 밤낮없이 나 패고 죽인다고 협박할 때, 당신들도 옆에서 부추겼잖아.”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지금 어쩌고 어째?”
“그딴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나도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어도 상관없잖아!”
“닥치지 못해?!”
“알게 뭐야. 그 쪽이나 닥치시던가. 한밤중에 찾아와서 소리지르는 바람에 잠깐 내가 정신을 놨었네.” 차현의 원래 성격이 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아 챈 제윤은 그녀가 잘 해결할 것 같단 느낌에 이제 관망하는 자세로 돌아섰다. 정말로 이 광경은 흥미로웠다. 방금 전까지는 수세에 몰려있던 차현이,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아주 사랑하는, 차현의 원래 모습으로.
“돈이 그렇게 좋으면 니들이나 나가서 몸 파세요. 스폰, 스폰, 노래 부르지 말고. 아, 숙모. 숙부가 술집 여자랑 아예 살림 차린거 알죠? 내가 알아보니 건드린 여자만 세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던데. 간호사, 인턴, 제약회사 직원……숙모 그거 알고서도 돈때문에 여지껏 붙어있는거잖아. 나같으면 자존심 상해서 그 여자를 반쯤 죽여놓고 숙부랑도 이혼했을텐데, 숙모 비위도 대단하다 진짜.”
이제 차현의 친척 쪽이 완전히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차현이 이 사실을 알게 된건, 관리국에 옮기고 나서 무영이 귀띔해 준 덕이 컸다. 사실 이 문제를 무영에게는 상담을 했었다. 그는 ‘도움이 크게 될 것 같진 않지만……’ 하고 흥신소 명함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숙부도 그거 조사 한 번 해봐요. 나 숙모가 모텔에서 남자랑 팔짱끼고 나온 사진 여섯장 정도 갖고 있는데, 남자가 다 다르더라고. 산악회 회원도 있었고,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도 있던데? 교복 입은 자기 제자 모텔로 끌어들이면서 죄책감도 없었나? 심지어 고등학교에서 학생 가르치는 교사가?”
“너, 너, 너, 거짓말 하지 마! 여보, 그런 적 없어. 쟤가 거짓말하는거야!”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조사 해 보시면 될 일이구요. 숙모 산부인과 진료기록도 있던데? 낙태를 몇 번이나 했어요? 전액 현금으로 하면 아무 기록도 안 남을 줄 알았죠? 부잣집 남자 하나 잡아서 결혼하기 전에 무릎 위에 올라탄 남자가 한명도 아니던데?” 타인의 의료기록을 입수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차현은 지금 그런 것을 따질만큼 제정신은 아니었다. “아, 후련하다. 진작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나한테 서명 받으러 올 친척이 당신들 말고 또 있었던거 같은데 오늘은 두 분만 오셨네? 이제 나 만나려면 변호사 거쳐야 하는데 이거 어쩌나. 그리고 말도 안되는 이유 가지고 유산 상속 자격 운운하지들 마시고,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사는지 부터 스스로 점검 좀 해 보세요. 그깟 푼돈 때문에 인륜 저버리는 새끼들이야 넘치고 넘쳤는데, 협박하는건 좀 치졸하지 않냐? 그것도 스무살이나 어린 조카한테?” 그리곤 차현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적어도 내 부모는 남의 새끼는 안 낳아 길렀어. 의사랑 교사 자식인데 공부는 지지리도 못한다고 숙부가 구박하는 그 조카들 말이지. 왜 공부를 못했을까? 의사 씨가 아니니까!”
그 말에 숙부의 얼굴이 마그마처럼 붉어지더니, 부인을 휙 낚아채서는 계단으로 뛰어내려갔다. 공용계단에서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현은 그제서야 후련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닫았다가–자신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는 제윤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지금까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하고 손으로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런데, 제윤의 입가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가 거의 배를 잡고 구를 정도로 웃음을 터트리는게 아닌가. 민망한 마음에, 그리고 분노를 막 쏟아내 허탈한 심정에 차현이 현관에 쓰러지듯 주저앉자 다치지 않게 잡아주긴 했지만, 그는 정말 생전 처음으로 이 상황을 즐기면서 웃는 중이었다.
“그만 웃어요!” 차현이 다그치듯 제윤의 등을 안아프게 때렸지만 그는 거의 울 정도로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야 진정이 된 제윤은 차현을 아주 힘차게 끌어안아 주었다.
“고생했어.”
“환멸 안해요? 그렇게 말하는걸 봤는데도? 그리고 저, 부모한테 학대당했던거 언제 알았어요?”
“네 옷 치수를 손으로 재던 날. 마법으로 교묘하게 감췄지만 만질 때 느껴졌거든, 몸에 흉터 있던 것. 자해는 아니고, 맞아서 터지고 제대로 아물지 못한 흉터더군. 그래서 몰래 조사를 좀 했지. 너는 지난번에 알지도 못하는 아이를 그렇게 몸을 다 바쳐가면서 보호해줬는데, 왜 그때는 그런 어른이 네 곁에 없었을까.”
“그러게요. 그 때는 아동학대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나보죠, 뭐.” 차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제윤은 힘겹게 웃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차현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 시간을 견디고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제윤은 차현의 흉터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당한 엄청난 학대의 흔적들. 그녀가 필사적으로 가리고 다녔던, 마법으로 살짝 덮어둔 상태지만 그의 눈엔 훤히 보이는 팔과 다리의 과거. 그걸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이걸 그녀에게 남겨버린 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았었다.
하지만 지금 제윤이 그녀를 안고 있다는 것은, 차현이 그 모든 상처를 딛고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그 흉터들은 생존의 증거였고, 그녀가 앞으로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훈장이었다. 그 강인함이 그녀를 자신에게 데려다준 것이다.
“.......”
그 말에 차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다가, 이내 굵은 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차현을 토닥여주던 제윤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등 뒤로 비치는 부드러운 달빛이 현관문을 어루만지는 밤의 일이었다.
8.1.
차현은 제윤이 출근준비 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중이었다. 셔츠 소매를 채우는 커프스 단추나, 그 소매 끝에 슬며시 보이는 시계보다도 눈길을 끄는 건 그의 손이었다. 혈관이 살짝 올라온, 굵고 단단하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손.
“오늘은 넥타이 어떤 걸로 맬거예요?” 차현이 슬쩍 다가가 제윤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제윤은 그런 그녀의 동작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더니, 서랍에서 감색 타이를 하나 꺼내 차현의 손에 올려주었다.
“이걸로.”
“다른 사람 매 주는건 처음이라 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곧장 제윤의 셔츠 깃을 세우고는, 넥타이를 둘러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직접 매 본 적은 있다는 말인가?”
대답없이 타이에 집중하고 있는 차현을 내려다 보다, 제윤은 자신의 시선이 차현의 손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침부터 저 복장은 너무 자신이 가진 매력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현의 매끄러운 손이 이내 매듭을 완성하더니, 어렵지 않게 윈저노트로 마무리를 지어주었다. 제윤은 그녀가 매 준 타이 위에, 넥타이핀을 달아 위치를 고정시켰다. 거울 뒤에서 차현이 뿌듯하게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내일이면 차현이 다시 직장에 출근하는 날이다. 같은 공간에 돌아가는 것이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평범한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니라 연인 사이라는 것. 그 사실이 제윤의 마음을 살며시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제 가봐야겠군.”
차현은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나갈 채비를 하는 제윤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붙잡으면 왠지 잡혀줄 것 같은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으니, 출근을 시켜야 하나 약간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업무가 많은 것도 알고 있어서, 만약 그녀가 본부장을 출근 못하게 잡아버리면 관리국 업무를 처리하느라 다른 직원들이 고생할 것이 훤히 보였지만–
‘독점하고 싶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제 막 뒤돌아서 나가려는 제윤을 살짝 붙잡고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제윤 씨.”
그런데 그 아주 작고 다정한 말 한마디가 제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걸음이 철근이라도 달아놓은 듯 무거워졌다. 다시 몸을 돌린 제윤이 그대로 차현을 끌어안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네.”
며칠 전에는 ‘본부장님’이라고만 할 거라 그렇게 우기더니, 이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가 신발을 신은 채 차현을 안아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차현이 황급히 그의 등을 살짝 때렸다.
“추, 출, 출근하셔야죠!”
“싫어.” 다시 현관에 차현을 내려놓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차현의 머리칼에 코를 파묻고는 이젠 귀여운 말을 중얼거렸다. “출근 안할래. 너랑 같이 있을거야.”
차현은 이 엄청난 변화를 받아들이느라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한 번만 눈 감아주면, 오늘은 제윤을 독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하지만 하고싶은걸 전부 하게 해 주면 언젠가는 그녀에게 질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신제윤은 자신한테 질리지 않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차현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양 손으로 감싼 뒤,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대답했다.
“이따 퇴근하고 오면 좋은거 해 줄게요.” 그 말에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좋은거?”
“응. 제윤 씨가 지금 하고 싶어하는 그거.”
그 말에 제윤이 깊고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걸까. 순진하게 웃는 저 미소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두고볼 생각으로, 그는 ‘어른스럽게’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다시 제대로 구두를 신었다.
“혼자 어디 나가지 말고, 가고싶은 곳이 있으면 내가 퇴근하고 같이 가.”
어제 밤에 있었던 그 일을 신경쓰는 듯한 말. 차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등을 밀어내며 현관문을 닫았다.
그날 낮. 차현은 자기 방에서, 제윤의 취향으로 잔뜩 채워진 옷장을 구경하다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속옷 섹션에 들어가 있는 물건이었는데, 이게 몸을 가리기 위한 속옷인지 그냥 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색깔은 흰색이었는데, 떼지도 않은 라벨에 ‘웨딩’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신혼 이벤트용 속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 차현은 그 속옷을 침대 위에 던져둔 채 달려나가, 신제윤의 드레스룸을 활짝 열었다. 잘 다려진 흰색 드레스셔츠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좋은 걸 해 주기로 했으니까?’
차현의 회복을 위해 며칠 자리를 비웠다지만 오늘은 해도해도 너무한 날이었다. 출근하자 마자 신무영이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 더미를 들고 오더니 책상 위에 내던지듯 ‘쿵’하고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거 다 처리 안하면 퇴근 못합니다’라는, 섬뜩한 미소와 함께.
결국 제윤은 그 서류를 다 해치우고 나서야, 저녁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차현에게 먼저 저녁 먹으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걱정을 가득 안은 채,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때까지는 업무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머릿속이 차현의 셔츠 아래 드러난 허벅지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새하얗게 지워졌다. 그건 그냥 셔츠가 아니었다. 제윤이 출근할 때마다 입는 드레스셔츠였다. 내 사람이 내 옷을 입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자극적인데, 몸의 실루엣이 셔츠 위로 살짝 드러나는게 미칠 정도로 섹시했다. 정작 당사자는 현관 앞에서, 아주 마음 편한 표정으로–
“다녀오셨어요!”
제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듣는 말을 했는데도, 그는 그 말의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현관에 서류가방을 툭 떨어뜨린 뒤 성큼성큼 차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한가득 끌어안았다. 그런데, 셔츠 아래에 느껴지는 감촉이 평소와 달랐다. 속옷이 있어야 할 위치에–거기 원래라면 있으면 안될 끈이 보였다.
“너, 지금 뭘 입고 있는–.”
이건 속옷이 아니라 정말 끈이었다. 셔츠 아래로 슬쩍 보이는 피부의 면적이 너무 넓었다. 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보다 더 빨랐던건 셔츠 단추를 푸는 그의 손길이었다.
“이거, 제윤 씨가 옷장에 넣어뒀던데요…….”
그제서야 떠오르는 기억. 차현의 옷장을 채우면서 약간은 기대감을 갖고 고른 속옷 중 하나였다. 그런데 상상했던 것 보다 이 모습은……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내일 출근 못하게 돼도 난 모른다.”
그는 지금 현관이라는 점을 떠올리고는,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는 것을 겨우 붙잡고 차현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차현이 “내일은 저도 출근해야 해요! 밀린 업무가 얼마나 많은데!”라고 외치는 것은 이제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은 이 쪽이 더 급해.”
등을 쿡쿡 찌르는 묵직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차현이, 얼굴을 붉힌 채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부드럽게 해 주세요…….”
“가능하다면.”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는 제윤이 급하게 벗어던진 넥타이와 차현의 작은 웃음소리만이 남았다. 내일은 다시 바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이런 저녁이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수정 중인 챕터라 변경될 수 있음!(백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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