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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Trapped. 본문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대공을 사로잡아라. 몇 해째 정혼자로 머물러 있을 생각이더냐? 그러다, 대공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아버지, 베스트팔렌 재상의 손에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작은 조작품이 잡히는 순간, 미레이유는 움찔했다. 어디로 피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기로. 벌써 십여분 째, 같은 이야기만 듣고 있으려니 - 여느 자식이라면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선천적으로 부친에 대한 복종을 타고난 그녀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생각은 할지언정 몸은 움직일 줄 몰랐다. 가끔은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어제도, 같은 상황, 그리고 팔목에 생채기가 나지 않았던가. 남들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워 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긴 소매를 갖춰 입어야만 했다.
"...내 말 듣고 있느냐? 미레이유."
"예, 아버님."
"오늘 오후에 대공이 널 보기 위해 방문하거든, 어떻게든 일을 진척시켜 놓거라. 약혼식을 건너뛰어도 상관 없음이니,"
순간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다른 이의 눈에는 선하게만 보일 그 눈 안에서 살기를 느낀 미레이유는 저도 모르게 - 자리에서 움찔하고 말았다. 입술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보일 수 없었다. 금방 알아차릴게 뻔했으니까. 언젠가 자신의 면전에서 그리 했다고 일주일을 근신 처분을 받지 않았던가. 그저 묵묵히 듣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모든게 널 위한 일이다, 미레이유."
끝내 아버지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밉더라도 그가 이런 다정한 말 한 마디만 해 주면 -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의 다정한 아버지가 돌아온 것만 같아서,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설령 이미 인형 수준으로 전락했을지라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잘 알아들었기를 빈다. 그럼 난 황궁으로 돌아가보마."
재상이 황궁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제서야 미레이유는 숨을 쉴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택을 나서는 아버지를 배웅한 뒤 그녀는 허물어지는 모래성마냥 문설주 뒷편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어서 화헌대공이 와 주었으면 싶었다. 적어도 그가 저택에 있는 동안은, 저택의 그 누구도 - 설령 아버지인 베스트팔렌 재상도 그녀 주변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가만히 두었기 때문이었다. 베스트팔렌의 말마따나, 화헌대공은 미레이유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열쇠었다. 이 지옥같은 삶에서 달아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줄 사람이었다.
정혼 한 이후로 으레 며칠에 한번씩, 길게는 한 달에 한두번 들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이상하게도 혼기가 다 차가는 와중에도 화헌대공은 성혼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약혼 말이라도 꺼내 재상, 혹은 미레이유를 기쁘게 할 만 일을 하지 않았다. 의문이 들었다. 그가 정말로 미레이유를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 재상의 뒷배경 따위 필요하지 않은 사방 대공 중 가장 위상이 높은 남방 대공령의 주인 - 화헌 대공 클라우스 페트라르카. 그의 의중은 오랜 기간 교유한 황제만이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알고싶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욱신거리는 팔목을 문지르고 있으려니, 제 집마냥 아주 자연스럽게 화헌대공이 저택 안으로 쏙 들어왔다. 미레이유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며칠간 힘들었던 것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르르, 웃어보이며 그의 품에 담쏙 안겨들었다. 제 어깨를 감싸주는 따뜻한 온기가, 가슴에서 들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좋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계략대로, 그녀도 대공비가 되려는 속셈만으로 그에게 접근한 것이었고 어느정도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일에 진척이 없었고 하염없이 성혼 말 나오기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면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적어졌고 도리어 미레이유가 대공에게 가지는 감정이, 단조로운 것에서 아주 복잡한 -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재상이 걱정하는 것처럼, 이대로 가다간 일방적으로 파혼당하고 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지내셨습니까? 덥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가 그녀의 드레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사실 대공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처한 입장을 - 그리고 재상의 의중도. 모를리가 없었다. 사실 황제가 일부러 봐주고 있다는 것을, 재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재상은 황제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으로 상대를 굉장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읽지 못하는데다 일부러 황제가 놓아주고 있으니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제 딸자식인 미레이유 조차도. 그녀가 대공비가 되려는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기 때문에 적당히 받아주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부르기엔, 미레이유가 가진 것보다 대공이 품은 감정은 아주 적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듯 하여."
거짓말. 하얀 소매 위로 언뜻 비치는 핏빛을 대공이 보지 못했을거라 생각한 것일까. 대공은 한숨을 내쉬며, 미레이유의 손을 잡아 끌고 늘 가던 응접실로 향했다. 항상 이 저택에선 응접실 외의 다른 곳에는 그녀와 함께 간 적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문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고, 일이 여기서 더 진척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대공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
바보같이, 미레이유는 대공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저택으로 오는 길에 재상을 만났습니다. 안색이 더 좋아지셨더군요."
"그러셨습니까..."
좋으실 만도 하지. 딸자식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나면 아버지는 늘 후련한 표정이었으니까. 물건을 집어던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미레이유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대공비의 자리를 줄 수 있는 남자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레이유의 눈동자가 대공의 얼굴빛을 찬찬히 살폈지만 별다는 것은 볼 수 없었다. 대공은, 하인이 조심스럽게 내어 온 찻잔의 온기를 어루만지면서 어떻게 하면 시간을 보낼까 궁리했다. 자신이 이 소소한 시간마저 그만둔다면 미레이유는 그야말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고통받게 될 것이었다. 그녀에게 난 작은 상처들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었기로. 하지만 미레이유를 대공비로 두기에는, 그녀는 좋은 '재목'이 아니었다. 대공 자신이 얼마든지 보듬어 줄 수 있겠으나, 평생을 감당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사람들의 이목도 신경을 써야 했으며 무엇보다 황제가 재가를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황제의 재가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에 미레이유를 대공비로 들였을 것이었다. 허나, 그녀는 대공비가 된 뒤에도 지금과 같을 터였다. 베스트팔렌이 사라진다면 황실에서도, 대공가에서도 완전히 무시당할게 분명했고 - 그녀의 정신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따금 저택의 사용인으로부터 듣는 미레이유의 소식은 대공에게 있어서 무시무시했다. 수많은 전장을 누빈 그가 듣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저잣거리의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밤중에 복도를 꿈꾸듯 걸어다닌다거나, 제 아비가 저에게 하듯 물건을 벽에 집어던져 박살을 내거나, 스스로 틀어박혀서 귀신처럼 웃다가 울기를 반복한다는 이야기가, 거리낌 없이 대공의 귀에 내리꽂힌게 꽤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지금은 멀쩡해보여도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대공은 제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찻잔에는 끝내 입술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보아 온 기간이 있으니, 황제가 칼을 빼 들 시점에 미레이유만은 살려 줄 생각이었다. 조만간 벌어질 일이었다.
"대공?"
"예."
제 딴에는 대공의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어, 흔히 사려깊은 연인이 하듯 다정하게 - 그리고 걱정을 담아 대공을 불렀던 미레이유는 그에게서 곧장 돌아온 평범하고도 날카로운 반응에 흠칫했다. 제 짐작이 정확하게 맞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대공도, 미레이유도 알고 있었다. 이 무의미한 관계가 언젠가 끝장나리라는 것을. 조만간,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지만 미레이유에게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조금 더 진실했더라면, 대공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었지만.
이십여분.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할 만큼 했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킨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레이유가 아쉬움에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빠른 걸음을 힘겹게 쫓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차갑게 입술 위에 닿은 그의 키스 뿐이었다. 자신이 아주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생각. 지금 죽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인생, 무엇하러 여태까지 살았던 것일까. 스스로에게 회의가 들었다. 곧장 제 방으로 돌아온 미레이유는, 몇 번이고 목을 걸었던 벽의 고리 위에 침대 커버를 찢어 만든 끈으로 매듭을 지어 고리를 만들었다. 차가운 리넨이 목에 휘감기고 발 밑의 의자에서 발을 떼는 순간, 그녀는 제 고리를 손으로 붙잡았고 그대로 혼절해서 쓰러졌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날 밤, 재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돌아온 것은 - 아니, 들이닥친 사람들은 황실 기사단의 기사 몇 명과 수백명의 병사들이었다. 베스트팔렌 재상의 저택을 둘러싼 병사들 사이로 제복을 입은 기사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이윽고 수십명이 저택 안에 강제로 들여보내지고 나올 수 있는 모든 출구에는 못질이 되었다.
미레이유는 정신을 잃은 채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 황제는 재상의 목을 쳤다. 항명할 기회를 주긴 했으나 애당초 정해진 판결이었다. 반란 모의. 황제가 다른 어떤 기관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분을 내릴 수 있는 절호의 죄목이었고 집행은 신속했다. 제 아버지의 목이 황제에 의해 직접 잘린 순간 미레이유는 제 방에서 죽기 위해 목을 매고 있던 것이다. 화헌 대공은 꿈에도 몰랐던 돌발 행동이었다. 제가 생각해 둔 것이 있어 서둘러 재상의 저택으로 왔지만, 그의 눈 앞에 보인 것은 이미 불이 잔뜩 붙어 검게 타오르고 있는 저택 뿐이었다. 사방의 창과 문에 판자가 못질이 되어 있어, 그 안에 몰아넣어진 재상의 일족들이 산 채로 타 죽고 있었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마치 지옥이 지상으로 올라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광경이었다. 대공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기사 하나가 대공을 저지했다.
"송구합니다만, 황명을 집행중입니다. 대공 전하."
"비켜라."
"황제폐하께서 화헌 대공은 집행중인 저택 근처에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은데."
"송구합니다. 저는 명령을 지킬 따름입니다."
"알버트 경, 지금 비키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는 비켜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화헌 대공은 제 신력을 이용해 알버트 경을 옆으로 치웠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는 가운데 시체를 한 구 더 늘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잠시 기절시켰을 뿐이었다. 화헌 대공의 등장에 겁먹은 다른 병사들은 순순히 길을 내어주었다. 미레이유의 침실 위치는 알고 있었다. 저택 안에 진입하자 이미 문가에는 타 죽은 시체들이 한가득이었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광경이었지만 이미 수백, 수천의 죽음을 보아넘긴 대공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미레이유만은 살려주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가 수행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는 이층으로 내달렸다. 불의 기운을 다루는 그에게 사방에서 거칠게 열기를 내뿜는 불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벌컥, 문을 열어 젖히자 바닥에 흥건한 피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이 멈추었다. 침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에 매어진 흰색 끈과, 발이 지상에서 한참 떨어진 채 흔들리고 있는 미레이유가 보였다. 목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피가 그녀의 하얀 옷을 완전히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보통 그냥 목을 맨다면 이 정도로 피가 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상당한 높이의 샹들리에게 스스로 목을 맬 수 있을리 없었다. 화헌 대공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누군가가 그 방에 먼저 들어와 미레이유를 죽인 것이 분명했다. 지켜주지 못했다. 그녀의 목숨도, 자신의 의지도. 조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진즉 대공비로 들였다면 나는 너를 지켜줄 수 있었을까. 황제가 작정하고 베스트팔렌 일족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미레이유를 순순히 내어주었을까 - 그녀가 대공비가 된 뒤에도?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무엇할까. 그는 황제가 항상 흥얼거리듯 중얼거린 그 말을 제 입으로 하면서 하릴없이 바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옷깃에 피가 약간 묻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은 완전히 불에 타 재가 되어 스러졌고, 폭삭 소리도 내지 못하고 검은 재가 사방으로 날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비구름이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고, 저택의 흔적은 비와 함께 땅으로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까. 구경하던 사람들은 전부 돌아가버렸고, 황궁 쪽에서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화헌 대공은 사람들에게선 멀찌감치 떨어져선, 저택의 마지막을 끝까지 구경하다가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