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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광연몽, 일부. 본문
내 기억이 허용하는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래된 장면은 칼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의 것이었다.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죽어, 그는 세상에 남겨진 나의 단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커다란 대저택에 단 둘이 남겨진 어린 아이들을 노리는 일은, 노련한 도둑이라면 생각해 봄직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방문을 받았다. 돌봐주는 이 없이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우리에게 다가온 남루한 차림의 사내는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칼을 휘둘렀다. 내가 먼저 칼에 깊숙히 찔렸다. 피부를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검이 빠져나가는 끔찍한 기분도. 칼과 동시에 내 몸에서 뜨거운 액체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오빠가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그 이후로 내 의식은 잠시 끊겼고,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내 앞에는 - 그 소년이 서 있었다.
아, 그래. 그는 나를 찌른 것이 아니라 날 공격한 그 도적을 공격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저택을 처분해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로는 모든것이 평화로웠다. 넘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부족함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금이 은행에 맡겨져 있었고, 우리는 그 돈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부모 없는 남매를 두고도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물론, 생활비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법도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이후로도 우리 남매를 노리고 집에 침입한 강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입은 자상으로 인해 나는 걸음이 느렸고, 겁이 많았다. 오빠는 언제나 걸음이 빨랐지만, 함께 걸어가 주지는 않아도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면 항상 멈추어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는 내 오빠였고, 내 보호자이며 또한 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다음의 기억은, 동네 어른들에게 멱살을 잡혀 집 현관에서 내팽겨쳐지는 오빠였다. 어린 애들이 살아갈 만한 돈이 대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그 사람들은 알고 싶어했다. 오빠가 입을 열지 않자 그들은 기어이 길다란 막대기와 낫들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공포에 질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오빠가 어떻게든 나를 감싸려고 기어왔지만 덩치 큰 청년이 오빠의 등을 발로 밟으면서 소름끼치게 웃었다. 오빠가 고통의 비명을 속으로 삼키는 동안, 인자한 미소를 줄곧 보여주었던 촌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다그쳤다. 대체 이 집을 유지할 수 있는 재산이 너희같은 꼬맹이들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고. 그의 거친 손이 내 턱을 짚는 순간, 다 죽어가던 오빠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에 섰다. 절대로 이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왜 당신같은 족속들을 믿었는지 후회가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장정 여럿의 힘을 겨우 소년이 견뎌낼 리가 없었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의 촌장이 지시하자 오빠는 사지를 결박당한 채 끌려나갔고, 내 목에는 기어이 단검이 들이밀어졌다. 익숙한, 차가운 감촉이었다.
바깥에서 오빠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피냄새가 났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촌장이 단검을 치우더니 느릿하게 걸어나갔다. 내가 달아나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곧이어 돌아온 촌장의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뒤이어 돌아온 사내들은 오빠의 몸을 들쳐매고 있었다. 피가 흥건히 그들을 적시고 있었다. 그 이후론 아주 신속했다. 오빠의 몸에는 여러차례의 자상이 남겨졌고, 나는 의자에 결박당했다. 바닥에 뿌려진 기름, 그리고 그 위에 던져진 성냥이 곧이어 집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익숙한 죽음의 기운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았다. 성당의 젊은 신부가 언젠가 말했던, 어떤 기사의 기도문이 떠올랐다.
내게 남은 것이 없사오니, 이제 나를 거두어 주소서.
크리스털링-헤이븐 교구에 오고나서는 딱히 신경쓰일 만한 커다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성 리프레의 번잡함에 질린 내게 이 교구의 보조사제 역할은 그야말로 적임이었다. 매일 몸이 힘든 것을 제하면 마음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선하고 친절했으며, 공기는 맑고 언제나 싱그러운 바람이 나를 반겨주었다. 저녁이 되면 기도를 올리고 나서도 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이따금 교구에 들르는 나의 친구, 에스테반 경과 밤 산책 겸 방범을 하는 것은 그 중 하나였다. 평소에는 약초를 정리하거나 성서를 필사하며 묵상을 하곤 했다. 낮의 일로 번잡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시간이 바로 저녁이었다. 에스테반 경과 함께 나서는 밤 산책도 고즈넉해서 좋았다. 낮과 밤의 크리스털링-헤이븐 교구는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정경을 보여주어 나를 즐겁게 했다.
평소라면 매캐한 연기는 내 코 끝에 잡혀서는 안되었다.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미간을 좁힌 에스테반 경이 뭐라 물어볼 틈도 없이 한 방향으로 내달렸다. 매일 훈련을 거듭하는 그와 달리 일개 신부에 불과한 내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그가 뛰어간 방향으로 줄곧 뛰어갈 수 있던 것은, 그 시선의 끝에 불타는 집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굳게 잠긴 문을 발로 걷어찬 에스테반 경이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와 그걸 압도하는 피냄새 때문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묵주를 들고 기도를 올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바로 이 집이, 어린 남매 단 둘이 사는 집이라는걸 기억해낸 나는 나도 모르게 에스테반 경을 따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집 안은 처참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작은 가구들이 모조리 부수어져 있었다. 그 때,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에스테반 경이 소녀를 껴안고 뛰어나왔다. 그는 소녀를 안은 채 내 목덜미까지 낚아채서는 집 바깥으로 뛰어나갔고, 우리가 현관을 나서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이 폭삭 주저앉았다.
목에 상처를 입은 소녀를 살핀 에스테반 경은, 나에게 아이를 맡기더니 검을 뽑아들고 집 주변을 살피기 위해 나섰다. 나는 정신을 잃은 이 소녀를 알고 있었다. 부모 없이 단 둘이서만 살던, 유리디스였다. 검을 든 에스테반 경이 돌아오기 전에 아이가 깨어났으면 싶었다. 그런 소원을 신께서 들어주기라도 하셨는지, 그녀가 움찔하더니 눈을 떴다. 나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녀는 오빠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녀의 오빠인 세드릭을 발견하지 못했다. 설마.
에스테반 경의 조사 덕분에, 유리디스 남매의 집을 불태우고 그 오빠를 죽인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모두가 마을 촌장과 그 청년들의 범행을 믿지 못했고 때문에 에스테반 경은 황실 측에서 수사관을 보내주어 보강 수사를 한 뒤에야 자신의 조사가 정확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범죄자들은 처벌받았다 해도 남겨진 사람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있었다. 작고 여린 소녀의 처분을 묻는 물음이, 유리디스의 보호처인 성당에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고아원을 따로 운영할 만한 여력이 없는 성당이었고, 소녀들을 위해 수녀원에서 봉사하는 고아원들이 제법 있었으므로 그 쪽으로 유리디스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들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주임인 제임스 신부는 그러한 결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유리디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조사를 위해 유리디스에 대해 알아본 에스테반 경 역시 그들 중 하나였지만, 그는 친구인 내게 사실을 함구함으로서 나의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와중에 법황청에서는 유리디스를 교구에서 보호하라는 통보를 해 왔다. 당황스러웠다. 나에게는 황실에서 검서관으로 일하는 여동생이 있었지만 그 아이는 혼자 훌륭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어린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주임신부는 교구의 일로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결국 나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법황청의 결정을 내게 전달해 준 에스테반 경은 잘 해보라고 격려만 한 뒤 곧장 크리스털링-헤이븐을 떠났고, 나는 어색함을 가득 안고 유리디스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었다.
한편, 나오 윈스턴 공작이 크리스털링-헤이븐에 당도했다. 찾고있던 사람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도 정작 움직여야 할 명완군 디안케트가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낮밤을 꼬박 걸려 공작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가게를 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훤칠한 키의 사내가 설마 그 나오 윈스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해받지 않고 성당의 생활관에 도착한 공작이 문을 두드렸고, 이미 새벽 기도를 올린 뒤였던 깔끔한 얼굴의 알로이스 신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그저 신도겠거니, 생각해서 문을 열어주었지만 막상 후드를 벗은 이가 황실의 실세 중 하나인 윈스턴 공작인 것을 알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나오 윈스턴은 유창한 인사치레 없이, 곧장 유리디스를 데려오도록 요구했다. 알로이스로서는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의 명령을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유리디스는 알로이스 신부의 목소리에 겨우 눈만을 뜬 채 생활관의 부엌에 발을 디뎠다. 나오 윈스턴 공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유리디스는 달아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으나 알로이스 신부가 어깨를 붙잡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디스를 데리러 왔다는 짧은 말을 남긴 윈스턴 공작은, 알로이스가 유리디스의 몇 없는 소지품을 챙겨주자 마자 그녀를 말 위에 태워서 순식간에 떠났다. 뒤늦게 생활관으로 돌아온 제임스 신부가 그 사실을 알고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알로이스는 그제서야 제임스 신부가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은 유리디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유리디스 헌팅턴이었다. 헌팅턴 가문이라면. 알로이스는 곧장 나오 윈스턴 공작의 추문을 떠올렸다. 윈스턴 공작부인의 수양동생인 헤일리 헌팅턴이 공작의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소식을 말이다. 헌팅턴...헌팅턴. 그 성씨를 다시금 떠올린 그는 헌팅턴 가문이 이 세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수의 직계 혈통이란 사실을 기억해 냈다. 너무나 당황해 그 자리에 굳어 선 알로이스에게 한 줄의 소식이 닿기 전까지는 그저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래도 황실 기사다 보니 에스테반 경을 제거하는 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명완군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해냈다. 실은 윈스턴 공작이 유리디스를 데려오는 동안 디안케트는 유리디스의 '정체'를 알아낸 모든 이들을 제거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타자는 에스테반 경이었다. 비번 중 사고사로 꾸미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나 정작 본인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번거로움을 겪어야만 했던 것 뿐이다. 비록 뒷방 늙은이 신세를 자처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강력했고, 황실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다만 법황청 소속인, 크리스털링-헤이븐 교구의 알로이스 신부와 제임스 신부에게 손을 대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에스테반 경을 죽인 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에스테반 경은 황제에게 바친 자신의 맹세를 어기고 법황청에 곧장 유리디스를 찾았다는 사실을 보고했으니 사실상 이적 행위로 처분했다고 해도 항명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법황청과 대놓고 다투는 일은 피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게다가 헌팅턴 가문을 지키는 일은 대대로 황족의 의무였다. 테런스 헌팅턴이 뿌린 씨를 수습하고 다니는 것에 질린 나오는 그예 테런스의 딸 중 하나인 헤일리 헌팅턴과의 추문으로, 그 대단한 용족 후계자와 대판 싸움을 벌였다. 디안케트 대신 나오가 크리스털링-헤이븐에 간 것도 그 때의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컸다. 물론 헤일리와의 일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오는 몰래 다녀오는 편을 택한 것이지만.
법황청에 헌팅턴을 빼앗길 수야 없지. 과거, 황태자 시기의 카를과 법황청 추기경의 사생아 로벨리아의 약혼 사건을 생각해 보면 법황청이 드러내 놓고 움직일 만한 일은 없어야 마땅했지만 최근들어 법황청이 수면 아래에서 벌이는 움직임이 디안케트의 눈에 적잖이 거슬리고 있었다. 에스테반 경이 법황에게 곧장 보고를 한 일도, 그리고 그들이 헌팅턴을 찾아다녔다는 사실도 명완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알로이스 신부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명완군과 윈스턴 공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쓰겠지. 하지만 디안케트에게는 아주 고전적인 수가 남아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딱딱한 껍데기를 두른 여린 감성의 여자에게 어떻게 하면 파고들 수 있는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틴 슈라이버는 아끼는 여동생의 자진 이후 상심에 빠져있든 디안케트를 가엾게 여기고 있었지만, 곧 '사용되고 버려질' 알로이스의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디안케트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