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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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광연몽

alicekim245 2017. 1. 30. 22:14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윈스턴 공가의 방에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이 놓여 있었다. 정작 아버지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내게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공작위를 물려받은 이후로 집안 자산을 점검하면서야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미하일 윈스턴 대공은 힘의 흐름과 어머니의 집착 때문에 엘리자베타 여제와 결혼한 경우지만, 그 이전에 약혼녀가 있으리란 것은 당연한 추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바로 미하일 윈스턴 대공이 평생을 두고 짝사랑했던, 그래서 내 어머니에 의해 죽어야먄 했던 귀족 아가씨였다. 아마 엘리자베타 여제도 이 초상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을 듯 하지만, 손에 넣은 남편의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마저 조각내는 것이 두려워 손대지 않았을 터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어머니도 꽤 가여운 사람이었다. 물론 펜리르 백작을 정부로 두고 아버지의 면전에서 욕보인 일은 잘못되었지만, 그 원인이 그녀의 지독한 짝사랑과 집착임을 생각해 보면 보상 받은 듯 하면서도 그런게 아니니까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가져온 수많은 죽음을 가벼이 여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신수 에드워드는 황제 노릇을 집어치우고 카를에게 제위를 넘겨준 이후로 가끔 윈스턴 공가에 나타나 나에게 술을 내어 놓으라고 땡깡을 부리곤 했는데, 술이 적당히 들어가면 옛날 이야기를 해 주어 그것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주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나를 낳고 며칠 지나지 않아 탑에서 투신자살했고, 아버지는 핏덩이인 나를 거두어 키우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과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그 모든걸 지켜본 이 빌어먹을 신수가 내게는 유일한 단서이자 과거로의 열쇠였던 셈이다. 본인도 에드워드 황제로서 살아간 시간이 그렇게 귀찮지만은 않았는지 물어보면 이것저것 술술 말해주기야 했다.

레티시아 윈터게이트. 아버지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한, 그리고 비극적으로 헤어져야만 했던 사랑. 어쩌면 나의 어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인물.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일어났던 차원의 균열로 인해 벌어진 -- 기이한 만남이 아버지를 더욱 그녀와의 기억에 얽매이게 했다. 지금은 초상화가 걸려있을 뿐인 그 방에 들어갔던 어린 날의 미하일 윈스턴은, 아름다운 처녀를 그 곳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묘한 미소를 남긴 그녀를 그가 다시 만난 것은, 루트비히 황제가 정기적으로 열던 갓 데뷔한 숙녀들을 위한 무도회에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루하게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에게 다가온 여인은 그가 어릴 때, 저택의 기묘한 방에서 만났던 바로 그 숙녀였다. 그때의 레티시아는 미하일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엇갈린 시간 덕분일지, 그렇게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이내 연인으로, 그리고 약혼자로 그들을 이끌었다. 약혼 후 삼개월 뒤를 결혼식 날로 정하고, 사랑에 푹 빠져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던 미하일에게 비수를 꽂은 사람이 바로...나의 어머니 엘리자베타 라인하르트였다.

엘리자베타는 자신의 오빠이자 나의 백부가 되는 루트비히 황제에게 꾸준히, 약효가 더디게 나타나는 독을 먹이고 있었다. 그녀의 조카인 메르디스 황녀를 익사시킬 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끈기있게 진행되는 '작업'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루트비히 황제에게 '미하일 윈스턴 공작을 부군으로 달라'고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이후로 그를 손에 넣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있었다. 짝사랑 하던 상대가 자신은 조금도 돌아봐 주질 않고(물론 미하일 윈스턴에게 엘리자베타는 친구의 여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곧 결혼까지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타는 조급해졌다. 그녀는 몹시도 레티시아를 죽이고 싶어했다. 분노와 질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루트비히 황제의 배려로 열린 미하일의 결혼식 일주일 전의 파티에서 레티시아는 엘리자베타의 시녀가 가져다 준 와인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은 채 며칠 만에 사망했다. 당연히 의심은 엘리자베타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일이 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 황제가 병환으로 쓰러져 죽었고 엘리자베타 여제의 부군으로 미하일 윈스턴을 지정함으로서 엘리자베타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 비극적인 무도회 이후로 나의 아버지는 엘리자베타 여제를 절대 친구의 여동생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온전한 부인으로 봐 주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 어머니의 유약한 내면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레티시아와 루트비히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게 분명한 그녀를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무관심으로 일관한 덕분에 여제는 즉위 후 몇 년동안이나 후사가 없었고 결국 그 일이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루트비히의 친아들인 에드워드가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미하일과 엘리자베타의 결혼 서약을 무효로 돌려놨다. 자신이 궁으로 돌아오는데 큰 도움을 준 미하일을 '보호'하기 위한 처사였다. 그리고 엘리자베타는 여제의 작위를 박탈당한 채 침묵의 탑에 감금당했다. 그 때부터였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내 어머니에게 결국 연민의 손길을 뻗기 시작했던 것은. 시기를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잉태된 것은, 미하일 윈스턴 대공이 미리 여제에게 경고를 해 주기 위해 검은 상복을 입고 황궁에 혈혈단신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였다(그 직전의 아버지는 사고로 위장된 습격 현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그 연민의 결실로 태어난 사람은 나였지만, 엘리자베타의 심리는 더욱 심연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겨우 창 하나, 문 하나만이 있는 작은 방에 갇힌 그녀를 무엇이 압박했는지는, 그녀만이 알 터였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과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에드워드 황제가 면담 차 다녀간 직후, 그에게서 엘리자베타를 만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미하일 대공이 불안감에 휩싸여 침묵의 탑을 단번에 올라갔던 그 순간, 내 어머니는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내게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 크고 나서야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과거와 통증이 가라앉아 있었는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때가 되고 나서는 그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건강하다가도 심리적인 불안 요소가 극대화 되면 약도 듣지 않는 생병이 들어앉아 순식간에 목숨을 덜어내게 된다고들 하던데 미하일 윈스턴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그 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작게 인기척이 들렸다. 얼마 전에 내가 크리스털링-헤이븐에서 데려온 유리디스 헌팅턴이었다. 테런스 헌팅턴은 그 호색한 기질을 버리지 못해 많은 자녀들을 세상에 남겨 두었다. 본인 말로는 헌팅턴의 씨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할 의무라고 거창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나로서는 귀찮은 일이 몇 해에 한번은 늘어나는 셈이었다. 헤일리의 일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내가 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디안케트가 극구 사양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또다른 딸을 내가 보호하게 되는 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유리디스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상당히 성가셨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낚아채다 방에 가두는 일은, 정말 하고싶지 않았다. 내가 레이첼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코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말이다. 나는 결국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문을 조용히 닫아준 뒤 내 서재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법황청이 이 저택에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으니 아이가 바깥에 무단으로 나가는 일만 벌어지지 않으면 내게도 귀찮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아니면 디안케트를 설득해서 어떻게든 아이를 그의 별궁으로 들여보내는 수도 있었다. 그 교구에 있던 슈라이버 신부의 여동생이 디안케트의 별궁에 주기적으로 드나든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쪽으로 어떻게든 일을 엮어봄직 했다. 슈라이버 신부라면 유리디스를, 게다가 내가 데려간 일을 상당히 염려할테니까.

기왕 생각난 김에 지금 가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장 명완군의 별궁으로 향했다. 슬며시 구름이 밀려와 밝은 보름달을 가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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