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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습작(Dec 14, 2020)

alicekim245 2020. 12. 14. 15:26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하지만 손은 이미 낡고 녹슨, 칠이 다 벗겨진 파란색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고, 신선한 공기를 밀어내는 묵은 세월이 순식간에 폐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기엔 피아노--새까만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서 있었다. 천을 덮어 씌우지 않은 것 치고는 무척이나 멀쩡해서, 근래에도 드나드는 이가 있었던 것일까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이내 바닥에 남은 발자국이 하나 뿐이라는 것을 알고 생각을 접어두었다. 묵직한 검은 뚜껑을 열자 새하얗고 검은 건반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 오른손으로 빠르게 음을 짚어보았다. 청아한 소리가 낡고 오래된, 이미 세월에 침잠한 듯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째서?
방치된 피아노 학원 안에 남겨진 그랜드 피아노 한 대(그것도 상태가 무척이나 좋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들었다. 하지만 홀로 이 작은 도시에 와서 줄곧 피아노에 대한 갈망이 있던 나는 결국 의자에 앉고 말았다. 업라이트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의 타건감은 여전히 생소했지만 그보다는 방금 전 내 귀에 들린 소리, 건반 위를 움직이는 이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순간이 더 절실했다.

내가 외우고 있는 곡은 딱 하나였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몇 백번을 연습한 초반의 익숙한 음절을 능숙하게 지나 곡이 최고조를 향했다가, 고요히 마무리 되었을 때였다. 아직 페달을 떼지 않아 잔음이 내 귓가를 머물던 때, 내 이름이 들렸다.

"수영 씨? 여기서 뭐해요......?"

내 직장 사수였다. 분명 점심시간이라고, 다같이 먹던 평소와 다르게 바깥에 식사를 하러 갔을 그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학원의 출입문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당혹감이 그의 얼굴에 이미 번져있었다.

"여긴 몇 년 전, 문을 닫은 피아노학원이에요. 전에 말해줬던 것 같은데. 나한테 물어봤잖아. 피아노가 하나 남아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나무 바닥이 삭아서 위험하니까, 얼른 나와요. 발 밑 조심하고."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문가로 걸음을 옮기는 찰나, 몸이 휘청거렸지만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떼는 발걸음이 마치 누군가 발목을 붙잡은 것처럼 무겁고 늘어졌으나, 문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사수는 내가 자기 손 닿는 곳까지 걸어오자 낚아채듯 내 손목을 잡아, 학원 바깥으로 끌어냈다. 분명 들어가기 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것 같은데, 하늘은 어느새 푸른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회색빛 일색이었다.

"그랜드피아노 급은 안되지만 업라이트라도 괜찮으면, 우리 집--아니, 아니다. 여하튼 저긴 정말로 위험하니까 안 가는게 좋아요. 폐건물 관리하는 부서에도 말 해둘테니까."


"오늘 저녁에 그 쪽에 약속이 있으니까, 차 태워줄게요."
그날 저녁, 신나게 퇴근 채비를 하는데 사수가 선수를 쳤다. 차도 없었고, 호의를 거절할 만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기에 그러마 하고 조수석에 그보다 먼저 홀랑 올라탔다.

차 시동을 걸고, 늘 하던대로 음악을 켠 그가 액셀을 부드럽게 밟았다. 신호등 하나를 지나칠 때까지 서로 말이 없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어쩐 일로 그 앞을 지나가신거예요?"
"우연이예요. 시간이 좀 남아서, 걷다가 들어가자 싶었는데 소리가 나면 안되는 곳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으니까. 설마 그게 수영 씨라고는......솔직히, 예상을 약간."

핸들을 꽉 쥔 그의 손등에 핏줄이 솟아난게 보였다.

"아무튼 거긴 정말 위험해요. 바닥도 낡았고, 나쁜 사람이라도 숨어 있었어봐요. 정말로--"
"조심할게요."
"다시는 들어가지 말란 이야길 하고 있는거예요."
"그건......"
"어휴, 정말이지......사람이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귀담아 들어줄래? 부탁이니까."
"그럴게요, 그럼.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 피아노가 좋아요?"
"여기 와서 할 수 있는게 그리 많지 않다는건 알잖아요. 연고도 없고, 차도 없으니 운신도 자유롭지 않고. 그러니 피아노 건반만큼은 내가 여기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존재라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괜찮아질거예요. 아직 여기 온 지 한 달 겨우 지났을 뿐이잖아."
"외로움에 익숙해지는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실텐데."
그 순간, 차가 집 가까이 닿았다. 나는 조수석 문을 반쯤 열었고, 실내등이 켜진 그의 얼굴을 물끄미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일부러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하는 일은 안 할게요. 근처에 일 있다는 거짓말은, 그러니까 굳이 안 해도 돼요. 이미 알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챙겨주는거 싫어하지 않아서. 걱정하도록 두고 싶지도 않고. 그럼, 내일 뵈어요. 운전 조심하시고."
"알았으면 잘 지키겠다고 약속 정도는 해주지? 조심해서 들어가요. 푹 쉬고."
조수석 문을 닫고, 그가 모는 차가 시야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나는 정말로 집에 들어갔다. 잠시 느꼈던 뜻모를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 오르다가, 이내 찬 물을 끼얹은 듯 사그라들었다.

사수는 꽤 오래 교제한 연인과 헤어진지 세 달이 안 되었고, 내가 이 직장에 나타난건 이제 막 한 달이 지났으며, 그의 휴대전화에는 아직도 전 연인의 사진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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