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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습작/아카이브 이펙트] 비 본문
“그 때의 나는, 날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너란걸 몰랐어.”
Music with. 비 / 폴킴
당연하게도 나는 아니었다.
청첩장을 받아들기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절대 연인일 수 없다는 것. 그 모든 따뜻함과 다정함은 잠시 내게 머물렀을 뿐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알고 있었어.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 기억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건 앞으로 온전히 나의 몫일진대.....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한 번은 해 볼 것을.
잠깐 졸았다가 깨어났을 때는, 비가 요란하게 창가를 때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소리에 깨었는가 싶었다. 우습게도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뭔가 슬픈 꿈을 꾼 것 같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어깨 위를 담요로 덮으면, 막 커피를 마신 직후여도 까무룩 잠이 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출근하는 길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던 것 같다. 퇴근할 때쯤엔 그치겠지, 생각하며 유영은 기지개를 켰다. 옆에 두었던 흰 머그잔의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탕비실에 가서 새 커피를 내려 와야지. 잠깐 밖에 나가서 비 내음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복원 기계에 뜬 완료까지의 남은 시간은 30분이었다. 다년간 하늘을 보며 날씨를 때려 맞춰본 경험으로는, 잠시 소강상태였다가 다시 거칠게 내릴 비였다.
탕비실에서 유영은 변덕을 부렸다. 에스프레소 잔이 눈에 띈 것이었다. 캡슐을 하나 넣어 에스프레소를 내린 뒤, 조각 설탕을 세 개 넣었다. 그 사람의 취향이었다. 벌써 연락도 끊고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처럼 지낸지 몇 년이나 지났어도 그가 자신에게 새긴 것들은 여전히 일상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기제원 뒤뜰의 백송 근처에 나가고 싶어졌다.
뒷뜰로 향하는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대지를 적신 비내음이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간 가물었던 것이 아니라, 빗물로 적셔지는 땅에서 살짝 갈라지는 소리도 났다. 시골에서 자랄 적 듣던, 자갈거리는 소리. 천진하게 뛰놀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한 켠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생각나는 법이었다.
늘 마시던 에스프레소와 조각 설탕 세 개로 자신에게 남은 사람.
한 번에 다 마셔버릴까 하다가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 비가 여전히 내리는 바깥에서, 유영은 백송 아래 자리를 잡고 벤치에 앉았다. 촘촘한 나무 그늘 아래는 아직 비가 들이치지 않아서, 비구경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언젠가는 그 사람과 이렇게 비를 구경하던 적이 있었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바다 여행에서였다. 해가 곧 뜰거라며 새벽 어스름이 깔리기도 전 유영의 방문을 두드린 그였다. '다른 녀석들은 안 일어나니까 말이야.' 구름이 짙어 해는 보이지도 않았고 덕분에 비만 잔뜩 맞는다며 유영이 투덜거리던 찰나, 수평선에서 슬그미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저걸 너랑 같이 보고 싶었어,'라고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손수 채비해 온—드물게도 에스프레소가 아닌—커피를 건네주던 모습도. 그건, 그 때까지도 에스프레소에 익숙하지 않던 유영만을 위한 배려였다. '성윤이는 에스프레소 말곤 절대 안 마셔,'라고. 그 사실을 알아 차린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손에 쥔 작은 잔이 온기를 잃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액체를 털어 넣자, 설탕 조각들이 입 안을 날아다녔다. 사탕을 씹어 먹던 습관은 어릴 때 버렸지만 이 때만큼은 와그작, 소리를 내며 설탕을 씹었다. 그 사람은 이런걸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그 사람은 이제 내 곁에 없는데, 이 습관만이 남아 자신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조금만 손을 더 뻗으면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얇은 손목이 내 손에 잡히는 일은 없었다. 조금만 더, 더, 그리 반복하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성윤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새벽녘 희미한 빛에 눈을 떴다.
눈가를 매만지니 눈물이 말라 새하얀 가루가 묻어나왔다. 꿈에서 그리 오열하고 있으면 현실의 그도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어쩐지 이 뒤쪽 길로 가면 그녀가 있을 것 같았다. 십 몇 년간 운동을 하며 단련한 직감은 이럴 때 진가를 발휘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는 위치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그녀를 만나러 간다는 말인가.
“기제원에 서류를 좀 전해주고 와.”
그런 내 생각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황제가 등을 떠밀었다. 서류를 전달해 주는 일 따위는, 굳이 비서실장인 내가 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항상 내 곁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 곁이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 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진짜 감정을 알아차린 순간은, 그녀가 ‘이제 끝내려고 왔어요,’라고 말하며 마주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 때였다. 때늦은 좌절이 일순간 나를 뒤덮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 ‘상실’은 결국 내가 세 번째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하면서 나를 모래판에서 끌어내렸다. 이전 두 번의 부상 모두 유영의 비명이 있었으나, 세 번째는 아무도 없었다. 사고가 난 걸 코치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의사를 올려 보내던 그녀가 없었다. 찢어지는 감각과 고통이 나를 엄습하는 와중에, 눈물로 흐려진 내 눈은 그녀를 찾고 있었다. 없을 것을 알면서도 찾았다.
기제원으로 향하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았고, 금방 그칠 것 같아보이는 비였다. 이 시간이면 기제원의 기록관들 전부 각자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니 서류만 살짝 넣어주고 온다면 유영과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아마도 그래야만 했을 터인데.
백송 아래 눈을 살짝 감은 채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을 눈으로 훑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몇 년의 세월을 건너서도 여전히 나는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다가가서 말을 걸면, 늘 내게 그리 하였듯 하르르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해 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럴 염치가 없었다. 네게 말을 거는 일 조차 너무 미안함이 들어서. 다시 네 세계에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기제원의 사무원에게 서류철을 건네주고 건물을 나서려고 하자, 비가 갑자기 거칠게 쏟아졌다. 아까 하늘을 봐서는 금방 그칠 줄 알았는데, 낭패였다. 우산을 챙겨왔어야 했다.
그렇다고 우산을 빌려 갈 생각도 들지는 않았다. 그냥 맞고 갈 요량으로 정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기둥 뒤에서 사람이 쏙 하고 튀어나왔다. 장우산을 왼손에 든 유영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등장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내게, 그녀가 제 손에 든 걸 건네주었다.
“비 맞고 가면 감기 걸려요, 선배님.”
그리고 유영이 내 앞에서 하르르 웃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 앞에 멍청하게 선 키 큰 남자를 유영이 몇 초간 들여다 보더니 그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위로 뻗었다.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꿈에서 그토록 달아나기만 하던 유영이 이번에는 얌전히, 현실의 온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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