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끄적끄적 본문

Writings/Di 245(BE, AE)

끄적끄적

alicekim245 2021. 11. 21. 15:06

-조금 쉬다가 와. 머리 좀 식히고 오라고.
일을 망쳐 놓고도 상사에게 해외행 비행기 티켓을 받아든 부하직원은 아마 몇 없을거다. 아니면, 이 수많은 승객들을 전부 공중에서 폭사시킬 계획이라던가. 어차피 그 일은 내가 막을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은 아니었으나, 내가 받은 충격을 그가 어림짐작한 것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담당하는 행사에서. 여태껏 단 한 번의 오차 없이 모든 일이 흘러가길 바랐고 또 어떻게든 멱살을 잡아 비슷하게나마 끌고 나갔던 내가 저지른 실수 중, 인생 최악의 일이었다. 그런 사건의 뒤끝으로 쫓겨나듯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있는 신세라니.
"계속, 한숨 쉬고 있네. 알고 있어요?"
비행기 옆 좌석 승객이 내게 말을 거는 일은 흔한 편이었다. 안경을 쓰고 있는 일터에서의 나라면, 말을 누가 걸자마자 일단은 웃으면서 대했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업무 모드를 꺼 둔 상태였으니, 그 말을 듣자 마자 홱-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열 시간은 더 옆에 있어야 하거든."
"이런. 미처 몰랐어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열 시간이나 옆에 앉아있어야 하는 승객은 검은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옅은 회색 정장 바지를 입고, 상의는 흰색 셔츠와 느슨하게 푼 넥타이--비즈니스를 위해 비행기를 자주 타는 타입의 남자였다. 특히 눈동자. 나른한 듯 하면서도 웃으면 매력적일 것 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나로서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그는 사과를 듣자 마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현명한 숙녀로군."
이내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신의 태블릿에 집중했다. 보안필름이 붙여져 있어서 내용은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인쇄된 서류뭉치도 없었기 때문에 정체는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하기사, 비즈니스석에 탄 사람들의 직업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내 신원이 사방팔방 방송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는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여분의 담요와 쿠션, 위스키를 부탁한 뒤 잠시 눈을 감았다. 긴 비행을 잘 버티는 노하우는, 잠을 자는 것 뿐이었다.
출발 전 아무 생각 없이 목덜미에 바른 고체향수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옅은 민트 향이 일랑이는 이 향수는, 흔하디 흔한 제품이었지만 그가 나에게서 이 향을 맡고는 '좋아하는 향이 될 것 같아.'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좋아하는 향수가 되었다.
승무원이 원하던 물건과, 투명한 잔에 위스키를 가져다 주자 옆 자리 남자가 살짝 흥미를 보였다.
"발렌타인?"
"아뇨, 평범한 조니워커 블랙. 이게 익숙해서요."
이런 좌석에 타고 있다고 해서 비싼 좌석을 내 돈으로 척척 구입할 만큼 부자는 아니었으므로, 사실이었다. 소주나 맥주는 한참 전에 질렸다. 소주가 주는 취기, 맥주가 주는 배부름보다는 둥근 얼음 위에 위스키를 붓고 적당히 시간을 죽여가며 약간의 술기운을 즐기는 것이 좋았다. 쉽게 말하면, 어른이 되는 척 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그가 짧게 대꾸하더니 버튼을 눌러 승무원을 불렀다. "이 승객이랑 같은 술로 갖다줘요."
"일 하시는 중 아니었던가요?" 어쩐지 돌아가는 승무원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걸 관찰한 나는 또 뭐람.
나의 퉁명스러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태도의 변화 하나 없이 테이블 위 태블릿을 살짝 접어 커버를 씌우더니, 내 쪽으로 상체를 약간 돌렸다.
"몇 시간이나 서류를 보면 눈이 피곤하기 마련이라, 한 잔 하고 자려고. 그보다..." 살짝 돌린 그의 상체가 이내 내게 가까워졌다. 살포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검은...아니, 연한 갈색 눈동자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좋은 향이 나."
"그렇죠?" 그 때도 이런 분위기의 대화였다. 어느순간, 내게 훅 다가와서는 잊지 못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사람이 내게 이렇게 했었다. 그러니 싱긋 웃으면서 대꾸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같은 유리잔을 가져다 주었고, 그가 날 향해 술잔을 뻗었다. 쨘, 하고 작지만 청명한 소리로 두 개의 잔이 부딪혔다.
"편안한 여정을 위하여. 황금이라고 다 반짝이진 않으며,"
"방랑하는 자라고 다 길잃은 것은 아니다. 톨킨?"
"받아 칠거라고 생각은 안했는데, 내가 마무리할 생각이었거든." 그의 눈가가 매력적으로 휘어졌다. 여자 여럿 홀렸을 것 같은 미소였다. 어쩌면,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홀랑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당신, 왠지 갈 곳 잃은 사람의 표정을 비행기 탈 때부터 쭉 하고 있었어."
그래, 그럴만도 하지. 나는 지금 업무사고를 덤터기 쓰고 해외로 잠시 쫓겨나는 몸이나 다름없다고. 
그의 이상한 위로를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셨다. 달금하게 목을 타고 들어가더니 이내 속에 마치 혈액이라도 된 듯 알코올이 자리잡았다. 그는 자신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가 술잔을 빠르게 비운 뒤 곧장 눈을 감았기 때문에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세 시간 정도를 푹 잤다. 깨어났을 때 남은 비행시간은 여섯시간 남짓이었다. 아까 술을 마신 그 상태 그대로 죽은듯이, 목적지에서 깨어났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비행기는 난기류에 휘말리기 직전의 상태였다. 승무원과 기장이 번갈아가며 곧 난기류에 진입한다고 안내하는 방송이 짜증날 정도로 침착했다.
나도 모르게 좌석 양 옆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새하얗게 질린 오른손 위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닿았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옆자리 그 남자였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져."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은걸까, 아니면 낯선 이 사람이 주는 이상한 편안함이 나를 안심시키고 있는 것일까. 비행기는 몇 분 뒤 난기류 지대를 빠져나왔지만, 그는 몇 분 정도 내 손 위에 더 머물러 있었다. 그러더니 날 보고 씨익 웃었다.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지?"
"그럴리가!"
이런 일이 익숙해진다면 나는 승무원이나 기장을 직업으로 삼았어야 했다. 자주 탄다고, 겪는다고 해도 이건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감각이었다. 나는 롤러코스터도, 자이로드롭도, 바이킹도 끔찍하게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그는 내 반응에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난기류 덕에 잠에서 완전히 깬 나는 결국 한 번 더 승무원을 불러서, 위스키를 부탁했다. 그녀가 친절하게 건네준 두 번째 잔을 마시고 십여분쯤 뒤에 나도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공항에 닿자 마자, 그 남자는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일등석의 승객들보다 빠르게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계속해서, 그 사람을 떠오르게 하는 미소였다. 젠장, 빌어먹을. 고개를 저으며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스쳐 지나가면서 그가 언뜻 내 쪽으로 몸을 살짝 숙여, 향을 맡는 것도 같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 이후론 일반적인 절차였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고, 짐을 찾아, 입국장으로 나서자 미리 예약해 두었던 호텔의 직원이 내 이름이 써진 카드를 들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두 시 도착 일정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호텔에 데려다 주었을 때 팁을 넉넉히 챙겨주었다. 새벽 의전이라니, 그 좇같음을 나도 잘 알지.
체크인까지 마치고, 준비된 객실의 문을 카드키로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장미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누군가 미리 보내주었을 장미 꽃다발이, 유혹적으로......
"유혹적......?"
이런 악취미를 가진 상사나 직장동료가 있을리는 없었고, 친구나 가족에게도 특별히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급하게 출국한 것이기에 벌어지면 안되는 일이었다. 순간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누군가가 머물기로 한 객실에 잘못 들어온 것이거나, 아니면--.
그 때, 다행스럽게도 아직 닫히지 않는 문 뒤에, 나를 안내해 준 급사가 아직 서 있었다.
"손님, 그 꽃은...손님께 온 것이 맞습니다. 카드에 손님의 성함이 적혀 있었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이라도 질렀던걸까, 속에 든 의문을 완벽하게 불식시켜주는 말이었다. 급사가 문을 닫아준 뒤, 나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침대 쪽을 쳐다보았다. 분홍빛 장미가 가득 찬 바구니가 침대 옆 콘솔에 놓여있었다. 푸른색 바탕에 은장으로 인쇄된 카드가 눈에 띄어 손을 뻗었다.
-수요일 오후 7시, 셀렌 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등 아래에서. A에게, F로부터.
이게 만약 어느 소설이나 영화의 일이었다고 가정하자. 그럼 나는 가장 먼저 납치를 떠올릴거다. 하릴없는 평온한 일상을 깨어놓는 범죄의 시작이 바로 이런 류의 일이 아니었던가.
다른 한편으로는, 한편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가로등이라니."
셀렌 강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특별히 내가 보고싶었던건, 시리게 파란 강 위에 뜬 보름달이었다. 바다에 뜬 달도 아름다웠지만 더 아름다운 그 광경을 다시 한 번 본다면, 그 사람과 같이 보았던 바다 위 보름달의 기억도 그걸로 덧씌워질 것 같아서였다.

문장에는 힘이 있다.
그걸 이런 작은 카드 하나로 느낄 거라곤 살아오면서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좌절과 짜증 끝에 나선 해외여행에서는 안 하던 짓을 더 하게 하는 그런 무모함이 있었다. 혹자는, 이걸 마법이라고 하겠지.
오후 여섯시쯤 되자 셀린 강의 가로등이 슬며시 켜졌다. 오랜 세월을 담고 있는 청동 등이 매력적인 빛을 담은 채 곧 지상으로 내려올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 중 하나인 나도 여기 서 있었다. 수요일 오후 일곱 시, 가장 아름다운 가로등 아래에서.
조금 걷고 싶어서 일찍 나온 참이었다. 호텔에서 내내 잠만 자다가, 입욕제가 들어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목덜미에는 예의 '그 사람이 좋아했던'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따뜻한 베이지색의 캐시미어 머플러. 내가 가장 아끼는 머플러였다. 평소였다면 해외에 들고 출장 나오는 것부터 꺼렸을테지만 이건 일단은 여행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가장 보고싶었던 광경을 보는 것쯤 욕심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시쯤 되어가자 퇴근 한 사람들이 모여서일까, 아니면 관광객일까-많은 사람들이 강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옅은 주황빛의 가로등 아래 정처없이 걸어가다 멈추어섰다. 달빛이 강 위로 어렴풋이 얼굴을 비추는 위치였다. 아직 보름이 되려면 사흘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이 날이 아닌건 아쉬웠다. 모처럼 달을 제대로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찾았다."
그 때, 어두운 갈색 가죽장갑을 낀 손이 내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놀라 뒤돌아보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클래식블루 모직코트였다.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어려울 색의 코트를, 짙은 회색 정장 위에 입고 나와 같은 색의 캐시미어 머플러를 두른 모습. 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누가 보아도 어제 비행기를 같이 탔던 그 남자였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바로 여기에. 마치 나를 찾아다녔다는 듯이.
놀란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뻐끔거리기만 하자 그가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가장 아름다운 가로등, 당신이 서 있는 가로등 아래."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남자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샐쭉거리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A에게 F로부터. 내 이름은 어떻게 안거죠?"
"출입국 신고서를 쓸 때 봐 두었지. 이래뵈도 눈썰미가 뛰어나단 소릴 자주 듣거든."
그럼 승무원이 왜 당신만 먼저 내리게 해 준거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알았다간 골치가 아파질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기왕 이런 마법같은 우연이 생긴거라면, 한 때의 추억으로 품고 살아가도 되겠다는 무모한 생각이 나를 잡아먹었다. 그의 눈을 마주보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날 찾아내줘서, 고마워요."

"내 세상에서 그 향을 가진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야."
호텔 객실로 돌아가기 전, 그가 나를 향해 팔을 뻗으며 말했다. 그 넓은 품에 가서 안겼다. 따뜻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향이 났다.
"오늘, 같이 산책해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즐거웠어요."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번호나 이메일 교환도 하지 않은 사이, 이런 우연이 지속될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한 가지가 제일 슬펐다. 마음에 든 이 남자와, 그 보름달을 같이 볼 수 없다는 것.
품에 안은 나를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가 세게 나를 껴안았다. 이 사람도 알고 있을거다, 두 번 다시 이런 우연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아쉬운 것이겠지. 아쉬운 것일까? 나처럼.
그리곤 말 없이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나의 바로 등 뒤에서 문을 닫아주었다. 띠리릭,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마치 마법에서 깨어나는 주문의 소리처럼 들렸다. 카펫은 그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해 주었고, 나는 허무한 기분을 떠안은 채 욕조에 가득 담긴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마법에서 깨어나려면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어쩌면, 곧 떠오를 셀렌 강의 보름달을 보고 또다른 마법에 걸릴 수도 있겠지. 이 저녁의 추억을 안고,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는 환상같은 마법을.

파란 강 위에 떠오른 보름달은 크고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달이 일렁이는 푸른 물 위에 비치는 모습을, 가능하다면, 보석으로 만들어 평생 손 위에 올려두고 보고싶을 만큼 근사했다. 이걸 결국 또, 혼자 보게 되는구나. 몇 년 전에 여기서 이걸 봤던 나도 혼자였고, 바다 위에 떠오른 보름달을 홀리듯 쳐다보았던 나도 결국엔 혼자였다.
강가의 카페에서 달을 보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전에는 저 달에 토끼가 보인다고 말했더니, 믿지 않았었지. 그런 말을 했던 언젠가의 당신은 지금쯤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 혼자인 기분을 나만 느낀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내 결정이고 그 결과였다. 그러니 어른답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것도 온전히 내 몫이었다. 괜히 달을 보러 오겠다고 마음먹었나보다. 과거의 기억들이 잔에 담긴 와인처럼 나를 잠기게 하고 있었다.
셀렌 강에서 함께 웃으며 저녁산책을 하던 그 사람도, 지금은 마법에서 풀려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겠지. 여기서 과거를 떠올리며 스스로 기억의 호수에 빠져든 사람은 나 혼자인듯 했다.
"하우스 와인으로, 한 잔. 레드로 줘."
사람은 목소리를 가장 먼저 잊는다고들 했다. 처음엔 목소리, 그 다음에는 얼굴, 그 다음에는 추억들을. 가장 최근에 들은 목소리라 잊을리 없는 소리가 귓가에 먼저 내리꽂혔다. 일어나서 뒤를 돌아봐야 하나?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잔을 들고 저 쪽의 자리로 옮겨 눈에 띄지 않게 피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가는 가운데,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몇 초가 지났을까, 철제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설마. 아닐거야. 아니겠지.
다음 몇 초가 지난 뒤, 더는 견딜 수 없어 눈을 뜨자 레드와인이 든 잔을 든 그가 내 맞은편에 앉아, 한쪽 손으로 턱을 괜 채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신 향, 안 잊는다고 했지."

'Writings > Di 245(BE, A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훈의 옛날 이야기  (0) 2022.11.13
차현과 태훈의 이야기(습작)  (0) 2022.11.13
회사 선배와 후배, 티키타카 대화들  (0) 2021.03.02
습작(Dec 14, 2020)  (0) 2020.12.14
[습작/아카이브 이펙트] 비  (0) 2020.09.2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