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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머나먼 곳에서

alicekim245 2020. 12. 5. 10:06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듯 하다.

글을 몇 번이고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겨우 아침에 기분이 나아져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언젠가 Swallow Knights Tales에서 쇼메 왕자가 그랬던가. '손으로 글을 쓰는 속도가 생각이 나아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라고. 모니터를 앞에 두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지금 약간 그런 기분이다. 요즈음 몇 글자 쓰려고 생각을 하다 보면 샤프펜슬을 잡은 손이 그 생각의 속도를 못 따라잡는다. 그런데 참 웃긴 것이, 글을 쓰고싶다는 생각이 직장에서 잘 든다. 딴짓은 만병통치약이랬던가.

이것저것 도전해 보고 있는 2020년 12월이다. 올해 초부터 터진 판데믹 때문에 여러모로 아쉬운 한 해로 기억이 되겠지만, 내 인생에서 대격변이 한 번 일어났고 결국 언제나 소리를 지르던 것 처럼 서울을 떠나 바닷가 지역으로 직장도, 집도 이사를 왔다.

나는 서울이 싫었다. 지금도 싫고, 앞으로도 싫어할 것이다.
번잡한 도시의 소음도, 출퇴근길 꽉 들어차는 지하철의 숨막히는 공기도, 아무리 아둥바둥 노력해 봐도 내 몸 하나 편하게 쉴 집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경제적인 좌절감도 모두 서울에 있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까, '아직 젊은데, 당연히 서울이 더 좋은게 아니야?'하고.
서울은 내 고향도 아니고, 내 마음이 머물 수 있는 평온한 곳도 아니고, 오히려 경쟁과 냉정과 복잡함이 버무려진 끔찍한 도시였다.

아무튼 대도시를 떠난 지금은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벌써 이사를 온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전 직장의 근황을 살피기 위해 웹사이트에 들어가기도 했고, 익숙한 얼굴이 언론에 올라오면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래도 4년 가까이 적을 두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내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곳에서의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기억들이 나를 채우겠지만 말이다.

다 좋은데, 넓어진 주거 공간도 한적하고 조용한 공기도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연고가 전혀 없는 지역에 덩그러니 떨어진 사람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라는 것을. 술을 조금씩 늘린 것도 이 핑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달에 친 사고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엣헴).

그래서 이것저것 해 보는 중이다. 한 동안 놓아 두었던 소설책을 꺼내 읽는다던가, 전자피아노로 익숙한 선율을 연주한다던가, 영화를 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운전도 배우는 중인데 악셀로 속도를 조절하는 솜씨는 일품이지만 브레이크 사용이나 커브길에서의 핸들 무브먼트를 좀 더 유의하라는 평가를 받았다. 더불어 운전석에 앉으면 성격이...변한다기 보다는 원래 성격이 욱 하고 튀어나오는건 좀 자제하라는 소리도 들었고(나는 안경을 쓰면 유순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렌즈를 착용하면 인상이 달라진다).

책은, 고전 쪽으로 탐독하고 있다. 허영의 시장을 읽으려고 잔뜩 날을 세웠는데 아직도 레베카가 런던을 안 떠났다. 그러다 읽어버린 것이 에밀리 브론테의 제인 에어였고. 피아노는 여전히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에서 못 벗어났는데, 교재를 몇 권 사버린 만큼 예전에 쳤던 곡도, 새로 치는 곡도 조금씩 해보는 중이다. 대신 아라베스크는 완벽하게 외우면서 곡을 제대로 완성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된다. 강약조절도 어렵고 치다가 정신을 딴데 두면 금방 손이 멈춰버리니까. 그래도 건반 위를 활보하는 이 손가락이 신기할 적이 있다. 어릴 때 배워둔 것이 서른 넘어서까지 취미가 될 줄은 몰랐지.

술은 맥주 대신 위스키(조니워커 블랙)에 탄산수를 타서 한 잔씩 하는 정도로 가볍게 즐기고 있다. 맥주는 포만감이 들기도 하고 다음날이 매끄럽지 못하단 기억이 있어서. 소주는..음, 안주를 제대로 챙겨서 적당히 마시는 것으로. COVID-19 때문에 회식이고 모임이고 다 금지된 상황이라 한동안은 주사라던가 술 마시고 사고 칠 일이 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긴 한데! 지난달 실수가 너무 뼈아팠기 때문에...아, 제기랄.
아무튼 얼음 위에 위스키를 약간 붓고 탄산수로 마무리 한 뒤 한 잔 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기분이란, 서울에선 절대로 느낄 수 없을 그것이다. 확실히 서울에서보다 지금 여유가 더 생겼다. 지금이 좋다. 누구 하나 쯤은 살짝 얹어도 좋을 그런 여유가. 그런데 그럴 일이 없다는걸,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외로움과 슬픔을 지금 가불받아서 힘겨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그 때의 결정을 내린 것은 나였으므로,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다(아마 그 때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지금도 서울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러가지 다른 형태로).

인생 어디로 흘러갈 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라지만 작년의 나는, 이맘때 정말 여기 있을 것이라곤 조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그 때의 직장에서 또 송년회 준비를 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송년회는 개뿔(물론 판데믹은 진짜 아무도 몰랐지), 혼자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혼자 송년의 밤을 기다리는 이 심정이란. 서른 넘어서까지 혼자라니, 이제는 글렀지. 그러니 아예 즐기는 쪽으로 가야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로울 터다. 그래야 좀 덜 비참할 것 같잖아?

2020년 올해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낼까. 근사한 입욕제도, 좋은 술도, 맛난 안주도 오로지 혼자 준비해서 즐기는 그런 밤이 될거다. 물론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내가 기독교인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되겠지. 아마도 혼자, 혼자, 혼자서. 입에 그만 담고 생각에도 그만 두어야겠다. 혼자이면 뭐 어떠랴, 내가 지은 죗값이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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