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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의 이야기

alicekim245 2018. 7. 1. 20:32

“다녀왔습니다,”
집 안에 들어오면 으레 그렇듯이 인사를 한다. 집 안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말이다. 혼자 살기 시작할 때부터 내게는 이 습관이 있었다. 마치, 집 안에서 나를 늘 맞아 주시던 부모님께 하던 인사처럼.
도둑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집 안은 내가 아침에 내팽겨치고 나간 그대로였다. 덜 개진 이불,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베개들, 싱크대 위에 잘 마른 식기들, 티비 한 켠에 고요히 놓여있는 베타 어항, 그 옆 자그마한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모든게 그대로였다.
처음 이사 왔을 적에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휑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몸 굴리기도 힘들 정도로 꽉 채워졌다. 불과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아차, 그리고 공기청정기와 늘 싸우는 모기 향도 있다. 현관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바람이 전-혀 통하지 않는 싼 집의 구조 덕분에 현관을 자주 열어두곤 했는데, 역시 계절이 여름이다 보니 모기 등의 날벌레가 성가실 수밖에 없었다. 예방 차원에서 바퀴벌레 약을 곳곳에 두는 한편 모기 훈증기(?)를 자주 틀어주곤 했는데, 그 때면 공기청정기가 발악하듯이 빨간 색으로 빛났다. 그러니 모기를 쫓아내려면 공기청정기는 잠시 재워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평온해야 할 밤에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칠 수는 없었으므로.
미녀와 야수를 보면 괘종시계, 찻주전자 같은 것들이 생명처럼 움직이는데(실은 사람이 물건으로 바뀐 것이지만) 아마 몹시 오래된 모에화의 기원을 쭉 올라가다 보면 미녀와 야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마른 식기들은 제 자리에 넣어주고, 이불은 다시 깔끔하게 각을 재어 정리한다. 날이 제법 괜찮으면 베개는 베란다에 빨래 건조대를 펼쳐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도 괜찮았다. 청소기로 바닥에 쌓인 먼지를 빨아들이고, 마른 부직포 마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그 위에 물걸레로 싸악-훔치고 나면 제대로 청소를 했다는 기분이 든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다. 제대로 정리하는 방법이랄까, 살림살이 혼자 하기엔 여전히 모자란 솜씨다. 나쁜 말로 하자면 반푼이 같은 실력이랄까.
특히나 내가 나름 정리를 해 둔걸 다른 사람이 보면 늘 정리가 안 되었다는 소리가 대번에 돌아왔다. 여기서 뭘 어떻게 더 치우라는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 나도 소리를 몇 번은 질러보았다.
아차, 화장실. 지금까지는 베이킹 소다를 탄 물이라는 제품을 썼는데 다음번에는 추천을 받은 다른 제품을 사용해 볼까 생각중이다. 머리카락, 그게 가장 문제인 것 같기는 했다. 배수구에 잘 걸려있는걸 매일 주워다 버리는 것도 익숙해질 법 했지만 역시 혼자 살다 보니 귀찮음이라는게 만성화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핑계다).
베란다는 또 어떻더라? 창의 모기장 틈으로 들어온다는 온갖 날벌레를 막아주렴, 하는 심정으로 지금은 세 개의 제라늄 화분이 살고 있었다. 실은, 리시안셔스 씨앗을 파종했다가 하나는 실패하고 그 이후 다 죽은 철쭉 모종이 남아있었다. 화분 흙 같은 경우는 특수 폐기물이라 아직 어쩌지 못하고 잠시 방치중이다. 생각난 김에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죽은 꽃나무는 뽑아내야 할 성 싶다. 제라늄은 손에 묻으면 그 특유의 금속 냄새가 오랫동안 가기 때문에 비닐장갑이라도 끼고 가지를 나누어 주어야 할 것 같다.
여름이라 역시 에어컨이 아까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에어컨까지 옵션으로 있었더라면 딱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긴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베란다에다 실외기를 설치해야 했는데 그 공간을 차지하게 되면 집에서 빨래를 널 수가 없었다. 하나를 포기한 대가로 결국 습고 더운 여름을 나고 있었지만 그거야 앉은뱅이 선풍기 앞에 주구장창 앉아 있으면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다. 현관문 열어두면 바람이 들어오기도 했고.
어디선가 공기가 가벼운 성질이 아니라 끈적하기 때문에 ‘제대로’ 휘저어 주어야 한다고 읽은 것 같은데 지금 내 집의 상황을 보면 그게 딱 들어맞았다. 맞바람을 넣어주고, 선풍기로 섞어주고 해야 비로소 숨 쉴만한 공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온도도 조금 떨어졌고. 현관을 열지 않고 그냥 두는 한여름 집의 온도는 30도까지 치솟는 정도였다.
그래도 여기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퇴근하면 돌아갈 집이 있고, 몸 누일 자리가 있고, 내가 먹고싶은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전에 살던 하숙집은 베란다 대신 창가에 화장실이 있어서, 거기서 씻고 다 하던걸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개선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불만을 가질래야, 과거가 있으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 내 종교의 가르침이기도 했고.
너무 이른 저녁을 먹은 탓인가, 역시 좀 걸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채비하고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잠깐이긴 해도 역시 걸어다니는 것만큼 좋은 운동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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