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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연, 어느 집안의 명절 본문

Writings/Di 245(BE, AE)

청하연, 어느 집안의 명절

alicekim245 2017. 12. 9. 10:20

벌써 몇 시간 전부터, 저택 앞에는 재벌가의 명절 첫날 풍경을 담으려는 취재진들로 북적였다. 무척이나 기분 나쁜 일이긴 했지만 그룹을 이끄는 최 회장이나 금융사를 이끄는 부사장이 크고 작은 발언들로 온갖 기업을 뒤흔든 해였으므로 올해는 어쩔 수가 없었다. 미리 차에서 내려 집 뒷문으로 향하는 수현은, 도휘로부터 정문 상황을 전해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본디 본가로 들어가는 날에는 비서보다는 집안 식구 중 누구와 동행하는 편이었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인한 재활치료를 마치고 나서부터는 집안 분위기가 하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던 고로, 정문에는 잠시 도휘가 나가 있었고 지금 그는 아영과 함께였다. 추석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귀경을 포기해 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겠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최우현 부사장이나 최아영 전무를 만나면 대체 어떻게 태클을 걸어줘야 할지 속으로 생각하느라 수현도 사실 제정신은 아니었다.

한편, 수현을 따라 저택 문지방을 넘은 아영은 가장 먼저 위압감을 느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압도적인 인테리어의 저택은 이 그룹의 창업주인 화헌 최호가 노후에 사용한 저택으로 세간에는 그의 시골 본가를 본따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생전에 아끼던 막내 손주인 수현의 집은 이곳에서 별로 멀지 않았고, 건물의 생김새도 비슷했다. 이를테면 고궁의 전각을 떠올리게 하는 그것. 지리산에 있는 아영의 본가 역시 이곳과 다소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과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니 자연히 주눅이 들었다. 얼른 도휘가 교대해 주었으면 싶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수현은 벤치에 앉아 도휘를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아영에게 들게 했던 서류 가방을 받아 다시금 문서 몇 장을 읽어나갔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영도 알지 못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휘도 안으로 들어오자, 아영은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함께 일하게 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아영은 도휘에게 꽤나 의지하고 있었다. 서류 처리능력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수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 할 줄 알았다. 운전이라던가, 자잘한 일들도 두말하지 않고 하니 과분할 정도로 – 오히려 아영이 그만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작 수현은 아영을 해고할 생각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새로 결혼한 먼 친척 여자가 수현을 알아보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옆에는 남편이란 사람이 함께였는데, 그를 알고 있던 아영이 흠칫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일부러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상하게 여긴 도휘가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말하지 않으려고 애써서 차마 대답을 얻지 못한 그였다. 그 부부가 집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아영은 꽤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후 손목시계를 흘끗 들여다 본 수현은 도휘와 아영에게 자신의 집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남긴 뒤 자기도 본가 건물로 들어가버렸다.

뒷문으로 나와 수현의 자택으로 향하던 중, 아영이 어렵게 –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그 여자의 남편이란 사람은 강민형 검사이며, 예전에(아영이 수현의 비서로 근무하기 한참 전) 자신과 교제하던 사이였다고.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자 마자 아영에게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휘는 기가막힌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남녀의 일이니 타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음은 당연했어도, 우연이 지나치다는 생각이었다. 본인의 지금 위치를 생각하면 애당초 과분한 사람이었다고, 마무리를 지은 아영은 조금은 홀가분 하다는 듯 수현의 집으로 향했다. 사실 아영은 처음 민형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검사가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우연찮게 알았지만 이렇게 마주한다면, 만약 그가 자신을 알아본다면 분명 비웃을 것만 같아 그게 두려웠다. 너는 결국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다고, 그가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영을 알아보지 못했고 – 아니, 애초에 비서 따위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 갑작스런 재회는 만남이랄 것 까지도 없이 바람처럼 지나가버렸다. 차라리 이 편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던 아영은 도휘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는 사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현의 자택은 주인이 머무는 본채 외에도 별채가 따로 붙어있었다. 예전 주인은 입주 가정부를 여기서 머물게 했지만, 지금은 객실로 쓰이고 있었다. 이따금 서류를 가져다 준다거나 술에 취한 수현을 데려다 주느라 본채에 들어가긴 했어도 별채에 발을 들이는 일은 처음이어서 아영은 약간 들뜬 마음을 겨우 감추고는 거실에 들어섰다. 곁에 붙은 작은 공간이기는 해도 구색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기로, 거실 하나에 욕실과, 침실 두개가 있는 일반 가정집이나 다름아니었다. 본채와 별반 다르지 않게 꾸며져 있기도 했다.

넥타이를 풀어 느슨하게 해 둔 도휘는 아영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켓을 받아다 옷걸이에 걸어주자 당황했지만, 아영에게는 습관이나 다름아니어서 이내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물잔 두개를 꺼내 정수기 쪽으로 갔다. 그래도 아영은 구두를 벗고 편하게 있을 수 있어서 이 잠깐의 여유가 감사했다. 수현이 차례며 가족 회의까지 하고 나면 아마 저녁 늦은 시간이 될 것 같았고 – 십여분 뒤 문자로 정말 그럴 것 같으니 알아서 식사도 해결해 달라는 연락이 수현으로부터 도착했다. 사무실에서야 둘이 함께 근무를 했으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지만, 이런 가정집 같은 분위기에서는 처음이라 묘한 기류가 실내에 흐르기 시작했다. 아영은 자연스럽게 TV 리모콘에 손을 뻗었다.


차례상을 차리는 것부터 삐걱댔다. 최 회장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물건을 던지고 난리가 났을 법한 과격한 흐름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특히 수현과 거리를 두려는 친척들의 움직임이 실로 대단했다. 최우현 부사장이 이미 손을 써 둔 덕인지 친지들 사이에서 수현의 입지는 무척이나 좁아져 있었다. 아마 최 회장이 수현이 ‘창업주의 유언 집행인’임을 상기해주지 않았다면 진즉 지위고 뭐고 다 빼앗기고 쫓겨 나갔을 듯한 분위기였다. 수현은 속으로 비웃음을 애써 삼켰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에게 조금은 원망의 마음도 들었다. 그리 귀애하실 요량이시라면 살아날 방도도 마련은 해 주셨어야지요, 그런 생각이었다. 다행이도 차례는 별 탈 없이 치를 수 있었고, 보도 자료용 사진을 찍은 사진 기사마저 자리를 비우자 그제야 거실이며 각 방에 식사를 위한 상차림이 차려졌다. 수현은 다른 남자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거실에서 상을 받았다. TH그룹을 이끄는 최 회장과, 그 형제와 조카들 중 회사 지분을 가지고 있는 실무자들이 거실에 둘러앉았다. 상을 물리고 술이나 차를 내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최우현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올해 추석에 이렇게 모여준 것에 대한 미려한 감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종내에는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재활치료를 마치고 너끈히 업무에 복귀한 수현에 대한 찬사가 나왔다. 별로 달갑지 않은 말들이어서 수현은 이렇다할 반응을 하지 않았다. 수현은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긴 유언은 시기가 되어 몇 가지 그대로 수행했음을 알렸다. 또다른 유언 집행인이기도 한 최 회장은 수현이 건넨 서류를 받아 읽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미가 궁금해 우현이 조바심을 냈지만, 그런 장남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회장은 아무 말도 그에게 건네지 않았다. 회사 경영의 중점은 '사람'이라고 말한 창업주의 뜻을 절대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회장은 이후의 일정이 있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틈을 타 우현은 수현을 끌고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아현이 그를 찾아갔을 때 보인 행태를 책망하려고 들기에 수현은 아현의 말도 안되는 요구 사항과, 그녀가 사무실에서 한 일들을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우현이 보기에도 친척이라는 이유로 하기에는 가당찮은 행동이었기 때문에 – 그는 수현의 반박을 반박하지 못했다. 덧붙여 회사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으니 본인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쏘아붙인 수현은, 다만 자기 사람들을 건드리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남긴 뒤 우현을 버려두고 방을 나섰다. 근처에서 아마 엿듣고 있었을 아현을 한 번 노려본 수현은, 왠일인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먼 친척 여자와 다시 한번 만났다. 남편과 함께였다. 자신을 검사인 강민형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잘 부탁드린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반응하기도 귀찮았던 수현은 부부를 아예 무시한 채 복도를 통과했다. 무엇보다 아까 민형을 만났을 때 아영이 보였던 반응이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그녀에게 술을 먹였을 때 말해주었던, 그 전 애인이 아닌가 싶었다. 이상하게 술을 먹으면 쓸데없이 솔직해져서 자신이 기를 쓰며 숨기려고 하던, 혹은 알고 싶지도 않던 과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영이 바로 그런 편이었다. 지금쯤 자신의 집에서 조금은 쉬고 있을까, 생각하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벽옥과, 조부가 가지고 있던 그녀의 만년필이 떠올랐다.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할 물건 탓일까 – 아영을 생각하는 빈도가 잦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이나 여러 방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예의 친척 여자가 '무시당했어,'라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곳은 질색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자기가 여기서 살 때 쓰던 방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 점은 즐거웠다. 조부가 사망하기 몇 해 전부터 쭉 수행을 맡은 덕분이었고, 최 회장이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무사한 공간이기도 했다. 회장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진즉 싹 갈려나갈 방이었다. 깨끗한 리넨 향이 나는 침대 위에 털썩 드러우누며 넥타이를 풀자 답답함이 조금은 가신 듯도 했다. 할아버지가 지금 자신과, 가족들을 보신다면 과연 뭐라고 하실까.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것은 전부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보면 손에 넣지 못한 것도 꽤 많았다.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술을 마시고 뻗기에는 너무 이른 낮이었지만 집안이 술에 잠식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이 아니면 잠시라도 잊기 어려운 것들을, 주신의 힘을 빌어 내려놓는 시간이었다. 누구를 위함인지는 모른 채로, 끊임없이…끊임없이.


도휘가 편의점에서 장을 봐 오는 사이, 아영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요 며칠 수현 때문에 야근을 했으니 피로가 누적되어 있던 것이다. 도휘는 침실에서 담요를 찾아내 아영을 덮어주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나니 왠지 퇴근 후 아내에게 식사를 만들어주는 남편이 된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났다. 평범한 사람이 추구하는 소소한 행복이란게 이런걸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그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일들을 하고 있어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러고 있는 목적은 아영의 감시이긴 했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만 있으면 도휘 자신만 피곤해질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만일의 사태에는 대비해야만 했다. ‘어째서’ 아영인지는 아직도 도운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도휘가 요리를 하는 동안 슬그미 잠에서 깨어난 아영은 온 몸이 뻐근함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압착기로 자신을 짜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도휘가 불 앞에 서서는 앞치마까지 두르고 열정적으로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아영은 슬그머니 옆으로 가서 도휘의 손을 덜어주었고,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했다. TV에서는 추석 특집이랍시고 온갖 파일럿 예능이 나오고 있었으니, 그 속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이 적막한 별채에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설거지는 아영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릴없이 TV앞 소파에 앉은 도휘는 아영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리모콘에 손을 뻗었다. 수현은 아마 오늘 오후 내내 본가에 갇혀있을 터였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므로.

설거지를 마친 아영은 자연스럽게 도휘 옆에 쿠션을 껴안은 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서실에 일하면서부터 도휘는 아영과 마찬가지로 휴일이 거의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 도운만큼이나 그녀는 그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이어서 이제 어색하지는 않다고 – 적어도 도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일 없이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드문 일이다 싶었다. 수현이 언제쯤 집으로 돌아오려 할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언제나 부재중인 상사의 뒷담화는 즐거운 일이었다.


어스름이 깔리자 창업주의 유택도 슬슬 한산해지는 분위기였다. 가사를 돕는 아주머니들이 설거지며 청소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수현은 슬금슬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수행기사에게 팔을 두른 채 퇴장하는 모 계열사 사장이라던가, 취한 남편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사모님이라던가 – 흥미로운 인간 군상을 눈에 담으며 수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 틈바구니를 빠져나왔다. 이제 슬슬 나가도 될 것 같았다. 도운에게서는 도휘가 아주 요리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바람같이 들이닥쳐서 요리를 내 놓으라고 땡깡을 부려보고 싶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한 기분도 남아있었는데, 무엇보다 명절 다운 명절을 못 보내게 회사 일에 붙잡아 둔 탓이었다.

집을 나서려다 예의 검사라는 사람에게 잠깐 붙들린 수현은 민형의 입에서 아영의 이름이 나오자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 사람이 어째서 자신의 비서를 알고 있는지 의아했다. 아까 아영의 반응을 생각하면 답은 자명했지만 말이다. 아영이 잘 지내는지를 묻는 민형의 얼굴은 뻔뻔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수현은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비서로서 일을 잘 해주고 있다고 하고는, 사위로 들어왔어도 회사 일엔 관여할 생각 접으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이 집에 사위니 며느리니 해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유독 회사 일에까지 손을 뻗으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걸 조부는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을 수현도 닮은 것이었다. 수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 여기가 더 짜증나는 부분이었다 – 민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사다망한 사람을 사소한 일로 붙잡아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이내 제 갈길로 가버렸다.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본가를 빠져나와 제 집 대문을 넘는데도 수현은 제 몸에서 열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늘 어둡던 별채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생소함이 몰려들어왔다.


수현이 올때쯤 되겠다 싶어 미리 저녁을 준비 중이던 도휘는 오후 다섯시가 채 안되었을 때 정말로 그가 별채로 성큼성큼 들어서자 조금은 놀랐다. 아영은 도휘 옆에 서서 그의 재료 손질을 돕는 중이었다. 왜 별채에서 이러고 있냐고 한 소리, 타박을 날린 수현은 별채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요리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부엌이 좁은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는 거실로 밀려났다. 아영과 도휘가 도란도란 요리하는 모습에 다소간 질투가 났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으니 재혼이나 서두르라는 이야기를 피하고 있었는데 막상 저 모습을 보니 결혼 생각이 슬그미 떠오르는 것이 본인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금은 저런걸 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았다. 방금 전만 해도 온갖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견디고 있었으니까.

도운이 장담한대로 도휘의 요리 실력은, 경력이 없는 자취생 출신이라 해도 꽤 대단했다. 세 사람이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왠지 기묘한 가족 느낌이 나서 수현은 웃음을 속으로 감추느라 꽤 고생을 했다. 아영은 더는 일이 없으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도휘가 아까 사 온 술을 잔뜩 꺼내는 바람에 그녀의 퇴근은 요원해졌다. 두 남자 – 도휘와 수현 사이에 주량 배틀이 붙어버리자 순식간에 빈 술병들이 늘어났다. 아영 역시 그 틈에서 지지 않고 술을 들이켰는데, 수현은 또 아영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 그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도휘가 틈틈이 끼어드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본가에서는 술 마시는 친척들이 그렇게도 꼴보기 싫었지만 정작 본인이 불콰한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제 자신이 한심하고 우습게 느껴지는 수현이었다. 나름 말술이라고 자부하던 수현은 도휘의 어마무시한 주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후 열두시쯤 되면서는 방 안에 있던 양주가 거덜이 났고, 아영은 진즉 패배했기 때문에 숙취 해소제를 미리 먹이고 침실에 넣어둔 뒤였다. 남자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조금 서글프단 생각도 떠오르긴 했지만 자리는 유쾌했고, 편안해서 좋았다. 적어도 도휘 앞에서는 체면을 차린다거나 상대를 예리하게 파악해 비수를 꽂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술자리는 수현이 백기를 흔드는 것으로 끝이 났고, 그 때까지도 멀쩡하던 도휘는 그에게도 숙취 해소제를 챙겨준 다음 본채 침실에 데려다 놓았다. 수현은 취해서 헤롱거리는 와중에도 아영이 구토하다가 질식사 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 달라는 지시를 잊지 않았다. 취한 사람이 별 소리를 다한다며 한 번 타박을 놓고는 그러마, 하고 약속한 도휘는 그의 상태를 한번 확인한 다음에 별채로 돌아왔다. 수현이 신경쓰이는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아영이 제대로 자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이 아영은 토한다거나 하지 않고 푹 잠들어 있었는데, 그녀가 주량의 한계를 넘기기 전에 아예 술잔을 뺏고는 재워버린 것이 주효한 듯 했다. 마치 연인에게 하듯 도휘는 아영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려주고는, 이불을 제대로 덮었는지 확인하고 다시 본채로 건너갔다. 제 주량 채우기도 전에 잠든 아영보다는 수현 쪽이 오늘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술보다는, 제 속에 들어앉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고 본인은 그걸 잘 숨기고 있었지만 그게 제약없이 풀어질 때가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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