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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청하연, 도운의 독백 본문
차가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잠시 인간의 모습을 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드물게 느껴지는 감각에 도운은 미간을 좁히며 도어락의 번호를 능숙하게 눌렀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대문이 열렸다. 인재경영실 팀장으로 승진한 이후로 살인 사건에 휘말렸던 과거의 집과는 아예 이별한 아영이었지만, 서늘한 대리석으로 꾸며진 집은 애초에 사람의 온기가 닿은 적 없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그 날 아침, 아영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빈 집을 두고 나가면서 오늘도 별로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로 마지막이 되겠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음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자기가 해고한 직원이 칼을 들고 달려들던 그 순간, 아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해 순간의 CCTV에서 그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얌전히 서 있던 것을 떠올린 도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거실에 들어섰다. 은색 금속으로 받침을 짠 검은색 가죽 소파와, 대리석 바닥 위에 놓인 푸른색 카펫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진 커피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달라진 자신을, 자기도 견디기 어려웠을거다. 최 회장이 내민 손을 잡은 그 순간 그녀는 사도에 끼어든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도운이 그녀의 죽음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귀왕 비형랑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도운은 아연실색했다. 크로노스 나이츠의 요청을 받고 아스트리드 경의 파편을 회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파편이 일으킨 사건에 아영이 휘말리는 것을 자기가 막아섰던 것이, 아영을 죽이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사실 그녀의 집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온 지금도 믿고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도운이 아닌, 인간인 수현이 아영을 그 살인사건에서 구해주었다면 아영은 변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 도운의 가슴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처음엔 아영이 최희완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수현을 향한 감정이 확실하지는 않아도 아영은 수현의 비서로서 곁에 남아줄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탓일까. 의아함을 여전히 품은 채, 도운은 수현이 아닌 아영의 곁을 지키고 섰다. 불안했다. 승진을 거듭하고, 위세를 떨쳐갈수록 더해가는 아영의 불안과 괴로움을 도운은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과거 인간이었던 적은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저편으로 멀어져서 온전히 아영을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안타까움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옆에서 다 지켜본 도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그가 수현을 떠나지 않고 비서로 남아있던 것이 납득이 갔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사건 이후로 시간이 멈추어버린 조간신문이 놓여 있었다. 아마 그날 아침, 아영은 신문을 읽으며 차를 마셨을 것이다. 어떤 업무를 처리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앞으로의 업무 방침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궁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장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영을 곁에서 도와주며 느꼈던 괴로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나날이 바뀌어가는 자신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자책하는 수현을 알고 있었을테니까. 서로 말은 제대로 할 기회도 없이 짝사랑이 아주 제대로 엇갈려버린 셈이었다. 누구든 한 쪽이 나서서 고백이라도 했더라면, 이 사랑을 지켜보기만 했던 이의 가슴이 이렇게 찢어질듯 아플 수 있기나 했을까. 도운은 신문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만약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멀리 돌아갈 지언정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기회는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계를 벗어나 이미 명계에 속한지 오래이긴 했어도 그런 것조차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감정을 망각한 적은 없었다. 사방이 냉기로 가득한 이 집에서, 차라리 스스로를 죽이기로 한 아영은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망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손에 들어오기 시작한,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법한 것들을 보며 아영은 더한 절망감을 느꼈을 터였다. 결국 이렇게 미치지 않고서는 하나도 이룰 수 없는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아영은 정작 원하는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침대 옆 콘솔 위에는 작은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영의 사망으로부터 수 일이 경과한 시점이라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도운은 그 상자를 들어 작은 종이가방에 집어넣은 뒤, 침실을 둘러보았다. 호텔을 연상하게 하는, 흰 커버를 씌운 침구는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베갯잇에 살짝 손을 대 보았다. 건조한 탓에 바짝 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지만 정작 여기엔 눈물이 가득 적셔져 있었다. 그리던 님이 강 저편으로,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오열한 그 꿈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모닝콜에 겨우 눈을 뜰 때, 눈가에 남은 눈물을 손등으로 쓸어내며 아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울다가 깨어났을 그 수많은 날들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려 나가보니 새하얗게 탈색 된 수현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도운을 보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는 않았다. 아영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남의 눈은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데다, 장례식장에선 이미 죽은 아영의 부모님을 대신해 상주 노릇도 한 그였다. 주변에서 그렇게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수현은 그예 며칠을 밤을 꼬박 새 가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도운은 수현을 썩 좋아할 수는 없었다. 친구였던 홍계수가 부탁한 그 손녀를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으므로, 그에 따른 죄책감을 그에게 전가하려는 심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고 싶었다.
도운은 말없이 그에게, 아영의 침실에서 가지고 나온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아영이 그를 위해 오래 전 준비해 두었다가 끝내 전하지 못하고 남아버린, 수현에게 전달되어야 할 그의 생일 선물이었다. 언젠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달을 부탁한다고, 아영이 도운에게 지나가듯이 말했던 물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플라스틱 봉투에 담긴, 피가 약간 묻은 스카프가 수현의 손 위에 떨어졌다. 아영이 살해당할 때 목에 두르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녀가 최수현 전무이사의 비서로 근무할 때, 수현이 생일선물로 준 스카프였다. 아영은 끝까지 알지 못했지만, 수현이 아는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만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물건이었다. 바로 그걸 알아본 수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도운은 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아영의 집을 나섰다. 더는 인간의 모습을 빌려 하계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강림도령처럼 인간으로 얼마동안 살아야 하는 벌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껍데기를 훌훌 벗어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되었지만, 그는 아랫입술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문 저편, 집 안에서 수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까웠고, 그도 슬펐지만 그 슬픔을 나누어 받을 수는 없었다. 수현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TH그룹의 신년 하례회는 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 성대했다. 문화사업 계열사의 전무이사가 아닌, 면세점 사업의 사장으로 복귀한 수현은 단상에 올라가 파티에 참석한 임직원과 내빈들에게 인사 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수트의 모양새를 체크하고, 넥타이 매무새를 다듬느라 거울을 한 번 들여다 보았다. 슬슬 나이가 얼굴 위에 내려앉는 것이 눈에 띄였다. 문화재단에서, 창업주 화헌 최호의 콜렉션을 공개할 미술관 개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영자의 위치로 복귀하는데는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아영이 최희완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재경영실로 이동해 팀장에 오른 시간과 같았다. 그녀는 그 다음 해의 신년 하례회로부터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다. CCTV를 통해 똑똑히 확인했던 아영은, 자신을 덮치는 죽음 앞에 마치 인형처럼 서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하며, 자신의 몸 속으로 파고드는 그 차가운 감각을 느끼며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수현은 한숨을 내쉬다가, 거울을 다시 보고는 일부러 환하게 웃어보였다. 아영은 거울을 보면 일부러 미소를 짓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가도 자신에게 격려가 된다고.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한다며 타박을 했지만 지금 와서는 수현이 그러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까지고 늪에 빠져있는 것을, 만약 아영이 살아 있었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갈 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 길을 걸어 보이겠다고 다짐한 뒤, 사방을 적으로 만드는 것마저도 감수하고 여기까지 다시 올라왔다. 아영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친척 여자 하나를 사회에서 매장시켜버렸고, 그 남편이었던 사람도 최아현 면세점 사업부 사장과의 불륜 건을 터트려서 그룹 승계구도에서 제거했다. 또한 그녀의 탈세와, 연예계 스캔들을 이용해 그 사장 자리를 수현이 차지했다. 갑작스런 수현의 행보에 최 회장마저 당황했지만 그를 막지는 못했다. 아마도 절망감 속에서 악으로 기어 올라온 이의 적의를 그도 느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수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그의 손에서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로.
아영이 여전히 자신의 곁에 남아 주었다면, 넥타이 핀이 비뚤어졌다고, 행커치프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하며 모양을 다듬어 주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할 그녀는 더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지만 수현은 더는 남들의 뜻대로 자신을 숙이고, 남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을 것이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아영은 수현이 선물해 주었던 그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를 다시 바로잡는데 손끝에 넥타이핀이 걸렸다. 도운이 아영의 집에 자신을 불렀을 때 건네준 그 선물 상자에 들어있던 물건이었다. 본인에게 미처 전해지지 못했던 편지도 함께였다. 아영이 그의 생일 선물로 준비했던 것으로, 아영이 죽고 나서야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착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때 달겠다고 결심했었다. 넥타이핀도 함께 위치를 조정한 뒤, 수현은 사회자의 호출에 맞추어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지 않아도, 적어도 함께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갈 수는 있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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