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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Di 245(BE, AE)

청하연, 수현의 이야기

alicekim245 2017. 12. 9. 10:19

애초에 그와 정 회장의 차녀인 은희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다. 이면에 수현은 전부 파악할 수 없는 내밀한 거래가 오갔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된 은희는 겉보기에 참하고 온순한 데가 있어 그나마 친척들 사이에서는 잘된 일이 아니냐는 평가가 오갔지만, 매일을 같이 보내야 하는 수현에게는 지옥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측은지심으로 인해 ‘다정한 남편'의 연기를 한 달쯤 해 주었지만, 이내 은희가 제 성정을 드러내면서 수현은 연기를 그만두었다.

집안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려는 장모와, 거기에 휘둘리는 은희는 유순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집안에서는 패악을 부리기 일쑤였다. 언젠가 수현은 친구들이 있는 술자리에서, '이럴 거면 결혼 안한다고 버티는게 나았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외부에서는 단아한 사모님으로 능숙한 연기를 펼치면서도 은희는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진다거나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운전 기사의 뺨을 때리는 추태까지 저질렀다. 그나마 그녀가 수현의 눈치를 보았기에 그의 면전에서는 음전한 부인의 연기를 하려고 애썼지만 수현은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때마다 그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과를 하느라 완전히 그녀에게 질리고 말았다.

부부의 행동이 완전히 상극이니 사이에 아이가 생길리 만무했다. 은희가 수현의 아이를 낳게 해서 최씨 일가와의 사이의 관계를 굳건히 하려고 했던 정 회장과 그 부인은 조바심을 냈다. 아이가 잘 들어선다는 약을 은희에게 꾸준히 먹이고, 절에 불공을 드리는 등 유별에 유난을 떨었지만 전부 허사였다.

그런 은희도 한 번은 유산을 했다. 그녀가 외도 중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상대가 누군지도 수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덮어두고 은밀하게 처리했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수현은 은희를 부인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다. 의도된 교통사고로 수술을 하면서, 본인은 사건에 대한 진상을 전혀 모른 채로 아이를 잃어버린 은희는 그 사실을 의사에게 전해 듣고도 울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으므로.

유산 이후에도 둘의 결혼생활은 아슬아슬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수현이야 상관은 없었지만 은희는 이혼할 수가 없었다. 정 회장의 기업이 부진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치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은희로 인해 자신의 삶에 잡음이 생기는걸 원치 않았던 수현이 외부로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은희는 점점 기상천외한 짓들을 벌이며 종내에는 최희완 회장의 귀에까지 그녀가 벌인 사건들이 들어가고 말았다. 최 회장은 둘째 아들인 제현을 시켜 기자들이 절대로 은희와 관련된 일들을 기사화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지만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 조카며느리가 벌이는 일들이 점차 스케일이 커져가자 최 회장은 가문의 위신과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부인의 패악질에 질려 집에 들어오기 싫어진 수현은 아예 조부 유택 근처의 한옥을 사서 거처를 거기로 옮겨버리고 은희가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모가 수현의 회사 집무실에 들어와 자기 딸을 책임지라며 난리를 쳤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안팀을 불러 장모를 사무실 바깥으로 끌어냈다. 그걸 다 지켜보고 있던 전략기획실의 이도운 팀장이 며칠을 최희완 회장의 집무실에 드나들었다.

그 사건이 있고 세 달 뒤에, 수현은 백부의 호출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정 회장이 경영하는 그룹의 모회사가 정치인의 뇌물 스캔들에 휘말려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증거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여 정 회장은 재기가 불가능할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언론 보도를 접하고 최 회장에게 '당신의 짓이냐'라고 대놓고 물은 수현은 어깨를 으쓱할 뿐인 그에게 공포심을 느꼈다.

수현의 장인 정 회장의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아버지의 기소 소식으로 인해 불안이 최고조에 달해있던 은희의 귀에, 최 회장이 수현의 재혼상대를 물색중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그 말을 듣고 공포감과, 분노에 휩싸인 은희가 한밤중에 그의 자택에 들이닥쳤다. 어떻게 자기한테 이럴 수 있냐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를 보고 수현이 면전에서 대놓고 혀를 찼다. 지금까지 버텨주었던 자신에 대한 칭찬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리 언성을 높이는 걸 보니 그간 참았던 시간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기인한 측은함에 조금은 신경을 썼지만 이제 은희는 완전히 수현의 눈 밖에 난 것이었다. 이혼은 절대 못해준다고 소리를 지르는 은희를 바깥에 세워둔 채, 수현은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바깥에서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결국 수현이 부른 경호원에 의해, 자기 어머니가 그리 당했듯이 거칠게 끌려나갔다.

수현은 그날 밤, 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 말이 나왔던 그 계획을 실행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적대관계에 있던 수현과 우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뜻이 맞은 안건이었다.

정 회장의 징역이 확정되기 직전, 은희는 해외 여행을 나갔다가 호텔 근처의 바다에서 일어난 선상 사고로 사망했다. 당연히 정 회장 측에서는 딸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걸 증명할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수현은 은희의 장례식장에서 진심어린 눈물을 연기함으로써 혐의에서 멀리 벗어났다.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한 탓에 증권가에서는 살인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돌아다녔지만 사고라는 것으로 수사가 종결되었고, 정 회장이 가지고 있던 기업이 공중분해 되면서 은희는 세상에서 아주 빠르게 잊혀졌다. 수현의 기억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억하는 전 부인과의 결혼 생활은, 그가 다정한 남편의 연기를 했던 그 한 달 뿐이었다. 아영이 죽고 나서는 그나마도 거의 떠올리지 못했다. 수현의 세계는 지금 온전히 아영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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