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시 삼십 분. 이 생활을 한 지도 십수년이 지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해가 길어지는 여름에도, 밤이 긴 겨울에도.
샤워를 하고, 머리카락을 말리고, 셔츠를 입고, 커피가 내려지길 기다렸다가 한 모금씩 마시며 매무새를 다듬는다. 오늘은 짙은 녹색의 넥타이. 손끝에 닿는 넥타이의 촉감은 늘 차가웠다. 실크를 만졌을 때 손에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은 언제나 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애초에, 속이 끓을 만큼 감정적인 경험을 할 일이 없었다. 업무는 늘 한결같았고, 그에 따라 내 일상도 늘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출근해서는 총무과에서 올려준 회의 일정을 한 번 체크한다. 업무용 태블릿은 있지만, 회의 일정들을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이 차라리 더 편안했다. 특수인원관리국의 본부장의 업무는 사실상 대외적인 일들이 주류였다. 마법사의 존재를 일반 사회로부터 감추는 한편, 그들이 우리를 속박하거나 해치지 않도록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일. 도선골을 위시한 주류 마법사 세계에서는 정부의 부역자 소리를 종종 듣곤 했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 같은 소릴 들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특수인원관리국이 없었다면, 이미 정부에 의해 실험대상이 되어 부자들의 영생을 위한 영약으로 쓰였을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 그냥 우습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지켜준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보호받는다는 느낌보다는, 그 사람들이 마법사로서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관리국에 들어왔으니까. 그때, 어른들이 조금만 더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 지루한 관리국에 갇혀서, 정부 인사와 끊임없이 협상하고, 마법사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는 일과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온전히 연구에 몰두했을 수도 있었다.
손가락을 톡톡, 책상 위에 두드려가며 회의 전까지 결재 문서를 전부 확인했다. 배가 고픈 듯도 했지만, 따뜻한 머그에 든 커피 한 모금으로 충분했다. 업무 중에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번 예산 요구 범위는 너무나도 말도 안되는 금액입니다.”
“정부에서 도선골에 요구하는 물품은 그럼 말이 되는 범위입니까?”
또다시 이런 흐름이다. 정부는 마법사를 어떻게든 통제하고 싶어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이용하고자 한다. 국가에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전쟁에서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마법사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들을 속박하지 말라는 비밀 협약에 강제로 서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마법사를 인정해주는 대신, 강력한 ‘기록’이란 제약을 들이밀었다. 정부의 방침을 어기고 자유롭게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대가는, 기록 삭제였다.
그깟 기록 삭제란 페널티가 무슨 의미냐고 패기있게 도선골을 뛰쳐나갔던 젊은 마법사들 대부분은,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어진 자신의 처지를 겪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에 이르곤 했다. 어떤 의료 서비스도 받을 수 없고, 정식으로 여권을 발부받을 수도 없으며, 다녔던 학교에도 모든 정보가 남아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태어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다. 정부의 기록 삭제란, 세상 어떤 시스템에도 그를 남겨놓지 않는 무서운 종류의 ‘형벌’이었다. 정부는 그런 식으로 마법사를 충분히 통제하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유로울 것 같은 마법사를, 그렇게 손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루한 회의는 결국 ‘자료를 보완’해서 다시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루에 네 번이나 회의를 잡아버린건 아마도 신무영의 농간이었다. 총무과에 버티고 있는 그 남자는 솔직히, 인간의 감정이 나보다도 더 없는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나긋한 말투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 어떤 담대한 인간도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또다시 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진절머리를 내다가도, 그가 건넨 서명판을 받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또 뭔가.”
한참 위의 ‘맏형’이었지만 이미 무영은 나의 그런 말투에 적응해 있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실, 그가 감정을 내보이는 일조차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진짜 웃음소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시계를 흘끗 보니 오후 여섯 시 삼십 분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아마 퇴근한 뒤 한참일 것 같았다. 무영은 그럼에도 아주 당연하게 나를 찾아 본부장의 집무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이 시간에는 어지간해선 퇴근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 것이 전부였다. 일은 어째서 하면 할수록 계속 쌓여가는 것일까. 이것도 그를 축출하고 손에 권력이란 걸 쥔 대가인 것인가.
“권차현씨가, 네 비서인걸 잊은 건 아니지? 다이렉트로 총무과에 뭘 요청하는 일 좀 줄여주면 좋겠는데.”
이 평온한 하루에, 무영이 ‘권차현’이란 이름 하나로 돌을 던지자 가슴 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마법사이면서 제대로 마법도 못 쓰는 반푼이 여자. 그 여자가 마력차단이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지 않았더라면 어디 한직으로 내쫓아 눈에 띄지도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무작정 관리국 안에 풀어두는 것은 위험했다.
이관현이 아직 건재했다. 그가 차현에 대해 안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권차현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마력 차단은 이미 소실된 능력이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권차현의 순간이동이 실패한 이후, 과거의 기록을 찾다가 그 능력이 왜 자연스럽게 없어졌는지 알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녀가 신경쓰이면서도, 신경쓰고 싶지 않아졌다. 현존하는 마력 차단 마법의 기초는 모두 그 능력을 가진 이들을 실험재료로 써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법사들을 가두는 쇄령옥의 기초도 동일한 원리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재료. 그 말은, 쇄령옥을 만들 때 마력 차단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의 피와 내장을 재료로 썼다는 말이었다.
권차현이, 내가 가둔 심문실에서 나온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반이 같으니 속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무영이 그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순식간에 입 안에 피 맛이 났다. 이관현이 쫓겨난 이유? 마력차단이란 재능을 재현하기 위해 애궂은 어린 마법사를 잡아다 분해하고 합성하는 미친 짓을 했으니까.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뉠 것이 분명했다. 전자는 경멸, 후자는 졸도. 분해된 마법사의 내장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 심장을 기반으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그 광경은 눈을 감으면 항상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자리를 손에 넣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행동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권차현, 그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하필이면 왜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때 신서율이 그녀를 데리고 왔더라면 차라리 몰랐을텐데. 이관현의 실험재료로 잡혀가 죽어버렸다면, 차라리 그녀를 동정했을지언정 신경을 쓰지 않았을텐데.
무영은 내 대답을 끝까지 기다릴 심산인 듯했다. 아니면, 내 속을 이미 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약간의 앞날만을 본다고 늘 주장하지만, 속을 알아내는 마법이 썼을지도 모르지. 한배에서 난 형제인데도 내게 무영은 검은 안개 그 자체였다.
“비서로 인정한 적 없다.” 그때, 문밖에서 종이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권차현이 약간 열린 집무실 문밖에서 그 대답을 들어버린 것이었다. 해명할 가치도 없었다. 명목상 비서로 잡아두고 있긴 하지만, 나는 저 여자가 누군가의 희생양이 되지 않길 바라기에 말도 안되는 직함을 붙여 곁에 둔 것일 뿐 비서로서 제대로 일할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한 적이 없었다.
“마법도 못 쓰는 반푼이 따위.”
그러자 비서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서율의 마력이 뒤섞인 차현의 마력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울 테면 울어보라지. 감정에 복받쳐 우는 것은 무척이나 한심했다. 울었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다고 해서 자기가 놓친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되돌릴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울었을 것이다. 펠 오르비스에 잡혀가 내 눈앞에서 산 채로 분해당한 그녀도, 금단의 지식에 취해 건너설 안될 강을 건넌 이관현도.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쥐었던 머그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가, 결국 마시지 못한 채 다시 책상에 내려놓고 말았다. 차라리 권차현이 이번 기회에 어딘가로 달아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사라진다면 이 쓸모없는 죄책감과 부채의식도 저 멀리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영은 바깥에서 난 소리에 조금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부러 그런 거니?”
나긋하지만 책망하는 듯한 말투. 그래, 알고서 그녀가 가까이 온 걸 알았을 때 그런 말을 한 거였다. 최근 들어 권차현이 약간 비서같은 일을 해 보려는 것이 내 신경을 거슬렀다. 나는 누가 옆에서 수행하지 않아도 이미 알아서 내 일들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샌드위치도,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면 책상 위에 놓여진 따뜻한 커피도 그녀가 준비해 준다는 것을 알았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목례를 하고 스쳐 지나갈 때마다 어째서인지 신서율의 마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무영에게 단숨에 말했다. 그래, 애초에 예언을 거스르겠다고 결심할 필요 조차 없었다.
“일전에 네가 말한 예언은 이미 깨진 것 같은데.”
권차현과 내가 사랑에 빠질 거란 무영의 예언은 틀렸다. 권차현에게 신서율의 마력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건, 그 두 사람이 연인이란 소리였다. 여러 밤을 함께 보낸 것이 아니라면 내가 느낄 정도로 그 여자에게 둘째 형의 마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신서율은 보통 마법사가 아닌 여성과 가볍게 놀곤 했지, 여자 마법사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기에 그 점이 약간 의아하긴 했다.
무영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끝내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내 앞에서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집무실 바깥의 비서실에서 더 이상 권차현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이동은 아직 하지 못할 테니, 제 발로 본부장실을 나선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무영이 돌아간 이후로도 한 시간쯤 더 업무를 봤다. 마법관리과의 보고서를 읽고, 오늘 정부 부처와 진행한 회의의 속기록도 살폈다. 비서가 있었더라면 속기록이 아니라 회의록을 봤을 테지만, 비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런 기초적인 일은 당연히 내가 해 왔던 것이었다. 정부에서 작성한 회의록에는 언제나 왜곡이 있었다. 내 발언을 곡해해서, 정부를 공격하는 어조로 정리해 놓는 것은 물론 정부 측의 악의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일까지 있었다. 종종 있는 일이 아니라, 자주 겪는 일이었다. 그러니 속기록과 녹취를 일일이 대조하여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정부에서 보낸 회의록에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수정 기록을 살펴보다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권차현.
그녀가 먼저 속기록과 회의 녹취를 비교해 오류를 발견한 뒤, 중간에서 회의록 수정을 요청한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정부 쪽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제길--.”
나는 인쇄해서 보관하는 것이 원칙인 지난 몇 회 간의 회의록 캐비닛을 찾았다. 결재받기 전의 회의록 원본에 꼼꼼하게 메모들이 붙어 있었다.
‘본부장의 발언을 회의록 작성자가 자의로 해석’, ‘속기록과 회의 녹취 불일치’, ‘통계 수치 왜곡’. 수백 개에 달하는 포스트잇을 보다가 홱 덮어버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요 몇 주간 회의록 관련해서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던 것이, 나는 정부 쪽에 그럴싸한 사람이 들어와서 그런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계산을 해 보니 회의 기록 관련 잡무가 줄어든 건, 권차현의 포스트잇이 시작된 시점부터였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미 이 여자는 내 삶에 깊게 들어와 있었다. 비서로 옆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곁에 두고 계속 내 삶에 머물도록 두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았다.
“이제야 봤네요?”
그때, 주저앉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사로잡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물은커녕 화사하게 웃고 있는 권차현이 테이크아웃 잔에 든 커피를 두 개 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근하시는 것 같아서 들어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