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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in the Dreaming Library
습작 본문
아프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게 양 다리에 금이 갈 만큼 세게 충격을 받아서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암전,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 괜찮은지 묻는 눈빛에 안쓰러움이 묻어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경찰서의 천장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삭막하고 싸늘했다. 병원부터 가는게 좋지 않겠냐는 행인의 말에, 경찰서에 먼저 데려다 달라고 했던 것이 또렷이 기억났다. 그 날의 일은 하나도 흐릿해져있지 않았다.
"오늘 몸 상태 안좋아? 안색이 나쁜데."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제이는 앞치마를 두른 채 캔버스와 고군분투 중이었다. 차현은 그의 부탁으로 사 온 커피를 흰색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어느샌가 슬리퍼가 폭신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을 잘 못 잤어요. 오늘은 그 캔버스 작업이예요?"
"아? 응. 자고 일어나니 이걸 건드릴 생각이 나서."
"슬리퍼 새로 샀네요?" 그것도 아주 보드라운 핑크빛 바탕에 꽃이 자잘하게 그려진, 바꿔 말하면 시장에서 파는 그런 느낌의 실내화였다.
"어. 어제 술 마시러 나갔다가 다이소에서 몇 개 샀어."
"술 마시러 나갔어요? 그 밤중에?"
"본인이 몇 시에 퇴근했는지 자각은 있나보네." 제이가 툴툴거리면서 붓을 내려놓았다. "하이볼만 한 잔 하고 그대로 집에 갔어. 은근히 나를 술고래 취급하는건 알고 있나?"
"그럴리가요. 얼마나 귀한 작가님이신데, 제가 감히." 차현이 일부러 이죽거리고는, 캔버스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어떤 그림으로 그려질지는 예상되지 않지만, 그가 잡은 색감이 이번엔 꽤 마음에 들었다. 제이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희미하게 술냄새가 났다.
제이는 어느샌가 그녀가 내려놓은 에코백으로 가더니 주섬주섬 헛개차를 하나 찾아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이가 붓을 만지는 모습을 보는게 좋았다.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흠칫한 적도 있었다.
이 모습을 메이킹으로 해서 언론에 풀면, 더 주목받지 않을까. 이미 몇 주 전, L사의 패션쇼 애프터파티에 참석했다가 '연예인보다 더 잘생긴 일반인'이란 사진으로 연예계를 떠들석하게 했던 그였다. 본인이 가진 외모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걸 이용하진 않았다. 외모로 먼저 주목받으면 지금 준비하는 전시 역시 '잘생긴 포토그래퍼, 유화 작가'라는 이미지에 덧씌워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테니까.
그래서 메이킹을 공개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눈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계속 볼 거면 사진이라도 찍어."
차현의 시선을 무시하는 척 하며 계속 붓을 움직이던 제이가 그녀 쪽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안그러면 집에 가서 계속 생각날걸? 찍어둘걸, 하고."
"사람을 변태취급하지 마세요."
그 말에 제이가 차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순간을 담아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후회를 하게 되거든. 그 때 그렇게 할걸, 후회해도 그 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니까. 말했을텐데, 내가 왜 사진을 찍는지."
모든 시간이 반짝거려서, 지나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모든 순간들이 아름답기에 사진을 찍어서 그걸 조금이라도 붙잡아보려고 아둥바둥 하는거라고 했었죠. 차현은 그의 말을 속으로 들이켜며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럼, 한 번만 렌즈 봐 줄래요?"
의외로 순순히 제이는 붓과 팔레트를 든 상태에서 차현의 렌즈를 바라봐 주었다. 찰칵, 소리가 나는 동안 고요가 감돌았다. 화면 속에 담긴 그의 모습은 앞으로도 영원할거다. 전시가 열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 서로 작품에 대해 열띈 토론을 하고, 이 꽃은 저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데 왜 사 왔냐고 드잡이질 할 기세로 싸운 날도.
뜻하지 않게 일을 같이 하게 된 건데, 어느샌가 그와 함께 하는 날이 자연스러워졌다. 언젠가 끝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점차 그의 색깔에 물들어버린 것 같아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모든게 마무리되면, 그는 훨훨 날아 오를테고 차현 자신은 다시 원래의 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사람끼리 일을 하다 보니 든 사소한 정에 불과하다고 취급하면 되었다. 그게 잘 될지는 아직 의문이 들었지만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줄거다.
"소파에 담요 있으니까 잠깐 눈 붙이고 와."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차현에게 제이가 훌쩍 다가왔다.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치는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다, 어깨까지 붙잡혀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멀찍이 있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외모인데, 가까이서 보니 뭔가 '하라'고 하면 말을 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괜찮은데......"
"작업 계속 할거긴 한데, 그렇게 다크서클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근처에 있으면 꼭 저승사자가 돌아다니는거 같으니까 눈 좀 붙이라고."
"저승사자라니!"
"화 내지 말고, 가서 누워있기라도 해. 피로 누적으로 쓰러진 사람 집에 데려다주긴 싫으니까."
카페인의 힘으로 오전까지는 어떻게 버텼지만, 그의 스튜디오로 넘어오면서 안그래도 부족한 잠이 몸을 재우려고 성화였다. 차현은 결국 그에게 백기를 들고, 얌전히 소파로 갔다. 그대로 머리까지 쿠션에 기대면 그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깨어나지 못할것 같아서, 소파에 왜 있는지 모를 목베개를 찾아 목에 끼우곤 웅크린 채 눈을 잠시 감았다. 꿈이 더는 생각나지 않았으면 했다. 이 곳에서만큼은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으면 싶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회의를 위해 나와 함께 미술관으로 갈 때면 점점 날이 서서는 종내 얼음처럼 바뀌어, 세상에서 일 말고는 다른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 처럼 굴었다. 서슴없이 내 의견을 잘라내기도 했으며, 내가 준비해 놓은 기획안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리기도 했다. 그 때의 차현은 정말 가차없어서, 누군가라도 베어버릴 듯 했다.
30대 중 보기 드문 은발이어서 그런걸까, 어쩐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곤 했는데 내 기획안을 두고 불이라도 지를 기세로 옥신각신 하는 동안 그녀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예술가에게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내게 닥쳤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서 눈 좀 붙이라고 했더니 그대로 소파로 들어가 웅크리고 잠든 모습이라니. 와중에 편하게 머릴 쿠션에 기대지도 않고, 마치 장거리 여행으로 버스에 탄 사람처럼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은 걸 보니 새삼 안쓰럽기도 했다. 최수현 이사장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가져가려면 이 여자도 고생 깨나 했을 터였다. 머리카락 색을 보통 사람처럼 검은색으로 물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한 고집 한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 선잠을 자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나도 하품이 나왔다. 그러다 장난기가 생겨, 카메라를 찾아 들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잠든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이것도 지나가면 다 추억이 되겠지. 이 사람과 일하는 것도 언젠가는 끝난다. 그렇다면 사진 한두장 정도 남겨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붙잡는 것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작은 화면을 보니 이걸 인화해서 문가에 걸어두면 죽일듯이 나를 노려보며 달려오지 않을까? 그런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났다.
"잠깐은 허락해줘."
웅크리고 앉은 그녀의 옆에 가서, 나도 웅크렸다. 대체 이런 자세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는건가, 의문이 들어 결국 쿠션을 찾아냈다. 쿠션에 머리를 받치고 누워, 밑에서 바라보는 차현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도 보였다. 가끔은 바닥에 하릴없이 드러누워 하늘이나 천장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평소의 피사체들이 다르게 보이곤 했다. 지금 이 얼굴이, 다른 각도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견딜 수가 없어 몸을 일으켜, 아까의 자세로 돌아가 차현 옆에 가까이 앉았다. 조금 맞닿은 옷깃으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이 사람이랑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이 있었나? 차를 타고 같이 이동할 만큼의 거리감은 있었지만, 온기가 전해질 정도로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애초에, 누가 이렇게 나에게 다가왔다면 치를 떨면서 도망갔을 거였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 의도가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지, 이 사람도 결국엔 이사장의 지시에 따라 나와 전시를 돕고 있는 파트너 관계라 의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다가온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를 두면 두었지, 나에게 먼저 다가온 적은 없었다. 이것저것 다정하게 챙겨주는 일도, 그저 같이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런거겠지. 누구에게나 이런 식으로, 자기가 관리하는 작가들에게는 이렇게 굴겠지.
문득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왜지? 그냥 일하는 사이일 뿐인데 다른 사람한테 이런다고 해서 서운할 필요는 없는데.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짝사랑하는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버린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냉정하고 차갑게 구는게 당연하던 내가, 이 사람을 보면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는걸까.
평범한 월요일이었다. 주말 동안 관람객의 관람 동선을 분석하고, 전시 미술품들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등 한결같은 보고와 회의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차현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 시간이 누군가에 의해 깨지는 것은 조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최수현 이사장도 회의 도중에는 차현을 방해하지 않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분명 이 시간에는 잠을 자던가,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할 제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차현은 온몸이 굳었다.
그녀가 월요일 오전에는 회의를 한다는걸 그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회의실에 몸보다 먼저 들어온 눈은 정확하게 차현을 짚어냈다.
"나가."
무슨 일이죠?라고 상냥하게 제이에게 묻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이 미술관에서 만큼은 그에게 져 줄 생각이 조금도 없던 차현이 의자에서 나긋하게 일어나며 내뱉은 말에, 동석했던 직원들이 하나 둘 고개를 돌렸다. 제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예상이 된 그들이었다.
"나가. 내 말 못들었어?"
티셔츠만 걸치고 온게 아니라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월요일 회의를 방해받은게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단순히 회의를 방해해서가 아니라, 일 자체에 훼방을 놓은 것이 무척 싫었다. 차현이 저벅저벅 다가갔지만 제이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동물의 왕국이었으면 아마 사자 둘이 으르렁거리며 폭발 직전인 상황일거라 해설 할 만한 기세였다.
"지금 당장 스튜디오로 와. 내 문자 못 봤어?" 회의 중이라 제이의 문자가 온 것 까지는 인지했지만 내용은 읽지 않았었다. 그깟 일로 이렇게 월요일 오전부터 쳐들어 올건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왜?"
순간 제이의 눈이 커졌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그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차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제이를 올려다 보았다. 이 태도가 계속 신경쓰였던 거였다. 평소에는 상냥하게 대하는 척 할 뿐이지, 본체는 이리도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을 가졌다고 해서 일부러 작가에게 굽신거리며 져 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뭔가 도움이 필요하니, 와 달라고 문자를 남겨줬더라면 차현도 한숨만 가볍게 내쉬고 조금 일찍 스튜디오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차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월요일 정기 회의 중이었고, 그녀가 '일하는' 중이었다. 일을 방해받는게 싫었고, 무엇보다도 저런 고압적인 태도로 남들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며 하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도록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라고 했어?"
제이는 조금도 지지 않은 태도로, 오히려 고요한 눈이 되어서는 되물었지만 차현이 그의 목덜미를 휙 잡아내리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회의를 방해할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계약이고 뭐고 파기하고 네놈 눈깔도 파버릴거야. 알아들어?"
마치 제이에게 키스하는 듯한 차현의 행동에, 직원들이 술렁거렸다. 그녀는 자기가 관리하는 작가의 눈 앞에서 순식간에 미소짓는 얼굴로 바꾸고는, 직원들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직전까지 정리된 내용으로 정리해서 회의록 작성하고, 저한테 결재 맡아주세요."
다행히 그녀는 직원들 면전에서 제이의 멱살을 끌고 나가지 않았다. 직원들이 다 나갈 때까지 웃는 낯을 유지한 차현이, 문이 전부 닫힌걸 확인하고는--방금 전까지 존재 자체를 무시하던 제이에게 몸을 돌렸다.
"꿇어."
제이는 자신의 청력을 의심했다. 서리라도 내려앉은 것 같은 차현의 입에서, 정말 의외의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제이가 그 바람에 멍한 채 서 있자, 차현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그대로 회의실 테이블 위로 그를 넘어뜨렸다. 테이블의 나무 감촉이 제이의 목덜미에 느껴졌다.
"무릎 꿇으라고 했을텐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낯선 향기가 그의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거리.
"이게 권차현이란 사람의 본모습이라고 보면 되는건가."
"본성이고 가면이고 알게 뭐야? 잘 생각해봐. 내가 왜 최수현의 눈에 못 들어서 안달인 저 새끼들 위에 서 있는지."
"과소평가였군."
"최수현 이사장도 아는 사실이지. 등신같이 너만 속아 넘어갔어.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서늘한 표정이 제이의 면전에서 다시 싱긋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차현은 이렇게까지 했으니 그가 잘 알아 들었을거라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눈이 좀 많이 가깝다 싶었는데, 이내 그의 입술이 차현의 입술을 덮었다.
허리를 감싼 팔이 워낙 견고한 탓에, 차현은 입 안쪽까지 그의 혀에게 내주고 나서야 겨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굉장한 성벽을 갖고 있네. 속은 미국인이라 그런건가? 무슨 위기만 닥치면 섹스하는." 그녀의 말에 제이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미국인이 그럴거란 편견은 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미드."
"오, 그거 좋네. 다음에 몇 개 적어줘. 나도 찾아볼테니."
"말 돌리지 마."
"스튜디오로 가자. 너랑 상의해야 할게 한가득이거든."
"그건 오후에 내가 거기로 출근하면 해."
"싫어. 나는 지금 당장 네가 필요한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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