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가 깨지는 소리는 눈을 감고 있어도 구분할 수 있었다. 하물며 그게 가장 동경하던 작가의 유작이라면 그 상실감은 더했다. 더는 그 분의 도자기 작품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는걸 안 순간 차현의 몸이 먼저 반응해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꺄아아아악!"
전시실에서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사이로, 깨진 사금파리를 든 채 한 청년을 뒤에서 붙들고 있는 긴 머리 여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상황을 바로 알아챈 보안팀장이 팀원들을 데리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보다 권차현이 그 여자에게 다가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당장 그거 내려놔!"
말 뿐인 허세가 아니었다. 두 번은 같은 일을 겪게 두지 않아, 차현의 속에 생각이 스쳐가는 찰나 그녀의 구둣발이 인질범의 손을 내리찍었다. 피묻은 도자기 조각을 놓쳐버린 여자는 당황해서 청년의 목을 더 졸랐다. 남자는 붙들린 사이, 사금파리에 왼쪽 팔이 깊게 그여있었다.
흉기를 상실했음에도 여자가 인질을 놓지 않자, 이번에는 매서운 구둣발이 여자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긴 생머리가 제가 먼저 떨어뜨린 조각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잠깐 정신을 잃은 듯 했다. 차현은 짧은 한숨을 몰아 쉬더니, 인질이 되었던 남자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그 사이 보안팀이, 인질범을 포박했다.
"화헌미술관 기획전시과장 권차현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 드려 대단히 송구합니다. 버티실 수 있습니까?"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리고 군인같은 딱딱한 말투를 쓰는데다 방금 전 구두로 여자를 막 걷어 찬 이 여자에 대한 호기심을, 청년--아이돌 그룹 프리즘의 리더 제이--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안도감을 주는 눈빛과 마주하자 마자 긴장이 탁 풀려, 사금파리에 베인 왼쪽 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차현은 무전기를 꺼내 정문의 경비실에 경찰과 구급차가 오면 바로 들여보내라고 지시한 뒤, 보안팀장이 가져다 준 붕대로 우선 제이의 왼쪽 팔을 감쌌다. 의학적 지식이 풍부하지 않아 꿰맨다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피를 멈추게는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운 좋게도 갤러리에서 도망나간 관람객들 다수가 신고를 해 준 덕에, 구급차와 경찰차가 거의 동시에 전시실에 도착했다. 제이가 구급요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쉰 차현은 보안팀장이 건네준 손수건을 받고 나서야 자기 얼굴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어나시죠."
제이를 공격했던 여자는 한 방향에서 봐도 스토커였다. 연예인을 동경하다 못해 자기가 그의 연인이라고 착각해,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려 드는 불유쾌한 종족들. 사람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으니 그걸 수습 하는 것도 차현의 몫이었으나, 그보다 차현을 더 화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차현이 저벅저벅 걸어가자 보안팀장이 경찰에게 손짓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철썩!
막 정신을 차린 스토커가 '제이 오빠는 내꺼야, 내가 제이 여자친구라고.' 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것이 차현의 손찌검에 뚝 멎었다.
"여기서 차라리 자살하는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게 할 만큼 괴롭혀줄테니, 기대해. 유치장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봐. 지옥이 찾아갈테니까."
아무리 화를 가라앉히려고 해도, 유작을 파손한데다 그 이유가 감히 스토커 따위라니 도저히 이성을 추종할 수가 없었다. 차현이 분에 못이겨, 여자가 끌려나가고 나서도 씩씩거리자 보안팀장인 재근이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얼른 구급차 쫓아가요. 상황설명은 차현 과장님이 하시는게 제일 정확할테니."
"아."
"화는 좀 가라앉히고. 운전하지 말고, 아직 구급차 출발 안했을테니까 보호자로 동석해서 병원까지 가 주면 좋겠어요. 후속 조치는 내가 해 둘테니까."
문득 죽은 오빠가 '자, 착하지?'라고 자신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차현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푹 내쉰 뒤, 재근에게 웃어보였다. 막 달려가는 차현의 등을 보며 재근이 쓴웃음을 짓는 것은 모르고.
구급요원 덕에 통증이 조금 줄어든 제이는 차 문이 닫히기 직전, 얼굴에 피가 약간 묻은 차현이 훌쩍 올라타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큐레이터님?"
스토커에게 당하기 전까지는 차현의 전시 설명을 쭉 듣고 있던 터라 제이의 입에서 저절로 그 소리가 나왔다. 병원까지 동행해야 사고를 제대로 처리하는 거라며 간단하게 답한 그녀를 경탄에 가까운 눈으로 보던 제이는 자기가 누굴 뚫어지게 보고 있는지--차현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알아차리곤 눈을 감았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서 차현이 할 일은 그닥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 병원 응급실 앞에, 이사장과 그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수현 이사장은 피가 여전히 얼굴에 묻은 줄도 모르고 인사를 꾸벅 하는 차현을 보고 면전에서 대놓고 혀를 차고는,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래, 스토커 얼굴을 걷어찼다고?"
"아."
차현이 낭패라는 표정을 짓자 수현은 이번에는 아예 배를 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한바탕 웃은 수현 옆에는 그렇지 못한 표정의 승휘가--못마땅한 표정으로 수현과 차현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일격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역으로 여러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잘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승휘는 웃음을 겨우 그친 수현을 아주 잠시 노려본 뒤, 수현과 그 부하직원--권차현 과장--을 데리고 제이가 막 응급조치를 마치고 이동한 VIP 병실로 향했다. 전용 승강기에서 수현이 다시 차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번이나 같은 방법이 통할거라곤 생각하지 마, 차현 과장."
걱정의 말이었지만 차현이 그걸 받아친 방식이 수현을 놀라게 했다. 과거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표정을 본 것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누구도 죽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그리고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은 차현을 보고, 수현은 승휘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그 표정에 승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최수현 이사장에게는 옮기지 않은, 차현의 과거를 이젠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이의 병실에는 차현만 들어갔다. 최수현 이사장은 지금 당장 들어야겠다는 노기등등한 태도로 승휘를 밖에 세웠다.
병실에 막 도착해 쏟아지는 잠을 받아들이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이는 간호사인가--막연히 생각하다가, 아까 그 용감무쌍한 큐레이터라는 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반색을 했다.
"큐레이터님?"
"다친데는 좀 괜찮으신가요?"
"네. 봉합도 잘 됐고...흉터로 남을지는 좀 지나봐야 안다고 하지만요. 아!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무방비하게 제이를 바라보던 차현은, 그의 미소가 심장을 관통하듯 시신경을 지나가자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큐레이터님? 괜찮으세요?"
오히려 그 모습에 제이가 더 당황했다. 하지만 제이는 다년간 연예인 생활을 통한 '직감'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반했음을 인지했다. 저 눈빛은 경멸 따위가 아니라, 순간 자신의 마음을 들켜 당황한 사람의 그런 얼굴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덕통사고를 당한 그런 사람의 표정.
결국 이 사람도 똑같구나. 제이는 모처럼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을 것 같단 기대감을 접었다.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주변에 필요없어.
"어......?"
그 때, 차현의 인중에 붉은 액체가 주룩 흘렀다. 왈칵 터진 코피는 제이가 침대에서 뛰어나와 휴지로 차현의 코를 막아주기도 전에 차현의 손과 블라우스를 적셨다. 차현은 시야가 아득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설마 내 미소 때문에 코피가 터진 것도 모자라 기절까지 한거야? 제이는 일단 축 늘어진 차현을 자기가 누워 있던 침대로 옮겼다. 생각보다 피는 금방 멎질 않았다. 기절한 사람이 코피가 나면 대체 어떡해야 하지. 3초 정도 고민하다 결국 간호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