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흩뿌려진 햇살의 힘은 강력했다. 차현은 아침 출근길을 서두르다 문득 벽돌 위에 남은 지난밤의 흔적을 흘끗 보고는 곧장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매끄럽게 빠져나간 뒤엔 미술관에 도착했고,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오늘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말 내내 만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핑계를 대 볼 심산이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오전 열한 시. 보통 프리랜서에게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 하지만 점심시간 전이라면 그다지 길게 끌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부러 안심도 되었다. 포트폴리오는 확실히 매력적이었고 이사장에게 미리 언질도 받았지만, 역시 이번 만남은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이 사람이 꼭 필요했다. 회사 안팎으로 돌고 있는 소문을 무시하기엔 이미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는 중이어서 운신의 폭을 조금이라도 넓히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민망할 정도로 자극적인 소문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도 어렴풋, 아니 꽤 명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기 5분 전이 되어 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 사무실 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모니터에 메신저 알람이 떴고, 그걸 확인하는 사이 손님이 사무실 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빌어먹게도, 십 년 만에 듣는 목소리인데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떠나보내면 목소리부터 잊는다고 했는데, 아직 차현은 완전히 그를 잊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몸부림을 쳤다.
“포트폴리오는 잘 받았어, 제이.”
하지만 그를 부르는 이름은 달라야 했다. 지금 차현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해외에서 유수의 명품 기업들이 러브콜을 보내는 유명 포토그래퍼 제이였으니까. 차현이 기억하고, 잊지 못한 이름이 입 끝에서 맴돌다가 겨우 들어갔다. 제이, 라는 이름을 들은 그가 싱긋 미소지었다. 눈꼬리와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함께 올라가는 매력적인 미소는 십 년 전과 똑같았다.
“제안서를 전달받고 나서, 솔직히 조금 놀랐어.”
애초에 차현의 이름이 전면에 나왔을 때 제이만큼은 응하지 않기를 바랐었다. 아니, 그가 '사람다운' 양심이 있다면 이번 제안에 응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장의 의견은 달랐고, 제이는 이사장의 강력한 권고로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것이었다—고 나중에서야 승휘에게 들었다.
차현의 말에 제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신 차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 사이 그녀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감상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몇 초쯤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제안이 흥미로워서 참여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하면 서운해?”
“이제와서 서운해 하거나 그런 감정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지.”
결국 본색을 드러낸 차현이 만족스러운 듯 그가 낮은 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차현은 그의 웃음이 거슬렸다. 마치 차현이 십 년 전과 똑같은 여자애라고 생각하는 듯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에서처럼, 바깥의 직원을 불러 이 사람을 당장 끌어내라고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도 안되었고.
“일은 일이니까. 나로서는 네가 원하는 사진만 잘 작업하면 될 뿐이야.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었던건 이사장님만은 아니었어.”
“아, 그런가.” 그가 차현의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받아들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꽤 기대했어. 십 년 만의 재회잖아. 그것도 이런 입장의 재회라니, 드라마같지 않아?”
그가 차현과의 거리를 확 좁혀왔다. 긴 속눈썹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간격에서, 숨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차현은 정신이 아득해진다던가 하지 않았다—아니, 아득해지려는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차현아.”
코끝에 스치는 향은 십 년 전의 나무향이 가득한 그 향수였다. 이 향을 맡으면 십중팔구 이 남자가 떠올랐다.
“너랑 자고싶어.”
그 말에 차현의 정신이 확 돌아왔다. 십여년 전, 모든게 그 때와 똑같았다. 자신이 무척 매력적이기에, 이런 제안조차도 거부할 수 없을 거란걸 아는. 이런 식으로 십년 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쓰러트렸겠지. 하지만 그건 어린애들한테나 먹힐 패턴이었다. 차현이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하르르 웃는 순간, 타이밍 좋게도 최수현 이사장의 수행비서인 승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문 앞에서 아무도 제지하지 않은 듯 했다. 보통이라면 손님이 안에 있으니, 팀장 사무실에 들어갈 때 노크정도는 하라고 알려주었어야 했다.
차현과 제이가 1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이 모습을 보고 승휘는 아주 잠시 당황하는 듯 하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제 무례를 사과했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평소의 차분한 그가 아니라는 것을 차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얼음왕자’ 따위의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환담 중이신 줄 몰랐습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차현이나 제이를 방해하기 위해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럼 앞으로 자주 보러 올게, 차현아.”
차현은 그가 말 그대로 사무실을 나갈 것이라 기대했지만, 곧이어 오른쪽 뺨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차현의 오른팔을 휙 잡아당긴 뒤 그대로 뺨에 키스하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승휘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 그녀의 면전에서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마치 애인에게 불륜 장면을 들킨 것 같은 이 죄책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최승휘는 그저 이사장의 비서라서 조금 더 친밀감을 갖고 있었던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방금 보인 표정은......대체 뭐였을까. 차현은 한층 더 복잡해진 감정을 갖고 자신의 사무용 의자에 주저앉듯 자리를 잡았다. 결재를 몇 건 더 하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이른 점심시간을 갖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직원들도 하나 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사장님 오셨나요?”
“아니요, 비서실장님이 혼자 들어오시길래 경비팀에 전화해봤더니 비서실장님만 오신거라고......”
“네?”
최승휘는 혼자서도 꽤 미술관에 자주 나타나긴 했지만, 요즘은 이사장의 수행이 아니면 거의 여길 오지 않고 있었다. 항간에는 그가 곧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날거란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사람을 이렇게 신경쓰고 있는거지. 방금 전의 일 때문인게 틀림없었다.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장면을, 그 사람에게 들켜서 그런거였다.
“그리고 팀장님,” 사무실 앞에 있던 막내직원이 차현에게 살짝 다가왔다. “아까 비서실장님 표정이 안좋으셨는데, 혹시 싸우신건 아니죠?”
“내가 그 사람이랑 왜 싸워요......?” 차현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직원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뒤 제 자리를 총총 벗어났다. 이쯤 되니 슬슬 짜증이 났다. 아까의 일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승휘의 태도까지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었다.
“삼십대에 갱년기가 온건가.” 차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차가 주차된 자리 옆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짙은 감색의 코트를 입은 승휘인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서실장님!”
일부러 아까 일은 기억나지 않도록 밝게 인사를 건넸다. 뒤돌아선 그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다가 이내 노을에 해가 들어가듯 스르륵 어두워졌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다가 차현이 나타나 방해받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보다, 이 사람이 아까같은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구나. 그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와 차현이 저도모르게 히죽였다.
“누구 기다리시나요? 직원들도 곧 점심 먹으러 나갈텐데.”
“약속, 있으십니까? 생각보다 일찍 나가시는군요.” 마치 본사 감사실의 직원을 떠올리게 하는 말투였다.
“아침을 안 먹어서 점심은 일찍 먹고 들어오려구요. 혼자 바람도 좀 쐬고 싶었고.”
“......”
생각보다 순순히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아마도 즐거울 기다림을 방해받아 불쾌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차현은 어깨를 으쓱한 뒤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아마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같이 식사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그녀가 입사하고 나서 들은 최승휘의 모든 멘트 중 가장 놀랍고도—처음 듣는 말이었다.